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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밤/문학] 왕자를 위한 무대앱에서 작성

Schne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5 01:02:30
조회 437 추천 35 댓글 17

“And therefore, since I cannot prove a lover to entertain these fair well-spoken days.
I am determinèd to prove a villain and hate the idle pleasures of these days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을 즐기는,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없기에,
나는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1막 1장.


왕자들의 서열이 태어난 순서대로 정해진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1차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순서가 꼭 절대적이지는 않다. 어차피 왕이 되지 못할 운명이 열 두명씩이나 된다면, 그 중에는 평화를 즐기는 게으름뱅이가 있지 않겠는가?

한스는 벨로아 왕국으로 향하는 배의 갑판에 기대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열 손가락에도 들지 못하는 한스가 왕국의 문화 사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위로 세명의 형들이 모두 항해라면 질색을 했기 때문이었지만, 한스 스스로는 이것을 운명으로 생각했다. 수많은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발판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으레 극의 주인공들은 다 이런 식이지. 한스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세자로 태어나서 글공부다 꿰다가 왕위에 오른 이를 칭송하는 극이 있던가? 아니다. 오히려 사악하고 추할지언정 운명의 시험을 이겨내고 늑대마냥 위를 향해 전진해 나가는 이야말로 극의 주인공이자, 왕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하루의 절반을 형들의 심부름만 하며 보내던 때도 있었다. 검술 대련이라는 핑계를 댄 형의 화풀이를 받아내던 때도 있었다. 다른 나라의 공주에게 선물을 배달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간 나에게 기회가 올 것을 믿었다. 그래서 잠을 아끼며 책을 읽고, 멍든 팔을 싸매고 검술을 단련했고, 이제 성인이 되어 나이만 먹고 야망이라곤 없는 형들을 대신하여 이렇게 왕국의 대사로서 벨로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껏 고무된 한스에게는 불행하게도, 기껏 초대했더니 막내왕자 한 명만 보낸 나라에 벨로아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벨로아와 서던 제도는 너무 멀었다. 물리적으로도 멀었고 외교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극장 주인과 이야기를 할래도 먼저 말을 거는쪽은 한스가 되었다.

“에반스 남작, 아주 멋진 공연이었어요.”
“아, 서던에서 오신 왕자님이시군요. 좋게 봐주시니 영광입니다.”
남작은 사무적인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는 왕족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남작의 말과 행동, 표정을 아무리 분석한다 한들,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음료는 입에 좀 맞으시던가요? 산지오베제 포도로만 정성스럽게 빚어냈답니다.”
한스는 말없이 잠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이 시점에서 남작은 서던 제도와 그 왕자들에 대해 대략적인 판단을 마친 상태였을 것이다.
“어쩐지 향이 굉장히 좋더군요.”
“다행이네요. 잠시만요, 이봐! 어 자네, 잠시 서던의 왕자님을 모시고 갈 테니 1층 방 하나를 준비해주게!”
한스는 외국의 왕자로서 받는 이 대접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래야지. 고향에서 환영받는 영웅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비록 위로 형이 열 두명이나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초라하지만, 이렇게 따로 다른 나라에 오니 제대로 대접을 받는거야.

에반스 남작은 한스를 데리고 극장 안의 방으로 들어와 방금 전의 연극에 의미와 연출에 대해 쉴 새없이 떠들었다.
“그래서, 모두들 리처드 왕을 지독한 악당으로 생각하지만, 극의 목적이 그게 아니란 말이죠.”
포도주를 몇 잔 더 들이키고는 좀더 얼굴에 홍조를 띈 채 남작이 이야기했다.
“중요한 점은, 관객들이 리처드에게 몰입하게 하는 거란 말이죠. 막이 내리고, 그 누가 리처드에게 비난을 쏟아 부을 수 있습니까?”
“맞아요. 하… 우리 나라에도 남작처럼 예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기사… 섬나라에서 무슨 예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잠시 방 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남작 덕분에 오늘 즐거웠습니다.”
한스가 재빨리 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잠시간 흐른 정적을 한스는 충분히 짧았다고 생각했고, 남작은 너무 길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 생각의 흐름이 엇갈리기 시작하자, 무르익던 대화의 분위기는 금방 가라앉았다. 그렇게 몇 분 지나지 않아 한스는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생각했다.

나는 이제 드디어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냥 형들 곁을 떠났을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다. 별 볼일 없는 나라의 힘 없는 막내왕자일 뿐. 저런 속물 극장주인조차 속으론 무시할 허울뿐인 철저한 엑스트라.



몇 년 뒤, 크로커스가 새겨진 커다란 의자에 앉은 한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위즐튼의 공작, 아렌델의 대사들. 모두가 나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한스는 벨로아의 남작에게 받았던 시선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저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 아래 어떤 감정이 있을지 아직은 신중해야 할 것이었다. 벨로아 왕국 극장에서의 기억이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한스는 자기 스스로를 언제 보여야 하는지를 배웠다. 지금은 아직 자신이 극의 중앙에 나설 시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의 눈빛은 한스가 평생 보아 오던 눈빛들이었다. 위즐튼의 공작은 아까는 나에게 일갈하더니 이제 와서는 뭐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는 눈빛이다. 다른 대신들은 줏대라곤 없이 그저 자기보다 높아 보이는 사람에겐 굴종하는 마치 개의 눈빛이다. 너무나도 익숙한 눈빛들이 한스에게 아직은 그의 인생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다들 나에게 원하는게 있어서 날 부추길 뿐이지. 하지만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그 순간 왜인지 모르게 갑자기 그에게 떠오른 것은 안나의 눈빛이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 본 적이 없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마음에 무언가가 고동치게 만드는 눈빛. 사랑. 그래 그런 게 사랑이겠지. 그 때 만큼은 나도 내 인생이 변할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나도 내가 주인공인 삶을, 적어도 한 명 만은 나를 무시하지 않는 삶이 기다릴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일까, 한스는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말을 뱉고 말았다.

“안나 공주를 찾으러 갈겁니다.”

그리고 이런 게 운명일까. 나도 모르게 말을 뱉고 예상 못한 말에 실망하는 저들에게 이야기하는 사이에 문이 열리고 놀랍게도 공주가 들어온 것이다.

“한스… 내게 키스해요, 빨리요…!”
한스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고동치기 시작했다. 아까도 저 공주 때문에 침착함을 잃을 뻔했다. 여태까지의 모든 수모와 고통이 이젠 없을지도 모른다고 잠시 생각했었다. 이제야 나는 내 자리를 찾았다고, 드디어 내가 주인공으로 멸시받지 않고 살아갈 무대를 찾았다고 잠시 생각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몸이 얼음처럼 차갑다. 유달리 손이 따뜻하던 아까의 그 공주가 맞나 싶을 정도이다.
“언니가 내게 마법을 썼어요.”
“해치지 않을 거라 했잖아요.”
한스는 안나를 안아서 난롯가로 옮겨주었다. 그리고 그 때,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 여왕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동생에게 마법을 썼다고? 점점 한스는 자신의 가슴 속에 고동치던 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래, 사랑과는 다른 감정이다. 공주를 안을 때에는 이정도가 아니었는데 드디어 왕좌가 비었다는 깨달으니 가슴이 미치도록 뛰는 것을 깨달았다.

“잘못 생각 했었나봐요… 내 심장을 얼렸어요. 그리고 진정한 사랑으로만 녹일 수 있대요.”
그 말을 듣는 도중에도 한스는 드디어 엘사를 처분할  명분이 생겼다는 것 이외의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 놀라운 마법을 가진 여왕도 여기까지구나. 물러 터진 인간들은 원래 중간에 나가 떨어지는 법이지. 그래, 그래야 그게 이야기가 되는 법이지. 한스는 오들오들 떨며 자신을 바라보는 공주의 눈빛에서, 드디어 자신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는 운명을 느꼈다.

아… 안나. 당신은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내가 주인공인 극에 끼기에는 그릇이 한참 모자라는 사람이로군… 미안하지만 당신의 희생이 이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래, 이제 진짜 주인공이 나설 차례다. 한스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이라 굳게 믿은 말을 결국 뱉어내고야 말았다.

“오… 안나,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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