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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씨의 운수 좋던 날 - 2

운영자 2010.11.19 18:16:43
조회 243 추천 0 댓글 0

1999년 12월 31일 새천년을 맞이하기 하루 전이었다. 아침에 월세 십만 원짜리 단칸방을 나오면서 배봉수씨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재수가 좋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섯 살 먹은 딸아이가 방긋 웃었다. 연년생인 다섯 살 아들놈은 가지 말라고 잉잉거렸다. 오늘 저녁엔 요새 꼬마들한테 선풍적인 인기인 로봇장난감을 사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보면 사는 보람이 느껴졌다.

그는 물건을 받기 위해 아침 8시40분까지 부지런히 힐튼호텔 앞으로 갔다, 지하철 안에서 장갑, 칫솔, 손톱깎이, 젓가락 같이 돈이 되면 다 취급해봤다. 지하철 잡상인들 상대로 물건을 대주는 창신동 사무실에는 없는 종류가 없었다. 오늘은 낮에 중국산 가죽장갑을 받기로 했다. 저녁은 밤12시까지 광화문에서 축제가 있다고 했다. 거기서 축제용품인 형광막대기를 팔아서 두 탕은 뛸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남산의 골짜기에서 찬바람이 불었다. 기다리던 봉고차가 왔다 물건을 넘기는 김 사장이 검은 비닐백 안에 중국산 가죽장갑 100켤레를 꽉 담아 넘겼다.

“하나에 이천원이야.”

김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지하철 안에서 한 켤레에 3천원을 받으면 일당 10만원이었다. 그는 지하철 4호선 서울역 구간으로 들어갔다.

“여러분! 좋은 장갑을 가지고 여러분께 왔습니다. 이 장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진짜 공들여 만든 좋은 가죽입니다……”

이제는 장사꾼으로 이력이 붙은 그의 입담이 시작됐다. 돌이켜 보면 정말 힘든 세월이었다. 삼십대 한창이던 시절 그는 소매치기 사회에서 촉망받는 기술자였다. 늦은 아침을 먹고 버스나 지하철에 올라타서 신문을 펴든다. 펼친 신문으로 옆 사람을 가리고 그 사이에 그의 지갑을 빼냈다. 너무 쉬웠다. 운 좋은 날은 몇 달 흥청망청 살아도 충분할 거액이 들어왔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버스 안에서 현금을 칠십만 원정도 소매치기했다. 당시로서는 큰 수입이었다. 다음날 그 일이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중인 어머니의 수술비를 준비해 가던 아들이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기사였다. 그 어머니는 생명이 위태롭다고 보도되었다. 그는 입맛이 썼다. 그렇다고 돌려줄 수도 없었다. 이미 그 돈은 조직의 형님들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며칠 후 친한 형이 이렇게 말했다.

“야 그 기사보고 그래도 우리가 가만있을 수 있냐? 돈 더 보태서 익명의 독지가가 보내는 걸로 해서 돌려줬다.”

다음 신문에는 익명의 독지가가 금일봉을 전달했다는 기사가 떴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남의 아픔에 그렇게 가슴이 저리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했을 뿐이었다.

“벌써 다 팔았어?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장갑판 돈 이십만 원을 받는 김사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후 세시 경에 장갑 백 켤레가 다 나갔다. 운수좋은 날이었다. 물건 파느라고 점심도 놓쳐버렸다. 잡상인 노릇을 하다보면 번개같이 돌아야지 지체할 틈이 없다. 단속이 심해서 요즈음은 점심 먹기도 마땅치 않다. 예전의 청원경찰은 그래도 나았다. 이만 원짜리 과태료 한 장을 끊으면 그래도 한주일은 눈감아줬다. 과태료만큼 세금을 내고 장사를 하는 셈이었다. 하루 5만원에서 10만원을 올리면 그런대로 먹고 살만했다. 그런데 공익요원은 달랐다. 부잣집 아들들이 군대대신 하는 것이라 그런지 힘든 앵벌이들을 이해할 줄을 몰랐다. 공익요원은 걸리는 대로 하루에 몇 장씩의 과태료 딱지를 부과했다. 자식 같은 놈들에게 애걸하고 멱살 잡히는 게 흔했다.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어릴 적 한국체육관에서 단련했던 권투실력으로 한방 날리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과태료를 못 내면 즉결로 넘겨져 구류를 3일 살기도 하고 5일 살기도 한다. 돈이 밀려 내지 못하면 검찰에서는 기소중지처분을 내렸다. 그러면 수배가 되어 불심검문에 걸리면 영락없는 유치장 행이었다.

그는 김사장의 창신동 사무실에서 김치찌개백반으로 늦은 점심을 때웠다.

“맨날 앵벌이 하지 말고 이제는 사무실 운영해보는 게 어때?”

김사장이 말했다. 그의 여섯 평되는 사무실에는 구석구석 샘플들이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잡상인이 파는 종목의 물건들은 없는 게 없었다. 김사장은 그를 신용해서 며칠 전 벌써 사업자등록을 그의 명의로 해주었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둘은 명실공이 동업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현장을 뛴 영업전문가로서 장사 훈련을 시켜 사람들을 지하철로 내보내면 되는 것이다. 관리직으로 승진하는 셈이었다.

“나는 앞으로 물건만 받아올 거니까 배봉수씨가 사장을 해”

김사장은 물건들을 박스나 가방에 넣고 봉고차를 서울시내 곳곳의 잡상인들에게 전해주는 게 지겨운 것이었다.

“이따 광화문에서 하는 행사에 야광막대를 가지고 한탕 더 뛸려고 하니까 7시쯤 그리고 삼백 개만 가져다 줘요.”

그가 말했다.

“오늘은 연말인데 그만하고 가서 식구들하고 놀지 그렇게 돈 벌어서 뭐해?”

김사장이 놀렸다.

“그래도 대목인데 이때 재미 좀 봐야죠.”

그가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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