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을 보시지 않았다면, 먼저 보시고 나서 이 글을 보시는게 이해가 쉽고 더 재미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중세 일본의 무사들과 무척 비슷해보이던 고려의 호족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익숙한 선비(士)의 모습으로 변모해갔는지를 고려의 지방교육의 강화와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지역할당으로서의 1차시험인 향시(鄕試), 그리고 이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지 않더라도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진사(進士)와 향공진사(鄕貢進士) 제도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고려의 호족들은 왜 중앙권력이 자신들의 지위를 향리(鄕吏)로 격하시키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선비(士)라는 명예를 얻으려 한단 말입니까? 그게 무슨 이익이 있죠?
중세 일본의 재지무사들이 재지성(在地性)을 강화시켜나간 것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재지사회에서 토지와 예속민들이라는 세습가능한 가업(家業)으로서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고려의 재지유력자인 호족들은 어떤 이익이 있기에 중앙정권의 지방통치를 받아들이고 그 지배연합에 합류하는 것을 희망한 걸까요? 어릴 때부터의 교육과 선비(士)의 신분이라는 모호한 명예만으로 그게 가능합니까?
그렇다면 실질적인 이익의 측면에서 고려의 재지유력자들의 행동을 중세 일본의 무사들과 비교해봅시다.
중세 일본의 무사들은 과거공부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중세 일본은 왜 봉건제 사회로 나아갔을까?(링크) 에서 일본 무사의 탄생과정에 대해서 소개한바 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일본 무사들이 무장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권리를 자신이 직접 지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상하죠? 왜 자기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폭력을 행사해야 하나요?
기본적으로 중세 일본의 무사들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업(家業)으로 대대로 상속해야할 농지와 이를 경작하는 농민들에 대한 소유권이 매우 불안정한 토대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일본에서 무사의 핵심 재산인 토지와 이에 속한 농민에 대해 일정한 연공(年貢), 즉 세금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는 시키, 직(職)의 체계에 의해 보장됩니다. 좀 어렵죠?
직(職)이란 재지무사가 받은 일종의 직무입니다. 이 직무를 맡고 이를 세습함으로서 재지무사의 토지와 농민에 대한 권리가 보장될 수 있죠.
지방관인 고쿠시(国司)와 주종관계를 맺고 지방관청인 고쿠가의 실무를 맞는 재청관인(在庁官人)이 되면 그들의 영지와 예속민에 대한 권리가 고쿠시에 의해 보장됩니다. 그들이 고쿠가에서 실무를 담당하고 연공수취를 대행함으로서 그들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거죠.
사적으로 장원(荘園)을 소유하고 있는 장원영주와 주종관계를 맺고 마찬가지로 장원의 실무관리자인 쇼칸(荘官)이 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토에 있는 장원영주에게 연공을 수취해서 보내는 일을 담당함으로서 장원 내에 존재하는 그들의 소유권이 보장되는겁니다.
헤이안시대에 형성된 이러한 재지유력자들의 소유권 구조는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일단 지방관인 고쿠시(国司)가 교체되어 새로운 고쿠시가 오면 원래 보장되던 권리가 취소될 수 있습니다. 지방의 통치권과 조세수취의 권한이 고쿠시와 그를 임명하는 지행국주(知行国主)인 중앙 권력자의 재산처럼 취급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특히 교토의 중앙정권이 정변에 의해 흔들릴 경우 이러한 불안정성은 극대화됩니다.

----일본 사극 가마쿠라도노의 13인에 등장하는 다이라노 키요모리, 사실상 최초의 무가정권의 수반입니다.-----
12세기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가 정권을 장악하고 헤이시정권(平氏政権)을 수립하면서 헤이시는 지방의 수십개 쿠니(国)의 지행국주(知行国主)가 됩니다. 각 지역의 지방관 임명권을 가지고 거기서 연공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한거죠.
이는 헤이시 가문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들이 기존 재지사회의 재청관인들의 직(職)을 획득해 소유권을 침해하는 사건으로 이어지죠. 여기에 불만을 품은 관동지방의 재지무사들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봉기를 지지하여 들고 일어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지방관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원래 재지무사들이 개발한 토지의 권리가 지방관의 교체나, 지방관이 다른 재지무사에게 시키(職)를 임명해 소유권이 날아가는 사태를 막기 위해 중앙의 권력자에게 토지를 바치는 것을 기진(寄進)이라고 하며, 이를 통해 장원(荘園)이 만들어집니다.
재지무사는 장원의 현지관리자인 쇼칸(荘官)이 되어 중앙의 권력자의 힘으로 자신의 소유권을 보장받습니다. 근데 장원영주는 연공만 잘 바친다면, 또는 더 많은 연공을 바친다면 누가 쇼칸이 되던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아예 직접 누군가를 파견하여 기존의 쇼칸을 죽여버리고 장원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중세 일본에서 지방의 통치권은 교토의 권력을 가진 가문들, 권문(權門)의 사적 소유와 재지유력자에 대한 주종관계에 의해 성립됩니다. 국가에 의한 공적 지배가 아닌 유력 가문들에 의한 사적 지배가 이루어지는 구조는 공적 이익과 안정성, 정당성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가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재지사회에서 무사들의 소유권을 불안정하게 만들죠.
그러한 구조 내에서 재지무사들은 그 불안정한 상황에 불만을 가지기도 하고, 동시에 이를 기회삼아 헤이시 정권의 가신이 되어 주변의 재지무사들을 압박하는데 참여하기도 하고, 반대로 이에 저항하기 위해 유력한 무가귀족을 후원하여 봉기하기도 합니다.

----가마쿠라도노의 13인에 등장하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관동지방 무사의 지저스 크라이스트로서 불안정한 소유권 문제를 해소해준다.---
자신의 가업(家業)을 지키기 위한 재지무사들의 행동은 재지사회를 더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뿐 아니라 아예 일본의 정권 자체를 교체해버리는데까지 이릅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자신과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들인 고케닌(御家人)의 기존 영지를 인정하고 새로운 영지를 지급함으로서 이 불안정한 상황을 부분적으로 해소해줍니다.
소령(所領)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서 고케닌(御家人)에게 지급된 것으로서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장원영주가 고케닌에게 지급된 영지를 선조로부터 내려온 땅이라고 하며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고케닌에게는 불만스러운 일이므로 이런 소송은 다루지 않는다.
어성패식목 제7조, 요리모토공이나 마사코님으로부터 주어진 소령(所領)의 취급
그러나 기존 연재글 가마쿠라 막부는 왜 자력구제를 타파하지 못했을까?(링크) 에서 가마쿠라시대에 날뛰던 악당(悪党)의 등장을 보시면 알겠지만 이 소유권의 불안정성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됩니다. 기본적으로 막부는 일부의 재지무사들을 고케닌으로 삼았을 뿐, 실질적으로 막부와 주종관계를 맺지 않은 무사들이 더 많았거든요.
게다가 가마쿠라 막부가 헤이시(平氏)를 타도하고,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천황과 조정을 격퇴하면서 기존의 헤이시측 가신들과 조정을 지지한 무사들의 영지를 빼앗아 고케닌(御家人)에게 나누어주기도 합니다. 입장만 바뀌었을 뿐 재지사회의 소유권을 불안정하게 만든 건 가마쿠라 막부 역시 마찬가지였죠. 막부 역시 하나의 권문(權門)이기 때문입니다.
중세 일본 무사들의 소유권의 불안정성은 그나마 전국적인 통치권을 유지하던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되면서 심화됩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유력 무사들은 전국 각지에 분산된 영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부와 주종관계를 맺은 이들은 그 권위를 기반으로 분산된 영지의 소유권을 보장받았습니다.

----남북조시대, 재지무사들이 고다이고 천황,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다다요시 3파로 나뉘어 격렬히 분쟁을 벌였다.-----
그러나 막부가 붕괴되고 남북조시대가 개막하면서 무사들은 자신의 소유권을 자신의 힘만으로 지켜야만 했습니다. 각지의 소령을 관리하던 무사들의 가신(家臣)이자 혈통상 방계에 속하는 서가(庶家)들은 독립하게 되기도 합니다. 분산된 영지를 난세에서 지키는 건 어려워지고 자신의 실력으로 지킬 수 있는 단일한 지역, 쿠니(国)에 소령을 집중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전국시대까지 이어지는 재지무사들, 특정 쿠니(国)를 연고로 하는 고쿠진(国人)이나 구니슈(国衆)라 불리게 되는 집단이 형성되는거죠.
소유권의 불안정성은 무사들을 점점 더 재지성이 강한 존재로 만듭니다.
그들은 고려의 향리들처럼 중앙에 진출하겠답시고 과거공부를 할 여유가 없습니다. 중앙권력과의 연계는 철저히 자신의 불안정한 소유권을 강화하고, 동시에 이 소유권의 불안정성을 활용해 주변의 다른 무사들의 권리를 침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재지무사들은 이 소유권의 불안정성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였죠. 당연히 재지사회에서 막부나 장원영주의 판결이 무시되고 자력구제와 사적 분쟁이 넘쳐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에 의한 공적지배가 아닌 가문의 이익을 위한 사적지배로 지방통치가 이루어지고 복수의 권력주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결과, 중세 일본 무사들의 소유권은 불안정해집니다.
중세 일본의 재지무사들은 자신의 불안정한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서 점점 더 재지성을 강화하게 되고 폭력적인 성격을 강화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려의 호족, 그리고 이후의 향리들의 상황은 어땠는지 살펴봅시다.
고려의 호족, 향리의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과 수조권
한반도의 호족들은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지역 자위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해당 지역의 토지와 농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나갔습니다. 고려의 통일은 이러한 재지사회의 자위공동체를 포섭해 흡수하게 되죠.
이렇게 구축된 자위공동체의 토지와 농민들은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합니다. 고려는 이러한 호족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권리를 인정함으로서 그들이 고려의 통치에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매우 어려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호족, 나중에는 향리라고 불릴 재지유력자들의 경제적 기반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냐, 아니면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수조권(收租權)이냐에 대한 논란이죠.
이 문제는 고려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자 아직도 풀리지 않은 논쟁의 대상입니다. 고려시대의 농업생산력 수준이 어느정도냐, 그리고 토지소유권이 발달했느냐는 한국 중세사 연구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화두이기 때문이죠.
일단 여기서는 향리의 경제적 기반이 안정적이었는지에 초점을 두고 살펴봅시다.
고려 전기에 향리에게 지급되는 토지의 내역으로 추정되는 문헌기록은 성종 2년(983년)에 지방 주현(州縣)에 따라서 공수전(公須田)과 장전(長田)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중 장전(長田)으로 군현마다 2~5결(結)의 토지가 향리들에게 지급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너무 적어서 이건 향리에 대한 급전으로는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군현의 향리 수가 여러명이기 때문이죠. 한명당 1결 이하에 불과하니까요.
문종 30년(1076년) 경정전시과(田柴科)에 대한 사료에는 12~14과(科)에 향리의 직책명인 대상(大相), 원보(元甫), 원윤(元尹)의 명칭이 나타납니다. 토지지급량은 1인당 30~40결의 밭(田)과 5~10결의 시지(柴地), 땔나무등을 마련하는 수조권이 분급됩니다. 이외에도 향리들은 지방군에 복무하여 무산계 관직을 얻음으로서 수조권을 분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토지들에는 이를 경작하는 농민들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여기서 수확의 일부(租)를 얻을 권리라고 해서 수조권(收租權)이라고 부르고 있죠.
이러한 사료에 대해서 학계의 해석은 둘로 갈립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및 의(義)를 좇아 귀순한 성주(城主) 등에게 훈전(勳田)을 50결부터 20결에 이르기까지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고려사, 식화지 공음전시(功蔭田柴) 경종(景宗) 2년(977) 3월
고려시대 향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원로 여성학자인 박경자는 향리에게 지급된 수조권이 나말여초 시기의 혼란기에 호족들에 의해 구축된 사적 소유권을 국가가 인정하고 추인하는 절차를 밟은 것으로서 자손에게 세습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고려초기에 귀순한 재지유력자인 성주(城主), 즉 호족들에게 지급된 훈전(勳田)은 새로운 토지를 지급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실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명목상 고려왕조에게 바치고, 다시 지급하는 과정을 거쳐서 소유권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영(李永)은 자가 대년(大年)이고 안성군(安城郡) 사람이다. 아버지 이중선(李仲宣)은 안성군의 호장(戶長)으로 경군(京軍)에 선발되었다. 이영은 어려서부터 스승을 따라 공부하였고, 아버지가 죽자 영업전(永業田)을 물려받아 서리(胥吏)가 되려고 정조주사(政曹主事)에게 문서를 주었는데, 〈이영이〉 읍(揖)만 하고 절하지 않으니 주사(主事)가 노여워하며 욕하였다. 이영이 즉시 그 문서를 찢어버리며 말하기를,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벼슬할 것인데 어찌 너희 같은 무리에게 예를 차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사 이영(李永) 열전,
12세기 초 숙종 시기의 이영의 사례는 이러한 사적 소유권이 꼭 호장(戶長)에 임명되지 않더라도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상속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박경자는 향리의 경제적 기반의 핵심은 이러한 사적 토지소유권이고, 여기에 추가로 전시과나 무산계에 의한 수조권이 중첩적으로 추가되어 있었으리라 봅니다. 이러한 관점은 향리에게 지급된 수조권의 토지면적은 기존 토지소유에 대한 과세의 면제가 얼마나 적용되는지에 대한 상한량이라고 보는 거라고 할 수 있죠.
반면 고려사 연구자 이진한은 향리들 역시 토지분급의 대상이며 직역 수행의 대가로서 토지가 분급되었다고 해석합니다. 단지 소유토지에 대한 면제라면 토지소유가 더 많은 상층 향리가 오히려 더 적은 토지가 지급되는게 아닌가라는 해석입니다.
이 글은 이런 저명한 학자들의 논쟁을 해결하려는 의도가 아니므로 이렇게 형성된 고려 재지유력자인 향리층의 경제적 기반이 불안정했는가에 초점을 두면서 두 가설 다 검토해보겠습니다.
일단 고려 전기에는 호족이나 향리가 보유한 토지나 예속민(田民)을 빼앗겼다거나 대토지가 겸병된다거나 하는 사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만약에 있다고 하더라도 주로 수조권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
고려의 사적 토지소유에 대한 기록은 현종 22년(1031년) 정도사(淨兜寺) 5층석탑의 조성에 대한 기록(五層石塔造成形止記)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 문헌자료를 통해 고려의 토지소유권은 국가가 토지조사를 하는 양전(量田)의 결과인 토지대장에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중세 일본의 재지무사가 지방관청이나 장원과의 사적 주종관계에 의해 성립된 직(職)을 읽으면 대대로 세습해오던 토지와 예속민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할 수 있는데 반해서 고려의 향리들은 국가라는 공권력에 의해 작성된 토지대장에 의해 자신의 소유권을 보장받습니다.
이렇게 공증된 소유권을 지방관이나 중앙권력자가 사적으로 빼앗거나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일본과는 다르게 고려사회에서는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적 토지소유권이 향리의 경제적 기반이라고 가정할 경우, 고려 전기의 중앙권력자들이 이를 침해하는 건 사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고려 전기는 인구밀도가 낮고 농업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토지가 그다지 희소한 자원이 아니었습니다. 토지는 오직 경작자와 같이 존재할 때만 메리트를 가집니다.
중앙권력자들이 이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여 토지를 빼앗는다 할지라도 재지사회에 있는 향리와 달리 이를 경작할 사람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굳이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고 향리의 소유권을 침해하는건 적어도 고려 전기에는 매력적이지 않았을 겁니다.
즉 고려전기 향리의 경제적 기반이 사적 토지소유에 기반할 경우 이는 매우 안정적이었을 것이란 이야기죠. 뺏아봤자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향리의 경제적 기반이 향직(鄕職)을 통해 분급되는 수조권에 기반한다면 어땠을까요? 이거 중세 일본 재지무사의 시키(職)하고 비슷해 보이네요? 향직을 상실하면 일본 무사들처럼 되는거 아니에요?
하지만 양자의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일본의 경우 수백년간 이어져온 고대국가에서 계승된 중앙권력은 재지사회에 건국 초기의 고려에 비해 훨씬 더 강한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고려는 나말여초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통일신라 시기의 군현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시작해야 했죠.
고려 건국 초기에는 아예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은 상태로 호족들에게 지방의 통치가 위임되었습니다. 성종2년(983년)에 가서야 주요 지역에만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향리는 일본의 재지무사보다 훨씬 유리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고려의 지방관이나 중앙권력자들이 중세 일본과 달리 재지유력자의 직위를 쉽게 교체하거나 박탈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론적으로는 최상위 향리인 호장(戶長)의 임명권은 지방관에게, 부호장 이하의 임명권은 사심관에게 있지만 향리의 직위는 재지사회에서 향리들의 가문의 영향력에 따라 세습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는 고려의 지방통치가 강화된 11세기 중반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주현(州縣)의 향리(鄕吏)들은 첫 관직을 후단사(後壇史)로 하고, 두 번 옮기면 병사(兵史)·창사(倉史), 세 번 옮기면 주·부(府)·군(郡)·현의 사(史), 네 번 옮기면 부병정(副兵正)·부창정(副倉正), 다섯 번 옮기면 부호정(副戶正), 여섯 번 옮기면 호정(戶正), 일곱 번 옮기면 병정(兵正)·창정(倉正), 여덟 번 옮기면 부호장(副戶長), 아홉 번 옮기면 호장(戶長)으로 한다.
공수정(公須正)·식록정(食祿正)은 호정에 준하고, 부정(副正)은 부병정·부창정에 준하며, 객사정(客舍正)·약점정(藥店正)·사옥정(司獄正)은 부호정에 준하고, 부정(副正)은 주·부·군·현의 사에 준하되, 가풍(家風)이 호정·부병정·부창정에 미치지 못하는 자로써 임명한다.
만약 대대로 가풍이 있는 집안의 자식이면 처음에 병사·창사를 제수(除授)하고 그 다음 가는 자는 처음에 후단사를 제수한다.”
고려사 선거지(選擧), 전주(銓注), 지방 아전의 승급규정, 문종 5년(1051년) 10월
향리는 단일 계층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3개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대대로 가풍이 있는 집안(累世有家風)으로서 고려의 음서제도처럼 처음부터 2단계 향직에서 시작합니다. 이들은 아마도 호장(戶長)이나 부호장(副戶長)을 세습하면서 과거제도에서도 특혜가 제공되는 최상층 향리층으로 추정됩니다.
그에 미치지 않는 가풍을 가진 2개의 집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층 향리층을 형성하며 그 자료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이들이 하층 향리인 차리(次吏)였으리라 추측됩니다.
금석문이나 호적자료를 보면 최상위 호장층은 대부분 같은 본관이나 인근 군현의 호장층이나 관직에 진출한 품관층과 주로 혼인하고 그 밑에 해당하는 집단들과는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계급내혼의 양상은 재지사회의 향리층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엄격한 계층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때문에 호장(戶長)이 지방관에 의해 결정되는 임명직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최상층 향리인 호장직은 대대로 세습되는 경향을 보이죠.

---중세 일본에서 재지무사의 시키(職)는 중앙의 공가, 무가, 사찰등의 권문세가들에 의해 결정된다.----
중세 일본에서 재지무사들의 소유권을 결정하는 시키(職)는 다수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중앙의 공가귀족, 무가나 막부, 사찰등에 의해 흔들립니다. 반면 고려의 향직을 임명하는 지방관이나 사심관은 단일한 공적 권력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국가재정의 안정적 수취를 보장하는 향리를 무분별하게 교체하거나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 허용된 것이 아니며, 고려의 지방관은 통치권을 사적으로 소유한 것도 아니므로 굳이 지방통치를 흔들리게할 메리트가 없습니다.
즉 고려 전기의 향리들의 경제적 기반이 사적 소유권이 아닌 향직에 의해 지급되는 수조권에 의존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중세 일본의 무사들처럼 불안정한 소유권 문제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자 이제 고려 전기 향리의 경제적 기반이 매우 안정적이라는걸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소유권이 안정적이라는 것이 그들이 과거공부를 열심히 해야할 메리트를 제공하는건 아닙니다. 단지 그럴 여유로운 환경을 제공할 뿐이죠.
하지만 당시 고려의 사회경제적 환경은 재지사회의 향리층이 과거공부를 하던, 군공을 세우던간에 중앙관직에 진출해야할 메리트를 제공했습니다.
고려의 미발달된 농업은 향리를 개경으로 이끈다.
위에서 설명한바 있지만 고려시대, 특히 고려 전기의 경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경제적 상식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농업생산력이 떨어지고 인구밀도가 낮기 때문에 토지는 남아돌게 되고 희소가치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때문에 토지가 처분가능한 재산으로서 매매의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토지의 낮은 가치 문제와 상대적으로 노동력의 가치가 토지가치보다 더 높은 현상은 조선전기인 16세기까지도 이어지게 됩니다.
고려시대의 농지(田)는 오직 경작 농민(人丁)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가치가 있습니다. 향리가 지방통치에서 중요했던 이유도 바로 이때문입니다.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향리의 전신인 호족들은 향도(香徒)와 같은 종교결사를 기반으로 자위공동체를 구성하고 지역민들을 결집시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지역민들은 토지를 경작하면서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죠.
호족들은 이러한 지역민에 대한 영향력을 기반으로 토지에 농민을 결합시켜 지배합니다. 고려 왕조는 이러한 호족의 지배력을 활용하여 호구(戶口)와 토지를 조사해 장적(帳籍)을 작성하고 등록된 지역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합니다. 토지에 경작민을 묶어두어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조세를 수취할 수 있도록 하는거죠.
고려의 이러한 지방통치 방식을 고려사 연구자인 채웅석은 본관제(本貫制)라고 명명합니다.
이는 왜 고려시대에 토지의 매매가 일반적이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작 농민을 확보하지 않으면 경영하는 농지의 규모를 확대하는게 의미가 없습니다. 농민의 거주이전이 허락되지 않고 인구밀도가 낮기 때문이죠.
즉 재지유력자인 향리가 가산(家産)을 확대하기 위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겁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통제하고 있거나 국가가 지급한 수조권에 의해 확보된 경작농민(人丁)을 새롭게 추가로 구하기가 어려우니까요.
고려 전기의 사회에서 향리층이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서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개경에 상경해서 과거에 합격하거나, 군인이 되어서 군공을 세우거나, 승진해서 관직을 얻는 것입니다. 관직을 얻으면 그에 따라 경작농민(人丁)과 토지(田)이 결합된 수조권을 새롭게 획득할 수 있으니까요.
즉 고려의 향리는 명예욕이나 프로파간다에 빠져서만이 아니라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기 때문에 중세 일본의 재지무사들과는 다르게 중앙 관직으로의 진출을 선망할 분명한 메리트가 존재했던거죠.
고려의 지방교육 강화, 과거제도와 함께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들은 고려전기의 향리가 중세 일본의 무사들과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도록 유도합니다.
하지만 고려후기가 되면 상황이 점차 바뀝니다. 향리의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과 재지영향력을 보장해주었던 본관제가 12세기 이후로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고 중앙집권의 강화는 향리의 입지를 악화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후기에 재지사회에서 향리들이 나말여초의 호족들처럼 중앙정권을 전복시키고 독자적인 지방지배를 복구하려는 대규모 반란은 발발하지 않습니다. 고려의 중앙집권은 꾸준히 진행되었으며, 향리층의 선비(士)로의 전환은 멈추지 않았죠.
고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향리층을 압박하고 그들의 신분을 끌어내리고 있었음에도 지방에서 중앙정권에 도전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참고자료
http://www.ktmchi.com/rekisi/ 武士の発生と成立
田口義之, "備後の国人- 国人領主制の成立と室町幕府"
송기원, "고려 전시과 수취의 성격"
박경자, "고려시대 향리연구"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산국사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이진한, "고려시대 토지제도의 변화와 향리"
채웅석, "본관제의 성립과 성격"
채웅석, "고려의 중앙집권과 지방자치, 본관제를 통한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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