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샌드라 오(왼쪽)가 분한 니나는 다이애나 손(오른쪽)이 무기력해진 자신을 반성하며 만들어낸 배역이며, 이 연극을 집필하도록 자극한 것은 샌드라 오였다.
△양지현
한국계-흑인 부부, 정체성을 말하다
자신의 문화로부터 단절된 이들의 이야기,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새틀라이츠>… 한국 이민가정 출신 작가 다이애나 손과 배우 산드라 오가 8년 만에 의기투합
▣ 뉴욕=양지현 <씨네21> 통신원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새틀라이츠>(Satellites)는 지난 1998년 연극 <스톱 키스>에 이어 8년 만에 한국계 미국인 작가 다이애나 손과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산드라 오가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새틀라이츠>라는 제목은 뿌리 없이 떠도는 현대인을 인공위성에 비유한 것으로, 정체성 고민에 휩싸인 부부와 뉴욕의 독특한 부동산 실정과 문화, 출산 등을 절묘하게 그려 호평을 받았다.
1998년에도 <스톱 키스>로 공전의 히트
5월23일부터 시작된 이 공연을 본 <뉴욕타임스>의 벤 브랜틀리는 “견고해 보이지만 내부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브루클린 주택의 세트장은 정체성의 위기를 느끼고 방황하는 주인공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다이애나 손의 고찰은 전통적인 윤리관과 사회, 경제, 성에 대한 경계선을 완벽히 흡수했다”며, 캐릭터들이 불안정한 이야기 속으로 빨려가듯이 관객 역시 그 세계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그는 계속하여 손씨의 <스톱 키스>와 <새틀라이츠>를 닐 사이먼의 희곡 <맨발로 공원을>(Barefoot in the Park)과 <2번가의 포로>(Prisoner of Second Avenue)에 비유하며, 손씨의 작품은 도시 생활을 하는 젊은이의 고민하는 모습을 현 세대에 맞게 대변했다고 평했다. <새틀라이츠>는 한국계 건축가 니나(산드라 오)와 흑인 마일스(케빈 캐롤) 부부의 이야기다. 니나는 한국인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한국어나 문화를 배우지 못했고 얼마 전 실직한 컴퓨터 전문가 마일스는 백인 가정에 입양된 흑인이다. 첫아이를 갓 출산한 주인공 니나는 딸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무리를 해서 브루클린 흑인 거주 지역의 낡은 브라운스톤 주택으로 이사하고 한국인 유모 미세스 채를 고용한다. 하지만 이들이 찾고 싶어하는 정체성은 단순히 이사를 하고 유모를 고용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다. 집 고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흑인 이웃 레지가 마일스의 눈에는 사기꾼처럼 보이고, 미세스 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흑인과 결혼한 것에 대한 인정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된다. <새틀라이츠>에 참여한 다이애나 손과 산드라 오의 우정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LA의 ‘뉴 웍스 페스티벌’에서 만난 뒤 오씨가 손씨의 작품 낭독회에 계속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1998년 이들은 연극 <스톱 키스>를 함께 만들었다. 이 작품은 두 여성의 사랑과 현대인의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과 공포감 등을 묘사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손씨는 무명 작가에서 <웨스트 윙> 등 네트워크 TV 극작가로 올라섰고, 이맘때 남편 마이클 코사붐과 첫아이를 가졌다. 2001년부터는 한국에서도 방영 중인 TV <뉴욕특수수사대>(Law & Order: Criminal Intent)의 프로듀서 겸 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난 8년간 오씨는 10개의 TV 시리즈에서 고정 혹은 게스트로 출연했고, 20여 편의 영화(대부분 저예산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 중 아카데미상 수상작 <사이드웨이>와 메디컬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로 인기를 끌고 있다.
아이를 가진 뒤 갑자기 혼돈에 빠지다
손씨가 TV에서 일을 얻은 것은 가정과 희곡 집필에 모두 시간을 할애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그럭저럭 ‘TV 직장’의 일은 잘돼가고 있었다. 이런 손씨를 자극한 것은 오씨의 말이었다. 손씨가 희곡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했더니, 산드라가 “전에 그렇게 집중 잘하고 의욕적이더니, 아이를 낳고 완전히 변했다”고 톡 쏘아붙인 것이다. 다이애나 손은 직설적인 그의 말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 말은 자극 없이 살아오던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이런 무기력해진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연극을 풀어나갔다. 그러니 <새틀라이츠>의 주인공 니나는 손씨의 분신이다. 니나는 출산 뒤 유모를 고용하면서 남는 시간을 이용해 파트너인 키트(요하나 데이)와 함께 공모전에 제출할 설계를 끝내려 한다. 임신 때문에 늦어진 스케줄을 만회하려고 애쓰지만, 갑자기 나타나 사업을 하자고 남편을 꼬드기는 시동생 에릭과 눈치 없이 집수리를 도와주겠다고 마음대로 집을 들락거리는 레지, 흑인과 결혼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유모, 계속되는 수면 부족 등 끊임없는 외부의 방해 공작에 지쳐간다. <스톱 키스>와 <새틀라이츠> 사이, 연극에서 TV로, 무명 극작가에서 인정받는 극작가로 변한 것 외에도 손씨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손씨는 아이를 가진 뒤, 갑작스럽게 혼돈에 빠졌다. <스톱 키스>를 무대에 올린 1998년, 손씨는 인터뷰에서 한인이라는 정체성보다 포괄적인 사회문제와 인간관계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많은 한국계 작가나 감독들이 한인 또는 이민문화에 대한 내용을 작품에 넣는데, 당신은 어떤가”라는 질문에 “난 내 자신을 미국인으로 생각하지, 한인으로 국한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 뒤 자신의 ‘뿌리’에 눈길이 갔다. “내 남편은 백인이다. 그런데 임신 중 아이가 옆으로 길쭉한 내 눈을 닮았으면 했다. 그런 내 자신에 놀랐다.” 극중 니나처럼 부모에게 한국 문화나 언어를 배우지 못한 손씨는 “과연 내 자식에게 생김새 외에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문화(또는 뿌리)로부터 단절된 이들의 이야기 <새틀라이츠>가 탄생했다. 오씨가 솔직한 조언을 한 2~3년 뒤, <새틀라이츠>를 완성한 손씨는 역시 ‘TV 직장’을 갖고 있는 오씨에게 주인공 역을 제의했다. 오씨는 TV 시리즈 촬영이 쉬는 사이 짬을 내어 ‘휴가 같은’ 기분으로 손씨의 작품에 참여했다. <사이드웨이>의 감독이자 남편인 알렉산더 페인과 지난해 이혼한 오씨는 니나 역을 위해 아이가 있는 친언니 그레이스를 참고했다. “이번 연극이 꼭 엄마가 되기 위한 극기훈련 같았다”는 오씨는 “이 연극은 이민가정 출신들이 겪는 인종차별이나 정체성의 문제는 물론, 미국에서의 ‘가족’을 재정의하고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새틀라이츠>는 <그레이 아나토미>의 세 번째 시즌 촬영이 시작되는 오씨의 스케줄에 맞춰 7월2일까지 한정 공연으로 끝났다. 홍보 담당자에 따르면 손씨는 <새틀라이츠> 공연 중 둘째아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고. <새틀라이츠>를 낳은 계기가 된 첫아이에 이어 둘째아이는 어떤 작품을 직조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잘리지 않는 ‘주인공’ 할래요”
산드라 오와 ‘원 온 원’ 팬과의 대화
산드라 오는 TV <그레이 아나토미>의 크리스티나 양 역으로 제58회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부문 여우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시상식은 8월27일). 1993년 캐나다 TV영화 <에블린 라우의 일기>로 데뷔한 그는 미국 시리즈 <알리스>와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사이드웨이> 등에 출연했다.
산드라 오는 <새틀라이츠> 공연 기간 중인 6월19일 아시안 아메리칸 비영리 문화단체 ‘아시안 시네비전’이 마련한 공개 인터뷰 ‘원 온 원’에 나와 팬들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한국인에게는 ‘한인 배우의 호프’처럼 비치는 그녀는 인정을 받은 뒤에도 어처구니없는 차별을 겪기도 했다. 그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듣는다.
연극 <새틀라이츠>에 출연 중인데, 연극무대에 선 느낌은.
= 사람들이 내가 즉흥연기 시어터 그룹 출신이란 걸 잘 모른다. (웃음) 필름은 영원해서 좋고, 무대는 매일 공연하면서 작품과 함께 성장할 수 있어서 좋다. TV가 가장 어렵다. 캐릭터를 소화할 시간이 거의 없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대본 외우기도 힘들다. 그렇게 2년을 보내니 TV 시리즈 휴지 기간에 하는 이번 공연이 일이란 생각보단, 편안한 안식처 같다.
소수계 연기자로 겪은 어려움이 있다면.
= <투스카니의 태양>을 끝낸 뒤였는데, 그 배역과 비슷한 역으로 오디션을 본 적 있다. 제작자가 오디션은 다 좋은데 또 같은 역으로 쓸 수 없다고 했다. 이해가 안 가더라. 새뮤얼 잭슨이었다면 “전에 경찰 역(또는 범죄자)을 했으니, 이번 작품엔 안 되겠다”고 했겠나.
마음고생이 컸을 텐데, 부모님이나 가족이 정신적으로 도움이 됐는지.
= 내 부모님은 연기생활을 무척 반대하셨다. 그래서 제작자가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큰 상처가 되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부모님부터가 내 성공을 믿지 않았으니까. 그런 부모님 앞에서 당당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다른 누구의 승인이나 동의도 필요하지 않았다.
<사이드웨이>나 <그레이 아나토미>의 성공으로 많은 작품들이 들어올 것 같은데.
= <사이드웨이>는 널리 알려졌지만 내 지명도가 높아지진 않았다. <사이드웨이> 뒤 1년에 3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모두 저예산이었다. 그해 20일밖에 일하지 못했다. <알리스> 뒤 다시는 TV 연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레이 아나토미>에 출연했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연기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줬고, 할리우드에 날 알릴 수 있는 기회도 됐다.
제작이나 시나리오 집필에도 관심이 있나.
=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연기뿐이다. 작가나 프로듀서가 되고 싶진 않다. 나이가 들면 제작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무명 시절처럼) 편집 중에 삭제될 수 없는 ‘주인공’을 더 하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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