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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5

운영자 2010.11.02 14:47:37
조회 587 추천 0 댓글 3

  우연히 군법무관 시험 공고가 신문에 난 걸 친구가 알려주었다. 군에서 법무장교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5년마다 한 번씩 30명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군에서 10년을 복무하면 제대 후 변호사 자격을 준다고 했다.


  서대문의 국제대학교실에서 치르는 군법무관 시험장에 들어갔다. 그동안 고시 공부를 하다가 군대 문제가 눈앞에 닥친 대학원 졸업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노란 표찰을 가슴에 단 시험관들이 시간이 되면 두루마리 문제지를 들고 교실에 들어왔다. 문제지가 펼쳐지면 교실은 쥐죽은 듯 모두 조용해졌다. 모두들 절박한 사람들이었다. 군대사회의 법관이 되느냐, 맨 밑바닥 졸병이 되느냐는 운명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시험을 치르고 있는데 빨간 표찰을 달고 양복을 단정하게 입은 사람이 시험장으로 들어왔다. 교실 담당의 노란 표찰이 황송한 표정으로 그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총무처 고시국의 책임자였다. 답안지를 작성하느라 바빴던 나는 그 모습을 힐끗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내 옆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야, 시험 잘쳐! 나 권상이다.”

  옆을 보니 빨간 표찰은 바로 친구 이권상이었다. 그는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행정고시에 합격해 총무처 사무관이 되어 고시를 관할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나의 초라한 모습을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군 법무관 시험 마지막 날이었다. 나흘간의 시험에서 아침마다 응시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것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인생이 직업군인의 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대부분은 한 번만 더 고시를 치르면 합격할 것 같은 느낌이 들 터였다. 나도 한 번 더 시험을 보면 합격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간염으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상태라면 더 이상 공부하기가 불가능했다. 하영과의 관계도 더 유지해 나갈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논문을 많이 쓰는데, 너는 왜 조금밖에 안 쓰냐? 일단 많이 써.”

  시험 총감독관 이권상이 내 옆에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답안지를 가지고 가서 내 것을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그는 점심시간이 되면 나를 데리고 나가 밥을 사먹이곤 했다.


  한 달 후 서울신문의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또 다른 운명의 전환점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이제 평생 직업 군인이었다.

  1978년 8월 31일 밤, 나는 광주 보병학교의 막사 내무반에서 사회에서 입었던 옷을 싸고 있었다. 입술이 부르트고 코피가 흘렀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재빨리 피를 닦았다. 장발이었던 머리는 바리캉으로 다 밀렸다. 구대장이라는 사관학교 출신의 김중위가 정신없이 장교후보생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긴 나무지휘봉으로 내 배 쪽을 가르키면서 말했다.


  “훈련 기간 동안 이 나온 똥배를 다 들여보내주겠어.”

  그는 수시로 내무반 관물대에 양쪽 발을 얹게 하고는 푸쉬업을 시키기도 했다. 나는 푸쉬업을 받다가 바닥에 나뒹굴곤 했다. 이미 건강은 밑바닥에서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덩치는 커다란 친구가 왜 이렇게 빌빌거려.”

  그가 소리쳤다.


  새벽에 취침나팔 소리가 은은하게 병영에 퍼져 나갈 때면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훈련 중에는 한 발도 떼기가 힘들었다. 어느 때는 앞 사람의 등판이 저 멀리에서 아물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저녁에 내무반으로 돌아오면 그 자리에서 픽 쓰러졌다.


  어느 날 노란 당직 사령 완장에 권총을 찬 소령이 막사로 들어왔다. 모두들 놀라서 눈이 후둥그래지고 비상이 걸렸다. 

  “여기 후보생 중 엄상익이 누군가?”

  당직 사령은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소리치며 두리번거렸다.


  “이 사람인데요.”

  내 옆에 있던 훈련병이 누워 있는 나를 가리켰다. 하루 종일 연병장을 기고 씻을 기운조차 없던 나는 진흙이 묻은 채로 구석에 기대듯 누워 있었다.


  “저 친구 빨리 몸을 닦에 하고 지급받은 옷 중에서 제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나는 명령대로 곧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막사를 나왔다.

  잠시 후 우리는 연대장실 앞에 섰다.

  “자, 연대장실 안으로 들어가 봐.”


  당직 사령이 명령했다.

  “넷!”

  나는 부동자세로 경례하고 주춤주춤 연대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연대장의 책상 앞 회의탁자에 하영이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랐다. 순간 하영 앞에서 허물어져 울고 싶은 감정이 북받쳤다.


  “여기 연대장을 하시는 박대령님이 클래스메이트 아빠세요. 그래서 특별히 부탁했어요.”

  하영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는 이처럼 무서울 정도의 적극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하영이가 가지고 온 과자와 보온병에서 따라놓은 차를 마셨다. 황량한 군대 안에서 그녀와 함께 있는 1초마저 내겐 한없이 달콤했다.


  그후 나는 큰 빽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쉴 시간을 최대한 만들어 볼 테니까 견딜 수 있는 만큼 견뎌봐.”

  구대장으로 있던 사람의 말이었다.


  법무장교로 정한 인원에서 한 명이라도 탈락시키면 보충이나 행정처리가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고문관이 되어 열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혹독한 훈련보다 더 힘겨운 일이었다. 남들이 힘들 때는 같이 힘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규칙적인 생활과 산으로 들로 이동하는 장교 훈련 덕분에 나는 건강을 많이 회복할 수 있었다.개구리같이 튀어나왔던 배가 정말로 쏙 들어가고 뛸 수 있게 되었다. 그해 말 나는 육군 중위로 임관되어 서울 지역을 경비하는 수도군단 사령부 군법회의로 명령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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