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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재업] You're you. 05

u=u(14.39) 2019.12.20 23:24:10
조회 367 추천 31 댓글 5
														

05





  -심심해! 일이 그렇게 좋아? 



  홀로 있는 집무실에 어린 아이가 떼쓰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눈 앞의 서류에 집중하려 애썼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나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이 빌어먹을 환영의 정체가 대체 무얼까 생각해봤다. 이내 생각이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사람 무시하니까 재밌어?



  저건 그냥 '나'였다.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내가 버리고 짓밟았던, 추악하고 더러운 '나'.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며 절대 만족하는 법이 없는 탐욕스러운 '나'. 나는 그런 '나'를 싫어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어쩌면 이건 벌인지도 몰랐다. 내가 '나'를 증오한 만큼, '나' 또한 나를 괴롭히는 것일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에 대한 연민이 작게나마 자리잡으려...



  -안나의 마음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아. 무려 13년 동안 무시만 당했는데 지금 너한테 하는 거 보면 안나는 천사인 게 분명해! 그치?

'그래, 안나는 천사야! 넌 악마고!'



  욕지거리가 나올뻔한 걸 간신히 참는 대신 책상을 내리쳤다. 역시 '나' 따위에게 연민 같은 건 사치였다.



  "폐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밖에 있던 카이가 큰 소리에 놀랐는지 급하게 들어왔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안나는 지금 뭘 하고 있죠?"

  "혼자 방에 계십니다."

  "안나를 불러와줘요. 그리고 다과랑 초콜렛도 부탁해요."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나를 괴롭히던 '나'는 안나가 오자 조용해졌다. 일에 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불안해지면 더 자주 나타나는 것 같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나가 곁에 있으면 거의 나타나는 일이 없었고 나타나더라도 조용히 안나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사라지곤 했다. 지금처럼. 마음이 놓인 나는 그제야 마주 앉아있는 안나에게 편하게 말을 붙였다.



  "참, 며칠 전에 숙부님이 다녀가셨다면서?"



  갑자기 사레가 들린 듯 몇 번인가 기침을 콜록거린 안나가 말을 이었다.



  "으응, 그냥 안부인사 하고 가셨어. 언니는 많이 바쁜 것 같으니까 내일 있을 국무회의에서 보자고……. 그나저나 언니랑 같이 차 마시는 건 처음이다. 어릴 땐 같이 소꿉놀이 하면서 흉내만 냈었는데, 이제 진짜 차를 마실만큼 커버렸네."



  말꼬리를 늘이거나 갑자기 화제를 바꾸는 건 안나가 거짓말을 할 때나 무언가를 숨기려 할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뭔가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먼저 말해 줄거라 믿었으니까. 일이 그런 식으로 틀어질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




  "오늘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안건입니다."

  "말씀하세요, 대공."

  "안나 공주님에 관련된 것입니다."



  의자 팔걸이를 움켜진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제 뭔가 이상했던 안나의 반응이 떠올라 마음에 걸렸다. 



  "안나 공주님이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청천벽력 같은 발언이었다. 내게 일말의 언질도 없이 갑자기 왜? 웨일즈 대공은 지난 3년 간 섭정을 하며 나를 대신해 아렌델을 잘 이끌어준 분이었다. 또한 내게는 좋은 숙부이자 스승 같은 존재였다. 



  "제가 아렌델의 군주로 즉위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벌써부터 후계자를 논할 필요는,"

  "사람 일은 어찌 될지 한치 앞도 모르는 법입니다. 선왕폐하께서도 그리 한 순간에 가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현재 왕위계승 1순위인 안나 공주님이 후계자수업을 받으심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그의 주장은 논리적이며 반박할 여지 없이 합당했다. 감춰진 속내를 파악할 수 없어 답답한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순수하게 아렌델을 위해 이러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저의가 있는 것일까. 왕의 자리는 그랬다. 나를 드러내서는 안되며 끊임없이 타인을 의심해야만 하는 자리. 피를 나눈 형제든 친척이든 그런 건 상관없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는 그저 타인일 뿐. 이런 자리에 안나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있는 한 안나가 이 자리에 앉을 일은 없을테지만, 후계자 수업이라는 것 자체가 왕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순수하고 솔직한 안나와는 극명히 대비되는... 이런 일로 안나를 옭아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안 됩니다. 안나는 이제 겨우 열여덟입니다. 너무 어려요."

  "잊으셨나 봅니다. 폐하께서도 겨우 열여덟에 후계자 수업을 받기 시작하셨습니다."

  "... 안나는, 그 아이는,"



  젠장. 답답함에 눈을 감았다. 반박할 만한 어떠한 이유도, 핑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방도를 찾아야 한다. 내가 왕이라는 이유로 그 아이에게까지 부담을 짊어지게 할 순 없었다. 이 굴레에 속박되는 것은 나 하나면 충분했다.



  "혹여 두려우신 겁니까? 

  "... 무엇이요."

  "안나공주님이 폐하께서 앉아 계신 그 자리를 위협할까, 그게 두려우시냔 말입니다."



  말도 안되는 그의 도발에 나도 모르게 차가운 비웃음이 서렸다. 방금의 발언은 왕족모욕죄로 목이 날아간다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위험한 도박을 해서라도 그가 얻고자 하는 게 대체 무엇일까. 당황하지 말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역심이라, 역심……. 내가 그 생각을 못했군."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숙부는 진심으로 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귀족들의 눈에 이제 갓 성년이 된 햇병아리 여왕은 좋은 먹잇감으로 보일 것이다. 그게 걱정이 된 그는 안나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내세워 교육을 받게 하고, 정치적으로 나를 돕게 하려는 것이다. 숙부에게 다른 저의가 없다는 전제만 성립된다면, 완벽한 가설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안나가 정치적으로 표면에 나서기 시작하면 그 아이까지도 귀족들이 먹잇감으로 노리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자신들의 발걸음에 거슬린다면 왕의 동생까지도 역모로 몰아 끌어내린 후 잔혹하게 뜯어 먹을, 하이에나 같은 부류였다, 그들은. 안나가 후계자 수업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위험에 노출된다는 의미였다.



  아니 어쩌면, 숙부는 안나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간과한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이 나라를 위해, 왕의 안위를 위해, 안나가 위험해지거나 혹여 희생 당하는 비극으로 이어지더라도 '왕권을 위해 이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이런 생각까지 해가면서 상대의 수를 내다봐야 하는 이 자리가 싫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받은 아이의 순수함이 무참히 부서지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끌어야 했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정당한 반대사유를 찾을 시간. 



  "좋다. 대공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니, 나도 한 발 물러나도록 하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당사자인 안나공주와 내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겠다. 결정은 그 후에 내리도록 하지."



  적어도 이 회의만 넘기고 나면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의 이런 간절함은 처절히 짓밟혔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



  너무나도 익숙한, 이 회의실에서는 들릴 수 없는,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절대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 고막을 타고 들어온 소리는 그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시켜주었지만, 나는 차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아니길 바랐다. 



  또각.


  또각.


  또각. 



  타들어가는 내 속을 조롱하듯 청아한 구두소리가 울리고.



  "후계자 수업을 받겠습니다."



  내 시야에... 안나, 네가 들어왔다.




*





  "아렌델을 위한 일입니다. 제게도 기회를 주시지요."



  나를 따라 가시밭길을 가겠다는 너를 보며, 너에게 내가 미덥지 못한 언니였음을 인정했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너를 막을 힘조차 없음에 좌절했다. 좌절을 곱씹을 새도 없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왕임에 몸서리쳤다.



  "알겠다. 그대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안나 아렌델은 제1 왕위계승권자로서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을 것을... 명한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굴복하고 내 전부인 너를 가시밭길로 끌어들여야만 하는 이 비참함을, 너는 알까.



  "황공하옵니다, 폐하."

  "... 웨일즈 대공."



  그러나 지금은 감정에 허우적 거릴 때가 아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앞으로 네가 걸어갈 길에 있는 가시덤불을 모조리 걷어내는 것이다.



  "조금 전 대공이 말했던 '역심'에 관해 할 말이 있는데."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된다. 힘을 집중하며 손을 뻗었다. 내 손길을 벗어난 얼음결정들이 빠른 속도로 커다란 덩어리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숙부의 목 언저리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숨소리조차 멎어든 고요한 회의장에 공포가 덧씌워졌다. 경악으로 물든 너의 청록빛 눈동자를 애써 외면했다.  



  "나는 그대들 중 그 누가 역심을 품더라도 아무 상관 없다. 허나, 하나뿐인 내 동생을 그 불온한 계획에 끼워넣으려 한다면!"



  나에게 집중된 수십 쌍의 눈들에 공포가 담겼다. 대관식 날의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이 상황은 어째서 또 생경하게 다가오는걸까. 그날 마주했던 군중의 눈빛을 단 한시도 잊은 적 없었다. '괴물! 마녀!' 귓가에 웅웅대는 단어들이 잔혹한 비수가 되어 꽂혔다. 지금 저치들의 눈 또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여왕은 괴물이다! 제 숙부에게도 칼을 겨누는 마녀다!' 내가 심어준 공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거꾸로 나를 압박해왔지만 견뎌내야 했다.



  "나를 능멸한 죄로 간주하여 그 즉시 처단할 것이다." 



  하이에나 같은 그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공포를 이용해야 하기에. 또한 공포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서 기인할수록 더 큰 효과를 발하기 마련이다. 주먹을 쥠과 동시에 얼음송곳이 위협적으로 깨지면서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 손으로 직접."  



  회의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정적에 잠겼다. 잠자코 기다렸으나 공기까지 얼어붙기라도 한 듯 아무도 이 정적을 깨지 못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희미한 만족감이 감돌았다.



  "오늘은 몸 상태가 좋지 않군. 이만 회의를 마치도록 하지."



  눈치를 보던 귀족들은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점으로 허둥지둥 회의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숙부와 안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나감과 동시에 나는 왕좌에서 일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서 있는 숙부의 앞에 섰다. 나보다 몇 뼘은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숙부님."


  당신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닌, 당신께서 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왕인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과입니다.


  "당신께서 최선이라 생각한 것을 행하셨듯, 제게도 이게 최선이었으니까요."


  또한, 이는 숙부님께 드리는 경고입니다. 아무리 아렌델과 저를 위한 것이라 해도 안나에게 부담이 가해질 일을 하신다면, 그때는 제가 무슨 짓을 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노련한 그는 아마 내 의중을 끝까지 다 읽어냈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표정에 아무 변화도 드러내지 않았고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예, 폐하-라는 말과 함께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후 나갔다. 이윽고 나와 안나만이 남았다. 



  "... 엘사."



  안나의 부름으로 인해 한껏 경직돼있던 분위기가 깨졌다. 깨진 틈 사이로 두려움이 스미기 시작했다.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아이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샌가 나타나 창틀에 앉아 있는 허상이 내게 묻는다.



  -안나가 부르잖아. 왜 등만 보이고 서있어?

  '두려워서. 저 아이 눈에도 내가 괴물이고 마녀일까봐. 그래서 내쳐질까봐.'

  -그건 안나를 위해서 한 일이었잖아.

  '그 아일 위한 거였지만, 그 아이가 원한 건 아니었지. 이건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할 짓이야.'

  -버림받을까봐 두려워? 그럼 이해해달라고 부탁해봐. 안나는 착한 아이니까 네 부탁은 거절 못 할거야.




  나 하나 편히 숨 쉬자고 안나를 이용하고 기만할 생각을 하다니. '나'는 끝끝내 추악하기만 한 괴물일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안나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도 이런 끔찍한 나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커졌다. '나'에게 말했다.



  "제발 꺼져."



  등 뒤로 희미해져 가는 너의 발걸음에 나는 무너졌다. 그리고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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