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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후회 1

검은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2.28 18:00:32
조회 1055 추천 31 댓글 0
														

저번에 읽은 갤럼은 2부터 읽으면 됨.








잔잔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앙겔라는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솔바람에 실린 꽃향기를 맡았다.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서글픈 향기가 가슴을 찌르르하게 울려왔다.

수술을 하루 앞둔 오늘, 유난히 더 그리워지는 얼굴을 마음속으로 되새기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적막한 병실에 홀로 있는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손가락으로 오른손 손목에 채워진 점자 시계를 더듬어보니 정오가 다 되었다. 곧 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예민해진 귀에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다리를 살짝 끄는 듯한 약간의 엇나간 박자. 간병인이었다.

“또 창문을 열어두고 계시네요.”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앙겔라는 살며시 미소했다. 감기에 걸렸다가 나은 지 한 달이 되어가는데도 간병인은 그녀가 또다시 앓을까봐 걱정을 하곤 했다. 질책 섞인 어조에, 아닌 듯 스며있는 염려와 배려는 언제나 앙겔라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잠깐 열어둔 거였어요. 조금 답답해서요.”
“공기 청정기 향이 마음에 안 드세요?”
“그건 아니에요. 그냥… 창가에 놓인 꽃향기가 맡고 싶었거든요.”
“네에…….”

간병인이 침대 근처로 다가와 침대 사이드 테이블을 설치하고서 그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익숙한 솜씨로 치즈가 듬뿍 들어간 파스타와 빵, 베이컨으로 이뤄진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 간병인은 앙겔라가 타이핑 해놓은 논문의 철자 검사를 했다.

식사를 끝낼 무렵에 간병인이 따뜻한 차를 내어왔다.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수입해 온 꽃차는 특유의 씁쓸하면서도 그윽한 맛이 있었다. 차에서 나는 향이 평소보다 많이 나는 것 같아서 앙겔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차를 두 잔 타신 거예요?”
“네.”
“저번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맛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혼자 마시는 건 쓸쓸하다면서요.”
“굳이 저 때문에 안 좋아하는 차를 즐길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앙겔라는 기분이 좋았다. 무심한 척, 퉁명스러운 척 하면서도 행동 이모저모에 깔린 다정한 태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나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며 소개한 간병인은 처음엔 몹시도 앙겔라에게 서먹하게 굴었기 때문에 내심 불편한 마음이 있었지만, 석 달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간병인의 그런 면이 오히려 기껍기까지 했다.

이전의 간병인은 앙겔라가 입은 부상을 몹시도 안타까워하며 최대한 그녀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앙겔라는 그런 태도가 너무 과하다고 느껴졌다.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받아들이기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인 천재 의학박사가 두 눈이 멀어 기약 없는 요양을 하게 되었으니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복잡하고 속상한 것은 다름 아닌 앙겔라 자신이었다. 앙겔라는 저를 동정하는 사람보다는 보다 덤덤하게 대해줄 사람을 원했고, 그리하여 아나가 데려온 사람이 지금의 간병인이었다.

천천히 차를 마시는 동안 간병인이 앙겔라의 앞으로 온 우편물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간 그녀에게 신세를 졌던 환자들이나 동료들에게서 온 편지가 대다수였다. 앙겔라는 간병인이 수신인 명을 부를 때마다 집중해서 들었지만, 마지막 편지에 이르러서도 원하는 이름이 들려오지 않자 어깨를 축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편지는 그게 다인가요?”
“네.”
“혹시… 반송된 편지 같은 건 없었나요?”
“네, 딱히.”
“그래요…….”

앙겔라는 애써 실망을 감추고서 새벽에 일어나 썼던 편지를 간병인에게 건네주었다.

“이 편지도 아시아 지부로 보내는 건가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대단하시네요. 답장 한 통 안 오는데.”

앙겔라는 간병인의 작은 혼잣말에 희미하게 미소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6개월째, 눈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건만 간병인의 말대로 답장은 단 한 번도 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 지금 보내는 편지에도 답장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쓰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마음을 전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알았다면, 하루라도 더 빨리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마음 한자락을 적셔갔다.

천천히 차를 마시는데 다시 살랑대는 바람과 함께 꽃향기가 퍼졌다. 앙겔라는 찻잔을 내려놓고 후각에 집중했다. 은은한 향은 맡으면 맡을수록 가슴 속에 수많은 상념을 불러 일으켰다. 한동안 그렇게 있자, 간병인이 말을 걸어왔다.

“꽃이 좋으신 거면 다른 꽃을 가져와볼까요? 매일 저 꽃 향만 맡는 것도 질리실 텐데.”
“아니요, 괜찮아요. 다른 꽃은 필요 없어요. 의미 있는 꽃은 저 아네모네뿐이거든요.”
“…저 화분이 특별한가 보네요.”
“특별하죠.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거든요.”

앙겔라의 말에 간병인이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아네모네가… 그다지 좋은 의미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앙겔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좋은 의미 정도가 아니라,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슬픈 의미를 갖고 있는 아네모네의 꽃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향을 맡을 때마다 가슴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게 하는 꽃이건만, 앙겔라는 도저히 아네모네가 담긴 작은 화분을 멀리할 수 없었다.

“다 제 잘못인 걸 어쩌겠어요. 그래도 선물은 선물이니까요.”
“사연 있는 꽃인가 보네요.”

앙겔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꿈에서 본 아이의 서글픈 눈동자가 잊히지 않아 가슴이 내내 술렁였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으나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석 달간 알아온, 입이 무거운 이 간병인에게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로 마지막인 인연. 병원에 입원한 여섯 달 내내 가슴 속에 들어찬 이야기를 한번은 꺼내보고 싶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앙겔라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요. 그래도 들을 생각이 있나요?”
“……네, 뭐. 해주신다면야.”

앙겔라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기억을 더듬다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제게는 연인이 있었어요. 착하고,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죠.

아이와 만난 것은 2년 전의 일이었어요. 당시 갓 성인이 된 아이는 한국이라는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발생한 옴닉 사태를 진압한 메카 조종사였죠. 어린 나이에 군대 입대해서 수 년 동안 활약한 바 있는 베테랑 요원이었어요. 오버워치는 아이의 공을 높이 사 스카우트 제의를 했고, 아이는 받아들였죠. 그렇게 오버워치에 오게 됐어요.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솔직히 거부감이 들었어요. 겨우 십 대 후반의 여자아이를 전장으로 끌어들인 오버워치의 판단에 반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당사자가 동의한 일을 제가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 대신 아이를 잘 돌봐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제가 관계를 먼저 시작했던 걸 수도 있겠네요.

아이를 처음 마주한 건, 아이가 오버워치에 온 지 1주일이 되던 날이었어요. 대인 훈련을 하다 다리를 겹질려서 레나 양의 부축을 받아 의무실에 왔던 게 생생하네요. 자료상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여린 모습에 마음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인지 다른 때보다 더 친절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진료를 하고 간단한 처치를 끝내자 아이는 두 볼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이고선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말했어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가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포도당 캔디를 꺼내 쥐어주었죠.

그 날 이후로 아이는 의무실에 자주 들르기 시작했어요. 달리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그러는 가겠거니 하며 일하는 틈틈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눴죠. 사실, 의무실에 상주하며 다친 사람들만 상대하다가 건강하고 밝은 아이와 대화하는 게 제게는 꽤 즐거운 일이었어요. 아이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날 있던 일들을 곧잘 이야기했고,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아이를 보곤 했죠.

유달리 제게 잘 웃어주고 살갑게 아이를 보면서 힘을 얻었던 것 같아요. 중요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진척이 잘 되지 않아 심적으로 고생하고 있었죠. 제 일만으로도 힘이 부쳐서 아이의 그런 모습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직접 만든 초콜릿을 가져와서 제게 내밀더군요. 그 날이 밸런타인 데이였는데, 전 그것도 모르고 그저 고맙다고 받아들었어요. 그게 시작이었죠.

아이는 그 날부터 제게 조금씩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점점 제 일상에 발을 들여놓았고, 의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죠. 그러던 어느 날, 마주 앉아서 디저트를 곁들인 커피를 마시는데 아이가 그러더군요. 저를 좋아한다고요. 솔직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서 정말 놀랐어요. 같은 성별은 그렇다 쳐도, 아이는 저와 나이차가 꽤 났거든요. 저보다 무려 열여덟 살이나 어렸으니까요.

당연히 거절했어요. 아이를 좋아하긴 했지만, 아이가 저를 생각하는 마음처럼 좋아한 건 아니었거든요. 아이는 말갛게 웃고는 알았다며 돌아갔죠. 괜찮은 척 했지만 상처받은 건지 떨리는 눈동자를 차마 숨길 수 없는 것 같았어요. 앞으로 서먹해지겠구나 싶어서 섭섭하게 생각했는데, 이튿날 또 밝게 웃으며 의무실로 찾아오지 뭐예요.

그리고 매일매일 제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더군요.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고백이 그렇게 1년 동안 이어졌어요. 그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가 매일 같이 예쁜 마음을 작은 꽃과 함께 전하는데… 싫지가 않더라고요. 아니, 실은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양심으로 인해 속이 불편한 와중에도 꽤 기뻤어요. 그렇게 순수한 호의를 받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요. 결국 아이의 햇살 같은 따스함에 젖어든 건 저였고, 많은 고민 끝에 쉽지만은 않은 결정을 내렸죠. 아이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예요.

하지만 아이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제 생활이 당장 바뀌는 건 아니었어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은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마냥 그 행복에 취해있을 수는 없었거든요. 임무수행 중 전투에 나선 요원들이 부상을 당하면 그들을 치료해야했고, 사지가 잘린 환자들을 위해 기계신체와 신경망을 잇는 데 도움을 주는 나노머신의 개발도 병행해야 했어요. 그때는 아직 그 분야는 거의 수작업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만한 기술을 가진 의사가 그리 많지는 않았으니까요.

아이는 그런 저를 이해해줬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응당 그러해야한다는 제 신념을 존중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줬죠. 열여덟 살이나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죠? 마음속으로는 저와 놀러도 가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런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더라고요. 다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해주더군요. 그 마음이 모두 거짓인 건 아니었겠지만, 그게 저를 위한 배려였다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웠죠.

힘든 하루의 끝에 지친 몸을 이끌고 의무실에 들어서면, 아이는 늦은 시간까지 저를 기다리고 있다가 꼭 껴안아주곤 했어요. 그럴 때면 아이에게선 언제나 청결하고 은은한 비누향이 나곤 했죠.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의 온기를 느낄 때면 행복하다가도, 당장 병실에 입원해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고 있는 환자이나 목숨을 잃은 요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졌어요. 다른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며 인류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데, 그런 영웅들을 구하지도 못한 제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곤 했던 거죠.

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당장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눈앞의 어린 연인마저도 최전방에서 쏟아지는 포탄을 뚫고 활약하는 전투요원인데, 그런 아이에게 마냥 위로를 받는단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고요.

일방적으로 배려를 받는다는 사실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어요. 저 또한 아이를 위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이와 데이트를 할 정도의 시간이 나는 일은 좀처럼 없었어요. 미안해하는 제게 아이는 괜찮다며, 식사 후에 기지 내를 같이 가볍게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곤 했죠. 어른스러운 아이라서 그런지 속이 정말 깊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갓 스물, 연애에 대한 환상이 가득할 나이의 아이가 하는 말이 진심일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어리석었죠.

아이에게 갖는 미안함이 변명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신경망 구축을 돕는 나노머신을 개발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면 그동안 느껴왔던 행복감에 대한 죄책감도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제게 몰리는 과중한 업무도 분산될 테니 아이에게 더 마음을 써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마침 연구가 탄력을 받기 시작하자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기 시작한 탓도 컸어요.

그렇게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 날은 아이가 제게 휴가가 언제냐고 물어보더군요. 오버워치에 발을 들인 이후 휴가를 받은 적이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기에 왜냐고 묻자, 사귄 지 1주년이 된 기념 삼아서 같이 휴가를 받아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싶어 놀랐지만, 기념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안해져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죠. 그러자 아이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렇게 밝게 웃는 얼굴을 본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정말 미안해져서, 그 날은 꼭 아이를 즐겁게 해주겠다고 마음먹었죠.

하지만 세상 일이 정말 뜻대로 되지가 않더라고요. 아이와 약속한 날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출이 울리더군요. 긴급 호출이었죠. 아이에게 조금 늦겠다 연락하고 의료동으로 뛰어갔는데, 난리가 나 있는 거예요. 임무에 나갔던 수색조가 탈론의 습격을 받아 절반이 사망하고 절반이 치명상을 입은 채로 실려 왔던 거죠.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심폐정지음에 놀라서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수술방에 들어갔어요. …아이에게 연락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당장 숨이 끊긴 환자를 눈앞에 두니 그 생각은 금세 밀려났죠.

수술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어요. 기능을 멈춘 심장을 인공심장으로 대신하고, 그 외 신체도 기계신체로 대신해야 했죠. 높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수술인 데다가 제가 담당한 환자는 오버워치의 이중 스파이로, 반드시 살려야만 하는 사람이었어요. 몇 번의 쇼크가 왔지만 다행히도 고비를 넘길 수 있었죠. 수술이 끝났을 때는 열여덟 시간이 지난 후였고요. 피와 땀에 전 수술복을 채 벗지도 못한 채로 휴대폰을 찾아 아이에게 연락을 했지만, 받질 않았죠.

새벽 세 시였지만 당장 사과해야한다고 생각해서 곧장 숙소로 향했는데, 아이가 없는 거예요. 아차 싶어 다시 휴대폰을 확인하니 아이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죠. 늦어도 괜찮으니 호텔에서 기다리겠다고, 전날 밤 9시에 보낸 메시지였어요.

부랴부랴 차를 타고 기지에서 1시간쯤 떨어진 호텔로 향했고, 도착해서 이름을 말하자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죠. 아이는 잠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평소엔 맛없다며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신 건지, 방 안에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거예요.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술을 이렇게까지 마셨을까 싶어서 안쓰러운 마음에 침대로 다가가니 아이는 웅크린 채 잠자고 있어요.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더군요. 좀처럼 조르는 일이 없는 아이가 1주년을 기념해서 모처럼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그걸 늦겠다 연락 한 번 한 뒤로 거의 스무 시간이 다 되도록 방치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서 침대 머리맡에 앉아 바라만 보고 있는데 아이가 끙끙대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뜨더라고요. 눈이 마주치자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더니 제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괜찮아요, 하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괜찮다고, 늦게라도 박사님이 와줬으니까 미안해하지 말라고…….

아이가 그렇게 말을 하는데 정말 심장이 미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미안하다고, 가까스로 그렇게 말하자 다시 한 번 괜찮다면서 절 안고 다독여주는데 대체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 줄 모르겠는 거예요. 그저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속삭이듯 말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아이는 괜찮으니 피곤할 텐데 어서 자자며 이불을 덮어줬고요. 술과 잠에 취해 정신이 없을 텐데도 다정하게 구는 아이를 끌어안고 자는 것으로 휴가는 끝이 나버렸죠.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아이는 그 날 이후로 행동이 조금 달라졌어요. 예전처럼 달려와서 안기지도 않았고, 게임 이야기를 조잘조잘 떠들어대지도 않았죠. 다정한 건 그대로였지만, 뭔가 심경에 변화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해서 저도 아이에게 조금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죠. 그래봤자 함께 식사를 한다든지 아이가 좋아할 법한 과자를 더 챙겨준다든지 하는 일들뿐이었지만요. 그래도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것 같았어요. 예전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웃음이 늘어가는 아이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안일한 생각이었지만요.

불행하게도 그런 나날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탈론과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저는 점점 더 바빠졌고, 그러는 와중에도 연구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죠. 그러던 중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만 거예요. 아이의 조국인 한국에서 제2차 부산 옴닉 사태가 발생했는데, 아이의 부모님이 이에 휘말려서 돌아가시고 만 거죠. 제가 수술방에 있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아이는 급히 휴가를 받아 한국으로 향했고, 나중에야 소식을 전해들은 전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마음 같아선 한국으로 가서 아이를 보듬어주고 싶었지만, 전 오버워치의 의무장교였어요. 부상자가 거듭 속출하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전장을 떠날 수가 없었죠.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아이에게 화상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전화를 받지 않더군요. 그때 억지로라도 휴가를 내서 한국으로 갔어야 했는데……. 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죠.

장례식이 끝나 주변 정리를 해야 하니 당분간 연락할 수 없다는 메시지 한 통을 보내온 이후로, 복귀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아이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어요. 마침내 열흘의 휴가를 끝내고 복귀한 아이는 그간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건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죠. 저를 비롯한 기지 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아이를 염려했어요.

오버워치 내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기도 하고, 붙임성도 좋고 성격도 활발해서 다들 예뻐하는 아이가 그렇게 되었으니 주위에서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이를 챙겨주었죠. 저 역시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글쎄요, 솔직히 아이의 마음엔 그리 와 닿지 않았을 것 같네요. 나노머신의 개발이 거의 끝나고 임상실험을 준비하던 단계라서 아이를 챙기기엔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뭐든 핑계에 지나지 않은 말이지만요.

아이가 의무실에 들르는 빈도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다고 생각한 건 그로부터 한 달 정도가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어요. 연구동에 임상실험 결과를 확인하러 가는 길에 레나와 이야기하며 웃고 있는 아이를 보고서야 그걸 깨달은 거예요. 의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거죠.

저는… 어리석게도 그게 좋은 일이라고 여겼어요. 의무실에 저와 있어봤자 일로 바쁜 저는 아이를 신경 쓰지 못할 테니, 제가 신경을 못 써주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그만큼 아이를 돌봐줘서 고맙다는 생각까지 했죠.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난 것 같다고, 어서 연구를 마무리하고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늘려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뒤로도 기지 내를 오가면서 종종 아이를 볼 수 있었죠. 아이는 전처럼 밝게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잘 웃고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보였어요. 요즘 들어 의무실을 자주 비우는 저 때문에 의무실에 찾아오는 일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조금이나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임상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된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따라 의무실을 찾는 환자도 없고, 날도 좋았기 때문에 전 오랜만에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 거예요. 그 날은 아이가 의무실에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찾으러 나섰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혹시 아이를 본 적 있냐고 묻자,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치글러 박사님과 있는 게 아니었던가요? 하고 되묻더군요. 하기야 아이가 오버워치에 와서 제 옆에 찰싹 붙어 다녔던 게 2년도 넘은 일이었으니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 만도 했어요.

기지 내 휴게실에도 없고, 식당에도, 매점에도 없어서 이상하다 생각하며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파라를 만났죠. 파라는 아이의 행방을 묻는 제 물음에 지금쯤이라면 훈련실 아니면 메카 격납고에 있을 거라고 대답해줬어요. 그리고서는 잠깐 망설이더니, 아이가 요즘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죠.

고맙다고 인사하고 훈련실로 향하며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근래 들어서는 아이가 웃는 모습을 자주 본 것 같기에-물론 저를 보고 웃었다기보다는 대화하던 상대방을 보고 웃은 것이었지만요- 의아했죠. 하지만 파라가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니, 조금 더 아이를 잘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찾아간 훈련실에 아이는 없었어요. 대신 최근 훈련 기록이 패널에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었죠. 보니까 30분 전까지 훈련실에 있던 거였어요. 최근 파라와 자주 이야기하는 것 같더니 훈련하는 습관을 들인 걸까 싶어 조금 더 자세히 기록을 살펴보는데, 아이의 또 다른 훈련기록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3시간 전에 2시간가량의 훈련을 끝낸 기록이었어요. 뭔가 싸한 마음에 제 ID 카드를 긁어서 관리자 모드로 접속했죠.

아이의 ID 번호를 터치하니, 최근 훈련 기록이 패널에 주르륵 나타나더군요. 오버워치의 훈련실 프로그램은 1시간, 1시간 30분, 2시간 코스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훈련코스를 반복적으로 받은 것이었어요. 문제는 그 주기가 너무 짧다는 거였죠. 보니까 하루에 적게는 3번, 많게는 5번의 훈련을 받았더라고요.

오버워치의 훈련 프로그램은 난도가 높아서, 파라조차도 하루에 3코스를 초과해서 훈련받는 일이 없는데 너무 과하게 몸을 쓴 거예요. 과거 기록까지 쭉쭉 올라가다 보니, 그렇게 고된 훈련 일정을 시작한 날짜를 알 수 있었어요. 아이가 부모님 상을 치르고 복귀한 날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때부터 고된 훈련을 계속 받은 거예요. 좋은 징조가 아니었죠.

보니까 아침 일찍 오전 훈련을 끝내고 의무실에 들렀다가 정오 즈음에 다시 훈련실에 갔다가 오후에 저를 찾아오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또 훈련을 받다가 밤에 저를 만나러 온 뒤 다시 훈련실로 향했던 거죠. 심지어는 새벽 4시경에 훈련실 출입 기록이 있기까지 했어요.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몸을 혹사시킨 거예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이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일에 속이 쓰리다 못해 아리더군요. 아이가 너무 걱정이 된 나머지 거의 뛰다시피 해서 메카 격납고로 향했죠.

격납고 안은 몹시도 적막했어요. 줄지어 세워져 있는 수많은 메카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아이의 분홍 도색이 된 메카였죠.
서둘러 다가갔더니 아이가 메카 지붕 위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이가 즐겨 씹는 풍선껌이 부풀어 올랐다가 딱, 하고 터지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죠.

입술만 달싹이다가 겨우겨우 아이의 이름을 천천히 부르자, 아이가 메카 위에서 몸을 일으켰죠. 정말 오랜만에 정면에서 마주하는 아이의 얼굴은 많이 상해있었어요. 기지 내를 오가며 가끔씩 볼 수 있었던 웃음은 흔적도 없었고 눈 밑에는 기미가 가득했죠. 그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요새 식사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요? 하는 말이 나온 거예요. 속상해서 한 말이었는데 아이는 그저 미미한 웃음을 입 꼬리에 걸고는 네, 하고 대답했죠.

잠은 제대로 자고 있고요? 하는 물음에도 아이는 똑같은 웃음을 머금고서 똑같은 말투로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자기방어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죠. 아이가 내심 벽을 세웠다는 걸 깨달은 저는 조금 더 정확히 아이의 상태를 알아내기 위해 정신 상태를 감정하는 질문을 차례차례 던졌어요. 의사로서의 직업병이 발동된 거였죠.

아이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제게 꼬박꼬박 답을 해줬어요. 일련의 질답을 통해 아이가 심정적으로 많이 공허하고 우울한 상태임을 눈치 챈 저는 이 지경이 되도록 아이를 방치한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죠. 햇살 같던 아이가 어느새 박제되어 시든 꽃 같은 웃음을 내걸고 있었는데 그걸 못 알아본 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웠어요. 어떻게 아이를 케어할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픽 웃으며 묻더라고요. 궁금한 점은 다 해결되셨어요, 의사 선생님?

한 번도 저를 그렇게 부른 적 없는 아이의 냉소 섞인 목소리를 듣고 잠시 정신이 멍해지더군요. 영특한 아이는 제가 한 질문들이 정신감정 질문이라는 걸 눈치 채고 있던 거예요.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본 연인이 가장 먼저 입에 담은 말이 의사로서의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던 거죠. 아이의 투명한 두 눈동자에 외로움과 슬픔, 비참함 등의 감정이 어지러이 섞여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자 심장이 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봤자 아이가 느꼈던 감정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을 테지만요.

아이는 메카 위에서 내려와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제 앞에 섰어요. 그리고는 한참 동안이나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고 말했죠. 훈련 받다가 쓰러질 일은 없게 할 테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박사님. 전 괜찮아요.

분명 덤덤한 말투인데도 제 귀에는 시리도록 차갑게 들리더군요. 가시 돋친 듯한 말을 곱씹는데 아이가 말을 이었죠.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그거 물어보러 절 찾아오신 건 아닐 테고…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그 말을 듣고서야 제가 아이를 개인적인 용무로 찾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제게 그토록 애정을 퍼부어주던 아이에게 손 한 번 먼저 내민 적 없었단 사실에 속이 쓰리더군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서 오랜만에 영화라도 보러 갈까 해서요… 하고 말하자 아이는 퍽 놀란 표정을 지었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에 마음 끝자락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아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그러자고 하고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숙소로 향했죠. 생각해보니 아이가 1주년 기념으로 데이트를 신청한 이후, 정식으로 데이트를 하는 건 거의 반년만의 일인 거예요. 큰일을 겪은 아이를 제대로 살펴주지도 못한 거죠. 그동안 참 형편없는 연인이었다는 걸 확인한 셈이었어요.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잘해주자고 다짐했죠.

아이가 숙소에서 나오길 기다려 차를 타고 기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번화가로 차를 모는데, 문득 막막함을 느꼈어요. 평소에는 아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들어서 대화가 끊긴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아이는 말없이 창밖만 보고 있었거든요.

제가 아는 주제라고 해봤자 기계 신체 관련 연구 논문이나 환자들의 부상 혹은 병환 등, 아이가 절대로 관심을 보일 리 없는 분야에 포진되어 있으니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침묵할 수는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꺼낸 말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였죠.

아까 훈련실에서 기록을 봤는데 새벽에도 훈련을 했더군요. 요새 잠을 잘 못 이루나요? 그렇게 묻자 아이가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그런 편이라고 대답하더군요. 저는 그 원인이 부모님의 죽음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하고-시기적으로 비슷했으니까요- 아이에게 정신 상담을 받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비록 눈치가 영 좋지 않은 저라도, 그런 제안을 오랜만의 데이트 중에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대신 제가 가끔 마시는 꽃차가 있는데 마셔볼래요? 라며 말을 이었죠. 아이가 좋아할 만한 맛은 아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말문을 트자 아이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들며 다소 좋은 분위기에서 영화관에 도착했죠.

광고판에 전시된 영화는 모두 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어요. 아이의 변화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바빴는데 시중에 상영하는 영화에 대해 제가 알 리가 없었죠. 아이에게 무슨 영화를 보고 싶냐고 묻자, 아이는 아무거나 보자고 하더군요. 아이가 좋아하는 영화로 고르고 싶었지만 그간 제대로 데이트를 해봤어야 뭘 알 거 아니겠어요. 아이의 취향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거죠.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자책하며 헤매는데, 아이가 그런 저를 눈치 채고는 그냥 시간이 가장 빠른 영화로 보자고 구조선을 내주더라고요. 액션 영화가 가장 상영 시간이 빨랐는데, 다행히도 아이는 그럭저럭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참 운이 없게도 클라이맥스에 접어드는 순간, 제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죠. 곧바로 휴대폰을 뒤집어 무음 모드로 전환했지만, 바로 옆에 앉아있던 아이가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저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그때 또다시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전화를 할 정도면 급한 일일 텐데, 반년 만에 하는 데이트인데다가 아이를 가장 우선시해야 할 순간에 전화가 계속 오니 난감하기 그지없었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만 씹고 있는 제게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어요. 박사님, 영화가 별로 재미가 없네요. 우리 그만 가요.

아이에게 한없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며 영화관 밖으로 나와 곧바로 전화통화를 했죠. 대인 지뢰로 인해 다리가 아예 날아간 요원이 응급실에 도착했다는 거예요. 급하다면 급한 일인데 제 생각엔 당직 서는 의료진들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어요. 기계신체와 신경망을 잇는 나노머신 개발에 성공한 참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하자, 환자가 기계신체 분야의 최고 권위자에게 수술 받고 싶다고 희망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서 반사적으로 아이를 돌아보았는데, 아이는 그걸 이만 돌아가자는 말로 알아들은 건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제가 붙잡기도 전에 지하주차장과 이어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거예요. 서둘러 뒤따라갔지만 데이트는 이미 파투난 상태고 어떻게 수습이 안 되는 분위기라 결국 저도 아이를 따라 지하주차장으로 향했어요.

기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저는 연신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데이트를 망친 것뿐만이 아니라 그간 아이에게 신경 쓰지 못한 점을 포함한 사과였지만 아이는 괜찮다고 했죠. 얼굴을 살피니 딱히 상처받은 표정은 아니었는데 묘하게 납득이라고 해야 할지 체념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어요. 그게 더 미안했죠. 스무 살짜리 애가 지을 만한 표정이 절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상황을 뒤집을 수가 없는 거예요. 기지에서는 인류를 위해 피를 흘린 영웅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기지에 도착해서 아이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어서 의료동으로 가보라고 말했어요. 무력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며 응급실로 향하는 도중 뒤를 돌아보니 아이는 차에서 내린 그 자리에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죠.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에 걸음을 멈추자 하필 그 순간에 또 호출이 오는데… 참담한 기분이 들더군요.

제가 느끼는 기분이 어떻든 간에, 결국 저는 응급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어요. 개인으로서의 앙겔라 치글러는 그 순간 존재해서는 안되었으니까요. 이번 일만 끝나면 정말 어떻게 해서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내겠다고 맹세하는 것으로 죄책감을 대신했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어요. 전반적인 수술은 당직을 서던 의사가 집도하고 세세한 부분은 제가 어시했는데, 나노머신이 성공적으로 신경망을 잇는 것을 보자 이제는 정말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직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환자는 새 신체에 거부반응도 없는 것 같았어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수술방에서 나오자마자 아이 생각이 났죠. 마지막에 저를 보던 그 눈빛이 잊히지가 않았거든요.

당장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여린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는데 시간은 이미 새벽에 가까웠죠. 지금쯤 자고 있을 테니 일단 눈 좀 붙인 다음에 아이를 만나기로 했어요. 불면증에 좋은 꽃차를 건네면서 정신 상담을 권해볼 생각이었죠. 마음 같아서는 제가 상담해주고 싶었지만, 연인인 제게는 말 못할 일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제3자에게 상담 받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요.

안 그래도 깨달은 바가 좀 있었죠. 사귄 지 1년 반이 넘어가는데도 제가 먼저 아이를 찾은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든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의 배려를 너무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든지, 데이트 때마다 제 일로 인해 파투가 났다든지, 한창 사랑받고 귀여움 받을 시기의 아이가 저 때문에 실망과 체념에 익숙해져 있다든지…….

저도 제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어요. 그 동안 여러 사람과 사귀어봤지만 끝이 매번 똑같았으니까 느끼는 바가 있긴 했죠. 다만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는 소명의식에 더 무게를 느꼈던 거예요. 하지만 자기 인생에 균형을 잡기 힘든 어린 연인이 제게 오랜 시간 동안 목을 매고 있는데다가, 결국 저 때문에 저렇게 아프기까지 한 걸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죠.

게다가 이번 수술에서 생각했듯, 이제는 굳이 제가 앞서지 않아도 되겠단 생각이 든 거예요. 그 동안 저를 대체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힘 써왔고, 그를 도울 나노머신을 개발해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죠.

아이가 제 건강을 해칠 정도로 몰려 있는 줄도 모르고, 제가 볼 때마다 웃는 얼굴을 보고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점이 너무 뼈아팠어요. 이제부터라도 아이의 옆에서 상처를 보듬어줘야겠다고 결심했죠. 제가 지치고 힘들어할 때면 밝은 웃음으로 저를 안아주던 어린 연인이 그러했듯, 저도 그래야 한다고, 그리고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찍 아이의 숙소로 찾아갔는데, 아이가 보이질 않는 거예요. 의무실에도, 휴게실에도, 훈련실에도, 메카 격납고에도 아이는 없었죠. 파라조차도 이번엔 아이의 행방을 모르기에, 아나를 찾아갔어요.

그러자 아나가 몰랐냐면서, 아이가 오늘 동이 트자마자 아나를 찾아와 휴가를 받아서 곧바로 기지를 나섰다는 거예요. 안 그래도 아나는 아이의 상태를 염려해 휴가를 권할 생각이었기에 휴가가 이례적으로 빨리 처리가 된 거였죠. 제게는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휴가를 가버린 아이에게 당황해서 연락을 해봤지만 통화는 되지 않았어요. 메시지도 보내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죠.

며칠이 지났어요. 만난 이래로 단 한 번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연락을 무시한 적이 없었는데 말도 없이 휴가를 가버린 데다가 연락도 안 되니까 너무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아나를 찾아갔죠. 만약 무슨 일이 생기거나 했다면 상관인 아나에게 연락이 갔을 테니까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제 걱정과는 다르게 아나는 오늘 오전에 프랑스에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 전에는 스위스에 있었고요. 그러니까 상관에게 정기보고는 꼬박꼬박 하지만 제 연락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이가 정말로 많이 상처받았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죠.

이제는 정말로 아이에게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여린 애가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제 연락을 안 받겠나 싶었던 거죠. 그저 미안하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여행 다니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잘 하길 바랐죠. 그리고 아이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제가 맡았던 과중한 업무를 분배하고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어요.

어떻게 보면 시기의 문제였던 거예요. 제가 가진 기술과 노하우를 널리 알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원했고, 거의 20년이 걸려 그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공적인 영역보다 개인적인 영역에로 시선이 돌아간 거죠. 그동안 제게 헌신했던 연인에게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돌려줄 준비가 됐는데, 아이가 없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다만 아이가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서 장기 휴가를 준비했어요. 아이에게 오롯이 제 시간을 내어줄 생각이었죠.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다 되어가도록 아이가 복귀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휴가 치고는 너무 길어서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들 즈음에야 아이가 복귀했죠.

타이밍 나쁘게도 저는 그때 세미나 출장을 가 있었어요. 기계 신경망을 잇는 나노머신에 대한 세미나였기에 빠질 수가 없는 자리였죠. 레나 양에게서 아이가 복귀했단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속이 상했지만 당장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요. 대신 최대한 빨리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죠.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뒤이은 저녁 식사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곧바로 수송선에 몸을 실었지만 자정이 넘어서야 복귀할 수 있었죠. 기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아이의 숙소로 달려갔어요. 아이가 자고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아이를 알게 된 이후로 이토록 오랫동안 얼굴을 못 본 적이 없었기에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거죠.

아이의 방 앞에 도착해서 똑똑똑, 노크를 했지만 답은 없었어요. 다시 한 번 힘주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다소 실망을 느끼며 손을 거두어들였어요. 하긴, 무려 한 달이나 여행을 계속했으니 피로가 누적되었을 만하다고 생각했죠. 아마 정신없이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차마 깨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의무실로 향했죠. 세미나에서 오갔던 대화를 정리하고 자러 갈 셈이었죠. 그런데 의료동으로 향하는 길에 익숙한 불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겠어요. 제 의무실에 불이 켜져 있던 거예요. 아이가 의무실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어요. 거의 뛰다시피 의무실로 들어섰는데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더군요. 의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어요.

의아한 마음에 의무실을 둘러보는데, 고운 연분홍색 포장지에 싸인 동그란 원통 같은 게 의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더군요. 옆에는 작은 화분도 같이 있었어요. 이름은 써져 있지 않았지만 왠지 아이가 놔두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종이로 포장이 되어있던 거예요. 전에 아이가 제 나라에서 나는 종이라며 한지라는 것으로 포장한 선물을 건네준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포장지가 참 예쁘다고 생각해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역시나 아이가 올려둔 거구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는데 그 안에 꽃차가 있는 거예요. 제가 줘야 할 선물인데 참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물을 끓여 차를 마셔보았죠. 살짝 씁쓰레하지만 그윽한 맛이 참 좋았어요. 아이의 배려를 생각해서 논문은 내일 정리하기로 하고 잠을 자기 위해 오랜만에 연구실 간이침대가 아닌 숙소로 향했죠.

꽃차 덕분인지 아니면 아이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심해서인지 그날은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어요. 꿈도 꾸지 않고 정오가 다 될 때까지 정신없이 늦잠을 잤죠. 원래대로라면 그날 오후에야 복귀 예정이었기에 늦잠을 자도 상관없긴 했어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쨌든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씻고 나서 의무실로 향했죠. 아이가 의무실에 와 있을 테니까 커피와 함께 마실 제과도 챙겼어요. 그런데 기분 좋게 향한 의무실에는 아이가 없었죠.

오전 훈련을 마치고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어젯밤에 미뤄두었던 논문 정리를 시작했어요. 한동안 논문을 타이핑하고 있는데 의무실 문이 열렸죠. 왔어요? 하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는데 문간에 서있는 사람은 아이가 아닌 레나 양이었어요.

당황해하는 레나 양에게 아이인 줄 알았다며,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묻자 레나 양은 두통약을 받으러 왔다고 했죠. 그러면서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어요. 아이를 만나지 못했냐고 말이죠. 저는 웃으며 대답했어요. 어젯밤 늦게 복귀해서 아직 못 만났다고, 대신 아이가 선물을 주고 갔다고요. 꽃도 하나 받았어요, 하면서 조금은 자랑하는 마음으로 책상 위에 놓인 화분을 보여줬는데, 레나 양의 얼굴이 그다지 좋지가 않더군요.

의아해하는 제게 레나 양이 말했어요. 박사님, 그 꽃 이름 아세요? 저는 모른다고 답했죠. 아이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서 꽃을 선물 받은 적은 많았지만, 꽃 이름을 외울 시간에 논문 한 자라도 더 들여다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에 아주 유명한 꽃 외에는 알지 못했던 거예요. 다만 아이가 선물해 준 하얀 꽃이 마음에 들어서 나중에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레나 양이 아는 것 같으니 물어봤죠.

레나 양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어요. 아네모네예요, 그 꽃.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죠. 창가에 두는 게 나을까요? 그런 저를 보고 레나 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어요. 치글러 박사님, 아네모네의 꽃말은 '허무한 사랑'과 '사랑의 괴로움'이에요…….

멍하니 굳어진 제게 레나 양이 말을 이었어요. 모르는 것 같은데, 아이가 어젯밤에 아시아 지부로 떠났다고 말이죠. 박사님에게는 따로 말한다고 해서 아시는 줄 알았는데……. 뒤이은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더군요. 따로 말은커녕 편지 한 장 없었거든요. 아이가 남긴 것이라곤 불면증에 좋다는 꽃차와 아네모네 화분뿐인데, 그 아네모네의 꽃말이 너무 의미심장한 거예요.

꽃말도 말이라고 치면 작별 인사가 '허무한 사랑의 괴로움'이라는 거잖아요. 아이를 기다리는 한 달 동안, 아이를 그리며 상처받았을 아이를 보듬을 준비를 다 해놨는데, 정작 아이는 여행하는 동안 마음 정리를 끝내버린 거였죠.

솔직히 충격이 컸어요. 아이가 오버워치에 온 지 2년 반, 그 동안 제게 보여줬던 아이의 사랑이 한순간에 무너질 리가 없다고 은연중에 생각해왔던 모양이에요. 아이는 아직 어려서인지 애정 표현에 거침이 없었고, 사랑을 처음 해본 탓인지 정도를 모르도록 제게 빠져 있었는데 대체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면 제대로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났겠어요.

레나 양이 두통약을 받고 돌아가자마자 저는 가운을 벗고 의무실을 나섰어요. 머릿속엔 온통 이대로 아이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죠. 부모님을 잃고 가까운 친척도 없는 아이가 기댈 곳이라곤 저 하나뿐이었는데 최후의 보루였을 제가 일에 빠져서 아이가 바로 옆에서 무너져가는 걸 모르고 있었으니 혼자 얼마나 괴로웠을지 생각하면 할수록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더군요.

아나를 찾아가 휴가 신청을 내고서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어요. 급하게 나서느라 다른 짐은 챙기지도 못한 채로 여권과 지갑만 달랑 들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죠. 업무 관계로 지구 곳곳을 돌아다닌 적은 많았지만 오버워치 소속 수송선이 아닌 민간 비행기는 십여 년 만이라 낯설더군요.

당장 빈 좌석이 없어서 퍼스트 클래스를 끊고 아이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지를 보냈죠. 할 말이 있으니 부디 조금만 시간을 내어달라고요. 아직 지부에 도착하진 않았을 테니 어떻게든 아이를 설득하고 싶었어요.

지부 이동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쉽게 취소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정식으로 전입신고를 마친 뒤에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 전에 마음을 되돌릴 생각이었죠.

초조한 마음으로 비행기 이륙을 기다리는데, 휴대폰이 진동했어요. 급히 메시지를 확인하자,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아이가 보냈더군요. 마지막 인사마저 꽃말로 대신했으니 그럴 만도 했죠. 하지만 아이와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죠. 지금 비행기를 탔으니 저녁 무렵엔 아시아 지부가 위치한 중국에 도착한다는 말도 함께 적었어요. 그러자 한참 있다가 아이가 머무르고 있는 호텔 주소가 보내져 왔죠. 마지막 기회를 얻은 거예요.

초조한 마음에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중국에 도착했죠. 아이에게 도착했다고, 호텔까지 30분이면 간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근처 커피숍에서 보자는 답장이 왔어요. 택시를 잡아타고 카페로 향하자, 1층 창가 구석에 모자를 푹 눌러쓴 아이가 앉아 있었죠.

한 달 만에 본 아이는 전보다 더 마른 것 같았어요. 건강 상태가 많이 신경 쓰였지만 저번에 들었던 의사 선생님 운운 하는 말이 뇌리에 남아 그 질문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죠. 대신 미안하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어요.

차근차근 한 달 동안 생각했던 말들을 꺼냈죠. 그간 연구에 골몰하느라 아이를 신경써주지 못했던 점, 아이의 배려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 소중함을 몰랐던 점, 동등해야 할 연인 사이가 그간 아이의 일방적인 헌신으로 이뤄졌던 점 등을 늘어놓는데, 참 제가 말해놓고도 염치없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어요.

아이의 그런 무덤덤한 표정을 보니 말해봤자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래도 최대한 진심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서 제게 한번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없냐는 말을 입에 담았죠. 아이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어요. 그리고는 인연이 여기까지 인 것 같다고 말했죠.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경험하는 것과 상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어요. 참담한 심정이었죠.

아이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만 가봐야겠다고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세워서 저도 아이를 마주보았죠.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잘 지내라든가, 건강 하라든가, 미안했다든가 하는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실제로 입 밖에 나온 말은 그 어떤 것도 아니었어요. 가지 말아달라는 말이었죠.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시끄러운 굉음과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커피 매장을 덮쳤어요.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이를 감싸 안았고, 뒤이은 충격에 정신을 잃었죠.

의식을 차린 건 한참 후의 일이었어요. 사고 연락을 받은 아나가 보호자로 찾아와 있었죠. 아나가 경위를 설명해주더군요. 테러를 당했다고 말이에요.

제가 워낙 오랜만에 휴가를 받은 데다,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보안 코드를 적용시키는 걸 잊어버린 탓이었어요. 평소엔 오버워치 수송기를 타고 다녔기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아이를 찾아 중국으로 떠났던 건 제 개인 사정이었기에 수송기를 이용할 수가 없었어요. 거기다 민간 항공기를 본명으로 이용했으니 탈론의 감시망에 바로 걸려들었고, 무인 자동차를 이용한 테러를 당한 거죠.

그 충격으로 머리를 다쳤고, 신경에 이상이 생겨서 시력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아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아이의 안부를 물었더니, 아나는 괜찮다고, 아이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별 이상 없이 퇴원해서 아시아 지부로 떠났다고 했어요. 불행 중 다행이었죠. 저 때문에 테러에 휘말린 것도 모자라 다치기까지 했다고 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 뒤로는 매일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네, 당신도 짐작했겠지만 여태 건네 드렸던 편지는 모두 아이에게 보내는 거였어요. 아이는 더 이상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아이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듣고 싶어서 편지를 보낸 거예요. 비록 답장은 오지 않지만… 반송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생각해요.

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한결 마음이 편해지네요. 항상 수술하는 입장이었다가 수술 받는 입장이 되니 불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많이 되었거든요.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뇌와 관련된 수술은 언제나 위험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까 건네 드린 편지는 일단 보내지 말아 주세요. 내일 받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아이를 보러 갈 생각이거든요. 하지만 만약,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서 제가 깨어나지 못하거든, 그땐 편지를 부쳐주실래요? 그리고 저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상자도 같이 전해주세요. 안에 화분이 들어 있으니까 조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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