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는 맞아요. 당신은 마취총으로 기절시켜만 주세요.>
랩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라인은 안나와 거의 비슷한 훈련과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즉, CIA 시절의 방식으로 대응했다간 되려 사살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약간의 도박을 할 필요가 있었다. 적들이 예측하지 못할 방식을 생각해야 했다. 곧 안나의 머릿속에서 걸어볼 만한 도박이 하나 떠올랐다. 위험을 수반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능성을 더 높일 방법이 없었다. 안나는 몸을 최대한 숙이고 총구를 적의 복부 쯤 되는 곳의 허공을 향해 올려 겨냥했다. 모텔 밖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상황이 정리된 것 같았다.
복도에는 랩터와 안나가 죽인 숨소리, 그리고 총의 잔음만이 들렸다. 밑에서 미세하게 문고리 돌려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모텔에 투숙하고 있는 사람은 안나 일행과 랩터가 전부였기에, 그들 입장에선 합리적이나 안나 입장에선 시간낭비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튀어나갔다간 살상을 전제로 할 적과 비살상을 전제로 하는 안나와는 임해야 할 격차가 있었다. 안나의 22구경은 블랙라인이 소지한 AR의 5.56mm보다 살상력이 떨어지지만, 머리에 맞으면 탄속이 줄어들어 두개골 안에서 뇌를 휘저을 수도 있는 기괴한 탄종이었다. 그러기에 부상으로 그칠 수 있는 팔다리를 사격하거나, 플레이트 캐리어를 맞춰 충격을 준 뒤 근접해서 제압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그리고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낡아빠진 목재 계단의 삐걱거림은 감출 수 없었다. 안나와 랩터는 가만히 있어 낼 수 없는 소리였다. 미세하게 적이 인터컴으로 소통하는 소리가 귓가에 걸렸다. 2층까지 점검된 모양이었고, 3층으로 진입하려는 것 같았다. 삐걱거림이 가까워질수록 안나의 관자놀이는 더더욱 빠르게 뛰었다. 땀이 눈에 젖어 따가웠다.
'여지껏 잘 살아남았잖아, 안나 브라이트, 할 수 있어.'
안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초소의 계단에서 총에 맞아 굴러도, 연구소 정문의 부비트랩에 걸려도 살아남았다. 추격전에도 살아남았고, 아파트에서의 수류탄에도 살아남았다. 어디까지 이 운이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안나는 적어도 여기서 죽어야 할 운명을 밟으면 안 되었다. 안나는 총을 약간 기울였다. 보조 사이트가 없지만 지근거리의 사격에선 오히려 지향에 가까운 사격이 더 도움이 되었다.
어느덧 블랙라인은 안나가 숨은 코너 바로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이윽고 적의 총구가 모습을 보였다. 안나는 아주 조금의 시간을 더 기다렸다. 적이 총구를 돌리는 그 때, 안나는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 적의 복부에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겨우 페트병 두드리는 소리가 두 번 들리면서 적이 주춤했고, 안나는 보기 좋게 개머리판으로 적의 머리를 내리쳐 복도로 엎어뜨렸다. 랩터는 그걸 놓치지 않고 마취총을 발사해 첫 번째 희생양의 군복 바지에 마취탄을 박아넣었다.
한 명이 끝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안나는 총을 던져 두 번째 적의 시야를 흐뜨렸고, 홀스터에서 cz 권총을 바꿔 들어 방탄복에 두 발 갈겼다. 하지만 적은 잠시 주춤할 뿐이었고, 이내 안나의 총을 들고 있던 AR로 쳐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방탄복에 감싸진 안나의 가슴에 총알 두 발이 직격했다.
송곳으로 찌른 듯한 통증에 안나는 뒤로 엎어졌지만, 떨어뜨리지 않은 CZ권총으로 즉시 그의 다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자 안나는 재빨리 가 총을 들었던 오른쪽 어깨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1초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적의 목에 마취탄이 박혔다. 세 번째 적이 계단에서 올라와 안나에게 총을 발사하려고 했고, 안나는 바닥에 떨어진 M&P를 주워 다리에 발사했다. 균형이 무너진 그가 계단 아래로 몸이 굽어졌지만, 이윽고 밑에 있는 다른 동료가 그를 받혔고, 네 번째, 다섯 번째 적이 한꺼번에 계단으로 진입했다.
"랩!"
안나가 일어서면서 랩터를 불렀다.
<엄호하겠습니다.>
장전한 마취 권총을 바지춤에 끼워 넣은 랩터는 한 손으로 992 소총을 거치한 채로 안나에게 복귀하란 손짓을 했다. 안나는 몸을 숙여 304호를 향해 움직였다. 그때, 벽이 무언가 부닥치는 소리와 바닥에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본능적으로 303호의 문을 열어 몸을 던졌고, 랩터는 문간으로 드러난 몸을 숨겼다. 팡 파르 소리와 함께 복도에 잠깐의 섬광이 일었다. 랩터가 다시 문에 총을 거치하려 하자, 총알이 빗발쳤다.
안나는 고개를 내밀지 않고 전자동으로 조정간을 맞춘 M&P 소총만 내밀어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를 낀 총들에서 나온 비명이 팝콘을 튀기는 소리처럼 복도에 울려퍼졌다. 저들은 절대로 지향사격을 가하는게 아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랩터가 몸을 숨긴 302호의 복도 벽에 머리 부근을 노린 듯이 집약된 탄흔들이 남아 있었다.
틱 소리와 함께 M&P 소총이 침묵하자, 안나는 탄창을 갈아 끼운 다음 장전바를 당겨 재장전했다. 그리고 섬광탄을 꺼내 핀을 뽑았고, 숫자를 2까지 센 다음 밑으로 굴려 던졌다. 몇 차례의 금속음과 함께 굴러가던 섬광탄은 이내 발광했고, 안나는 발파 소리에 맞춰 몸을 기울여 4, 5번째 적의 방탄복에 한 발 씩, 그리고 오른 어깨에 한 발씩 방아쇠를 당겼다. 두 적의 상체가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랩터는 마취총을 4번째 적의 허벅지에 맞췄고, 4번째 적은 권총을 뽑아들어 랩터에게 발사했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숨긴 랩터였지만, 총알이 만들어낸 나무 파편이 볼을 스쳤다. 피가 새어나오자, 억지로 손으로 훔쳐 닦은 랩터는 안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랩터의 눈은 안나와 바닥을 번갈아 두 번 돌아보고 있었다. 다리를 쏘라는 지시였다. 어차피 비살상이 주를 이루는 극한 도전이었다.
안나는 권총을 쏘며 다가오는 5번째 적을 저지하기 위해 똑같이 CZ권총으로 바꿔들었다. 적이 문가로 진입할 때, 안나는 손으로 총구를 쳐내려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날아오는 칼날에 안나는 그러지 못했고, 오른쪽 볼이 깊게 찢어지고 말았다. 왈칵 피가 입안과 밖으로 뿜어나왔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안나는 다친 것에 화가 나 팔꿈치로 적의 목울대를 가격한 다음 권총으로 복부를 연달아 세 번 발사했다.
적은 물러나지 않고 슬라이드를 잡은 권총의 손잡이로 안나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넘어지면서 폐에서 부자연스럽게 숨이 새어나왔다. 청록색 시야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안나의 눈 앞에 커다란 총구가 보였다. 안나는 되는 대로 팔을 휘둘러 간신히 총구를 쳐냈고, 동시에 군화에서 트루돈 나이프의 스위치를 눌러 나온 칼날을 적의 종아리에 두번 찔렀다. 마르기 시작한 젤리를 찌른 것 같은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감상을 남길 여유 따윈 전혀 없었다.
칼을 뽑아낸 안나는 권총을 다시 파지하려는 적의 팔에 한번, 그리고 어깨에 한 번 더 칼을 꽂았다. 피가 나오긴 했지만 모두 동맥을 피한 상처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부상을 방치하면 사상이라는 새로운 범주가 추가될 것이다. 401호실에서 나오기 전 엘사가 보여준 동작 디오라마에는 9명의 블랙라인이 살아 있었다. 4명이 남아 있다는 소리였다.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비살상으로 제압을 이어가야 했다. 안나가 문으로 다시 나왔을 때, 992소총의 개머리판으로 4번째 적의 어깨를 내려친 랩터가 있었다. 적의 자세가 무너지자, 랩터는 마취탄을 마취 권총에 장전하지 않고 그대로 적의 어깨에 꽂아넣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랩터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4번째 적과 고전한 듯 했다. 그럴 수 있었다. 랩터는 정규 훈련을 받은 게 아닌 전직 극단주의자 단체 소속이었다. 정규 훈련을 받은 특수대원을 제압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양복의 어깻죽지가 칼에 베인 것처럼 찢어졌고, 그 사이로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남색 방탄복이 드러났다.
<아뇨, 아직 4명 남아있어요. 그 4명도 여기로 올 것 같은데....일단 쉬고 있어요. 마취 총 줘요.>
<할 수 있겠어요? 당신 상태를 봐요, 조커마냥 입이 찢어졌고 총도 몇 방 맞았을텐데.>
가슴이 욱씬거리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아무리 방탄복이 총알을 막아준다지만 고통까지 막아주진 못한다. 다음 번에 한두 발을 더 맞는다면 그 땐 그로기 상태에 빠져들어 의지없이 기절할 것 같았다.
<할... 수 있어요.>
"안 돼!"
계단 내려오는 소리와 멜리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랩터와 안나는 동시에 4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향했고, 멜리사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바닥을 두 손으로 짚었다.
90.
"갈 거야아아.....!"
"안 돼에에에.....!"
엘사는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불과 방탄복에 덮여 있고, 디오라마가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안나 언니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엘사는 언니가 '총'이란 물건에서 나온 작은 철덩이에 여러 번 맞아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작은 총에 옆구리를 맞고, 볼이 찢어졌다. 엘사는 안나를 스칼렛으로 불렀던 때, 추격전에서 한 번, 그리고 멜리사를 만날 때 한 번 안나를 잃어버릴 뻔 했다. 그 이후 멜리사와 가족이 되었지만, 섣불리 찾아오는 불안함은 떨쳐낼 수 없었다.
오히려 불안감은 극도로 증가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저 작은 건물 모형과 안나 언니, 그리고 랍터 아저씨의 움직이는 모형들이었다. 어떻게 나왔는지 능력을 발현시킨 엘사도 몰랐다. 어쩌면 안나 언니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었지만, 안나 언니의 상태는 정말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엘사는 멜리사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쳤다.
"앙나 언니가 위험해에에....."
"엘사, 안나 언니는 괜찮을 거야. 응? 봐봐, 이미 5명이나 무찔렀잖아."
멜리사가 엘사의 허리에 팔을 감고 억지로 버텼다. 멜리사는 안나 언니와 엘사를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동시에 안나의 약속도 지켜야 했다. 그러므로 멜리사가 해야 할 일은 엘사를 이곳에서 내보내면 안 되는 것이고,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였다. 멜리사는 엘사가 얌전해 보여서 좋았다고 생각했고, 나름 체력이 약할 것 같다고 느꼈다. 처음 하얀 카페 앞에서 조우했을 때, 엘사는 안나 언니에게 약간의 능력을 전해주고 바로 쓰러졌으니까. 적어도 힘으로는 엘사를 묶어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사는 멜리사의 구속을 거의 풀어내기 직전이었다. 멜리사는 얼음으로 엘사의 손을 묶어볼까도 생각했다.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이미 엘사와 멜리사 주변에 작은 소용돌이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멜리사의 스파이키 컷과 엘사의 꽈배기같이 땋은 머리가 거칠게 흩날렸다. 이렇게 시끄럽다면 엘사와 멜리사는 방 안을 위험하게 날아다닐 것이고, 적들이 엘사의 위치를 알아챌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미 알아챘는지도 모른다.
"네 사람이나 남아있잖아... 멜리사, 응? 제발 보내줘어어....."
엘사가 다리를 바동바동 움직였다. 멜리사는 어쩔 수 없이 구속을 풀어줬다.
"엘사, 잠깐잠깐."
그대로 문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 엘사를 멜리사가 불러세웠다. 엘사는 울면서 멜리사를 돌아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멜리사는 속으로 엘사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내가 갈게."
"멜리사가 다치면 어떡해..."
엘사는 걱정했다. 멜리사는 씁쓸히 웃었다. 깃털같이 가벼우면서도 웃음이 어울리는 아이. 그리고 누구보다 남을 위해 살아가려는 아이. 참 신기한 아이였다. 정작 자신은 지쳐가고 있었음에도, 남을 생각하는 그런 아이를 멜리사는 보았다.
"괜찮아 엘사. 난 이런 거 겪어 봤어. 그러니까 엘사는 나 같은 짓 하지마."
"무슨 짓....?"
"아무튼 있으니까... 여기 잠자코 있어줘. 안나 언니랑 같이 금방 돌아올게."
엘사가 멜리사의 손을 잡았다. 떠나보내기 싫은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꼭 돌아와야 해... 약속."
엘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멜리사는 그것이 유치하다는 것을 알지만, 엘사에겐 진심이란 걸 알았기에, 흔쾌히 붕대를 맨 손으로 약속을 걸었다.
"진짜 꼭...."
"알았어, 알았어, 오면 사탕 다 너 줄테니까, 잠자코 기다리셔!"
멜리사가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풀고 문 밖을 뛰쳐나갔다. 스르르 문이 닫혔고, 엘사는 자신이 만든 디오라마를 내려다 보았다. 작고 검은 눈송이 하나가 복도를 달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안돼에에에...}
멜리사의 목소리가 물먹은 것처럼 흐릿하게 들렸다.
"멜리사... 멜리사아.... 언니이...."
눈보라는 어느새 모습을 감췄다. 엘사는 안나의 부탁대로, 그리고 멜리사의 약속대로 방 안에서 나가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멜리사마저 다친다면, 그 때는 문 밖으로 나가야 함을 알고 있었다. 달콤한 사탕보다, 따뜻한 두 사람이 더 중요했다.
복도를 달리는 멜리사는 처음 사람을 죽였던 때를 기억했다. 우발적이었지만, 자신을 괴롭히던 연구원이 하려던 짓은 죽어 마땅했다. 그 때 쓰게 된 가면은 마치 얼굴에 달라붙은 것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몇 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안나와 엘사라는 고마운 인연들이 가면을 간단히 벗겨주었다. 안나는 이미 피를 묻히고 살아왔을 터였다. 그러니 적어도, 엘사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 두려움, 그 떨림 속에서 저지른 첫 살인은 멜리사를 실성하게 만들었고 [미친년]이라는 오명을 남겨주었다. 엘사가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엘사는 언제나 하얀 아이여야 했다. 하얀 깃털이 붉게 물드는 건 보기 싫었다.
검은 깃털은 피에 젖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 9살 남짓한 멜리사는 엘사를 대신해 다시 한 번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