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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시절 사랑하던 여인

운영자 2021.07.05 10: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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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시절 사랑하던 여인




나는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내게 선물로 다가온 유년 시절의 풋풋함을 메마른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그걸 잡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머리가 하얗게 바랜 내게 한 통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발신자 난에 ‘김창식’이라고 쓴 그는 나와 유치원을 같이 다녔다고 했다. 그는 오래된 사진 하나를 같이 보냈다. 호박잎이 너울거리는 앞에서 꼬마 세 명이 찍은 흑백사진이었다. 두 명은 남자아이였고 한 명은 여자아이였다. 아득히 시간에 덮여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그 여자아이는 여섯 살이던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좋아하던 어린 여인이었다. 김창식이라는 그 친구도 그 여섯 살짜리 어린 여인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친구와 나 우리 둘은 여섯살 짜리 한 여인을 놓고 사랑의 라이벌이었다. 그 여자아이는 나와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했었다. 초등학교 사학년에 올라가자 엄마는 나를 다른 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내가 엄마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에 섰을 때였다. 그 여자아이가 따라와 엄마에게 나를 전학시키는 거냐고 물었다. 어린 내 마음속에 뭔가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걸 표현할 능력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내게 유치원시절 사랑의 라이벌이 문자메시지를 보내 셋이서 만나자고 제의한 것이다. 현실에 쫓기던 나는 그 친구의 제의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의 강물을 타고 흘러 내려왔다. 바다를 눈앞에 둔 강의 하류 옆에는 칠십 고개의 봉우리가 보이고 있다. 한 방울의 물인 나는 넓은 강의 하류에서 빙빙 돌면서 아주 오래전에 떠나온 맑은 시냇물시절부터의 기억을 다시 생각을 한다. 집안 형편이 안되는 데도 당시 삼십대 초반쯤의 엄마는 나를 유치원으로 보냈다. 얹혀사는 시아버지 몰래 쌀독의 쌀을 퍼내서 아들의 장난감을 샀던 독한 엄마였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디선가 유치원비를 끌어댔을 것이다. 엄마는 여섯살 짜리 아들이 앉을 작은 방석을 만들고 그 가장자리에 포도나무와 아들의 이름이 새겨진 수를 놓았다.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긴 동화를 한편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나서 그 옛날얘기를 기억해서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아이는 손들어 보라고 했었다. 나 혼자 손을 번쩍 들고 아이들 앞에 나가서 유치원 선생님이 한 얘기를 다시 했다. 그것은 방송국 간부인 남편을 둔 유치원장의 선발 테스트였다. 당시 남산에 있던 유일하던 라디오 방송국 어린이 프로에 출연하게 됐다. 배우가 시나리오를 들고 액션을 하면서 대사를 반복해 보듯 엄마는 구석방에 나를 세워놓고 연습을 시켰다. 같은 유치원을 다니는 창식이 엄마가 이의를 제기했다. 왜 자기 아들은 방송국에 데리고 가지 않느냐는 내용이라고 했다. 창식이와 함께 방송국으로 가게 됐다. 동네에서는 잘 살던 창식이네 집 덕분에 그 집에 가서 밥도 먹어보았다. 밥상에는 윤기가 흐르는 구운 김도 있었고 햐얀 종지에 담긴 먹음직스러운 명란젓도 있었다. 당시 서민들은 타보지 못하는 그 집의 검은 찦차인 관용차를 얻어타고 방송국을 가기도 했었다. 그 무렵 새해 설날 아침 방송국 스튜디오로들어갔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린이프로의 진행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도했다.

“엄상익 어린이 오늘 아침에 뭘 먹었죠?”

진행자는 내가 떡국을 먹고 왔다고 하길 기다렸을 것이다.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내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왜 그랬죠?”

진행자가 물었다.

“엄마가 방송국에 시간 맞춰서 가야 한다고 밥도 안줬어.”

집에서 그 방송을 듣고 깔깔 웃었다고 했다. 오십년도 넘었는데 그 시절의 창식이가 같이 좋아하던 여자꼬마아이와 한번 보자고 하는 금 같은 기회를 나는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정말 나는 메마르고 나쁜 놈이었다. 얼마 있으면 불에 타 없어지고 말 운명인데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 아름다운 것인지를 모르는 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삶도 사랑도 다 바람같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무심히 살던 나는 요즈음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고 애쓴다. 카톡으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낸다. 손녀에게 카톡을 통해 케이크나 꽃을 보내는 방법도 배웠다. 세상을 떠날 때 사랑의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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