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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의 조각배

운영자 2021.07.12 10: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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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의 조각배




보랏빛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깔려있다. 어스름한 밤바다 의 출렁이는 물결 위에 작은 조각배 하나가 조금씩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조각배의 가운데 길다란 노 하나를 빗겨 든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밤바다의 허공에는 반딧불이 같은 맑고 투명한 불이 선명한 빛의 궤적을 남기며 떠다니고 있다. 화면 속의 출렁이는 풍요한 물이 나의 책상 위로 흘러내릴 것 같다. 높고 선명한 피아노 음이 기와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같이 똑똑 떨어져 내리고 있다. 나는 책상 앞 내 눈높이에 커다란 벽걸이 화면을 붙여놓고 아름답고 신비한 영상이 흐르는 음악을 듣는다. 화면 속의 밤바다에 흐르는 서늘한 기운이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살갗을 부드럽게 만지고 가는 것 같다. 조각배를 타고 검은 하늘아래서 쓸쓸하게 어디론가 가는 남자의 모습이 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내가 죽으면 나의 영혼이 저렇게 혼자 배를 타고 어딘가에 있는 그곳으로 가는 거겠지. 그곳의 선착장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조용히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나를 한없이 사랑하던 세 사람이었다. 사랑받던 장면 하나하나가 선명한 슬라이드 영상같이 기억 저쪽에서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립고 보고 싶다. 한쪽으로는 이승에 있는 가족이 떠오른다. 사십년을 함께 해온 아내다. 젊고 앳띠던 얼굴이 어느새 하얀 백발의 노쇠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내가 저 여인을 정말 제대로 사랑해 준 것일까. 아들과 딸을 우리 아버지처럼 사랑해 주었던가. 난 자신이 없다.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얀 백발의 아내의 머리를 보면서 며칠 전 요즈음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미국의 오스카 상을 받았다는 ‘미나리’라는 영화를 보았다. 갑자기 몸이 마비되어 침대에서 당황하는 모습의 칠십대 중반의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보았다. 늙고 쇠약해지고 골 깊은 주름이 얼굴에 나 있는 건 연기가 아니라 그녀의 현실이었다. 삼십여년전쯤 텔레비전 화면에서 인터뷰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참 예쁘다’라고 생각 했었다. 음료수 선전에서 파랗고 싱싱한 잎들이 무성한 사이에서 그녀가 꽃같이 밝은 모습으로 미소를 짓던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바뀌고 늙은 노파가 몸이 마비가 되고 침대에 오줌을 저리고 있었다. 기계도 오래되면 녹이 슬고 붉은 물이 흘러내린다. 목수가 잘 짠 오동 나무장도 세월이 흐르면 뒤틀어지고 부서져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인간도 어쩔수 없이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며칠 전 아주 오랜만에 만난 외국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머리가 빠지고 윤기 없는 백발만 민둥산에 박힌 몇 그루의 나무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허리가 앞으로 약간 구부정하게 굽었다. 그의 모습이 충격이었다. 그건 그라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은 수액이 다 빠진 고목 나무 등걸 같았다. 나도 그럴 게 틀림없었다. 그가 나를 보고 말했다.

“오랫 만에 보니 네가 왜소해진 것 같아. 살이 많이 빠졌어?”

그는 나의 늙은 모습을 그렇게 에둘러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느낀 그의 모습을 정직하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근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항상 소년인 네가 있어. 초등학교 시절 너는 반장이고 나는 너를 좋아해서 따라다녔지. 너는 볼이 빨간 귀염성 있는 막내아들이었지. 우리가 같이 중학입시에서 떨어지고 몇 달을 전차를 타고 청량리에 가서 극장구경도 하고 청계천을 걸어서 퇴계로 쪽으로 가기도 했었지. 서울역에서 석탄을 때는 옛날의 검은 기차를 타고 인천을 가기도 했고 말이야.”

젊어서는 눈으로 꽃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런데 늙으니까 백내장이 오고 녹내장이 찾아왔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마음의 눈이 열리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의 눈으로 보니까 함께 늙어가는 이웃들에게서 오랫동안 숙성된 푸근한 내면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연기상을 받은 늙은 여배우는 내면이 훨씬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 본질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나도 수액이 다 빠진 고목등걸이 된 것 같다. 이제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인 어느 날 힘없이 푹 쓰러지면 그 순간 하나님이 ‘아가야’ 하면서 따뜻하게 안아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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