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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천재들

운영자 2022.05.03 11:01:31
조회 156 추천 1 댓글 0

삼십년 가까이 지속되는 다섯명 고교선후배의 모임이 있다. 내가 제일 후배로 총무를 맡고 있다. 나는 그 모임에서 선배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허튼소리가 거의 없었다. 지나치는듯한 얘기에도 그 안에는 진주 같은 알맹이가 들어 있었다. 어제의 모임에서 내가 옆에 앉은 선배에게 궁금한 걸 물었다.

“법조계에서는 선배님을 천재라고 여기는데 머리 좋은 거 말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솔직히 말해봐요.”

그는 사법고시에 수석합격을 하고 오랫동안 판사 생활을 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났다고 해서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주위사람들을 배려하는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까지 갖추었다. 고교 시절 그의 취미는 독일어였다고 했다. 판사 시절 그는 독일에 유학을 가서 짧은 기간 학위를 취득해 독일의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독일어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어 영어에도 정통했다. 그의 재능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자기 자랑을 하거나 말을 많이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인간으로 치면 특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그의 노력을 깊숙이 알아보고 싶어서 물은 것이다. 그가 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대학시절 푹푹찌는 한여름에 집 다락방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어. 다섯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법서에 몰입을 했지. 번역서인 한국의 법학책 만으로는 완벽하게 이해가 쉽지 않아. 일본 원서를 옆에 놓고 공부했었어. 어느 순간 궁둥이가 쓰리고 아파지는 거야. 봤더니 팬티하고 짓무른 살이 완전히 붙어 버린 거야. 팬티 조각하고 살이 한덩어리로 엉킨 걸 인근 의원에 가서 떼어냈지. 그런 적이 있었어.”

흔히들 당시의 고시 공부는 궁둥이 싸움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오래 앉아서 공부하느냐는 말이었다. 그는 그 경지를 꿰뚫고 높이 오른 것이다. 그의 수석합격 뒤에는 무아의 경지로 가는 집중력과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있는 네 명의 선배들은 각자 그런 번쩍거리는 명예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기도 하고 힘든 고시들을 종류별로 모두 합격하고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기도 했다. 인생도 성공적으로 살아왔다. 그들은 실력보다도 더 중요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의 좌장격인 다른 선배에게 “공부를 할 때 얼마나 노력을 했어요?”라고 다시 물어보았다. 그 역시 천재소리를 들은 사람이었다. 대통령은 판사 중의 일등인 젊은 그를 뽑아 옆에 데리고 큰 일을 시키면서 애지중지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오만하거나 자기의 힘에 취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을 소리없이 도와주고 앞에 나서지 않는 인품이었다. 그가 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이런 고백을 했다.

“대학시절 한번은 고향에 갔더니 어머니가 나에게 물으시는 거야. 어떻게 런닝셔츠의 뒷판이 모두 닳아서 너덜거리느냐고 말이야. 나는 도서관에서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공부를 했었어. 런닝셔츠가 의자의 등받이에 쓸려서 헐어버린걸 몰랐지. 런닝셔츠마다 다 그렇게 된 걸 보고 어머니가 그걸 빨면서 우시더라고.”

전설 같은 그들의 노력이 나의 질문에 처음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형설의 공’이라는 말이 있다. 밤에 눈에 비친 달빛이나 반딧불을 모아놓고 그 아래서 과거공부를 했다는 조선의 선비들한테서 나온 말이었다. 우리들 시대에도 그 이상으로 집요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눈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부 세계에서는 프로였다. 공부뿐 아니라 음악에도 바둑에도 골프에도 프로의 세계가 있다. 일반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고 자기의 인생을 몽땅 거기에 던지는 무서운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이 눈을 찡긋하는 운까지 따라주어야 프로의 경지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런 특품이 아닌 존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원로 소설가 정을병씨가 살아있을 때 내게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천재인 톨스토이나 토스토엡스키의 작품을 보면 나는 정말 좌절을 느낍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삼류도 못되고 사류 오류도 안될 거예요.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내가 최고 의 문학인으로 떠받들어져요. 정말 속은 괴롭죠.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능력이 부족해서 오류라고 해도 그냥 내 길을 묵묵히 갈 수 밖에.”

나는 지금도 그의 말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그릇을 각자 다르게 다른 목적으로 만들었다. 피라미가 나는 왜 상어로 만들지 않았느냐고 따질 수 없다. 재능이 없어도 노력이 약해도 그냥 내 작은 그릇에 작은 능력을 담아 분수에 맞게 묵묵히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행복은 또 다른 것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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