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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2

운영자 2010.11.02 14:39:10
조회 417 추천 0 댓글 0

  대학 4학년 여름에는 강원도 서석의 서봉사라는 절에 묵게 되었다. 불교에서 한 나무 밑에 사흘을 묵지 말라고 했다. 물건이든 장소든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리라. 나는 석 달을 주기로 공부하는 절을 옮겨 다녔다. 전국의 산천경개를 구경하는 셈이었다. 어차피 학교는 반 독재투쟁 데모로 일 년의 절반은 휴강을 하던 시절이었다.


  절 뒤켠에는 작은 바위언덕이 있고, 그 밑으로 굽이굽이 맑고 푸른 물이 흘렀다. 한 여신도의 힘으로 창건된 그 절에는 인허 스님이 혼자 그 여름을 지키고 있었다. 유명한 탄허 스님의 속가에서의 친동생이었다. 인허 스님은 신도들을 위한 백일기도를 하고 있었다. 신심이 대단한 분이셨다. 칠십을 넘긴 연세에도 하루 아홉 시간을 꼬박 서서 염불을 하며 목탁을 두드렸다. 밥은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미쳐버렸다는 공양주 보살 아주머니가 해주었다.


  저녁이면 장작 몇 개비를 가져다 불구멍에 시옷자 모양으로 괴고 그 아래에 청솔가지를 넣는다. 종이에 불을 붙여 솔가질 태우면 파란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불이 붙기 시작한다. 탁탁 소리를 내며 타는 빨간 장작불을 지켜보면서 나는 싸한 저녁 공기를 들이마셨다.


  해가 산 너머로 지고 밤이 오면 성긴 판자에 나뭇가지로 다리를 만든 책상위에 촛불 두개를 켜고 저녁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의 다른 친구들은 도서관에 다니고 출제위원인 교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고시 합격의 지름길들을 택했다. 나는 그런 행위들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젊음의 한 시절을 산사에서 지내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법학보다는 역사나 세계 문화사 같은 과목에 더 흥미가 끌렸다. 당시 정부는 1차 시험에 세계 문화사, 법철학, 경제원론을 넣고, 2차에는 필수과목으로 국사를 치르게 했다. 특히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한 동양문화와 프랑스 대혁명을 근거로 전판된 새로운 사상이 재미있었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을 대표하는 각 시대의 예술과 음악에 관한 설명이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왕조 말까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관한 사학자들이 논문을 섭렵했다. 이우근 교수의 『한국통사』,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 조좌호 교수의 『세계 문화사의 기본서』만 해도 정독으로 스무 번은 더 읽었다. 틈틈이 독일어 단어를 외우기도 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내 정신의 비옥한 거름이 되어 있다.


  “학생, 새벽 예불 시간에 한 달 정도 종을 쳐보지 않을래?”

  어느 날 저녁 인허 스님이 내게 권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4시에 일어났다. 눈을 뜨면 산사의 방은 깜깜절벽이었다. 눈을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매한가지였다. 베개 위 머리맡에 손을 뻗으면 성냥이 잡히도록 놓아두었다. 그 옆에 초가 있었다.


  촛불을 들고 절 마당 한켠에 있는 종각으로 갔다. 푸른 단청에 시뻘건 칠을 한 각이 진 살창 속으로 육중한 종이 보였다. 심호흡을 하고 양쪽이 밧줄로 매어진 서까래 크기의 나무공이를 잡았다. 그것을 뒤로 한껏 젖혔다가 연꽃무늬가 있는 부분으로 밀면 새벽을 깨우는 산사의 종소리가 인근 마을로 밀물져 나갔다.


  마지막 타종을 하면 법당 안에서 ‘탱탱’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허스님이 나무망치로 매달린 징을 치는 소리였다. 징소리는 점점 빨라지면서 커졌다. 그 다음은 독경과 목탁이 동시에 울리는 과정이었다.


  그 즈음 인허 스님의 기도는 지장기도라고 했다. 저승으로 가는 영혼을 위로한 기도였다. 나는 조그만 한 암자의 주인이 되어 일생을 고요하게 보내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그만 책상 하나뿐인 소박한 방에서 불경을 한 권 한 권 익혀나간다. 그것은 오랜 세월 모든 진리를 위해 수도하던 수많은 선사들과의 영혼의 대화일 터였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탐구의 생활일 터였다.


  하지만 뜨거운 욕망이 피가 흘렀던 나로서는 그저 생각에 불과했다. 돈을 벌어 좋은 집에 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을 누르고 싶었고, 공명심이 앞섰다. 험한 구덩이 속에 빠져보고 나서야 조심을 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있다. 반면에 미리 위험을 예견하고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항상 넘어지고 다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아는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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