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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4

운영자 2010.11.02 14:43:27
조회 539 추천 0 댓글 0

  방종했던 나는 그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다. 누군가에 의해 내 행동이 관찰된다는 게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막으니까 튀고 싶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장의 명령을 어기고 자주 대구로 나갔다. 목욕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차라도 한잔 마셔야 사는 것 같았다. 그때 만나 사람이 아내였다.
 

  대학 1학년 때 여고 2학년인 아내를 처음 보았다. 선배의 동생이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선배를 찾아갔다가 우리 옆을 지나가는 여고생을 보았는데, 그 얼굴이 내게 너무 익숙했다. 분명히 처음 보는 것인데도 그 동안 마음 속 깊이 간직해 왔던 얼굴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와 있지? 내가 잘 아는 여잔데. 그런데 어떻게 나하고 알더라? 오늘 처음 보는 여고생인데..’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전생의 깊은 인연인 듯한 감정이었다. 그 예감 깊숙한 곳에 “내 아내가 왜 여기 있지?”하는 의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만남이 있은 지 5년 후 나는 혼자 대구에 있는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미대 교수실의 조교로 있었다. 나는 대명동의대학 건물로 무작정 찾아갔다. 털모자로 빡빡 깎은 머리를 덮고, 한복의 솜바지 위에 누런 잠바를 입은 해괴한 모습이었다. 말라붙은 얼굴에서는 피부 비늘이 떨어졌다.


  수위실 입구에서 미대 조소실을 물었다. 그녀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조소실은 왜 찾죠?”

  뒤에서 두툼한 모직 코트를 입은 40대 후반의 남자가 다가오면서 내게 물었다.


  “하영이를 보러 왔는데요.”

  나는 그 남자를 물끄러미 보며 대답했다. 남자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나를 따라와요.”

  남자가 먼저 천천히 걸음을 떼며 말했다.


  나는 그를 따라갔다. 포장된 나지막한 언덕을 넘으니 유럽풍의 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남자는 돌기둥과 박공지붕 아래의 문으로 들어갔다. 어둠침침한 교수실 복도를 지나 한 방으로 들어가며 그가 말했다.


  “하영이는 내 조교인데, 지금 없어요.”

  그는 하영의 담당교수였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여제자를 쫓아다니는 남학생을 보는 보호자의 표정이 어려 있었다.


  “언제쯤 올까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마 한참 걸릴 거요.”


  그는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조선 핫바지를 입고 머리를 빡빡 깍은 내 모습이 기괴했으리라.

  “그러면 메모를 써놓을 테니 전해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나는 수첩에서 종이 한 장을 찢어 볼펜으로 휘갈겼다. 아까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도인동의 ‘로즈가든’ 다방으로 메모를 보는 즉시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메모를 끈처럼 얇게 접어 오각형으로 만들어 교수에게 건네주었다.


  “혹시 무슨 내용인지 알아도 될까요?”

  “내가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나오라는 내용입니다.”


  “아마 바빠서 나가기 힘들 거요.”

  교수의 말에는 내보내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래도 보면 나올 겁니다.”

  나는 까닭 모를 확신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순간 교수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그날 오후 나는 해인사로 들어가는 버스의 막차시간까지 다방에서 하영을 기다렸다. 그러나 하영은 나오지 않았다.


  절간 방 윗목에 놔두었던 물대접이 꽁꽁 얼어붙었다. 손가락이 얼어서 책을 넘기기조차 힘들었다. 털모자를 쓰고 서울 평화시장에서 산 누빈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민법책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맞은편 창호지문이 열리더니 고구마 장사 모자를 쓴 영감의 얼굴이 쑥 나타났다.


  “음, 제대로 박혀 있구만..”

  영감이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나를 장학생으로 뽑아준 김학장이었다. 학장은 이어서 다른 방들도 점검했고, 고시생 부대는 난데없는 사령관의 출현으로 비상이 걸렸다. 학장은 시간이 날 때면 재단에서 내준 까만색 포니를 타고 고시생들이 배치된 전국의 암자를 순회했다. 학장이 불시에 방문했을 때 마을에 내려가 있거나 개울에서 고기라도 잡고 있었다가는 그 날로 보따리를 싸서 쫓겨나는 게 규칙이었다.

  우리는 학장이 지난밤에 묵은 해인사 아래의 정갈한 여관방으로 내려갔다. 보류가 깔린 방바닥 한쪽에 학장의 손때 묻은 민법책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동경에서 법대를 나온 학장은 철저한 학자였다. 서울대 교수시절부터 한 시간도 휴강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고, 심지어 추석날 보충수업을 하겠다고 학생들을 불러 모은 적도 있다고 했다.


  경상도의 부잣집 아들로 일본 유학을 한 학장은 총명한 머리로 해방이 되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학자 특유의 강한 고집을 가진 그는 남들과 그리 잘 어울리는 편이 못 됐다. 그의 학설도 소수설이 많았다. 그런 그의 고집이 다른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켜 학교를 나오게 됐다는 것이다.


  “절에서는 간신히 몸이나 추스릴 정도로 먹어야 해. 힘이 넘치면 여자 생각밖에 안 하는 게 젊은 놈들이야.”

  학장은 웃으면서 빙 둘러 무릎을 꿇고 앉은 우리를 보았다.


  여관 종업원이 검은 자개밥상에 아침을 들여왔다. 밥과 국, 그리고 된장찌개, 젓갈, 나물들이 흰 도기에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된장찌개를 보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새해에는 1차 시험을 다시 봐야 했다. 대학 3학년 초에 합격한 1차의 효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시험을 끌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2차까지 완전히 통과하고 싶은 욕망이 끓어올랐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금년 합격’을 부르짖었다. 머릿속에서는 달콤한 상상의 날개가 펼쳐졌다. 멋진 옷을 입고 화려한 호텔 커피숍에서 하영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무지개 같은 앞날, 사람들이 내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 등을 상상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눈앞에서 삭막하고 딱딱한 법서의 활자들이 나를 빈정대듯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대구로 가서 응시원서를 받는 심부름은 내가 자청했다. 하영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산기슭을 따라 뱀같이 이리저리 굽은 한적한 도로를 시외버스는 유유히 미끄러져 갔다. 버스 안 스피커에서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길 나그네길’이라는 노래가 잔잔히 흘렀다. 나는 소설 『삼포가는 길』 속의 영달이나 정씨의 마음이 되어 이미 추수가 끝난 황량한 논바닥 여기저기에 쌓아둔 벼 그루터기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만나는 강가의 산자락에 해묵은 기와집들이 보였다. 이끼로 얼룩진 기와가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나를 손짓해 부르는 듯했다.


  대구로 나와 중앙통 부근의 다방에서 하영을 만났다. 미대생인 그녀는 물방울 무늬가 있는 매끄러운 레인코트 차림이었다.


  “지난번에 로즈가든에서 막차시간까지 기다렸는데..”

  “교수님한테서 오빠 쪽지를 받고 로즈가든으로 부리나케 달려갔었어요.”


  “교수가 제대로 전해주기는 했나 보지?”
  “네. 그런데 좀 이상한 말을 하셨어요.”


  하영은 약간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핫바지 저고리에 19세기 출세관을 가진 속물들이 법대 고시생이래요. 그런 사람들과 예술을 하는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대요.”


  예술 지상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동시에 부성애와 에로티시즘이 섞인 나이 먹은 교수의 감정이 혼재되어 있었을 게 분명했다.


  오빠 친구라는 명분은 하영의 경계심을 없애주었다. 사랑은 말이 아닌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나는 막연하지만 분명히 어떤 일체감을 느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어?”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이제부터는 조소로 방향을 돌리려고 해요. 지도교수님이 조각을 하셨거든요. 작업실에서 밤낮없이 진흙덩어리하고 뒹굴어요. 도전에도 출품하고 프랑스 유학도 갈 거예요.”


  하영은 작품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세계 문화사에서 암기했던 지식들을 풀어놓았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을 조각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 갇혀 있던 역동적인 말이나 사람의 모양을 꺼냈다는 이야기며 서머셋 몸이 『달과 6펜스』에 쓴 고갱의 일생을 들려주었다. 진정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교수라는 명예직이나 미술협회에서의 심사권 같은 유치한 욕망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도 강조했다. 내심 하영의 지도교수에 대한 힐난이었다. 예술 지상주의를 내세우며 고시생을 깎아내린데 대한 앙갚음이었다.


  노장 고시생인 우리는 대구 고등학교 앞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1차 시험 전날이었다. ‘봉봉여관’이라는 조그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베니어판으로 한 사람 겨우 누워 잘 수 있도록 칸막이를 한 조그만 방들이 벌집처럼 늘어서 있었다. 꽃잎 모양이 박힌 싸구려 벽지 무늬는 그나마 색깔마저 번지고 문드러져 보였다.


  서울에서 학장이 까만 포니를 타고격려차 내려왔다. 시합을 앞두고 선수들을 격려하는 야구감독이었다. 우리는 근처의 식당으로 가서 특식을 얻어먹었다. 기운을 내라고 고기를 사준 것이다 방도 각자 한 개씩 빌리는 특정을 얻었다. 마지막 정리를 잘 하라는 뜻이었다. 여관 근처 고깃집에서 우리는 몰려 나왔다.


  “여관까지 차를 타거라.”

  학장이 말했다. 고깃집 앞쪽에 포니가 얌전히 대기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본닛이 퉁겨냈다. 나는 신이 나서 포니 쪽으로 가서 타려고 했다.


  “이 사람아, 착각 말아. 자네가 아니야.”

  선배 정이 나를 살짝 밀쳤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사이 학장이 뒷좌석에 오르고 정이 반대편 문을 통해 차 안으로 들어갔다.


  “다 차는 게 아니여. 대장만 타는 거여. 그리고 차 안에서 그도안 개개인의 상황보고를 학장 선상님에게 드리는 거여.”

  고참인 신이 눈치없는 나를 나무라듯 말했다.


  “쳇. 대학까지 졸업한 놈이 돈 몇 푼에 신세 한번 더럽네. 다음에 성공하면 나도 포니 타고 전국을 돌면서 해인사 이 여관을 찾아와 떡 벌어진 밥상을 받을 거네.”

  나는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해 1차 시험에서 나는 어이없이 낙방했다. 2차 시험장에는 아예 들어갈 자격조차 없어진 것이다. 그것은 내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한양대 장학생 제도는 대학생이라도 1차에 낙방하면 고시방에서 퇴출된다고 했다. 그런데 외인부대인 내가 들어가자마자 1차에서 떨어졌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암자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거의 합격했다. 자격을 상실한 나는 하루라도 그곳에 있는 게 고통이었다.


  해인사 마을의 여관으로 가서 방을 잡았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기도 난감했다. 그렇다고 계속 그곳에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근처 약방으로 가서 수면제를 샀다. 먹지 못하는 매주도 두 병 사가지고 왔다. 수면제를 술과 함께 먹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리고 천장을 보았다. 정신이 물에 헹군 듯 점점 더 또렷해져 왔다. 이윽고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마비가 왔다. 몸이 뼈 없는 낙지처럼 흐물흐물 해지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은 문경 쪽 사불산 대승사에서 묵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서 고시반 동기생인 장과 둘이서만 함께 지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장은 학장에게 머리를 깎았는데도 불합격시키면 책상을 뒤엎겠다고 호기를 부리던 청년이었다.


  장과 나는 털털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합천에서도 한참을 더 산 속으로 들어갔다. 하얀 모래가 펼쳐진 강을 지나고 굽이굽이 도는 험한 산길을 여러 번 넘었다.


  이윽고 해질 무렵 우리는 50호도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버스 차부 앞의 허름한 기와집이 동네 잡화점이었다. 구석에 싸구려 과자며 좀약, 술 궤짝 등이 놓여 있고, 때 묻은 회벽 한가운데에는 수영복을 입은 정윤희가 온몸에 물방울을 묻힌 채 사과를 들고 서 있었다. 그 마을의 유일한 위락시설이 그 가게였다. 흙바닥에 놓인 난로 위 양은냄비에서 오뎅이 끓고 있었다.


  “이제부터 산을 두 개 더 넘어야 청강사가 있다.”

  자이 잡화점에서 초를 몇 갑 샀다. 신문지도 얻었다. 장은 보따리를 어깨에 걸쳐 메면서 어서 산으로 올라가자고 서둘렀다. 우리는 어스름이 짙어가는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중의 겨울 해는 금세 저물었다. 곧 깜깜한 밤이 왔다.


  “잠깐만 기다려.”

  장은 보따리를 바닥에 놓더니 얻어온 신문지로 초를 두 자루 단단히 쌌다. 그리고 초 심지에 불을 붙였다. 심지와 함께 둘레의 신문지가 타면서 초는 마치 횃불처럼 밝아졌다.


  “이게 즉석 플래시야. 제법 밝아.”

  자은 초로 만든 횃불 한 자루를 내게 건네주었다. 밤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불었다. 우리는 앙상한 나무들 사이를 뚫고 나아갔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을 무렵 산중턱의 한 낡은 절에 이르렀다.


  그 절은 이미 운명을 다한 폐사 같았다. 절 입구의 건물은 지붕이 내려낮고, 문의 창호지들이 찢어져 이리저리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괴기 영화를 찍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야, 이게 귀신이 나올 집이지, 어디 우리가 공부할 절이냐?”

  나는 으스스한 기분을 누르며 말했다.


  “원래는 합천의 만석꾼 정씨 집 개인 사찰이었는데, 그 집안이 망하면서 이렇게 됐다.”

  “이 절에 중은 있냐?”


  “없다. 정씨 집 마지막 며느리인 늙은 할머니가 대신 염불을 하며 지킨다.”

  장은 그 집의 종손과 친구였다. 우리는 나무문의 돌쩌귀 소리가 삐이익 나는 빈 건물을 지나 안쪽으로 갔다. 낡은 법당 앞의 방 하나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사람이 있다는 증거였다.


  “안녕하십니까, 보살님! 이제야 왔습니다.”

  장이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낡은 장지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머리를 내밀었다.


  “어서 들어 오이라.”

  희미한 호롱불이 방안에서 일렁거렸다. 할머니는 소반에 늦은 저녁을 차려주었다. 방 안은 밥상 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 넣을 때마다 입 속에서 우두둑 돌이 씹혔다.


  폐허가 된 절의 요사채 한쪽 구석방이 그해 겨울 장과 나의 공부터가 되었다. 장은 무섭게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법서에 몰입해 있는 그의 강렬한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진리를 찾아 시간을 초월해서 용맹정진하는 승려 같은 모습이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척하면서 그 분위기만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나는 잠과 피곤을 이기지 못해 방바닥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린다. 그러나 근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이 생활에 자신이 없어졌다. 결국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듯했다.


  한 달 가량 지나 우리는 근처의 제실로 거처를 옮겼다. 할머니가 더 이상 밥을 해 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자 기와집 대청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방이 있었다. 제실 마당을 건너면 묘지기의 작은 집이었다.


  어느 날 밤 장은 내게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그는 제실 대청마루 한가운데 간단한 제상을 마련했다. 그리고 스스로 한지에 제문을 써서 촛불, 향과 함께 상에 놓았다. 내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합격해서 부모님을 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결의인 것 같았다. 그는 제문을 불에 태우는 소지 의식까지 거룩하게 거행했다.


  그해 겨울은 마음까지도 유난히 추웠다. 몇 해에 걸쳐 낭만같이 지내오던 그런 생활이 이젠 진저리가 났다. 다 집어치우고 서울로 가고 싶었다. 사라들로 북적이는 거리가 그리웠다. 다방에서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싶었다. 하얀 눈이 쌓인 들판은 더 이상 보기 싫었다.


  나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앓아누웠다. 제실의 묘지기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면의 약방에 가서 사다 준 감기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열이 높았다. 찬 바람이 윙윙 부는 밤 동안 외양간에 있는 소의 목에 달린 방울 소리가 딸랑딸랑 밤하늘에 울렷다.


  면으로 나가서 하영에게 전화를 했다. 그 동안 하영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하영은 정이 담뿍 담긴 편지를 보내오기도 하고, 언니와 하께 절에 찾아온 적도 있었다. 나는 앓는 목소리로 하영에게 약을 지어 가지고 와달라고 했다.


  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다. 드넓은 합천의 들판은 우리가 있는 제실만 빼고 온통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마당 저쪽에서 아주 작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공부를 하고 있던 장이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며서 “자네, 여복 하나는 아주 좋구만” 하고 부러운 듯 소리쳤다. 하영이 약을 지어 가지고 찾아온 것이었다. 눈물이 울컥 솟았다.


  나는 하영의 도움으로 겨우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며칠 후 짐을 쌌다.


  “이제 이런 황량한 풍경 속에 있는 게 정말 싫어..”

  내가 장에게 하소연했다.


  “나는 아직 괜찮아. 이 정도면 얼마든지 더 견딜 수 있어.”

  장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몇 달 후 나와 장은 1차 시험에 합격했다. 2차 시험을 얼마 앞두고 장과 나는 한양대 법과대학 건물의 지하 기숙사에서 다른 고시반 학생들과 함께 묵게 되었다. 그곳 고시반 학생들은 모두 나름대로 깊은 사연을 가진 굴곡 많은 삶들이었다. 공통된 점 중의 하나가 가난이었다. 그 중에는 장이 곤상이 기가 막히게 좋다면서 남몰래 짝사랑 하던 여학생도 있었다.


  처음 고시를 볼 때는 나흘간의 2차 시험이 그렇게 괴롭고 힘들 수가 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괘선지에 논문을 쓴다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그러나 1차 시험에 떨어져 보니 그게 아니었다. 2차 시험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2차 시험을 치르는 내내 짝을 이루어 지낸 장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마치 파티장에라도 온 듯한 차림이었다. 일반 수험생들은 시험 때 목욕도 안 하고 손톱, 발톱마저도 깎지 않는 미신이 있었다.


  “시험 치는 놈이 웬 양복이냐?”

  내가 시험 중간에 장에게 물었다.


  “어허, 이 사람, 미야모도 무사시도 안 읽어봤는가? 무사시는 사사키 고치로오와 대결하기 전날 목욕재계하고 가장 새 옷으로 단정히 입고 결전을 준비했다네. 나도 그렇게 하는 거네.”

  장이 웃으면서 옛 선비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는 돈키호테이고 나는 산초 판자쯤 되는 느낌이었다.


  그 해에 나는 또 낙방을 했다. 그 동안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에게는 봄이 찾아왔다. 해인사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은 다 합격했다. 학장의 총애를 받던 대장 정은 고시에 수석합격을 해서 매스컴의 인터뷰를 받느라 바빴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가난하다고 푸념하던 권도 합격하고, 고참인 강, 신 모두 좋은 성적으로 관문을 통과했다. 미야모도 무사시의 결전을 자처한 장도 거뜬히 합격했다.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도 재학 중에 산의 정상에 올랐다. 낭만 운운하며 뜨겁지도 차지도 않던 나만 그 대열에서 떨어져 나온 셈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현주소도 모두 화려하다. 당시 장이 좋아하던 여학생은 판사 생활을 거쳐 대통령의 가장 총애를 받는 당의 중진 정치인이 되어 여야회담 때 당대표격으로 TV에 등장하곤 한다. 장이 말한 관상이 들어맞은 것이다. 장은 자칭 포청천 같은 판관이 되었다. 그리고 전국적인 주요 사건의 수사가 회오리칠 때 기자 회견장을 보면 당시 함께 공부하던 신이나 권이 나와 발표를 하곤 한다.


  몸이 이상했다.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지나면 피곤이 엄습했다. 식사 시간에 간신히 일어나 밥을 먹는 외에는 줄곧 쓰러져 잤다. 어쩌다 오후에 시내라도 나갔다 오는 날이면 거의 까부라질 정도로 지쳤다. 마치 수면병에라도 걸린 듯 잠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매일 지나치는 길목에 있는 약국의 의사가 나를 손짓해 불렀다. 이따금 피로회복제인 드링크를 사먹는 인연으로 낯이 익은 약사였다.


  “한번 병원에 가서 간 검사를 받아보시죠.”

  약사가 내 눈을 응시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나는 약사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제가 간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눈에 노란 기운이 서리는 게 아무래도 간염이 심한 것 같아 보여요. 하루 종일 피곤하지 않아요?”

  나는 곧 고려대학교 부속병원에 가서 간 검사를 받았다. 피 검사를 하고 의사가 촉진을 했다. 이어서 의사는 리버스캐닝을 하라고 지시했다. 기계로 여러 각도에서 간을 수십 번 찍었다. 불규칙한 생활의 말로는 낙방과 간염이었다.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는 막연한 병이었다.


  그 무렵 내게 유일한 힘과 위로가 되어 주는 건 하영뿐이었다. 그녀는 내가 힘들 때 항상 곁에 있어 주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현실적인 여러 가지 부담이 가로놓여 있었다. 군대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고, 기업에 취직할 입장도 아니었다. 몸은 더 이상 공부하기 곤란한 상태였다.


  하영과 나는 어느 날 여주로 가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방이 앞뒤로 꽉꽉 막힌 것 같아.”

  내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부가 정형외과 의산데, 몸을 열고 등뼈를 살짝 긁어 놓으면 그게 엑스레이에 나타난대요. 그러면 군대에 안가도 된다고 하던데.”

  하영 역시 별 궁리를 다해 본 것 같았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나날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따금 나는 꿈속에서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입영열차를 타곤 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느 날 같이 공부하던 대학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친구는 합격해서 사법연수원에 다니는 중이었다.


  식이 끝나고 음식을 차려놓은 식당으로 갔다. 한쪽 구석에 흰 테이블보를 단정히 씌운 식탁이 놓여 있었다. 무심코 거기 가서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안내를 맡은 친구의 친척 남자가 나를 보고 다가왔다.


  “아닌데요.”

  순간 그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죄송하지만 여긴 앞으로 판사나 검사를 같이 할 연수원 동기생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학교 친구시면 저쪽으로 가시죠.”

  그는 나에게 문가의 식탁 쪽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장을 빠져나왔다. 함께 공부하고, 성적이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하더라도 현실은 이렇듯 무서운 것이었다.


  판검사가 아니라도 좋았다. 이제 어딘가 적을 두고 싶었다. 조그만 책상이라도 앉아 일할 장소가 있었으면 싶었다.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나사못 하나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나를 받아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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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SNS로 싸우면 절대 안 질 것 같은 고집 있는 스타는? 운영자 24/05/06 - -
357 음악밖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8 운영자 10.12.30 294 0
356 음악밖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7 운영자 10.12.30 321 0
355 음악밖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6 운영자 10.12.28 481 0
354 음악밖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5 운영자 10.12.28 328 0
353 음악밖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4 운영자 10.12.28 325 0
352 음악밖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3 운영자 10.12.28 313 0
351 음악밖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2 운영자 10.12.28 356 0
350 음악밖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1 운영자 10.12.24 449 0
349 아씨시의 프란체스코를 찾아서 운영자 10.12.24 244 0
348 골드코스트의 한국인 백만장자 [1] 운영자 10.12.24 434 0
347 카프리 섬에서 만난 '안토니우스'와 '살바도레' 운영자 10.12.24 157 0
346 리포터 플리니우스의 봄베이 멸망보고 운영자 10.12.24 348 0
345 진짜 그림장사 [1] 운영자 10.12.24 210 0
344 사랑은 마음의 문제 운영자 10.12.16 333 0
343 운현궁의 봄 [1] 운영자 10.12.16 227 0
342 박수근 화백의 3대 운영자 10.12.16 309 0
341 자유를 택한 젊은 시인 운영자 10.12.14 204 0
340 용감한 경찰관 2 운영자 10.12.14 466 1
339 용감한 경찰관 1 운영자 10.12.14 362 0
338 어느 잡지가 이룬 기적 [2] 운영자 10.12.09 351 1
337 얼굴 없는 예술가의 초상 [1] 운영자 10.12.09 181 0
336 북한산 호랑이와 상냥한 청년 운영자 10.12.09 209 0
335 빈손을 헌금주머니에 넣고 돈 낸 척 했수 운영자 10.12.07 250 0
334 접촉 사고 때 신사가 됩시다 운영자 10.12.07 281 0
333 어느 훌륭한 군인 운영자 10.12.07 637 0
332 무의미한 판결 [2] 운영자 10.12.02 382 0
331 깨어진 유리인형 - 2 [1] 운영자 10.12.02 595 0
330 깨어진 유리인형 - 1 운영자 10.12.02 317 0
329 한 줌의 사랑을 베풀었던들 운영자 10.11.30 230 0
328 법정 곰팡이 없애기 [1] 운영자 10.11.30 233 0
327 악마를 보았다 운영자 10.11.30 399 1
326 빨간 줄 간 호적이 무서워 운영자 10.11.25 421 0
325 엉터리 미륵선사 - 2 운영자 10.11.25 222 0
324 엉터리 미륵선사 - 1 운영자 10.11.25 275 0
323 봉수씨의 운수 좋던 날 - 7 운영자 10.11.23 250 0
322 봉수씨의 운수 좋던 날 - 6 운영자 10.11.23 195 0
321 봉수씨의 운수 좋던 날 - 5 운영자 10.11.19 223 0
320 봉수씨의 운수 좋던 날 - 4 운영자 10.11.19 201 0
319 봉수씨의 운수 좋던 날 - 3 운영자 10.11.19 251 0
318 봉수씨의 운수 좋던 날 - 2 운영자 10.11.19 243 0
317 봉수씨의 운수 좋던 날 - 1 운영자 10.11.19 337 0
316 어느 건달의 후회 - 2 [1] 운영자 10.11.19 481 0
315 어느 건달의 후회 - 1 운영자 10.11.19 527 0
311 저희 같은 사람 말도 믿어주나요? 운영자 10.11.19 246 0
310 소 명 운영자 10.11.12 283 0
309 갑자기 스쳐간 고통의 메세지 운영자 10.11.12 295 0
308 절망, 그 죽음에 이르는 병을 딛고 3 [2] 운영자 10.11.09 460 0
307 절망, 그 죽음에 이르는 병을 딛고 2 운영자 10.11.09 375 0
306 절망, 그 죽음에 이르는 병을 딛고 1 [1] 운영자 10.11.09 469 0
305 특권계급의 울타리인 비자금 운영자 10.11.09 31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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