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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만 안끼치면 되나

운영자 2022.05.16 10:13:41
조회 178 추천 2 댓글 0

묵호 바닷가 근처에 집을 얻어놓고 생활하고 있다. 불가피한 일이 있어서 법정에 가야 할 때 서울로 올라간다. 반쯤은 은둔생활이고 반은 아직도 시정의 먼지 속에서 싸우는 현직 변호사다. 얼마 전 서울에 올라온 김에 인사를 드렸던 선배는 논어를 공부하는 모임에 나간다고 하면서 그 황금율을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얼떨떨해 하자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게 동양의 도덕이라고 했다. 나는 그와 비슷한 성경의 한 귀절이 떠올랐다.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도 그를 대접하라’

내가 원하는 걸 다른 사람에게 해 주라는 소리다. 논어와 성경 속의 말들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하나가 소극적이라면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개념 같다. 남에게 폐만 끼치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선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자진해서 해야 하는 것일까. 은둔생활을 하면서 나 자신이 깨끗하면 그걸로 다 된 것일까.

밤바다에 떠 있는 고깃배들의 불빛을 보면서 이따금씩 고독을 떠올린다. 누가 메시지를 보내주면 마음이 따뜻해 진다. 내가 받고 싶은 대로 먼저 해 봤다. 내가 쓴 작은 글들을 중풍으로 요양병원에 있는 법과대학 동기에게 보냈다. 불쌍한 친구다. 가난한 대학 시절 과외선생으로 돈을 버느라고 고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변호사사무실 사무장으로 평생을 보냈다. 절실히 추구했으면서도 환경 때문에 이루지 못한 한이 앙금으로 남은 그는 이따금씩 술잔을 앞에 놓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투명한 소주잔에는 눈물이 반쯤은 섞여있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고 머리가 파뿌리 처럼 하얗게 변했을 때 그는 중풍으로 몸이 마비됐다.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어느날 그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기 같은 중풍 환자들이 수백명 있는 걸 보니까 위로가 된다고. 하루에 세 시간씩 열심히 재활운동을 하는데 지금의 꿈은 걸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걷는 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나 보다. 그에게 영상편지를 만들어 보냈다. 나도 중증의 녹내장으로 한쪽 헤드라이트가 고장난 자동차 같은 신세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혈압이 이백을 넘어가 응급상황이었다고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들 모두 녹슬고 부서져 가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너와 같아 하는 것보다 그에게 위로가 되는 게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위로의 메시지를 받고 싶어 그에게 적극적으로 영상편지를 받았다. 성경의 말씀 대로 대접을 받고 싶어 먼저 그를 대접한 것이라고 할까.

내가 사는 작은 아파트의 관리단 임원을 뽑는 공고가 나붙은 적이 있었다. 지원자가 없었다. 골치 아픈 회계서류를 봐야하고 시간을 뺏겨야 하고 논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배운 동양의 도덕은 남에게 폐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는 의식이 있다. 나머지는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나도 그랬다. 무관심의 틈을 타고 불순물이 끼어들었다. 주민 생활의 질서가 느슨해지고 돈이 낭비되고 관리비가 올라갔다.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는 전통적인 의식으로만 되는 사회가 아닌 것 같았다. 동양의 전제군주가 오래간 반면 서양은 주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의회나 자치정부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동양사상과 자진해서 선을 행하라는 서양의 도덕은 비슷 하지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퇴보와 진보, 냉담과 열심, 압제와 자유, 쇠퇴와 번창 둘이 갈라지는 차이가 있다면 너무 거창한 주장일까? 악을 저지르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으면 사람은 은퇴적이 되고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을 받으면 진취적이 된다. 남에게 해만 가하지 않으면 그 다음은 모르겠다고 하면 세상의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게 된다. 다섯달 동안 동해의 청담색 바다를 보다가 요즈음 생각의 키를 조금 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요즈음 바닷가 마을에서 조금씩 일의 끈을 다시 잡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주문이 들어온 법률 서류를 조금씩 쓴다. 그것은 나의 즐거운 노동이다. 친구들이 참선과 명상을 할 때 나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노동을 한다. 그게 나의 수양방법이다. 혼자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바닷가 마을을 돌아보기도 한다. 갯마을에 변호사사무실겸 책방겸 글공방겸 커피점을 내 보는 건 어떨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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