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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와 무기수 - 1

운영자 2011.07.05 14:34:51
조회 336 추천 0 댓글 0

  오십대 말쯤 되어 보이는 초라한 옷차림의 남자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골 깊은 주름이 푸석푸석한 얼굴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다. 갈대 같은 기름기 없는 백발은 그의 신산스런 삶을 알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딘지 그에게서는 엘리트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지 한달 됐습니다”

  그가 저음의 굵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두툼한 안경 뒤로 보이는 그의 눈이 선량했다. 범죄형이 아닌 것이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셨는데요?”

  내가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다.


  “거액의 당좌수표를 부도냈죠.”

  그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명문대 출신 수의사인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성공한 인생이었다. 그는 사료공장과 목장을 가진 부자사업가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큰 빌딩을 소유할 기회가 왔다. 100억이 넘는 빌딩인데 마지막 공사비가 모자라 반값도 못되는 가격에 넘어가는 건물이었다. 빨리 잡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지 몰랐다. 그는 우선 당좌수표를 발행해서 계약금과 중도금을 치렀다. 잔금은 보험회사에서 융자해 줄 테니 아무 걱정 말라고 했다.


  그에게는 목장이나 공장 같은 충분한 부동산 담보가 있었다.


  그는 이제 빌딩임대료도 받아 남은 인생을 좀 더 평안하게 즐기고 싶었다. 빌딩을 아이들에게 남겨주면 자식 대까지 걱정 없는 생활일 것이었다. 착하고 무난한 성격을 가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인심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많은 복을 준 것 같았다. 좋은 성품을 주었다. 명문을 나오고 자식도 재물도 넘치게 주었다. 그러나 그가 빌딩계약을 했던 그 무렵은 IMF외환 위기 때였다. 그는 갑자기 성경속의 욥같은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IMF외환위기로 보험회사는 70억 대출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도미노처럼 모든 게 무너졌다. 헐값이 된 전 재산을 날리고도  당좌수표를 막지 못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부자가 갑자기 거지죄수로 전락한 것이다.


  “정말 그렇게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수도 있군요”

  나는 마음속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내 앞에 존재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이제 청춘마저 다 가버린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족마저 그를 떠나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남은 빚이 있다고 했다. 그 빚 때문에 어디 수의사로 취직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월급 자체도 바로 압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죄도 없으신데 그렇게 까지 될 수 있을까요?”

  내가 안 스런 마음으로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가 알듯말듯한 미소를 띄우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요 감옥에 가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는 오히려 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 됐어요.”

  상당수의 사람들은 감옥에 가면 자기만의 불행에 집착한다. 심지어 살인자들은 고통을 겪으면서 오히려 죽은 사람을 원망하는 게 교도소 안의 극단적 이기주의였다. 그러나 그는 더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영혼을 다시 살린 것 같았다. 


  “제가 이렇게 온 건 말이죠 내 문제가 아니라 함께 징역을 산 무기수를 부탁하러 온 거예요.”

  난 깜짝 놀랐다. 출소했으면 다시는 교도소 쪽이나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을 향해 얼굴도 돌리기 싫은 게 그들의 생리였다. 그러나 그는 함께 살던 무기수를 부탁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무기순데요?”

  내가 물었다.


  “제가 교도소에서 죽 세탁 공장 일을 했거든요. 거기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젊은 반장이 있었는데 정말 여자 같고 천사예요. 고참반장이면 나이에 상관없이 욕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게 감옥입니다. 보통 속옷도 빨아 입지 않고 신입에게 시켜요. 그런데 그 젊은 반장은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는 걸 못 봤어요. 징역고참인데도 말없이 재봉틀에 매달려 일해요. 저보고도 형님이라고 예의를 지켰어요. 자기 죄에 대해서도 침묵하다가 나중에야 혼잣말로 ‘살인누명이라도 벗었으면--’ 하고 고민하는 걸 봤어요. 지독한 고문으로 누명을 썼는데 고아출신이라 어느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거죠. 옆에서 오래 지켜봤는데 그 사람 말이 틀림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온 겁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돈을 벌어 댈 테니까 도와주세요.”

  나는 정말 오랜만에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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