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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고어]Praying prey 29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2.23 21:5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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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불이 모두 꺼지자, 엘사는 몸을 크게 움츠렸고, 멜리사는 엘사를 감쌌다.


"엘사, 멜리사. 괜찮아?"


안나가 엘사와 멜리사를 안았다. 엘사는 벌벌 떨고 있었다. 멜리사는 엘사만큼은 아니나, 그래도 어린 아이였고, 이 상황이 조금은 무서웠는지, 볼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안나는 멜리사의 눈이 푸르게 빛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멜리사, 잠깐만. 언니 봐봐."


멜리사는 정확히 안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거 보여? 지금 손가락 몇 개 핀 거 같아?"


안나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멜리사는 엘사를 감싸면서도 안나의 손가락을 눈으로 좇았다.

"세 개... 그... 다 보여. 완전히는 아니지만, 안나 언니가 어떤 표정인지도 볼 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멜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나는 엘사의 상태를 확인했다. 엘사의 눈도 푸른색으로 빛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엘사? 언니 얼굴 봐봐. 괜찮을 거야."

불안했지만, 엘사의 눈도 옅은 푸른색을 띄고 있었다. 안나가 볼을 잡지 않았음에도, 엘사 또한 멜리사처럼 안나의 눈을 마주했다.

"예쁘네, 우리 동생들. 눈에 예쁜 꽃이 피어있네?"

안나가 두 동생의 볼을 문질렀다. 엘사와 멜리사의 경직이 풀어진 것을 확인한 안나는 암순응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몇 초 뒤, 어느 정도 시야 확보가 되자, 안나는 허공을 더듬어 선반 위의 옵스코어 헬멧을 썼고, 야투경을 내려 작동시켰다. 다시금 청록색의 원으로 둘러진 세상이 안나를 맞이했다. M&P 소총과 마취 권총을 장비한 안나는 캐리어 파우치에 mp5가 아닌 M&P 소총의 탄창이 장비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 다음 트루돈 나이프를 군화 속에 끼워 넣었다.

"계획이 뭡니까? 아무래도 당신 친구들이 온 것 같은데...아니, 잠시만."

랩터는 단안식 야투경을 끼고 커튼을 조금 거둔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프, 아니 리트리버, 잠깐 이리 와봐요."

랩터가 손짓했다. 안나는 엘사와 멜리사를 침대에 앉혀 놓고 랩터가 있는 창가로 다가왔다. 창가에 가까워질 수록, 영어와 알 수 없는 언어, 그리고 공기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진동했다. 안나가 가까스로 창문 밖을 보았을 때, 이미 밑은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한 쪽이 당신 친구들인 건 확실한 모양인데."

랩터의 말이 맞았다. 뒤통수와 어깨에 붙여져 있는 야간전 식별 패치, 그리고 선이 세개 그어져 있는 부대 패치는 안나가 있었던 SAD 산하의 블랙라인의 것이었다.

"반대편 쪽도 영어를 쓰는데.... 발음이 현지 발음이 아니에요."

랩터의 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일단 안나도 반대편의 적의 국적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7야수부대와 비슷한 소음기를 낀 AK 계열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지만 보호장비는 안나가 보았던 야수부대의 것이 아니었다. 두 세력은 각자가 타고 온 밴들을 방호벽 삼아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직 호텔로 들어오는 적은 없었다.

"리트리버, 어떡할 거예요. 교전할 겁니까? 아니면..."

"일단 대기해요. 지금 저들이 서로 싸워야 저희에겐 싸워야 할 머릿수가 적어져요."

안나는 들키지 않게 몸을 숙여 창밖을 내려보며 M&P 소총의 장전바를 당겼다. 그 때, 블랙라인의 대원이 쏜 AR계열 소총에 반대편 미상의 적이 맞아 비명을 질렀다. 러시아어가 아니었다.

"...중국어 같습니다."

랩터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도 RO992의 장전바를 당겨 약실을 점검했다.

"언니, 밖에 누구 있어요...?"

멜리사의 팔에 감싸진 엘사가 말했다.

"으응, 쉿. 엘사, 멜리사, 지금부터 우린 조용히 얘기해야 해. 밖에 엘사와 멜리사를 데리고 가려는 나쁜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조용히 해야 해. 들어줄 수 있지?"

안나가 엘사와 멜리사를 보며 손가락 하나를 입에 가져갔다. 엘사와 멜리사도 안나와 똑같이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었다. 다시 창 밖을 주시한 안나는 지금 막 실패한 전략을 어떻게 보완할지 머리를 굴렸다. 두 세력 모두 비등비등하게 싸우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 쪽 세력이 불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블랙라인 대원 두명이 모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진입을 하려는 의도인 모양이었다. 안나는 랩터에게 마취형 권총을 건넸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전 22구경으로 어떻게든 비살상으로 제압할 거예요. 랩터 당신은 제가 제압한 블랙라인 대원들에게 마취총으로 재워 주시고요. 마취탄들은 가방에 다시 넣어놓았으니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겨주세요. 시간이 없어요. 후안을 피신시켜요, 빨리!"

안나가 침대를 흘끔 보고 문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랩터는 이미 밖으로 나가 정전이 되어 경악에 질린 후안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후안 씨,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아마 이 건물에 총알이 좀 많이 튈 겁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죄송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모든 손실들은..아.."

랩터가 머리를 긁었다. '아가씨' 에리얼에게 청구한다고 하면 그 발랄하기 그지없는 아가씨도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했다. 리트리버는 분명 전 소속 블랙라인들을 비살상으로 제압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청구해야 할 곳은 블랙라인, 즉 CIA쪽에다 하면 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랩터는 후안을 5층으로 끌고 올라갔다. 후안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사내의 모습에 항의하려 했지만, 그가 들고 있는 총을 보고 입을 열을 수 없었다.

"401호실에 머무르는 여자분이 미국 방첩기관 소속입니다. 일이 끝나면 그 여자분이 연락처를 알려드릴 테니, 그쪽에다 청구하시면 됩니다. 아마 모두 배상해줄 겁니다. 어쩌면 거액의 위로금도 안겨드릴 수 있을 테고요. 후안 씨,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냥 당신이 머무는 집 안에서, 잠자코 쥐 죽은 듯이 있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모두 좋게 끝날 수 있어요."

"날 인질로 삼으려는 거요?"

"저기 아래층 여자분은 인질로 잡겠지만, 전 인질 같은 거 모릅니다. 총알이 인질을 피해갑니까?"

랩터가 윽박을 지르자, 후안은 몸을 떨면서 조용히 부엌으로 가 몸을 감췄다.


랩터가 4층으로 다시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안나는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안나의 방탄복을 엘사가 꼭 잡았다.

"엘사, 안나 언니는 나가 있어야 해. 그러니까 조금만 참자.. 응?"

멜리사가 엘사를 말려보려 했지만, 엘사의 작은 손은 안나를 원하고 있었다.

"언니... 잠시만요, 진짜 잠시만요."

안나의 시선을 돌린 엘사는 두 눈을 감고, 바닥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엘사? 눈보라는 여기서 만들면 안 되는데..."

"그게 아니예요...잠깐만요..."

바닥에 조금씩 눈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사가 평소 만들던 눈더미가 아니었다. 점점 모습을 갖춰가며 '건축'되어가고 있는 형상들은 이윽고 작은 디오라마를 연상케 했고, 그것은 안나 일행이 머물고 있는 모텔과 밖에서 일어나는 교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 디오라마들은 거의 사실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엘사, 이건 뭐니?"

시간이 없었다. 안나는 문 앞에서 대기중인 랩터를 향해 3층에서 대기하라고 준비했고, 랩터는 곧 문에서 모습을 감췄다.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느껴져요. 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게.... 완벽하진 않아도... 움직임 같은 게 눈에 보여요. 잘 모르겠어요...그냥..."

엘사가 말끝을 흐렸다. 어둠 속의 푸른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디오라마 속 중국 세력은 이미 거의 전멸 상태였다. 블랙라인 요원들이 모텔로 뛰어들어와 입구에서 차례로 대기했다. 엘사의 추측성 능력으로 구현된 거지만, 어느 정도 참고해 볼 가치가 있었다. 심지어 안나와 랩터의 움직임을 가진 눈 인형도 있었다. 랩터는 3층 303호실에서 992소총을 C그립(총몸을 굽어 잡는 파지법)을 취한 채로 거치한 뒤 복도 끝 계단을 겨누고 있었다.

"멜리사, 엘사를 부탁할게."

"걱정 붙들어 매. 엘사하고 안나 언니는 내가 지켜줄 거야."

안나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엘사, 고마워. 덕분에 도움이 되었어. 엘사가 도와주니 든든한걸?"

안나는 두 동생을 침대에 눕힌 다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방탄 백팩을 멜리사 옆에 두고, 방탄복들을 이불 위와 두 동생의 머리에 비스듬이 기대 올려놓았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주렴. 금방 올게."

안나가 엘사와 멜리사에게 인사를 남긴다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상황은 최악에서 차악으로 넘어가 있었다. 안나는 M&P 소총을 겨누며 3층으로 내려갔다. 백업 사이트로 겨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서 준비하시죠.>

랩터가 안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는 304호 쪽에서 대기할게요.>



<어느 정도는 맞아요. 당신은 마취총으로 기절시켜만 주세요.>

랩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라인은 안나와 거의 비슷한 훈련과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즉, CIA 시절의 방식으로 대응했다간 되려 사살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약간의 도박을 할 필요가 있었다. 적들이 예측하지 못할 방식을 생각해야 했다. 곧 안나의 머릿속에서 걸어볼 만한 도박이 하나 떠올랐다. 위험을 수반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능성을 더 높일 방법이 없었다. 안나는 몸을 최대한 숙이고 총구를 적의 복부 쯤 되는 곳의 허공을 향해 올려 겨냥했다. 모텔 밖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상황이 정리된 것 같았다.




복도에는 랩터와 안나가 죽인 숨소리, 그리고 총의 잔음만이 들렸다. 밑에서 미세하게 문고리 돌려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모텔에 투숙하고 있는 사람은 안나 일행과 랩터가 전부였기에, 그들 입장에선 합리적이나 안나 입장에선 시간낭비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튀어나갔다간 살상을 전제로 할 적과 비살상을 전제로 하는 안나와는 임해야 할 격차가 있었다. 안나의 22구경은 블랙라인이 소지한 AR의 5.56mm보다 살상력이 떨어지지만, 머리에 맞으면 탄속이 줄어들어 두개골 안에서 뇌를 휘저을 수도 있는 기괴한 탄종이었다. 그러기에 부상으로 그칠 수 있는 팔다리를 사격하거나, 플레이트 캐리어를 맞춰 충격을 준 뒤 근접해서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그리고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낡아빠진 목재 계단의 삐걱거림은 감출 수 없었다. 안나와 랩터는 가만히 있어 낼 수 없는 소리였다. 미세하게 적이 인터컴으로 소통하는 소리가 귓가에 걸렸다. 2층까지 점검된 모양이었고, 3층으로 진입하려는 것 같았다. 삐걱거림이 가까워질수록 안나의 관자놀이는 더더욱 빠르게 뛰었다. 땀이 눈에 젖어 따가웠다.


'여지껏 잘 살아남았잖아, 안나 브라이트, 할 수 있어.'


안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초소의 계단에서 총에 맞아 굴러도, 연구소 정문의 부비트랩에 걸려도 살아남았다. 추격전에도 살아남았고, 아파트에서의 수류탄에도 살아남았다. 어디까지 이 운이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적어도 여기서 죽어야 할 운명을 밟으면 안 되었다. 안나는 총을 약간 기울였다. 보조 사이트가 없지만 지근거리의 사격에선 오히려 지향에 가까운 사격이 더 도움이 되었다.


어느덧 블랙라인은 안나가 숨은 코너 바로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이윽고 적의 총구가 모습을 보였다. 안나는 아주 조금의 시간을 더 기다렸다. 적이 총구를 돌리는 그 때, 안나는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 적의 복부에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겨우 페트병 두드리는 소리가 두 번 들리면서 적이 주춤했고, 안나는 보기 좋게 개머리판으로 적의 머리를 내리쳐 복도로 엎어뜨렸다. 랩터는 그걸 놓치지 않고 마취총을 발사해 첫 번째 희생양의 군복 바지에 마취탄을 박아넣었다.


한 명이 끝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안나는 총을 던져 두 번째 적의 시야를 흐뜨렸고, 홀스터에서 cz 권총을 바꿔 들어 방탄복에 두 발 갈겼다. 하지만 적은 잠시 주춤할 뿐이었고, 이내 안나의 총을 들고 있던 AR로 쳐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방탄복에 감싸진 안나의 가슴에 총알 두 발이 직격했다.


송곳으로 찌른 듯한 통증에 안나는 뒤로 엎어졌지만, 떨어뜨리지 않은 CZ권총으로 즉시 그의 다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자 안나는 재빨리 가 총을 들었던 오른쪽 어깨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1초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적의 목에 마취탄이 박혔다. 세 번째 적이 계단에서 올라와 안나에게 총을 발사하려고 했고, 안나는 바닥에 떨어진 M&P를 주워 다리에 발사했다. 균형이 무너진 그가 계단 아래로 몸이 굽어졌지만, 이윽고 밑에 있는 다른 동료가 그를 받혔고, 네 번째, 다섯 번째 적이 한꺼번에 계단으로 진입했다.

"랩!"

안나가 일어서면서 랩터를 불렀다.

<엄호하겠습니다.>

장전한 마취 권총을 바지춤에 끼워 넣은 랩터는 한 손으로 992 소총을 거치한 채로 안나에게 복귀하란 손짓을 했다. 안나는 몸을 숙여 304호를 향해 움직였다. 그때, 벽이 무언가 부닥치는 소리와 바닥에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본능적으로 303호의 문을 열어 몸을 던졌고, 랩터는 문간으로 드러난 몸을 숨겼다. 팡 파르 소리와 함께 복도에 잠깐의 섬광이 일었다. 랩터가 다시 문에 총을 거치하려 하자, 총알이 빗발쳤다.


안나는 고개를 내밀지 않고 전자동으로 조정간을 맞춘 M&P 소총만 내밀어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를 낀 총들에서 나온 비명이 팝콘을 튀기는 소리처럼 복도에 울려퍼졌다. 저들은 절대로 지향사격을 가하는게 아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랩터가 몸을 숨긴 302호의 복도 벽에 머리 부근을 노린 듯이 집약된 탄흔들이 남아 있었다.


틱 소리와 함께 M&P 소총이 침묵하자, 안나는 탄창을 갈아 끼운 다음 장전바를 당겨 재장전했다. 그리고 섬광탄을 꺼내 핀을 뽑았고, 숫자를 2까지 센 다음 밑으로 굴려 던졌다. 몇 차례의 금속음과 함께 굴러가던 섬광탄은 이내 발광했고, 안나는 발파 소리에 맞춰 몸을 기울여 4, 5번째 적의 방탄복에 한 발 씩, 그리고 오른 어깨에 한 발씩 방아쇠를 당겼다. 두 적의 상체가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랩터는 마취총을 4번째 적의 허벅지에 맞췄고, 4번째 적은 권총을 뽑아들어 랩터에게 발사했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숨긴 랩터였지만, 총알이 만들어낸 나무 파편이 볼을 스쳤다. 피가 새어나오자, 억지로 손으로 훔쳐 닦은 랩터는 안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랩터의 눈은 안나와 바닥을 번갈아 두 번 돌아보고 있었다. 다리를 쏘라는 지시였다. 어차피 비살상이 주를 이루는 극한 도전이었다.


안나는 권총을 쏘며 다가오는 5번째 적을 저지하기 위해 똑같이 CZ권총으로 바꿔들었다. 적이 문가로 진입할 때, 안나는 손으로 총구를 쳐내려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날아오는 칼날에 안나는 그러지 못했고, 오른쪽 볼이 깊게 찢어지고 말았다. 왈칵 피가 입안과 밖으로 뿜어나왔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안나는 다친 것에 화가 나 팔꿈치로 적의 목울대를 가격한 다음 권총으로 복부를 연달아 세 번 발사했다.

적은 물러나지 않고 슬라이드를 잡은 권총의 손잡이로 안나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넘어지면서 폐에서 부자연스럽게 숨이 새어나왔다. 청록색 시야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안나의 눈 앞에 커다란 총구가 보였다. 안나는 되는 대로 팔을 휘둘러 간신히 총구를 쳐냈고, 동시에 군화에서 트루돈 나이프의 스위치를 눌러 나온 칼날을 적의 종아리에 두번 찔렀다. 마르기 시작한 젤리를 찌른 것 같은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감상을 남길 여유 따윈 전혀 없었다.


칼을 뽑아낸 안나는 권총을 다시 파지하려는 적의 팔에 한번, 그리고 어깨에 한 번 더 칼을 꽂았다. 피가 나오긴 했지만 모두 동맥을 피한 상처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부상을 방치하면 사상이라는 새로운 범주가 추가될 것이다. 401호실에서 나오기 전 엘사가 보여준 동작 디오라마에는 9명의 블랙라인이 살아 있었다. 4명이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비살상으로 제압을 이어가야 했다. 안나가 문으로 다시 나왔을 때, 992소총의 개머리판으로 4번째 적의 어깨를 내려친 랩터가 있었다. 적의 자세가 무너지자, 랩터는 마취탄을 마취 권총에 장전하지 않고 그대로 적의 어깨에 꽂아넣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랩터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4번째 적과 고전한 듯 했다. 그럴 수 있었다. 랩터는 정규 훈련을 받은 게 아닌 전직 극단주의자 단체 소속이었다. 정규 훈련을 받은 특수대원을 제압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양복의 어깻죽지가 칼에 베인 것처럼 찢어졌고, 그 사이로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남색 방탄복이 드러났다.

<아뇨, 아직 4명 남아있어요. 그 4명도 여기로 올 것 같은데....일단 쉬고 있어요. 마취 총 줘요.>

<할 수 있겠어요? 당신 상태를 봐요, 조커마냥 입이 찢어졌고 총도 몇 방 맞았을텐데.>

가슴이 욱씬거리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아무리 방탄복이 총알을 막아준다지만 고통까지 막아주진 못한다. 다음 번에 한두 발을 더 맞는다면 그 땐 그로기 상태에 빠져들어 의지없이 기절할 것 같았다.

<할... 수 있어요.>


"안 돼!"

계단 내려오는 소리와 멜리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랩터와 안나는 동시에 4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향했고, 멜리사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바닥을 두 손으로 짚었다.








90.


"갈 거야아아.....!"

"안 돼에에에.....!"

엘사는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불과 방탄복에 덮여 있고, 디오라마가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안나 언니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엘사는 언니가 '총'이란 물건에서 나온 작은 철덩이에 여러 번 맞아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작은 총에 옆구리를 맞고, 볼이 찢어졌다. 엘사는 안나를 스칼렛으로 불렀던 때, 추격전에서 한 번, 그리고 멜리사를 만날 때 한 번 안나를 잃어버릴 뻔 했다. 그 이후 멜리사와 가족이 되었지만, 섣불리 찾아오는 불안함은 떨쳐낼 수 없었다.



오히려 불안감은 극도로 증가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저 작은 건물 모형과 안나 언니, 그리고 랍터 아저씨의 움직이는 모형들이었다. 어떻게 나왔는지 능력을 발현시킨 엘사도 몰랐다. 어쩌면 안나 언니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었지만, 안나 언니의 상태는 정말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엘사는 멜리사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쳤다.


"앙나 언니가 위험해에에....."

"엘사, 안나 언니는 괜찮을 거야. 응? 봐봐, 이미 5명이나 무찔렀잖아."



멜리사가 엘사의 허리에 팔을 감고 억지로 버텼다. 멜리사는 안나 언니와 엘사를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동시에 안나의 약속도 지켜야 했다. 그러므로 멜리사가 해야 할 일은 엘사를 이곳에서 내보내면 안 되는 것이고,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였다. 멜리사는 엘사가 얌전해 보여서 좋았다고 생각했고, 나름 체력이 약할 것 같다고 느꼈다. 처음 하얀 카페 앞에서 조우했을 때, 엘사는 안나 언니에게 약간의 능력을 전해주고 바로 쓰러졌으니까. 적어도 힘으로는 엘사를 묶어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사는 멜리사의 구속을 거의 풀어내기 직전이었다. 멜리사는 얼음으로 엘사의 손을 묶어볼까도 생각했다.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이미 엘사와 멜리사 주변에 작은 소용돌이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멜리사의 스파이키 컷과 엘사의 꽈배기같이 땋은 머리가 거칠게 흩날렸다. 이렇게 시끄럽다면 엘사와 멜리사는 방 안을 위험하게 날아다닐 것이고, 적들이 엘사의 위치를 알아챌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미 알아챘는지도 모른다.


"네 사람이나 남아있잖아... 멜리사, 응? 제발 보내줘어어....."


엘사가 다리를 바동바동 움직였다. 멜리사는 어쩔 수 없이 구속을 풀어줬다.

"엘사, 잠깐잠깐."

그대로 문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 엘사를 멜리사가 불러세웠다. 엘사는 울면서 멜리사를 돌아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멜리사는 속으로 엘사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내가 갈게."

"멜리사가 다치면 어떡해..."

엘사는 걱정했다. 멜리사는 씁쓸히 웃었다. 깃털같이 가벼우면서도 웃음이 어울리는 아이. 그리고 누구보다 남을 위해 살아가려는 아이. 참 신기한 아이였다. 정작 자신은 지쳐가고 있었음에도, 남을 생각하는 그런 아이를 멜리사는 보았다.

"괜찮아 엘사. 난 이런 거 겪어 봤어. 그러니까 엘사는 나 같은 짓 하지마."

"무슨 짓....?"

"아무튼 있으니까... 여기 잠자코 있어줘. 안나 언니랑 같이 금방 돌아올게."

엘사가 멜리사의 손을 잡았다. 떠나보내기 싫은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꼭 돌아와야 해... 약속."

엘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멜리사는 그것이 유치하다는 것을 알지만, 엘사에겐 진심이란 걸 알았기에, 흔쾌히 붕대를 맨 손으로 약속을 걸었다.

"진짜 꼭...."

"알았어, 알았어, 오면 사탕 다 너 줄테니까, 잠자코 기다리셔!"

멜리사가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풀고 문 밖을 뛰쳐나갔다. 스르르 문이 닫혔고, 엘사는 자신이 만든 디오라마를 내려다 보았다. 작고 검은 눈송이 하나가 복도를 달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안돼에에에...}

멜리사의 목소리가 물먹은 것처럼 흐릿하게 들렸다.

"멜리사... 멜리사아.... 언니이...."

눈보라는 어느새 모습을 감췄다. 엘사는 안나의 부탁대로, 그리고 멜리사의 약속대로 방 안에서 나가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멜리사마저 다친다면, 그 때는 문 밖으로 나가야 함을 알고 있었다. 달콤한 사탕보다, 따뜻한 두 사람이 더 중요했다.






복도를 달리는 멜리사는 처음 사람을 죽였던 때를 기억했다. 우발적이었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연구원이 하려던 짓은 죽어 마땅했다. 그 때 쓰게 된 가면은 마치 얼굴에 달라붙은 것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안나와 엘사라는 고마운 인연들이 가면을 간단히 벗겨주었다. 안나는 이미 피를 묻히고 살아왔을 터였다. 그러니 적어도, 엘사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 두려움, 그 떨림 속에서 저지른 첫 살인은 멜리사를 실성하게 만들었고 [미친년]이라는 오명을 남겨주었다. 엘사가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엘사는 언제나 하얀 아이여야 했다. 하얀 깃털이 붉게 물드는 건 보기 싫었다.



검은 깃털은 피에 젖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 9살 남짓한 멜리사는 엘사를 대신해 다시 한 번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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