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송곳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송곳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지금 첼시 상황 ㅇㅇ
- 보조금 가로챈 마을 이장·어촌계장… 공무원도 한통속 몽쉘통통
- ‘채 상병 특검법’ 28일 결판…여야, 17표 싸움 정치마갤용계정
- 삼시 세끼를 다 챙겨주는 지방 아파트 부갤러
- (ㅇㅎ) 여름특집 기후재앙 폭염으로 TS해본.manhwa 새만화금고
- '초고속 진화' 딥페이크, 국가 안보까지 흔든다.. AI 규제냐 개발이냐 정치마갤용계정
- ㅅㄱㅂㄱ 국장 근황 복슬복슬Teemo
- 교황청, 중국에 대표부 설치... 대만은 초긴장 상태 난징대파티
- 축의금 3만원 낸 친구에 이유 물으니. 부갤러
- 거대한 바다 어류들의 어린시절...jpg 설윤아기
- 싱글벙글 뉴스에 나온 칼 든 괴한을 제압한 MMA 선수 ㅇㅇ
- 블루아카이브 PD 결국 퇴사 ㅋㅋㅋ ㅇㅇ
- 오들오들 4년동안 8,799개의 법안을 통과시킨 나라 ㄷㄷ ㅇㅇ
- 도야마 3박 4일 여행기 진짜기본요리책
- 싱글벙글 느타리버섯이 사실 "육식"버섯인 이유 유미고양이
싱글벙글 일본에서 불륜이 들통난 성우 자세한 취재내용 정리
- 관련게시물 : 국내 어지러운와중에 일본에서도 큰사건 터졌네불륜이 들통난 성우는바로 후루야 토오루이 사람이 맡은 주요 캐릭터는 아래와 같다이렇게 여러 작품에 참여한 그가어떻게 불륜을 하게 되었는가?일본의 주간 시사잡지 주간문춘 (週刊文春)에서 후루야 토오루의 불륜을 취재하였다아래의 내용은 주간문춘의 취재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0) 2018년33세의 여성 A씨는 코난을 즐겨보는 일반인이다그녀는 2017년경, 후루야 토오루의 팬미팅에 참석했는데후루야 토오루의 목소리에 흠뻑 빠졌다.2018년 명탐정코난 극장판 제로의 집행인을 45번이나 볼 정도로 거의 후루야 토오루의 광팬 수준이었다(1) 2019년 2019년 새해 첫날, A씨 (후루야 토오루의 그녀) 에게 모르는 번호로 문자 한통이 온다번역기를 돌렸더니"후루야 토오루 입니다. 갑작스러운 짧은 문자 미안해요! 작년에 저한테 선물 사례를 해준 것에 사과의 말을 직접 하고 싶어서 보냈습니다"A씨 : 처음에는 사기라고 생각했지만, 문자를 주고받을 때 후루야씨라는 걸 알았습니다. 믿을 수 없었어요.후루야 토오루가 최초로 문자를 보내고 1달 뒤2019년 2월, 후루야와 A씨는 도쿄의 한 식당에서 실제로 만났다.A씨 : 첫 만남에 긴장했지만, 작품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이 만남에서 후루야가 신사답다는 걸 느꼈어요.식사 후, 두 사람은 노래방에 갔고후루야 토오루는 노래방에서 타케우치 마리야의 'Station'이라는 노래를 불렀다Mariya Takeuchi - Station 1987 on Vimeohttps://youtu.be/hqQUlq3V72E(2) 2020년 2020년 3월, 후루야 토오루는 고치현(高知県)에서 애니메이션 관련 행사에 참가하려고고치시(高知市)의 한 호텔에 숙박을 하고 있었다.마침 A씨도 이 애니메이션 행사에 일반 게스트로 참가하려고 고치시(高知市)에 있었다!이를 알게 된 후루야 토오루는 자신의 호텔에 A씨를 초대한다초대한 시점은 자정이 지나서였지만, A씨는 그 호텔로 간다A씨 (모자이크)A씨에게 뽀뽀 일명 키갈(?)을 시도하는 칠대남 후루야 토오루그런데! 호텔방에서 후루야 토오루가 돌변한다?!A씨 : 후루야가 저를 침대로 밀쳐 눕혔어요. 당황해서 서서히 초조함을 느꼈는데후루야씨가 피임도구를 이용하지 않고 성관계(속된 말로 노콘질싸)를 하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잠깐만요!" 라고 말했지만 그는 "괜찮아" 라고 하였어요이윽고 후루야 토오루가 말하길후루야 토오루 : 나는 정자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야 그러니 노콘질싸는 괜찮아A씨 : 제가 임신을 할까봐 걱정했어요. 그렇지만 후루야씨는 제가 존경하는 사람이니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결국 이 두 사람은 피임도구 없이 잭스를 하였고, 잭스 이후 급속도로 사이가 가까워진다(3) 갈등제일 큰 문제는후루야 토오루가 유부남이었다후루야 토오루의 부인은 마지마 사토미 (1955년생)후루야 토오루는 마지마 사토미와 결혼하여 친딸을 낳았는데후루야의 친딸은 1992년생A씨는 1991년생이다성우, 한 집안의 가장, A씨의 애인3개의 얼굴을 지닌 후루야 토오루는 능숙한 필력으로 A씨에게 LINE 메시지를 보냈다후루야가 보낸 LINE 메세지를 번역기로 돌리면"너와 함께 하고 싶지만 무리야""지금 연기하는 역할을 내려놔야 한다""많은 이들에 폐를 끼친다""A씨를 좋아하지만 현재 부인과 헤어질 수 없기에, 당신 (A씨)은 나를 용서할 수 없을거다" 이후 2020년 9월, 일본 관동지역 근교의 후루야 토오루 별장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후루야 토오루의 별장에서 그와 A씨가 함께 찍은 사진)A씨 : 별장에서 만난 그 날, 불륜 관계에 대해 심한 말다툼을 했어요. 그러자 후루야는 제게 "너 그만좀 해!" 라고 외치더군요말다툼을 하다가 욱한 후루야 토오루는 A씨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A씨의 코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다A씨 : 주먹으로 맞은 저는 필사적으로 화장실로 뛰어가서 긴급신고 110번 (한국의 112와 같은 기능)을 눌렀어요제가 살려줘!라고 외쳤는데, 후루야 토오루가 화장실 문을 열고 제 스마트폰을 빼앗아 전원을 껐어요후루야가 제 스마트폰을 돌려주지 않아서 저는 문을 열고 별장 밖으로 뛰쳐나갔어요절 보더니 후루야가 "정말 미안해"라고 사과를 했어요 사과를 하면서 제 스마트폰을 돌려받고, 전원을 켰더니 이미 현지 경찰이 전화를 한 기록이 있더군요결국에 현지 경찰관 5명이 별장에 찾아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에 제가 진술을 했어요뒷방에 숨은 후루야 토오루는 A씨와의 전화 통화에서A씨 : 때리는 건 경우와 다른 거야. 그것도 얼굴 말이야후루야 토오루 : 솔직히 내가 욱해서 그랬지만, 그것(얼굴을 때린 것)은 잘못한 거라 생각해라고 말한다이런 소동이 있었는데도 후루야 토오루와 A씨의 관계는 계속됐다후루야 토오루는 A씨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명탐정 코난에서 맡은 배역인 '아무로 토오루'의 목소리와 대사를 변형하였다.명탐정 코난 극장판 제로의 집행인에서 아무로 토오루는https://youtu.be/GCiSiqyIM2k코난에서 후루야 토오루 : "내 애인은 바로 이 나라야"후루야 토오루는 A씨에게 "내 애인은 바로 A 너야" 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4) 위기후루야 토오루와 A씨와의 관계에 큰 위기가 들이닥친다2021년 3월, 바로 A씨가 후루야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A씨는 이 당시를 떠올리며 취재진에게 말하길A씨 "후루야는 LINE 메시지로 (미안해 더 조심해야 했어) 라는 말을 했어요. 전화 통화를 했더니 첫마디의 키워드가 '낙태'였지요. 후루야가 제 심정을 이해하길 바랬지만, 통화를 해도 그는 시종일관 낙태를 고집하였어요"결정적으로 후루야 토오루는 "임신을 했다며? 그게 정말 내 아이야? 그거는 아직 생명이 아니잖아"라는 식으로 말을 하여 A씨의 마음을 후펴팠다아무튼 A씨는 후루야 토오루의 의향에 따라 낙태를 하였다그런데 후루야 토오루는 A씨의 낙태 수술 동의를 거부하였다A씨와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변명 때문이었다결국에 A씨는 후루야에게 수술 후 각서를 받는 것으로 낙태 동의를 받았다낙태 이후, 후루야와 A씨는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았다가 2022년 8월, 원피스 영화 (원피스 필름 레드) 를 함께 보면서 데이트를 즐겼다 (2022년, 후루야 토오루와 A씨의 사진)(5) 이별이별은 갑작스러웠다.후루야 토오루는 2023년 9월, 홋카이도의 행사에 A씨와 함께했다A씨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후루야 토오루와 싸웠는데후루야 토오루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을 만큼 화난 모습이었다그는 A씨에게 "내가 낙태 동의서에 사인했잖아!, 너 내가 결혼한 거 알면서도 사귄 거잖아" 라고 말을 하였다그러면서 후루야 토오루는 A씨에게 "이제 끝이야"라고 말을 하였다.A씨는 이별의 순간을 회상하며A씨 : 돌이켜보면 후루야는 제게 심한 말을 하였어요. "나는 몇십년동안 부인과 하지 않으니, A 너와 사귀는 건 바람이 아니야"후루야와의 관계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지만 지금은 착잡한 심정이에요주간문춘 취재진은 사실 확인을 위하여 후루야 토오루와 인터뷰를 하였다아래는 질의 응답이다(선즙필승을 하려는 칠대남 후루야 토오루)Q. A씨와 바람을 핀 게 사실인가요?A.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Q. A씨는 당신보다 37살이나 어려요. 당신의 친딸와 나이가 비슷합니다.A. 어쩌면 젊고 예쁜 여자와 데이트를 할 수 있었기에 정말 그때는 날아오르는 기분이었어요Q. A씨에게 호감이 있습니까A. 그렇지요Q. A씨에게 아무로 토오루 캐릭터의 목소리를 썼습니까A. 아마도 그럴 거예요. 저는 칠대남이라 기억력이 안 좋아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 생각해요.사적인 불륜에 이용한 것은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더럽히는 것이니 반성합니다. Q. 2019년 3월에 피임을 안 했나요?A. 기억이 나질 않아요Q. 피임을 하지 않아도 임신이 안 될거라고 생각했나요?A. 예전에 병원에서 진찰 받았을 때, 정상적인 잭스로는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Q. 당신은 당신의 별장에서 A씨를 때린 게 맞나요?A. 사실이지만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때린 거예요. 그녀가 집에 가겠다고 하니까 그만 욱해서 손이 나간 거예요Q. 당신이 A씨에게 맞은 적은요?A. 없습니다.Q. 2021년 3월에 A씨가 임신했을 때, 그녀에 낙태해 달라고 했습니까?A. 네 맞아요Q. 당신은 A씨에게 "정말 내 아이야?" 라고 말했나요A. 아마 그럴 거예요. 저는 나름 짐작한 것도 있어서 그녀와 함께 병원에 가서 위자료 성격의 비용을 냈어Q. 그러면 당신이 A씨에게 "그건 생명이 아니잖아" 라고 한 건요?A. 그때는 분명 임신 5주차였으니 그렇게 생각해서 말했어요. 저는 우울해보이는 그녀를 위로하려고 말한 거예요Q. 임신에 책임지고 싶지 않았어요?A. 당연히 제 책임인 줄 알았지요Q. 낙태 수술의 동의를 거부했나요?A. 낙태 수술 동의서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래서 그녀가 낙태를 하고 나서 동의서가 아닌 각서에 서명을 하고 날인까지 하였어요.Q. A씨와 결혼할 생각은 있었나요?A. 그건 절대 없다고 말했어요. 저는 1953년생, 올해 71살이라 介護 (개호/ 한국말로 장기요양) 이 시작돼요. 제가 받아야 할 장기요양은 그녀의 행복으로 결코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Q. A씨와의 관계에서 잭스는 큰 비중을 차지합니까?A. A씨 덕분에 저는 "난 아직 남자 구실을 하는 구나" 라는 자신감을 얻었어요Q. 당신의 가족은 불륜을 알고 있나요?A. 네 그럼요. 주간문춘과 인터뷰 전에 집사람에게 얘기를 했더니집사람은 제게 "당신 정말 어리석고 천박하구나. 난 이제 수치스럽게 살아야겠다" 라고 말했지요집사람이 친딸에게 불륜 얘기를 하면서 "딸아 나는 네 아빠 편이란다" 라고 말했어요.Q. 당신이 얽힌 불륜 의혹은 모두 사실인가요?A. 네, 물론입니다. 전적으로 제 책임이에요. 폭력도 불륜도 인간이 해서 안 되는 최악의 짓입니다.전 어떤 처벌과 제재를 받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역시나후루야 토오루가 목소리를 연기하는 작품 명탐정 코난에서코난의 말처럼 (真実はいつも1つ) 진실은 언제나 하나였다. + 놀라운 점마지마 사토미는 후루야 토오루의 2번째 부인이었다 후루야 토오루가 그녀와 1985년에 재혼하여 1992년에 친딸을 얻었다그러면 첫번째 부인은? 코야마 마미후루야 토오루와 1976년에 결혼하여 1983년에 이혼하였다코아먀 마미도 명탐정 코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다름 아닌...?검은조직의 일원인 베르무트 (아무로 토오루 옆의 여성) 이다결론 : 스고이 닛폰출처 : レジェンド声優・古谷徹(70)が名探偵コナン不倫!《暴行で警察出動、妊娠・中絶も。元愛人の告白に、本人は覚悟を決めて――》 | 週刊文春 電子版 (bunshun.jp)후루야 토오루의 음성 녹취 : vimeo.com/948181224/499092d3cb
작성자 : 노인복지관고정닉
싱글벙글 한반도의 나무와 산 이야기
한반도의 나무들과 녹화 사업의 역사에 대해 ARABOZA 1932년 발표된 김동인의 유명한 소설, "붉은 산"의 말미에는 애물단지 동네 건달이었던 삵이라는 인물이 조선인 동포들을 위해 중국인 지주에게 항의하다 린치당해 죽어가며 주인공 앞에서 독백을 되뇌는 장면이 나온다 "보구 싶어요 붉은 산이 그리고 흰 옷이! 저기, 붉은 산이...그리고 흰 옷이.... 선생님 저게 뭐예요!" 만주의 천덕꾸러기 조선인 건달이 죽어가며 떠올린 고향의 모습은 붉은 산이었다. 도대체 왜 한반도의 산들은 붉은 산, 즉 민둥산이 되었을까? 그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선 17세기부터 전세계를 덮친 이른바 "소빙하기" 라는 기후 변화가 그 근원이었는데, 160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급격하게 낮아진 기온으로 식물의 생장이 크게 영향을 받아 경신대기근 같은 대기근이 발생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날씨가 추워져서 산의 나무가 모두 고사했다 라는 얘기는 아니다. 나무야 당장 시베리아나 알레스카 같은 극지에서도 잘만 자라고, 한반도의 식생은 세계에서 위도 대비 가장 혹독한 반도의 겨울에 적응했으니까 범인은 바로 온돌이었다. 우리는 온돌이 조상의 지혜라고 찬양하는 경향이 있다. 맞는 소리이다. 분명 한반도의 냉혹한 겨울에서 살아남으려면 온돌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온돌은 대량의 에너지... 즉 엄청난 양의 땔감을 필요로 한다. 영조는 즉위하고 3년 후 33세가 되던 해 "내 어릴 적에는 그래도 백악산이 참 푸르러서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벌거숭이 민둥산이다" 라며 탄식할 지경이다. 단 2~30년전만해도 푸르렀던 조선의 산이 완전한 민둥산이 된 것이다. 그랬다. 그 전까지만해도 한반도 북부 평안도나 함경도 지방에서나 쓰던 온돌이 소빙하기로 인한 급격한 기온 저하로 조선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온돌에 들어가는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적인 대량 벌채가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 이런 무분별한 벌채로 전국의 산림이 황폐화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북악산에서 흘러내려온 토사가 한양의 하수 역할을 하던 청계천을 틀어막아 한양의 위생을 극적으로 악화시켰다. 영조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천 준설 사업을 벌여 청계천에 쌓인 토사를 걷어냈고 그 흙과 모래로 언덕을 쌓았는데 사람들은 이를 방산이라 불렀다. 오늘날 외국인들의 관광 명소로서 이름을 날리는 청계천 옆 방산 시장이 바로 청계천 준설토를 쌓아 만든 언덕 위에 세워진 시장인 것이다 영조 다음으로 즉위한 정조 또한 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뒤주에 갇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무덤, '현륭원' 주위에 나무 한 그루 없이 휑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식목 사업을 벌여 현륭원과 그 주위에 무려 1200만 그루에 가까운 엄청난 양의 나무를 심었다. ?????????? 그 많은 나무는 다 어디 갔노? 현대의 조림 기술자들에 의하면 서울시 정도 면적의 지역을 녹화하는데 필요한 나무의 수는 약 90만 그루 정도라고 한다. 정조가 심은 나무의 수는 그의 10배를 훌쩍 뛰어 넘는 숫자인데 도대체 정조의 노력은 어떻게 되었길래 일제 시대까지도 온 조선은 민둥산이었단말인가? 우선 조선엔 '조림'이란 기술이 없었다. 나무는 가져다 심는다고 장땡이 아니다. 나무를 심고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는 비율을 '착근률(着根率)'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재임기간 내내 심은 나무의 착근률은 15%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무식하게 나무를 가져다 심은 게 아닌 '때려 박은' 것일 뿐이었다. ?????? 1200만 그루의 15%면 180만 그루인데 아니 그래도 90만 그루의 2배라면 많이 심은 거 아니노? 문제는 그것이 처음부터 조림을 위해 기른 나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정조가 재임 기간 내내 심은 대부분의 나무는 씨앗부터 체계적으로 기른 나무가 아니라 지방의 각 고을로부터 어린 나무를 징발해 가져온 나무였다. 결국 저쪽에서 자라던 나무를 가져와 이쪽에다 심었을 뿐 새로운 나무를 심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대 조선은 교통이 상당히 불편한 축에 속하는 국가였고, 자연스레 지방에서 징발한 나무들을 옮기는 과정에서도 어린 묘목들이 부지기수로 죽어나갔다. 결과적으로 왕릉 근처의 산은 나름 풍성해졌으나 그 외의 다른 지역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 아니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 이것이 근래 '식목왕 정조'라며 찬양되던 정조의 식목 정책의 실체였다. 조선 총독부가 만든 조선임야분포도에서 볼 수 있듯이 영정조 시대 이후 조선 왕조의 산림 관리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아니 산림 관리 정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왕실은 "산림과 천택은 백성과 공유한다"라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왕실 소유의 산림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적 소유권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판국이니 산림 관리와 식목에 대한 관심은 조정 대신들과 왕에게서 멀어져만 갔고, 드문드문 올라오는 산림 관리의 필요성에 대한 상소도 이들에게 닿지 못했다. 결국 백성들은 추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주공산의 산림에 들어가 먼저 베는놈이 임자라는 식으로 마구잡이로 뗄감을 채취했고 그로 인해 한반도 산림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그렇다. 아주 교과서적인 공유지의 비극이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들도 소빙기와 인구 증가 등의 비슷한 시련에 부딪혔으나 그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산림 자원을 보존하는 것에 성공했다. 영국 같은 경우 왕실에서 전국토에 걸친 전면적인 산림 벌채 금지령을 내린 뒤로는 석탄을 통한 산업 혁명을 거치며 비효율적인 땔감의 필요성에서 벗어났고 (덤으로 스코틀랜드에는 양질의 석탄이 대량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격 면에서도 석탄이 땔감을 순식간에 밀어낼 수 있었다) 일본은 1657년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로 대량의 목재가 필요해진 이후 각 지역 다이묘들을 통해 체계적으로 산림 자원을 채취하고 식목을 시행하는 법령을 도입해 산림 자원을 관리했다. 참고로 고좆 새끼는 그나마 산림 자원이 남아있던 지역의 벌목권을 일본과 러시아에 팔아먹기 급급했고 그나마 숲을 가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정조에 비하면 나무를 심는다거나 환경을 가꾼다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던 인간이었다. 40여년을 집권하며 수많은 기회 속에서도 나라를 말아먹은 인간에게 이런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바보겠지만. 한반도의 식목,조림을 위한 노력은 비로소 20세기가 되어서야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고종의 시대를 지나 조선 아니 대한제국의 명운이 거의 끝나가던 1909년, 일본 동경대 임학과를 졸업한 사이토 오토사쿠(斉藤音作)라는 일본인이 대한제국 농공상부 임정과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다음 해 1910년 5월 5일 풍년과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인 '친경식'을 행할 때 제사와 더불어 식수식도 포함시키자고 통감부에 제안했다. 황제가 제국 신민들 앞에서 나무를 심으면 그 선전 효과가 좋을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 해 8월 한일합병 이후, 총독부의 식산국 산림과장이 된 사이토는 다시 한번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기념 식수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 인간은 정말로 식수식과 나무에 미쳐있는 인간이었다. 이에 데라우치는 이렇게 답했다. "조선을 살찌우려면 나처럼 대머리인 곳에 조림해야지 대머리가 되는 것은 안 좋은 일이지 암." 물론 그의 의도는 식민지 조선에서 무언가를 뽑아먹으려면 어떻게 해서든 조선의 살을 찌워야 한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1911년 4월 3일 제1회 기념 식수식이 거행됐다. 이 행사는 해방이 될 때까지 총독부의 연례 행사가 되었고 바로 이 행사가 우리가 아는 식목일의 모태가 된다. ???? 식목일은 4월 5일 아니노? 사이토 오토사쿠는 한일 합병을 기념할 목적으로 제안한 이 사업을 진무 덴노의 기일인 4월 3월로 정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들어선 미군정과 그를 이은 대한민국 정부는 이 식목기념일을 계승해 4월 3일에서 4월 5일로 옮겼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아마 식수의 필요성은 절감했으나 하필 합병 기념을 위한 날짜를 그대로 쓰기에는 영 껄쩍찌근했으리라 그래서 일제의 식수 사업은 성공적이었나? 그러면 반인반신 시대의 식수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도 않았겠지 물론 일제의 식수 사업은 어느 정도의 진전은 있어 초토화되어가던 한반도의 녹화를 진행시키긴 했다. 공식 통계가 도입된 1927년부터 조선의 산림률은 꾸준히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27년부터 총독부가 심은 나무의 산림 면적은 대략 195만 헥타르에 가깝고 심은 나무는 82억 그루에 달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은 일제가 벌인 식수 사업을 무위로 돌렸다.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총력전 체제로 전환된 뒤 일본 본토와 한반도 전역에 걸친 나무의 강제 공출 명령이 떨어졌고 한반도에선 총독부가 심은 나무 이상의 벌목이 행해졌다. 일본 본토의 산림 자원도 전쟁 자원 확보를 위한 벌채와 폭격으로 인해 크게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 6.25 전쟁에 의해 일본보다 더 직접적으로 전쟁의 화마에 휘말린 한반도의 산림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결국 한반도의 산림이 복구된 것은 강력한 행정력과 식목, 그리고 환경 보호에 대해 이전의 어떠한 정부보다도 강력한 의지를 지녔던 박정희 정부에 의해서였다. 반인반신의 노력 끝에, 소빙하기 이후 거의 400년 만에 한반도는 다시 숲으로 뒤덮힐 수 있었다. 그 결과를 보증하듯이 지리산과 태백산맥의 일부 원시림을 제외한 휴전선 이남 지역 산림의 80% 이상이 60년대와 70년대에 조성된 인공림이다 다만 10.26 사태로 인하여 중간에 조림 사업이 미완성으로 끝나긴 했었으나, 여하튼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림 복구를 성공하였다. <끝>
작성자 : 기레츠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