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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잡지가 이룬 기적

운영자 2010.12.09 11:47:16
조회 351 추천 1 댓글 2

  9년 전이다. 뒤늦은 나이에 야간 대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거기서 알게 된 한 사람이 내게 원고지 다섯 장 분량의 수필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밝은 이야기를 적은 작은 잡지를 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수필이라는 것을 진땀을 흘리며 처음 써 봤다. 원고지의 한 칸 한 칸을 메운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몇 달이 흘렀다. 잡지를 시작했던 그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내게 하소연했다. 매달 몇 백 권씩만 찍는데도 도저히 적자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내게 그 잡지를 그냥 인수하라고 했었다. 다음달이었다. 그가 허술한 중국음식점에서 한 사람을 내게 소개했다. 기업 홍보실 과장으로 근무하던 분인데 그 잡지를 인수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샐러리맨을 그만두고 필생의 사업으로 그 잡지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월급을 저축해서 사 둔 조그만 땅이 있는데 그걸 자본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망하려면 잡지를 해라’라는 우스개 소리를 들었다. 뼈가 있는 소리였다. 잡지를 인수한 J씨를 보며 나는 불안했다. 검은 얼굴에 선량해 보이는 눈을 가진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대문에 초라한 사무실을 얻었다. 다섯 평 남의 사무실 귀퉁이에 철 책상 하나를 달랑 놓고 아내와 마주앉았다. 남편은 원고를 쓰고 직접 사진기를 들고 밖으로 돌았다. 아내는 잡지의 발송을 맡았다. 원고료 한 푼, 사진 한 장 값이라도 아껴야 했던 것이다. 처음 써보는 보잘 것 없는 나의 원고도 그들 부부에게는 감사인사를 받았다.

  이따금씩 J씨는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나는 그와 부근의 음식점에서 종종 점심을 먹었다. 얘기 끝에 그가 사무실에서 쫓겨 나온 것을 눈치 챘다. 종이 값, 인쇄비 같은 비용독촉에 시달릴 때면 슬며시 피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는 정말 열심히 책을 만들었다. 시간이 없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얇은 책 안에 풍부한 양과 질을 담아 팔겠다는 고집이었다. 


  나는 그의 외판원을 자청하여 친구들에게 그가 만든 책을 팔아주려고 애썼다. 반응들이 시큰둥했다. 대개는 돈 많은 호사가가 만든 선전용 교양책자로 취급했다. 인연을 따라 마지못해 몇 권 사주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연줄 없는 그에게는 광고조차 없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약속한 광고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에게 처음으로 조그만 광고가 들어왔다. 얼마 후 그가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내게 놀러왔다. 


  “한 독자에게서 편지가 왔는데요. 내 잡지의 광고에 난 물건이 광고문안하고 다르다고 그래요 안 좋다는 거예요.”

  독자에게 진실할지 광고수입으로 인쇄비를 충당할지의 기로에서 그는 망설였다. 어려운 결정이 떨어졌다. 그는 광고를 거절한 것이다. 다시 잡지의 어느 면에도 광고는 없었다.


  “망하는 날까지 철저히 기존의 세태와 거꾸로 달려볼 겁니다.”

  그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맹세했다. 가판대에는 항상 선정적인 잡지가 가득했다. 그런 속에 촌스런 디자인의 그의 책을 끼워 놓으려고 그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내면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인쇄소도 여러 차례 가서 오탈자 하나까지 자신이 직접 손을 보았다. 한 페이지라도 잘못되면 손해를 무릅쓰고 다시 찍었다. 표지 사진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보고 또 봤다. 그의 촌스러움은 무수한 고민 끝에 만들어 낸 계산된 접근방식이었다. 삼 년이 흐른 어느 날 오후였다. 

  “이제 매달 이만부가 팔려요 이제는 할 만 합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안도의 말이 나왔다. 기뻤다. 종이 값이 오르고 인건비가 올라도 그는 책의 가격 2천원을 올리지 않았다. 한번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책값을 받아서 다 쓰는 게 아니라 독자에게 그 일부를 돌리면 반드시 그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작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나아갔다. 침몰하는 배와 함께하는 선장같이 잡지와 함께 했다. 기적과도 같이 판매 부수가 늘어났다.


  IMF가 터지고 경제 불황이 왔다. 출판계가 연이어 도산하고 노숙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런 속에서 그는 어느덧 8톤 트럭에 가득 실린 잡지가 열대여섯 대 줄을 서서 전국의 서점으로 실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1999년 3월 19일. 통 유리창으로 잔잔히 흐르는 강물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한강변에 웅장한 9층 건물의 잡지사 신축사옥 입당예배가 있었다. 초현대식 건물의 일층은 갤러리였다. 그 외에 편집부, 발송부 등 수십 명의 직원이 깨끗한 한복을 입고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J씨가 아내와 함께 나와서 인사말을 하기 위해 앞에 섰다.


  “새까만 사람이 나와서 인사드립니다. 시골 바닷가 어촌에서 힘들게 자랐습니다. 너무 부족하고 못난 사람입니다. 오늘의 영광을 모두 직원 여러분께 돌립니다. 여러분이 밤새워 일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걸 볼 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의 의지가 흔들릴 때도 직원 여러분 때문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봄이 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는 끝은 창성했다. 나는 앞으로 커진 나무에 바람과 장애가 많아지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진심으로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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