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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장편/모험] 시간을 달리는 안나 2 -17화-

절대온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3.20 01: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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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다시보기: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3660932


1~14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4167169


15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4219516


16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4243323




성탄절, 1812년
저녁 6시 49분


행복이라는 것은 값비싼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행복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오늘 하루 그녀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끔찍했다. 어머니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참혹한 기분으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방금 벌어진 엄청난 일에 대한 충격이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이제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운명의 물결은 안나를 비웃으며 더욱 끔찍한 시련을 선사해 주었다.

그녀는 검은 사내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짐마차 한 대에 사내들이 올라탔고 그것이 도시 외곽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이대로 어머니가 끔찍한 일을 당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그녀와 엘사의 목숨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코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지자 안나는 품속에 있던 사진을 꺼내서 보았다.


‘예상대로 언니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나는 급한 마음에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프라이팬을 들고 집밖으로 달려 나와 마차를 쫒았다. 사력을 다해 달렸지만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차를 따라잡을 만한 이동 수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렌델의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국민들은 모두 가족과의 시간을 즐기거나 아렌델 성으로 놀러가 파티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 제발!”


그런데 안절부절 못하던 그녀에게 천운이 찾아왔다. 길모퉁이에서 순록 한 마리를 끌고 가던 한 여인이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안나는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


“저기, 저기요! 당신 순록 좀 잠깐 빌려도 될까요?”


안나의 입에서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네?”


“순록을 빌려도 되냐고 물었잖아요!”


여자가 몹시 겁먹은 표정을 짓자 안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프라이팬을 들고 순록을 달라고 소리 지르는 그녀의 꼴은 틀림없이 미치광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공중도덕 따위를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언니와 어머니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는 5초간의 기다림이 마치 5분 같았다.


“네, 네! 쓰셔도 돼요! 대신 한 시간 안에 스벤을 이 자리로 돌려주셔야 해요!


여자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안나는 순록 위로 올라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는 속도를 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주색 망토를 길가로 벗어던졌다. 순록의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꼭 크리스토프의 오랜 친구처럼 말이다. 순록의 왕은 크리스토프였지만, 오늘 하루 순록을 타고 질주하는 이는 미래의 여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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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나의 팔은 등 뒤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한 채 하얀 끈으로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두 명의 사내가 넓은 마차 안에서 그녀의 몸을 억누르며 저항하지 못하게 붙들어 두었다. 그녀의 앞에 낯익은 실루엣, 이 일의 원흉이 앉아 있었다.


“나는 정말로 이 순간을 기다려왔어.”


루토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죽음에 대한 극한의 공포가 서려 있는 이두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몹시 즐거워했다.


“마치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이 말이야.”


그리고 장갑을 벗어 그것으로 이두나의 뺨을 가격했다. 팔목까지 덮는 기다란 하얀 장갑이 마치 채찍처럼 느껴졌다. 얼굴에 얼얼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런 뒤 루토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렸다.


“아악!”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두나는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애를 썼다. 이번에는 악녀가 주먹을 쥐고 그녀의 복부를 가격했다. 강력했다. 다시는 숨을 쉬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자 결국 이두나가 무릎을 구부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신랑은 따로 있어.”


이두나의 귀에 아득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누군가가 자신에게 증오심을 품고 죽을 때까지 괴롭히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너가 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아?”
 
루토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두나는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 모른다고? 한심한 년 같으니라고. 넌 그 천한 몸뚱아리로 감히 국왕 폐하와 놀아났어. 어떻게 알았냐고? 우리 아버지는 자그마치 30년을 궁에서 보내셨던 분이야. 너 같은 년들을 관리하고 색출해 내는데 아주 능숙한 분이시지.”


이두나가 울먹이는 얼굴로 그녀를 힘겹게 쳐다보자 루토는 검은 옷의 사내 중 한 명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생각에 이 나라가 잘못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08년부터이지 않았을까 싶어. 선왕 폐하께서 야만인들과 싸우다 돌아가셨던 바로 그 해 말이지.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놈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 궁 안으로 개나 소나 기어들어오기 시작하더군. 너도 그 중 하나였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 따위에게 동정심을 느끼진 않아. 더구나 너처럼 주제 파악을 못하고 국왕 폐하를 홀리는 요망한 계집을 말이야!”


“전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뿐이에요!”


이두나는 복부에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강력하게 항변했지만 오히려 루토의 분노만 키웠다.


“사랑? 사랑이란 단어를 아무데나 갖다 붙이지 마! 고아원 출신이라 교육을 못 받아서 핵심을 모르는 건가? 뭔가 파악이 덜 된 것 같으니 내가 제대로 설명해주지.”


루토는 이두나를 똑바로 마주 쳐다봤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겐 각자 정해진 운명이 있어. 우리는 모두 그런 운명을 따르며 살아가. 예를 들어 나는 명문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이 나라의 왕비가 될 운명이지만 너는 부모님도 없는 고아로 자란 시녀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겠지.”


마차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것이 신경 쓰였지만 루토는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너는 그 운명에 도전을 했어. 네게 주어진 신분에 만족할 줄 모르고 괴상한 행동을 한 거야. 그러자 이 세상의 조화가 뒤틀리고 균열이 일어나고 말았지.”


루토는 기다랗고 날카로운 쇳덩이를 꺼내 이두나의 머리 위로 두세 차례 휘두르다 그것을 그녀의 목에 겨누었다.


“오늘 저녁 나는 그 뒤틀려버린 세계를 직접 원상태로 되돌려 놓을 거야. 너도 동의하지? 마음 같아선 너를 죽을 때까지 패고 싶지만 성에서 잘생긴 신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빨리 가봐야 하거든. 너무 걱정하지 마, 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순식간에 끝내줄게.”


이두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 저녁 이후로 아그나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이렇게 스무 살도 되지 않아 먼저 죽는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두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 너무나 간절하게 아그나르를 생각했다.


“꺅!”


그때 마차가 급격하게 덜컹거리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마차의 회전력 때문에 루토는 벽에 머리를 부딪쳤고 바닥에 굴렀다. 마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런 제기랄, 마차 똑바로 몰지 못해?”


루토가 앞좌석의 마부를 향해 성질을 부렸다. 그러나 마차 칸 너머로 들려온 답변은 사죄나 변명의 말이 아닌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앞에 어떤 미친 여자가 순록을 타고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루토는 마차 앞쪽을 가로막고 있던 창문을 열고 정면을 주시했다. 적갈색 반묶음 머리의 여자가 순록을 타고 손에 프라이팬을 든 채 마차의 주위로 접근하고 있었다.


“요르겐비요르겐?”


그녀는 4일 전에 감히 자신의 멱살을 잡았던 이상한 성을 가진 여자를 똑똑히 기억해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여자가 이두나를 구하러 달려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흥분한 루토가 검은 옷을 입은 그녀의 수행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중에 석궁을 들고 있는 놈이 있느냐? 저 망할 년을 당장 쏴라!”


“아가씨, 저희 임무랑 관련 없는 민간인까지 죽이면 뒤처리가 곤란해집니다!”


“시끄럽다, 내가 책임지겠다! 당장 저 여자를 쏴서 없애버려라!”


곧바로 마차 칸의 조그마한 지붕이 열리며 검은 옷의 사내 세 명이 차체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한적한 아렌델의 거리에 울려퍼졌지만 안나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안나는 차분하게 화살을 프라이팬으로 튕겨내며 목표물로 점점 가까이 접근했다. 그녀는 결전의 순간이 올 때마다 항상 강해지는 인물이었다.


‘저 마차에 직접 뛰어들어 엄마를 구해야해!’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그녀의 머리를 지배했다. 안나는 경사로를 내려가 붉은 하늘 아래 어둠에 잠기고 있는 교차로로 접어들었다. 아렌델은 보기보다 참 넓은 도시였다. 이제는 마차가 안나를 쫒았다. 안나는 마치 용의 머리처럼 그들을 끌고 다니다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마차 위에 올라가 있던 세 명의 남자가 관성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마차 안에서 창문을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두나의 얼굴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환해졌다.


“이두나, 이두나! 그 안에 있어?”


“안나! 나 여기...읍!”


부하 하나가 이두나의 입에 하얀 천을 물려 그녀의 음성을 봉쇄해버렸다. 분노로 일그러진 루토의 푸른 눈은 모세혈관이 터져 실핏줄이 퍼져 있었다.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안나가 어디서 쫒아오는지 찾으려 했지만 순록을 탄 여자는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년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그때 창문으로 무언가가 날아들어 유리 파편이 마차 내부로 쏟아졌다. 하마터면 돌덩이가 그녀의 머리를 맞출 뻔했다. 놀란 루토는 마차 지붕 뚜껑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안나가 어느새 마차 뒤꽁무니에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루토는 계속해서 쫒아오는 찰거머리 같은 여자의 무임승차를 저지하기 위해 악을 쓰며 마차 안에 있던 물건들을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안나는 프라이팬으로 얼굴을 보호하며 각종 장신구들을 튕겨냈다.


‘저 마차 안에 도대체 몇 명이 있는 거지? 일단 이대로는 저 위로 접근할 수가 없겠어!’


안나는 방향을 선회해 두 갈래의 경사로로 올라갔다. 마차를 끌던 마부는 경사로에서 그녀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평탄한 길로 도망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안나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경사로의 높이가 마차의 지붕 높이와 비슷해지자 안나는 순록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고마워, 스벤!”


그녀는 순록을 향해 습관적으로 하던 말을 내뱉었다. 안나는 마치 하늘다람쥐처럼 날아올라 마차의 지붕 위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몸 전체를 지붕에 처박은 채 눈을 들어 위쪽을 쳐다보았다. 사람 한명은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법한 구멍 사이로 루토가 고개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참 동안 응시했다. 미래와 과거라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을 뿐 본래 역사에서 지금 존재해선 안 되는 두 여자가 끝까지 싸울 기세로 대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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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델 성의 1층은 온갖 다양한 직업과 신분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도회장에는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1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등진지 20년이나 지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음악을 사랑했다. 아그나르는 그의 옆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소년 시종에게 시간을 물어보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7시 55분입니다, 폐하.”


풍성한 머릿결의 신참내기 시종인 카이가 대답했다.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도 성 안의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왜 이두나가 도착하지 않는 거지? 길을 잘못 들었나? 혹시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일까? 돌연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조금 있으면 중대 발표를 할 것이라고 어제 대신들과 왕궁 사람들에게 실컷 지껄이고 다녔는데, 정작 그 주인공이 오질 않으니 시작조차 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일분, 일초가 흘러갈 때마다 아그나르의 속은 타들어갔다. 그는 와인 잔을 들어 그것을 허겁지겁 삼켰다. 포도주가 그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자 당황한 그는 손등으로 그것을 쓱 닦아냈다. 파티장에서 왕을 지켜보고 있던 일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꼭 그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시선들을 피하기 위해 닌센 공작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이유 없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왜 루토가 아직도 도착하질 않지?’


닌센 공작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젯밤 딸에게 무도회장 도착시간을 그리 강조했건만 말썽쟁이 공녀님은 도통 그와의 약속을 지키는 법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이두나라는 여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도랑 한가운데서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재빠르게 손을 써둔 덕분에 그녀가 아렌델 성을 밟는 일은 두 번 다시없게 되었다. 초조해하고 있는 소년 왕의 모습을 보니 그는 지금까지 해온 예상이 모두 맞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노련했다.


‘애송이 녀석, 그런 뻔히 보이는 수로 나를 밀어내려 하다니... 저놈은 루나드가 다리에서 주워온 자식이 틀림없어. 어떻게 그토록 똑똑하고 교활했던 친구 밑에서 저런 허술한 아들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리타가 아들을 너무 애지중지 키워서 저리 된 건가?’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책상 위에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8시 1분 전이었다. 닌센은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쯤 되면 루토가 무슨 연유가 있든 오지 못한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대충 연말을 기념하는 축사나 한 번 하고 그것이 중대 발표였다고 넘겨버리자. 그런 다음 내일 열릴 국정회의에서 결혼 문제를 언급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왕에게는 선택지가 없어진 시점이기 때문에 그녀를 거절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왕은 여전히 허둥대며 단상 아래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니 웃기기보다 이제는 측은함마저 밀려왔다. 하지만 동정심은 정치판에서 버려야 할 1순위 감정이다.


‘루나드가 지하에서 울고 있겠군.’


성 안에 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번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엄연히 말해 도착 신호가 아니었다. 아그나르는 절망감을 느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가 반드시 이곳으로 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한 가닥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굳게 믿었다.


“폐하,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폐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8시가 지나도 왕이 아무런 말이 없자 대신들이 하나 둘씩 아그나르를 향해 의문을 던졌다. 당신이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냈으니 어서 아무 말이나 지껄여 보라는 말투 같았다. 약속시간보다 대략 3분 정도가 지났는데도 이두나가 왔다는 신호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그때 섭정이 단상 위로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포착됐다.


“자자, 여러분! 모두 집중해 주십시오. 제가 여러분들께 전해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섭정이 힘 있는 목소리로 청중을 향해 외쳤다. 아그나르는 그가 틀림없이 결혼 발표를 선수 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필사적으로 뛰어 올라가 그의 팔을 잡아당겨 저지했다.


‘뭐, 뭐야? 이 자식 왜이래?’


예상치 못한 왕의 돌발 행동에 철가면 같던 닌센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그의 관절은 아직 그 정도의 충격을 버텨낼 수준이 되는 듯 했다.


“하하, 공작께서 굳이 제 발표를 대신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여기 모이신 우리 아렌델의 소중한 국민들에게 직접 전해야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죠.”


아무리 왕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는 닌센 공작이었지만 전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왕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일단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소년은 무도회장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의 시선을 홀몸으로 받아야 했다. 이건 준비된 상황이 아니었다. 어떤 준비된 연설문도 그에게 주어져 있지 않았다. 수백 개의 눈동자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는 광경에 아그나르는 현기증을 느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이 상황을 무마해야만 했지만 이미 머릿속에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폐하께서 지금부터 여기 모인 모든 국민 여러분들에게 전할 중대한 발표가 있다고 하십니다! 모두 집중해 주십시오!”


아그나르의 입술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본 닌센 공작은 오히려 대놓고 판을 깔아주며 그를 진창 속으로 빠뜨릴 계획이었다. 평소 소년 왕은 닌센 공작이 적어준 연설문을 줄줄 읽어내려 가는 것에만 상당히 익숙해진 터였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저 소심쟁이가 언뜻 봐도 수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렌델의 국왕 아그나르 루나드손 아프 아렌입니다.”


그는 간신히 한마디를 토해 내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박수갈채가 그를 향해 쏟아졌지만 전혀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뒤에 아그나르는 뭐라고 말해야만 했지만 마치 입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청중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의 중대 발표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감상하며 그를 기리자는 건 아니겠지요?”


교육부 장관이 농담을 던지자 무도회장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는 왕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아그나르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에 올라온 이상 정말로 아무 말이라도 지껄여야 했다. 어렵사리 그가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말이죠...그건 바로...아 죄송합니다. 그게 뭐냐면...”


그의 제복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아그나르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았다. 무도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동정심, 안타까움, 혐오감, 비웃음 등이 섞인 눈빛으로 힘겨워하고 있는 소년 왕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은 차마 못 보겠군.”
“폐하가 너무 불쌍해.”
“왜 저러는 거야? 저럴 거면 나서지 말던가.”
“어린 나이에 왕 노릇 하기 쉬운 게 아니지.”
“왕이 저모양이니 이 나라의 미래가 정말로 암울하군!”


아그나르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너무나 간절하게 이두나가 보고 싶었다. 그녀가 곁에 있어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긴장하지 말고 차분하게 하라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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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너냐, 요르겐비요르겐?”


“당장 이두나를 풀어줘!”


물론 루토가 그 말을 들어줄 리는 만무했다. 이미 대화로 해결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나는 몸을 일으켜 왼손에 프라이팬을 쥐고 루토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이 닿기도 전에 남자 하나가 안나를 덮쳤다.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었다. 차체 뒤쪽 창문에서 검은 형체 두 개가 더 올라왔다. 그들은 날카로운 무기를 휘두르며 안나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그녀는 날렵하게 프라이팬으로 검을 방어해냈다. 그녀와 싸우고 있는 자객들도 생전 처음 보는 격투 방식에 속으로는 황당해했다. 비록 검을 들고 있지는 않았지만 안나는 질주하는 마차 위에서 남자 셋과 검술 대결을 펼치며 침착하게 그들을 상대했다.


남자 하나가 안나의 팔을 움켜잡았으나 그녀는 그의 힘을 역이용해 그를 다른 자객들이 있는 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노리던 남자의 머리를 프라이팬으로 가격한 뒤 샌드위치처럼 모여 있는 세 남자들에게 킥을 날리자 그들이 나란히 괴성을 지르며 한번에 마차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비교적 협소한 공간이 안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들! 남자 셋이 여자 하나를 상대 못해?”


루토가 그렇게 외치자 열받은 남자 하나가 또 튀어나와 안나에게 덤벼들었다. 그가 검을 휘둘렀지만 안나는 프라이팬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가공할 위력의 오른손 펀치는 한방에 남자를 나가떨어지게 했다. 안나는 이제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루토가 있는 구멍에 닿을 수 있었으나 검은 옷이 또다시 안나를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안나가 그의 공격을 피하고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뭉개버리는 사이 뒤에서 또 다른 자객이 두꺼운 팔뚝으로 안나의 목덜미를 휘감으며 거칠게 그녀의 숨통을 조였다. 목에 가해지는 충격 때문에 안나는 손에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 그 상태로 죽어버려라!”


루토가 통쾌해하는 얼굴로 외쳤다. 한편 마차 속에 갇혀있던 이두나는 위쪽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안나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도와야만 했다. 마차 안에는 이제 이두나와 마부, 검은 옷의 남자 한 명만이 남아 있었다. 마침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남자는 그녀에게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두나는 힘겹게 기어가 유리 파편을 집어 들어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하얀 끈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녀는 노력 끝에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녀는 입에 물려져 있던 하얀 천도 제거한 뒤 조심스럽게 일어나 뒤를 보이고 있는 남자를 제압하기 위해 나무토막 하나를 집었다. 싸움이라곤 평생 해본 적 없었던 이두나였지만 안나를 돕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전투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행동에 옮기려던 찰나에 남자가 그녀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이년이 언제...”


남자가 황당함과 분노가 담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두나의 팔을 움켜잡았다. 남자의 악력에서 전해지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무기를 휘둘렀지만 공중에서 헛되이 공기만 가를 뿐이었다. 이두나의 두 팔이 남자의 양손에 의해 공중에서 머무르다 점점 목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두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며 그녀에게 접근해오는 불결한 손아귀를 있는 힘을 다해 물어뜯었다.


“아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앞좌석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그의 단검이 마부의 등으로 내리꽂히려 했고 마부는 그것을 피하려 몸을 비틀면서 말고삐를 이상하게 틀며 갑작스럽게 좌회전을 했다. 마차 위에서 사투를 벌이던 안나는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와 함께 마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녀의 목덜미를 조르던 자객은 길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안나는 간신히 마차에 달려있는 장식을 두 손으로 붙잡고 힘겹게 매달렸다.
그러자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루토가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 지붕 위로 올라와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네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았구나.”


루토가 안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았다. 마녀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바로 그녀일 것만 같았다.


“당신은 한스만도 못한 인간이야!”


안나가 분노어린 목소리로 그녀의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모욕을 내뱉었지만 루토에게는 손톱만큼도 충격을 주지 못했다.


“한스? 그건 누구지? 그놈도 나처럼 너 같은 벌레들과 원수지간이라도 되나?”


루토는 안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들어 올려 안나의 왼손을 하이힐로 밟았다. 손등으로 전해지는 끔찍한 고통에 안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왼손을 놓치며 오른손에 모든 힘을 집중해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아파? 한 번 더 그렇게 아플 건데 계속 매달려 있을 거야?”


안나는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 보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손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는 않겠지만 어머니를 구할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루토는 끝내버릴 생각으로 칼을 꺼내 안나에게 겨누었다.


“잘 가라, 요르겐비요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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