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회한도 희망도 없이 현재를 버텨 나가라

운영자 2009.01.23 16:47:18
조회 1745 추천 1 댓글 2

 ‘주역’은 ‘무망(无妄)’괘를 통하여 미래에 대한 과도한 계산이나 잔꾀를 부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무망’이란 거짓이 없고 진실된 자세를 의미한다. 그런데 ‘无’는 무(無)요, ‘妄’은 망(望)과 통하는 것이므로,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기대와 예정, 속셈, 계략을 버리고 되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이 ‘무망(无妄)’괘의 정신이야말로 역(易) 전체의 주제를 뭉뚱그려 함축하고 있다. 언뜻 보면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비슷한 의미로도 해석되지만, 무조건 현재의 상황을 방관, 포기하는 자세가 아니라 현실의 여건을 ‘지성진실(至誠眞實)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시간을 무심히 흘려보내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역설적 의도’를 ‘지성이면 감천’과 결부시켜 실질적으로 활용하려는 저술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


 ‘무망(无妄)’괘에는 부질없는 의도와 미래지향적 계산을 삼가라는 뜻으로 ‘무망왕길(无妄王吉)’이란 말이 나온다. 이것을 의역하면 “무심히 나아가면 뜻을 얻고 길하다”가 되는데, 이것은 다시 “무망 행유생 무유리(无妄 行有生 无攸利, 되어가는 형세에 맡겨라. 억지로 행동하면 재해가 있어 이로울 것이 없다)”로 이어진다.


 이토록 소극적이고 비(非)진취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무망’괘인데도 이 괘의 본문 첫머리에서는 ‘무망 원형이정(无妄 元亨利貞)’이라 하였다.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상징하는 글자들인데, 이 네 글자를 다 동원한 괘는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무망(无妄)괘는 성운(盛運)의 괘가 되는 것이다.


 역경에 처했을 때 미래에 대한 부질없는 계산이나 과도한 기대를 갖는다는 것이 사태를 정반대로 악화시킬 수 있다는 실례를, 빅터 프랭클은 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주역’의 정신이나 삶의 방법론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잘 적용되는가를 실증해주는 사례다.


 “1944년 크리스마스부터 1945년 새해 사이에 우리 수용소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대량의 사망자가 나왔다. 그것은 가혹한 노동조건이나 악화된 영양상태, 또는 나쁜 기후나 새로 나타난 전염성 질환 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도리어 이 대량사망의 원인은 수용소의 죄수들이 크리스마스 때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에 몸을 의탁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도 수용소 통보(通報)에는 아무런 밝은 정보도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격심한 실망과 낙담이 죄수들을 때려눕힌 것이었다.”


 위의 예는 현재보다 미래에 지나친 기대나 욕심을 두게 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뜻하지 않은 재난을 경계시켜주는 좋은 실례라 하겠다.


 ‘역설적 의도’를 구체적 행운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단절시키는 것과 아울러 과거에 대한 회한(또는 미련)을 단절시키는 일 역시 필요하다. 역경에 처하게 됐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잘못은 자기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법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를 외치면서 “아, 그때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텐데..”라고 자책하며 “그때 내가 만약에...”를 되풀이하게 되는 회한의 시기가 있다. 세월이 지나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리게 된다면 모르겠으되, 그렇지 못할 경우 이런 식의 과거집착은 곧 울화병이 되어버린다. 이럴 때도 역시 “과거는 흘러갔다”식의 ‘무심한 달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역’은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주기 위해 자연현상이나 음양의 변전법칙 등을 예로 들어 “그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하며, 역(易)을 읽는 이(또는 역점을 친 이)의 잠재의식에서 과거를 내쫓고 일체의 자책감이나 도덕적 인과론을 내몰아버리는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은 흰색의 도화지를 만들 듯이 말이다.


 나는 한국인들의 지나친 과거집착증이 수구적 봉건윤리에 따른 문화적 쇄국주의를 불러오고, 나아가 각 개인의 정신적 불안 상태를 초래하고 있다고 본다. 출생신분이든 과거의 정신적 상흔이든 모든 것을 깡그리 잊어버릴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본능적 잠재능력의 기적적인 발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주역’은 민중들이 갖고 있는 “구관이 명관” 식의 과거집착증과 기득권자들의 수구, 복고정신을 배척한다. 그래서 혁명을 뜻하는 ‘혁(革)’괘를 만들어가지고 이를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을 함께 갖춘 성운(盛運)의 괘로 제시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역시 원, 형, 이, 정을 함께 갖춘 ‘수(隋)’괘를 만들어 과거를 잊고 새로운 변화에 따를 것을 권고한다. ‘수(隋)’괘의 대의(大意)는 “타의에 의해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따른다”는 뜻이다.


 이렇듯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과도한 계산을 근절 시켜버리고 난 뒤에 비로소 ‘역설적 의도’에 의한 운명개척의 길이 열리게 된다. ‘주역’은 역설적 의도에 의한 ‘통(通)의 상태’를 좀더 빨리 오게 하기 위하여, 아니 통(通)의 상태가 확실히 오게 하기 위하여, 보다 적극적인 암시기법을 쓰고 있다.


 ‘무심한 달관’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그것은 ‘현재 상황’에 대한 의연함으로만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나아가 미래에 대한 한가닥 미련이나 과거에 대한 보상욕구가 슬그머니 발동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희망을 완전히 멸절시킬 필요가 있다(불교의 사성제 가운데 멸제(滅諦) 역시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순전히 우리 인간의 마음의 힘에 의하여 음(陰)은 양(陽)을 부른다는 원리에 따라 통한 상태를 끌어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易)에 나오는 마지막 효사(爻辭)들은 대부분 어둡고 우울한 상징어들로 이루어진다. ‘쾌(夬)’괘에 나오는 “무호 종유흉(无號 終有凶, 부르짖어 구원을 청해봤자 결국은 흉하다)”라든가, ‘태(泰)’괘에 나오는 “성복우황 물용사 자읍고명 정인(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吝, 성은 무너져 도랑을 메운다. 싸워봤자 소용없고 대중들에게 호소해봤자 소용없다. 바른 일을 해도 궁지에 빠진다)”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인 예다. 쾌(夬)는 흉한 괘이고 태(泰)는 길한 괘인데도 불구하고 두 괘의 마지막 효사(爻辭, 주역에 있어서 한 괘를 이루는 각 효(爻)의 뜻을 설명한 글을 말함)가 비슷하다는 것은, ‘주역’의 저자가 그만큼 역설적 의도의 ‘자기 암시적 주입’에 신경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내가 추출해낸 ‘주역’의 운명대처법을 읽으면서, 미래에 대한 ‘계산’을 없애든 ‘희망’을 없애든, ‘주역’이 제시하고 있는 운명극복법이 결국은 허무주의나 현실도피주의에 그쳐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희망을 갖고 살지 말라면 결국 현재를 인내하라는 얘기요, 그것은 곧 혁명적 진보사상에 배치되는 것이 되며, 또한 미래에 쾌락과 행복에 대한 적극적 노력을 부정하는 얘기처럼 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역이 제시하고 있는 처방들은 어디까지나 구체적 행복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서 말했듯이 ‘주역’은 일종의 심리요법서이고, 운명과 싸워나가기 위한 전술서이다. 우리가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가며 종국적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질깃질깃’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황현이나 민영환처럼 자살로 순절(殉節)하는 것만이 영광이나 능사가 아니요, 안중근 의사처럼 죽을 각오로 원수를 암살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의 쾌거가 오히려 일본의 국내 여론을 부추겨 한일합방의 명분을 보다 확실하게 부여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풍이 불 때는 슬쩍 누워 바람을 피해 목숨을 지탱해나가고, 강풍이 지나가면 발딱 일어나 삶과 싸워나가는 잡초같이 끈질긴 생명력과 투쟁정신이 ‘주역’에서는 여러 가지 유연성 있는 운명 대처법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보면, ‘주역’의 보다 확실한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다.

>

추천 비추천

1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SNS로 싸우면 절대 안 질 것 같은 고집 있는 스타는? 운영자 24/05/06 - -
107 <붙이는 글> 마광수의 ‘시대를 앞서간 죄’ [68] 운영자 09.04.03 14779 55
106 운명은 야하다 [14] 운영자 09.04.02 12417 17
105 창조적 놀이정신은 운명극복의 지름길 [3] 운영자 09.04.01 4585 7
104 시대상황에 맞는 가치관은 따로 있다 [7] 운영자 09.03.30 3918 8
103 패륜범죄, 대형참사 빈발의 원인은 따로 있다 [9] 운영자 09.03.27 4935 8
101 ‘위대한 설교자’보다 ‘위대한 놀이꾼’이 필요하다 [5] 운영자 09.03.26 3886 6
100 ‘투쟁’에 의한 역사발전의 시대는 가다 [4] 운영자 09.03.25 3005 3
99 진정한 속마음이 왜곡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4] 운영자 09.03.23 3693 4
98 민심을 바로 읽어내는 것이 급하다 [2] 운영자 09.03.20 2491 1
97 상투적 도덕은 필요없다 [2] 운영자 09.03.19 3047 1
96 왜 이렇게 비명횡사가 많은가 [2] 운영자 09.03.18 3160 5
95 이중적 도덕관 탈피해야 개인과 사회가 건강해진다 [22] 운영자 09.03.17 3065 8
94 그릇된 관념에서 비롯되는 ‘집단의 병’ [4] 운영자 09.03.16 3155 2
93 현대병의 원인은 권태감과 책임감 [5] 운영자 09.03.13 3883 5
92 ‘인격 수양’ 안해야 마음의 병에 안 걸린다 [11] 운영자 09.03.12 5750 18
91 억눌린 욕구가 병이 된다 [7] 운영자 09.03.11 5602 6
90 ‘무병장수’의 현실적 한계 [5] 박유진 09.03.10 3501 3
89 인간 있는 곳에 병 있다 [4] 박유진 09.03.09 2562 3
88 이중적 의식구조를 벗어버리면 병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3] 박유진 09.03.06 2780 2
87 자유만이 유일한 해결책 [4] 운영자 09.03.05 3128 3
86 참된 지성은 ‘지조’가 아니라 ‘변덕’에서 나온다 [3] 운영자 09.03.04 2723 3
85 ‘관습적 윤리’에서 ‘개인적 쾌락주의’로 [2] 운영자 09.03.03 2797 4
84 ‘편의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 [2] 운영자 09.03.02 2388 2
83 개방적 사고에 따른 문명과 원시의 ‘편의적 결합’ [4] 운영자 09.02.26 2599 1
82 문명이냐 반문명이냐 [3] 운영자 09.02.25 2786 1
81 진리로 포장되는 ‘권위’의 허구 [3] 운영자 09.02.23 2638 3
80 원시와 문명의 ‘편의주의적 결합’은 우리를 참된 자유로 이끈다 [2] 운영자 09.02.20 2028 1
79 솔직한 성애의 추구는 운명극복의 지름길 [2] 운영자 09.02.19 2476 5
78 ‘타락’도 ‘병’도 아닌 동성애 [3] 운영자 09.02.18 3995 10
77 선정적 인공미 가꾸는 나르시스트들 늘어나 [5] 운영자 09.02.17 3026 5
76 개방사회가 만든 자연스런 관음자들과 페티시스트들 [3] 운영자 09.02.16 1630 1
75 삽입성교에서 오랄 섹스로 [9] 운영자 09.02.13 6349 1
74 ‘성적 취향’의 다양성을 인정하자 [2] 운영자 09.02.12 1358 1
73 생식적 섹스에서 비생식적 섹스로 [4] 운영자 09.02.11 2027 4
72 ‘성욕의 합법적 충족’을 위해서 결혼하면 실패율 높다 [3] 운영자 09.02.10 1852 7
71 결혼은 환상이다 [2] 운영자 09.02.09 2064 6
70 작위성 성억압은 개성과 창의력을 질식시킨다 [2] 운영자 09.02.05 1081 3
69 전체주의적 파시즘은 집단적 성억압의 산물 [3] 운영자 09.02.04 1613 2
68 쾌락으로서의 성을 부끄럼없이 향유하라 [5] 운영자 09.02.03 2129 3
67 변화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발전을 이룬다 [2] 운영자 09.02.02 1186 1
66 결국 현재의 욕구에 솔직하라는 역의 가르침 [2] 운영자 09.01.30 1480 1
65 ‘주역’을 아는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 [7] 운영자 09.01.28 2621 5
회한도 희망도 없이 현재를 버텨 나가라 [2] 운영자 09.01.23 1745 1
61 ‘역설적 의도’로 막힌 세상 뚫어보자 [3] 운영자 09.01.15 1606 5
63 쾌락주의에 따른 동물적 생존욕구가 중요하다 [3] 운영자 09.01.19 1547 2
62 음양의 교화(交和)가 만물생성의 법칙 [2] 운영자 09.01.16 1215 1
60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 지닌 동양의 민중철학 [2] 운영자 09.01.14 1165 1
58 궁하면 변하고, 변하다 보면 통한다 [2] 운영자 09.01.09 1734 3
57 햇볕이 뜨거울 때 우산을 쓰면, 신기하게도 비가 내린다 [2] 운영자 09.01.08 1180 1
56 잠재의식과 표면의식의 일치로 얻어지는 생명력 [4] 운영자 09.01.02 1581 2
123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