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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람지휘관 대회] 비처럼, 꽃처럼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5.01 23:12:13
조회 12846 추천 113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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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톡. 한 방울 한 방울 비가 내렸다. 지표면에 떨어져 튄 빗방울은 이내 갈라진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톡. 톡. 톡. 다른 빗방울들도 뒤를 따랐다.

메마른 평원 위에 머나먼 기억속의 풍경이 되살아났다. 이제 살았다며 뛰어나온 마을 사람들 틈에서 나는 아버지의 하얀 가운 자락을 잡고 서 있었다. 아버지의 메마른 얼굴에도 빗방울이 스며들었다.


비처럼, 다른 이의 마음을 적셔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찰박. 무언가 흘러와 발등을 적셨다. 내려다보니 피처럼 붉었다. 불안해져서 손에 힘을 주며 아버지를 올려다 보았다. 아버지의 이마에도 붉은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가 비명으로 바뀌었다. 절망에 찬 목소리가 빗방울 대신 귀를 적셨다. 구해줘. 무서워. 살려줘. 무서워.


아버지가 바닥에 쓰러졌다. 찰박. 무언가 흘러와 발등을 적셨다. 양 손으로 귀를 막았다. 끈적한 것이 묻어났다. 언제나 손을 깨끗이 해야 한다.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치맛자락에 손을 닦았다. 새하얀 원피스가 붉게 물들었다.


어떡하지. 옷을 더럽혀 버렸어. 누워있는 아버지 옆에 쭈그려 앉아 더러워진 원피스를 문질러 보았다.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 끌었다. 안 돼요. 아버지를 깨워야 해요. 현관에서 자고 있을 찰스도 깨워야 해요. 기다려 주세요. 아아, 정말.

참을성 없는 사람이네. 결국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무기질한 회색 눈. 검은 소녀.






“지휘관님, 일어나셔야 해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비명을 지른 것도 같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불안한 기분으로 눈을 뜨자 다행히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건 검은 눈동자가 아니었다. 평생 못 벗어나겠어 이거. 왼팔로 몸을 지탱해 상체를 일으켰다. 붙어 있던게 많이 줄어서 그럴까, 힘이 없는데도 그리 어렵진 않았다.


“잘 잤어? 시노.”

“전혀요. 어서 일어나세요. 식사할 시간도 없어요.”


시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안아들었다. 이미 몇 번 당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 나도 모르게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이것 저것 없어져서 가볍지?”


나를 안아들고 침실에서 반쯤 폐허가 된 부엌으로 향하던 시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러다간 동이 틀때까지 그대로일 것 같아 세 개 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상처투성이인 시노의 볼을 어루만졌다.


“미안.”


시노는 입술을 깨물며 나를 식탁 의자에 앉히곤 돌아섰다. 그리곤 "수프 덥힐 테니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 매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내고 부엌 구석에 만든 임시 버너로 향했다.


소화기관은 대충 남아 있어서 다행이네. 이번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금세 고소한 향이 두 평 남짓한 부엌을 채웠다. 덜덜 떨리는 스푼으로 따뜻한 수프를 한 입 먹었다. 차갑던 몸에 온기가 퍼졌다. 추격당하는 중에 이런 사치도 부릴 수 있다니.


“카리나랑 45로부터 연락은?”

“없었어요.”


시노가 UMP45가 건네준 이어셋을 만지작거렸다.


“미리 약속한대로 움직일게요. 26분 후에 출발이에요.”

“그래.”


목소리는 간신히 돌아왔지만 새빨개진 눈은 어쩌지 못했는지 풀어 내린 머리카락으로 가려보려 애쓰는 모습에 가슴 한쪽 귀퉁이가 저려왔다.


“시노. 이리 와.”


내 부름에 시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쭈뼛쭈뼛 내 앞으로 다가왔다. 화려했던 보라색 의장복은 그슬리고 찢겨 넝마가 된 지 오래였다. 스타킹은 너덜너덜해져 가느다란 다리를 간신히 덮고 있었고 새하얀 인조 피부 아래로 금속 구동부가 드문드문 보였다.


다가선 시노의 손을 잡고 살짝 아래로 끌어당겼다. 스르르 주저앉는 시노의 주위로 보랏빛 머리카락이 꽃처럼 피어났다.


“머리 많이 자랐네.”

“별로 지휘관님 때문에 기른 건 아니에요.”


뚱한 목소리였지만 놓지 않겠다는 듯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볼에 부비며 말해서야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피식 웃음지으며 시노의 손을 살짝 풀었다.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봤다.


“키스, 해줄래?”


시노가 무릎을 세워 눈높이를 맞췄다. 붓꽃 향기가 났다. 아아, 전술인형은 참 좋겠네. 이렇게 꾀죄죄한 몰골로도 좋은 냄새가 나고. 문득 자신의 상태에 생각이 미쳤다. 시노가 대충 몸을 닦아주긴 했지만 그래도...


시노의 향기가 확 덮쳐왔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움에 밀어내려던 왼손은 갈 곳을 잃고 시노의 어깨에서 맴돌았다. 입술만 맞대고 있을 뿐인데도 숨이 가빠져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온기가 그리웠던 거야.


잠시 멈춰 있던 시노가 고개를 틀며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헤매던 왼손이 시노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렸다. 하읏, 꼴 사나운 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맞댄 입술이 빙그레 호를 그리는게 느껴졌다. 시노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더니 부드러운 혀가 살짝 내 입술을 핥았다. 이것만은 안 돼. 하다못해 물이라도 마셔야...


내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시노의 손이 뱀처럼 허리를 감으며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상처투성이인 허벅지에 하얀 손이 닿자 통증인지 쾌감인지 모를 알싸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덜덜 떨렸다.


입은 절대 벌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노크 한 번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허리와 허벅지의 맨살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벌어진 입술사이로 시노의 혀가 파고들어왔다.


꽉 다문 이를 벌려보려 하던 시노는 이내 방향을 틀어 무방비한 잇몸을 슬쩍 핥았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몸을 비틀어 살짝 벌어진 틈으로 시노의 혀가 침입했다. 이리 저리 도망치려는 내 혀를 순식간에 얽어 매었다. 자포자기하고 그대로 몸을 맡기자 시노는 만족스럽게 나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읏, 츗ㅡ, 하읏,ㅡㅡ, 흐앙, 츄릅ㅡ"


혀의 예민한 돌기들이 비벼질 때마다 흠칫흠칫 허리가 튀어 올랐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나도 적극적으로 혀를 얽었다. 흘러들어오는 시노의 타액에선 달콤한 맛이 났다.


무릎 아래로 잘려 나간 오른다리와 왼팔로 시노를 껴안았다. 시노도 나를 부서질듯이 세게 안아주었다. 그 따뜻함과 충족감에 눈물이 흘렀다. 아아, 시노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기분 좋아. 시노의 향기에 휩싸여 열이 오른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읏, 츕... 흐윽, 시, 노... 앗ㅡ, 히잇?!”


그 순간 온 몸에 전기가 통했다. 눈 앞이 번쩍이고 하반신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련했다. 말도 안돼. 나 키스만으로 가버린거야? 시노가 힘이 빠져 무너지려는 내 몸을 받쳐주었다.


내가 진정될 때까지 잠시간 기다리던 시노가 입술을 뗐다. 투명하게 이어지는 타액을 나도 모르게 멍한 눈으로 좇았다.


“어머, 지휘관님? 방금 혹시 가버리신건가요?”


잠깐 빈틈을 보였더니 어느새 시노는 완전히 부활해 있었다. 볼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달뜬 숨을 내쉬는 입가엔 고혹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출발까지 21분, 이제 20분 남았네요. 어떻게 하실래요?”


나는 말없이 하나 남은 눈을 감았다.




“더미, 가동하고 올게요.”


시노가 내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거실로 향했다. 식탁에 달아오른 뺨을 대고 식히며 시노가 마지막 하나 남은 더미 인형의 전원을 켜고 시스템을 점검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아직도 호흡이 불규칙했다. 폐의 갯수가 절반으로 줄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닌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더미 인형이 기동한 후 어느새 정기행사가 된 작업을 했다. 시노의 등에 업히고, 더미 인형이 단단히 몸을 묶어 고정해 주었다. 그동안 시노는 탄창과 약실을 점검하곤 권총을 장전해 내 왼손에 들려주고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그 후 더미 인형의 등에도 다른 더미 인형의 잔해를 대충 모아 만든 나의 더미를 업히고, 묶었다.


내 모습처럼 조각나 있는 더미의 모습에 언제나처럼 시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시노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이 내 역할이다.


“걱정 마. 이런 몸으로도 순식간에 세 명 머리에 총알 박아넣는거 봤잖아?”

“누가 그런 걱정 했대요?”


뾰로통해진 시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틀어올린 머리카락 끝이 볼을 간질였다. 장난스레 살짝 깨물자 시노의 몸이 땅에서 5cm쯤 튀어 올랐다.


“......지휘관님.”

“복수야.”




마당에서 날이 저물때까지 보초를 서던 반파된 더미 인형의 전원을 끄고 무장을 챙겼다. 간신히 붙어만 있는 두 다리,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오른쪽 상반신. 툭 고개를 떨구자 머리카락이 기대어 앉아있던 울타리에 걸렸다.


시노가 힘들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어. 꼭 안아주고 싶었다. 팔 하나로는 어려웠다. 쓰다듬어 주기라도 하고 싶었다. 권총이 붙어있는 세 손가락짜리 손으로는 불가능했다.


자유로운 건 입뿐이었다. 그들도 내 말을 필요로 해서 남겨둔 것이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자. 집에 가야지.”

“......네.”


입에서 나온 거라곤 참 멋도 없는 말이었다.

시노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두운 숲속을 달려가는 중에 나뭇잎 사이로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였다.


“한 발 부족해!”


시노의 등에 업힌 상태로 쏜 권총탄이 스트렐치 둘의 바이저를 부쉈다. 무너져 내리는 동료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남은 스트렐치가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시노가 더 빨랐다. 나와 같은 모델의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스트렐치의 미간이 있을법한 곳을 꿰뚫었다. 말없이 권총을 갈무리한 시노가 내 총의 탄창을 교환해주었다.


시노는 좌측의 대응을 나에게 일임할 정도로 연산능력을 안전한 탈출경로를 찾는 데에 쏟고 있었다. 그을음이 묻은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탈출지점으로 이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기습을 받게 되었다. 첫 공격에 더미 인형이 로델레로의 레이저에 직격당했다. 시노와 나의 더미가 남긴 잿가루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하얀 세력들로부터 우리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이미 발각된 이상 무선침묵이고 뭐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카리나, 카리나! 여기는 카르카노 M91/38! 지금 하얀 세력에게 공격받고 있어요! 탈출 지점까지 거리 3km! 당장 지원을 요청합니다!”

「확인했어! UMP45의 제대가 교전 발생 지점으로부터 남쪽 1km에서 접근중! 그리폰 본대도 가용한 모든 차량을 동원해 급속 기동 할거야!」


시노의 귀에 걸려있는 이어셋에서 지직대며 카리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급박한 와중에도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버텨! 곧 UMP45와... 아앗! 적들이 UMP45의 제대를 막...」




“움직이자.”


내 말에 시노가 작게 끄덕였다. 달리느라 흔들리는 보라색 머리카락 사이로 뭉개진 귀와 이어셋의 잔해가 보였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전투가 있었다. 다행히도 큰 상처 없이 살아남았지만, 처음의 기습에서 스트렐치의 총탄 한 발이 시노의 귀와 통신기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아마 내 머리를 노린 거겠지.


우거진 숲을 헤치고 달려가던 중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연병장 크기의 공터였다. 근방에 적의 기척은 없어 보였다.


며칠 전 시노가 간신히 스캔한 지형도를 떠올렸다. 좋아, 여기만 지나면...


“카리나가 우리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 수는 없겠지만 적들의 움직임으로 유추할 수 있을 거야. 45도 계속 우릴 뒤쫓을 거고, 본대 애들도 움직이는 중일테니까...”


희망을 잃지마.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폭발음과 함께 몸에 무언가 푸욱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폭압 때문에 시노의 몸에 묶여 있던 줄이 끊어져 흙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끔찍한 고통이 온 몸을 달렸다. 도저히 몸을 내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뱃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울컥 토해냈다.


“지휘관님!”


멀리서 시노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얼마나 날려온거람. 희미해지는 시야 구석에서 나무를 헤집고 하얀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큭..!”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시노가 무릎쏴 자세를 취했다.


기이이잉. 이곳저곳 인공 피부가 벗겨져서인지 시노의 코어가 기동하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타앙! 별 다를 것 없는 격발음이었지만 도펠죌트너의 몸체 중앙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천천히 쓰러지는 거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시노는 허겁지겁 내 몸을 살폈다.


“지휘관님! 지휘관님! 정신 잃으시면 안 돼요! 제가 구해드릴테니까..!”


시노가 코어의 출력이 낮아져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톡. 톡. 시노의 눈물이 내 오른쪽 눈이 있던 자리를 적셨다.


“안 돼... 안 돼요...! 카리나 씨! 응답하세요! 지휘관님이...!”


절망적으로 부서진 통신기를 조작하던 시노의 몸이 얼어붙었다. 흐릿한 눈으로 시노의 시선을 따라가자 멀리서 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이내 도펠죌트너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넷... 아니 다섯인가. 큰일이네. 피가 부족해서인지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시노라도 도망치게 해야 하는데.


“도망...가... 시노...”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당신은 내가 지킬거야.”


간신히 목소리를 낸 보람도 없이 시노는 이를 악물고 노리쇠를 당겼다.


“명령이야!”


힘을 짜내어 겨우겨우 큰 소리를 냈다. 시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서, 가...”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치미는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네가, 여기서... 마인드맵 백업도, 못 하고... 죽어버리면... 이 며칠 동안, 우리 둘이서 함께한 시간... 나눈 이야기들, 감정들... 전부, 없어져버려. 아무도, 모르게 돼...”


적의 파상공격으로 고립되어 따로 탈출했을 때,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암울했지만 시노와 단 둘이어서 조금은 행복했다. 처음엔 혼자서는 화장실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에 절망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라고... 조금 정도는 생각하게 되었다.


시노가 무리해서 UMP45와 함께 나를 구하러 와 준 덕분에 그 지옥 같았던 몇 달을 이렇게 조금이나마 보상받게 되었다.


“기억, 해줘. 처음 만났을 때... 내 모습도. 지금, 이 모습도. 부탁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시노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예전부터 울먹이는 얼굴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엉망진창으로 우는 모습도 역시 예쁘구나.


“당신 같은거... 정말로, 정말로 싫어요!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싫어하니까...!”


시노가 내 가슴팍에 머리를 묻었다.


“죽지 마... 혼자 두지 말아줘.”


사라질 듯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속삭이는 시노의 모습 뒤로 거체들 사이에서 하얀 소녀가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거대한 낫이 달빛을 반사해 섬뜩하게 빛났다.


“신파극은 끝났습니까?”


소녀의 핏기 없는 입술에 가학적인 미소가 걸렸다. 고개를 들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노가 무언가 결심한듯 다시 나를 내려다 보았다. 방울방울 눈물이 맺힌 옅은 옥색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사랑해요, 지휘관님. 지휘관님의 전술 인형이어서 행복했어요.”


입술을 뗀 시노가 미소지었다.


“명령은 꼭 지킬게요.”

“잠깐, 시노...!”


시노가 몸을 일으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말리려는 목소리 대신 또다시 핏물이 왈칵 튀어나왔다.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동반자살하려는 겁니까? 혼자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리가요. 당신들 따위를 정리하는 건 맨손으로도 충분해요.”


소녀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결정입니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철컥. 소녀의 말이 끝나자 도펠죌트너들이 일제히 양 손의 주포를 들어올렸다. 그 소름끼치는 금속성에 맞서 시노도 이곳저곳 칠이 벗겨진 총을 겨누었다. 코어의 기동음은 들리지 않았다.


“처리하세요.”


소녀의 입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 몸의 기능이 하나 둘 정지하는 것이 느껴졌다.


쾅! 멀리 폭발음이 들렸다.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를 연달아 터지는 폭발과 섬광이 밝혔다. 총을 내던지고 내 상태를 확인하는 시노의 팔 사이로 쓰러지는 하얀 거체들이 보였다.


“연막탄 전개! 카리나! 지휘관 확보했어! 416! 나인! 계속 쏟아 부어!”

「좋았어! 선발대 합류까지 7초!」


숲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거의 고장난 귀로도 지겹게 들었던 수송헬기들의 로터 소리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안녕, 지휘관. 불행을 전하기엔 너무 안 좋은 타이밍인가? HS2000! 어서 이리 와!”


씨익 웃는 UMP45의 뒤로 로프가 드리워졌다. 차례차례 레펠로 내려오는 익숙한 모습들에 나도 모르게 하나 남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장갑판 전개 완료!”

“엄폐물 설치하고 산개해! 시노! 지휘관님을 후방으로 옮겨!”

“목숨 걸고 주인님을 지키세요!”


수송헬기에서 강하한 전술 인형들이 공터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스쳐지나가며 나에게 눈길을 주는 얼굴들엔 결의와 안도, 걱정과 각오가 뒤섞여있었다.


「본대 도착까지 8분! 무슨 수를 써서든 버텨!」


혼란을 수습한 하얀 무리가 UMP45가 전개한 연막을 헤치고 전진해왔다. 언제 접근했는지 수많은 스트렐치들이 아군을 반쯤 포위하고 있었다.


팽팽하게 흐르는 긴장감 사이로 소녀가 비척비척 걸어나왔다. 하얀 옷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저격당해 반절 정도 날아간 왼뺨 사이로 입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모조리... 모조리 쓸어버리세요!”


소녀의 악에 받친 목소리에 하얀 무리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날아든 유탄이 장갑판과 임시 엄폐물에 연달아 부딪혀 폭발할 때마다 공터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총성과 폭발음이 숲을 가득 메웠다.



시노가 나를 안아들고 공터 구석 나무 그늘까지 옮겼다. 발사된 조명탄이 시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밝혔다. 꼬리를 길게 남기며 천천히 떨어지는 조명탄을 배경으로 곰인형이 불쑥 눈 앞에 나타났다.


“아, 안녕하세요, 지휘관님. 일단 안정제를 놔드릴게요. 바이탈 사인 체크랑 긴급 수혈도... 으윽.”


HS2000이라고 했었나. 소심해 보이는 인형이 내 상처를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아, 아마 괜찮을 거에요.”


으으- 죽는 소리를 하며 주사를 놓는 HS2000 옆으로 잠깐 비켜섰던 시노가 다가왔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시노는 다 안다는 듯 다정하게 내 볼을 쓸었다.


“아까 말했죠? 지휘관님은 제가 꼭 지킬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미소짓는 시노는 지금껏 본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말라붙은 눈물 자국도, 이마에 묻은 그을음도, 생채기로 가득한 볼도, 헝클어진 먼지투성이 머리카락도.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는 애정이 가득 담긴 옥색 눈동자도.


약기운이 퍼져 내려앉는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붙들며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것 같아. 무서워. 무서워.


“약속할게요. 이런 마인드맵을 가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진짜 약속이에요.”


시노가 아직도 내 왼손에 붙어있는 권총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지, 검지, 그리고 새끼손가락. 손톱을 뽑힌 데다 이리저리 쓸려 피투성이가 된 내 새끼손가락에 시노가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일어나시면 저희의 집일거예요. 저도, 지휘관님도, 다른 아이들도 전부 함께.”


시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붓꽃 향기. 나의 시노.


“안녕히 주무세요.”


더이상 무섭지 않았다.






톡. 톡. 한 방울 한 방울 비가 내렸다. 이번엔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메마른 평원에 내리는 비. 마을 사람들. 아버지.


일단 죽지는 않은 모양이네. 자신의 질긴 목숨에 새삼 감탄하며 발등을 적시는 검붉은 피를 덤덤히 내려다 보았다. 그 끈적끈적한 표면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았다. 어깨까지 오는 은발,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가 텅 빈 눈동자로 올려다 보았다.


별로 유쾌한 유년시절은 아니었다. 전쟁의 구렁텅이에서 꼬마 여자애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버지뿐이었다.


별로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맨 정신일 때보다 술에 취해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무서울지언정 밉지는 않았다. 나를 때리면서도 아버지는 왠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술이 깬 후 미안하다고 울먹이며 상처투성이가 된 나를 치료해주고 안아줄때는 조금이나마 가슴이 따뜻해졌다.


밑에 깔려 몸을 내맡긴채 거친 숨을 내쉬는 아버지를 올려다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흥분과 격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눈동자는 어쩐지 공허했다. 그래서일까. 그 눈에 비친 상처와 멍으로 가득한 내 모습도,


비처럼, 다른 이의 마음을 적셔 주고 싶었다.

정작 내 마음이 텅 비어 있었다.





꽃처럼,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언니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처럼 사랑스러웠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넌 언제나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해야 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내 어설픈 거짓말과 엉성한 가면을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도... 그 아무도 내게 씌워진 가면을 벗겨 주지 않았어. 언니조차, 아니 언니라서 내 구원이 될 수 없어.


“어서 와. 장시안느라고 해.”


배속 받은 지휘부에서 만난 지휘관은 자신을 소개하며 아름다운 보랏빛 꽃의 이름을 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라색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어쩐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휘관님. 보이는 대로 저는 활발한 인형이랍니다.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요.”


시노를 만났다. 새침한 얼굴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인형도 다르지 않아.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평생 그러리란 법은 없어.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돼.”


지휘관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가면을 벗겨냈다. 난생 처음으로 드러난 맨얼굴에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차갑게 대하고 말았다.





“지휘관님 드시라고 만든 거 아니에요.”


어느새 그 솔직하지 못한 태도에 위로 받는 자신이 있었다.





“고마워. 시노가 있어서 다행이야.”


받은 사랑을 다시 지휘관님에게, 다정한 미소 뒤로 언뜻언뜻 보이는 그 메마른 내면에 채워주고 싶었다.


조금 더 내 마음을,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어.





“아뇨? 지휘관님 같은 사람은 정말 싫어하는데요?”


가슴에 따스히 내리는 시노가, 소중한 사람이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휘관님? 정신이 드시나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눈을 떴다. 허리께를 비추는 햇살이 따스해 다리를 뒤척였다. 새하얀 시트가 바스락거렸다.


멍한 의식으로 삶의 질감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분 좋은 소음이 투명한 창문을 두드렸다. 군용 차량의 엔진 소리. 군수 지원에서 돌아와 물자를 정리하는 누군가의 외침. 눈이 부셔 다시 눈을 감았다.


오른손에서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다. 꼬옥 마주 잡아오는 애달픈 촉감이 공간을 채운 옅은 붓꽃 향기에 녹아들었다. 다시 눈을 떴다. 초점이 흐릿한 눈에 아름다운 옥색 눈동자가 비쳤다.


“약속, 지켰어요.”


톡. 톡. 뺨에 빗방울이 내렸다.




ㅡㅡㅡ




처음엔 가볍게 포도가 지휘관 같은 사람은 정말 싫어요! (정말 좋아함) 하는 이야기를 쓰려했는데 하다보니 흥이 나서 길어졌네


괴롭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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