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 민간인들까지 죄다 산제물로 내다바친 악마가 할 법한 80% 인신공양 프로젝트를 시행한 에렌이 욕먹어도 쌀까? 아니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민간인들 다 죽여버리고 눈앞에서 친하게 지낸 마레인 아저씨들까지 죄다 죽인 적병 한 두명 살해한 세뇌된 소년병인 가비가 욕먹어도 쌀까? '가비 브라운'이라는 캐릭터가 없었으면 이야기의 깊이에 진지함이 사라져서 긴장감도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암울해져가는지 무심결 잊어가고 있었을 거야.

가비가 니콜로에게 "사샤가 빼앗아간 소중한 사람들"이라 말한 그 아저씨들은 그것도 단순한 이웃집 아저씨들도 아니고 마레군 정체를 통틀어봐도 엘디아인에게 눈에 띄게 친절과 아량을 베푸는 마레병인데, 저렇게 진심으로 가비를 지키려했던 사람들임. 마레군의 그로스 같이 페이 같은 어린 소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개들에게 산제물로 바치는 쓰레기 말종이 있는데 저 정도의 군인이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지. 크루거도 복권파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페이의 죽음을 방조한 책임이 있음. 저 아저씨들이 그로스 같았어 봐.

조피아와 우도, 팔코 일행과도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던 아저씨들이고. 가비 입장에선 그만큼 특별한 은인들인데 자기고 누군지도 모르고 난생 처음 보는 '파라디 섬의 악마'에게 아저씨들을 잃었으니 딥빡한 거지. 참고로 사샤는 가비가 처음으로 얼굴을 1 대 1 마주친 파라디 섬의 엘디아인임.

동시에 처음으로 '악마'가 아니라 '카야에게 있어 따뜻한 언니. 전쟁만 아니었어도 친하게 지냈을 언니'로 인식이 뒤바뀐 사람이고.

에렌도 있지만, 그건 거인으로서의 모습이었고 인간의 모습은 본 적 없음. 사샤의 얼굴을 보고 난 뒤였지. 에렌은 처음부터 끝까지 최악의 원수지만 사샤는 갈수록 카야와의 만남을 통해 재평가하게 된 게 차이지. 인간의 모습이든 거인의 모습이든 파라디 섬의 악마건 아니건 에렌은 가비에게 최악의 악마로 각인된 셈이고. 가비가 에렌처럼 자라지 않고 사샤 같이 자라주니 다행인 셈. 오히려 124화에서 저런 천인공노할 악마를 상대로 "이왕 땅 고르기로 파괴할 거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죽이지 말고, 세계 군사시설만 없애달라"고 요청하고 대화를 시도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임. 다른 때였으면 증오만 더욱 커지고 에렌을 죽이려고 남았을 텐데.

가비는 그걸 환기시킴으로써 밸런스를 맞추는 데 성공하고 더 나아가 무지에 처한 현대인이 진실의 딜레마를 마주하고 각성해 '화해와 용서'와 에렌도 예거파도 심지어 마레군도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절대 이루지 못할 '증오와 폭력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인종을 초월한 자유로운 인간애'이라는 궁극적인 성장의 테마를 이뤄냈다. 사쿠라 아야네도 가비라는 캐릭터를 정확히 잘 이해하고 해석했음. 캐릭터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나 이입력, 애정이 없으면 저렇게까지 전율이 일게 하는 실감 나는 명연기를 하지 못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