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카터후보는 후보연설에서 한국의 인권문제해결과 미군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이렇게 폭로했다.
“한국엔 700개의 핵폭탄이 있다. 나는 단 한 개라도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실제로 당시 한국엔 683개의 핵폭탄이 있었다.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을 싫어했다. 미국의회에 김형욱등 반박정희인물들이 한국의 인권을 고발하면서 한국지도자에 대한 인상이 더욱 나빠졌기 때문이다. 카터후보의 지지층은 베트남전 반대운동과 워터게이트사건을 일으키면서 미국사회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던 진보 세력이었다. 그런 카터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범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카터는 이어서 한국내의 핵무기 및 주한미군의 철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지지 않고 노골적으로 맞받아 쳤다.
“월남패망 때부터 내 이럴 줄 짐작했어요. 카터는 땅콩장사만 해서 그런지 경륜이 없다더군, 한국에 어떤 인권문제가 있느냐고 미국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못합니다. 인권침해란 법에 의하지 않고 재판도 하지 않고 탄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헌법에 따라 3심을 거치고 그것도 공개리에 외국기자들한테까지 방청을 시키면서 법으로 확정해서 처벌하는 것을 어떻게 인권침해라고 할 수 있는가 말이오. 반체제 사람들이 콧대를 높이는 것도 바로 미국 사람들 때문이야. 미국이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낄 때라야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놓아 줄 수 있지. 이 기회에 그 사람들의 사대근성을 뿌리 뽑아야 됩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근성을 버리지 않고는 진정한 자주독립 국민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동안 미국에서 반정부운동을 하던 한국사람들의 말을 미국언론은 그대로 실어줬단 말이야. 우리는 더 이상 미국에 구걸하지 않아요. 내년에 프랑스에서 장갑차 150대를 도입하고 가을에는 서해에서 미사일 시험발사도 할 것입니다. 핵을 가져가겠다면 가져가라지. 그들이 철수하고 나면 우리는 직접 핵을 개발할 생각이오.”
박정희 대통령비서관 회의와 주변에 한 말이다. 1977년5월5일 카터는 주한미군 전체를 철수한다고 결정을 대통령지시각서 12호에 담아 미 합동참모본부에 내려 보냈다. 한미간의 마찰과 위기가 다가와 있었다.
1977년의 겨울 같은 봄이 돌아왔다. 북한산 자락에 진달래가 가슴 서늘한 빛으로 피어났다. 그 색깔은 김상협의 마음까지 물들이는 것 같았다. 그는 어느새 세월이 갔다는 걸 느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낚시터로 갔다. 그는 낚싯대 두 대를 펼쳐놓고 바위같이 앉아 명상 속에 빠져 들었다. 지나가는 낚시꾼은 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움직이는 법이 없는 그를 보면서 물가의 바위 같다고 생각했다. 김옥길 김동길교수 남매가 더러 찾아왔다. 김상협은 그들과 더러 우래옥에 들려 냉면에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무렵 그는 일기에 이런 독백을 했다.
‘곰곰히 생각하면 나의 인생도 이제 15년 기껏해 봤자 20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길이 막혀 있으니--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
그의 수명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었다. 20년의 수명이 남은 시점이었다. 김상협은 낚싯대를 드리우며 조용한 중에도 그의 지적 순례는 쉬지 않았다. 북한산자락의 농장에서 매주 미 대사관의 참사관급 직원인 드래고니라는 미국인을 불러 얘기를 들었다. 그를 통해 그때그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미국의 마음을 읽으려고 한 것이다. 김상협은 카터의 진의가 인권에 있는지 주한미군의 철군 어느 쪽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었다. 칩거하고 있다고 하지만 제자들을 비롯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 일본, 서독, 영국, 캐나다, 자유중국대사등 주한 외교사절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미국무부차관 하비브가 특사자격으로 방한해서 대통령과 대담을 한 후 김상협을 만나 대통령과 대화한 얘기를 전해주기도 했다. 하비브는 한국내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카터의 정치적 입장을 대통령에게 설명했다고 전했다. 그 무렵 글라이스틴 대사는 박대통령을 만나 한미정상이 직접 만나 얘기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박대통령은 정상회담은 할 수 있지만 인권개선을 전제조건으로 거는 건 불쾌하다고 거부반응을 보였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북경에서 미국선교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직업외교관이 되었고 동아시아를 전공했다. 그는 아시아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인권개선의 필요성을 박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는 인물들과 자주 접촉했다.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서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구금자를 석방하면 주한미군 철수문제에서 호의적인 성과가 있을 것임을 얘기했다. 카터의 인권문제 거론도 미국내의 진보세력을 의식한 정치적인 행동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그 무렵인 1976년경부터 김일성은 카터에게 편지를 보내 직접 접촉할 것을 제의했다. 한국을 제외하고 직접 미국과 대화하자는 내용이었다. 1977년7월 주한미군의 헬리콥터가 비행실수로 북측 비무장지대 상공으로 들어갔다가 격추되어 미군 3명이 죽고 한명은 억류되었다. 북한은 이례적으로 사흘만에 유해와 생존미군을 돌려주었다. 김일성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을 통해서도 카터에게 편지를 보내 미북 직접 대화를 제의했다. 월맹이 미국과 직접 협상을 벌인 것과 흡사한 과정이었다. 북한은 대포와 전투기를 배로 늘렸고 장갑차는 세배로 수륙 양용차와 수송기를 네 배로 증강시키고 휴전선 가까이 공군기지를 만들었다. 북한의 모든 병력은 전진 배치되고 공격대형이었다. 워싱톤 포스트지는 주한 미군사령관 베시의 참모장인 싱글러브의 말을 인용해서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다. 주한미군사령관 베시도 미군이 철수하면 한국 내에서 전쟁이 발생하리라는 의견을 한국 중앙정보부장에게 알려주었다. 한미정상회담이 준비되고 있었다. 미국의 요구는 한국의 민주화였다. 미국의 정계주변에서는 한국의 대통령이 정치범을 석방하고 민주화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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