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고등학교 1학년, 방황하던 시기에 어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게 아멜리야. 그래서 고딩 때부터 아멜리를 쫓아다니며 좋아했는데 아멜리는 하나가 연애상대로 안 보이고 그저 애로 보여서 계속 거절했지.
그러던 어느날 아멜리랑 친구 사이인 메르시가 카페에서 만나고 있는데 메르시 옆자리에 하나가 털썩 앉는 거야. 처음 보는 애가 옆자리에 앉으니 당황하는데 애가 씩 웃으며 아멜리 언니 들었어요? 이러는 거야. 아멜리는시큰둥한 표정으로 어, 이러고.
그러니까 애가 입을 삐죽이면서 감상이 그게 다예요? 박수라도 쳐줘야지, 하니까 아멜리가 세상 귀찮단 표정으로 짝, 짝, 짝, 박수치는데 누가 들어도 성의없는 박수건만 애는 싱글벙글인 거야.
메르시가 어리둥절해하는데 애가 메르시를 돌아보더니 경계 어린 눈으로 한차례 훑고는 아멜리에게 묻지. 누구예요, 이 언니는? 이러니까 아멜리가 내 대학 동기, 하는 거. 그러니깐 애가 급 방긋 미소지으며 안녕하세요, 전 송하나라고 해요. 아멜리 언니 친구분이세요? 하고 묻는 거.
그러면서 자기는 아멜리를 3년간 알았는데 아멜리 친구라는 사람은 처음 봤대. 사실 아멜리에게 있어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메르시가 다였어. 그걸 아는 메르시는 어색하게 웃으며 제가 이번에 한국으로 오게 됐거든요, 하고 에둘러서 대답을 하지. 그러자 애가 오! 그럼 환영의 연주라더 해드려야겠네, 하더니 카페 중앙에 있는 피아노로 다가가는 거야.
그러고선 차이코프스키의 카니발을 연주하는 거. 그제야 메르시는 하나가 아멜리에게 물은 '들었어요?'의 주어가 제 연주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지. 마침 시기가 2월이라 카니발을 연주하는 것 같았어. 잔잔한 카페에는 좀 맞지 않았지만 연주가 훌륭했기에 연주가 끝나고 여기저기에서 박수소리가 났지.
한차례 연주를 끝내고 다시 메르시에게로 다가오는 하나는 참 예뻐보였어. 오랜 친구인 아멜리에게도 받은 척 없는 환영인사를 생전 처음 보는 소녀에게서 받으니 기분도 좋았지. 부주의하게 가슴이 설레는데, 다시 메르시의 옆자리에 앉은 하나가 아멜리를 보며 싱글벙글인 걸 보니 금세 얘가 아멜리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알 수 있었지.
아멜리의 얼굴을 더 잘 보기 위해 메르시의 옆자리에 앉았던 거야. 아멜리가 책에 시선을 둔 채 드문드문 대답해주는 가운데 하나와 메르시의 대화가 시작됐어. 애가 어찌나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지, 메르시에게서 아멜리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게 눈에 훤했지.
메르시는 한참이나 어린 애가 아멜리에게 푹 빠져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지. 예쁘장하게 생긴 애는 붙임성도 좋고 말도 예쁘게 잘해서 대화가 잘 통했어. 메르시는 어떻게 이런 애가 아멜리랑 친해진 건지 궁금해졌어.
그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나봐. 하나가 저한테도 물어볼 거 있으몀 미음 편히 말씀하세요! 이러니까 애가 눈썰미가 대단하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물어봤지. 그러자 하나가 눈을 찡긋하며 웃더니 대답하는 거야. 방황하던 어린 시절에 아멜리를 만나서 개과천선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메르시는 그 말을 듣고 아멜리가 하나에게 있어 아주 큰 의미라는 걸 깨닫지.
메르시는 하나의 주도로 연락처를 주고 받았어. 그러면서 나중에 아멜리 언니랑 놀다가 심심하면 저 불러요! 꼭 갈게요! 하면서 헤어지는데 참 귀엽기도 하고 아멜리를 좋아하는 마음이 예쁘기도 해서 메르시는 그러마고 대답했어. 그리고 메르시는 가끔씩 아멜리와 만날 때 하나를 부르곤 했지.
메르시가 보기에 하나의 노력은 참 가상했어. 아멜리가 있는 곳이라고 연락하면 언제 어디든지 달려왔고, 아멜리 취향의 전시전 같은 게 열리면 표를 얻어와서 같이 가자고 권하고, 가끔 식사할 때면 아멜리 취향의 음식-그러나 본인은 별로 안 좋아하는-만 먹고,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꼬박꼬박 확인해서 알려주고…
보통 그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푹 빠져있으면 자기 생활에 지장이 갈 만도 한데 얘는 절묘하게 균형을 잘 지키고 있는 거야. 알고 보니 하나가 방황할 적에 아멜리가 한 충고 때문이었지. 아멜리의 한마디가 그렇게 영향을 미칠 정도였으니, 하나에게 있어 아멜리의 의미가 정말 큰 거야.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멜리는 하나를 그저 어린 동생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
메르시는 그런 하나가 안쓰러워서 이런저런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아멜리는 끄떡도 하지 않았어. 그러던 어느날, 메르시가 병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하나에게서 전화가 왔지. 언니! 오늘 날씨 좋은데 뭐해요? 하는 소릴 들으니 새삼 아멜리가 부러워졌어.
언제나 아멜리의 기분을 살뜰히 살펴주는 어린 친구의 존재가 부러웠던 거지. 아직 메르시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리 친한 사이의 지인도 없고, 연락오는 사람들은 죄다 흑심 품고 접근하는 사람들이니 이런 순수한 감정을 품고 있는 하나가 눈부시게 느껴졌어.
혼자 있어요, 하고 아멜리와 함께 있지 않음을 알렸는데 하나가 어, 언니 술 마신 거예요? 왜 술을 혼자 마셔요? 무슨 속상한 일 있어요? 하는 거지. 그러면서 어디냐고 물어. 바 이름을 알려주고 30분쯤 지나니까 하나가 찾아온 거야. 그러면서 기분 안 좋으면 나를 부르지, 왜 혼자 술을 마셔요, 라며 옆자리에 앉아.
메르시가 무심코, 아멜리도 없는데요? 라고 하니까 하나가 서운하게 그런 말 할 거예요? 우리 친하잖아요. 아니에요?이러는 거. 그러고선 메르시랑 눈을 마주치면서 왜 속상한 건지 밀 안 해줄 거예요? 라는 거야. 안 그래도 외롭고 힘든 날인데 예쁘고 착한 애가 다정하게까지 구니까 메르시는 많이 감동했어. 그래서 한참이나 어린 애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놨지.
애가 어리긴 해도 영리한지라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구나, 언니 많이 속상했겠다, 그 사람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하고 장단도 맞춰주고 메르시 등도 쓰다듬어주고 다독다독해주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거야. 아멜리였다면 이런 상황에선 왜 못 받아치냐고 메르시한테 한소리를 늘어놓았을 텐데 하나는 마음 따뜻해지는 위로를 해주니까 애의 배려가 가슴에 스며드는 거지.
메르시도 아멜리 외에 친분있는 사람이 한국에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 하나는 메르시를 조금씩 챙겨줬어. 가끔씩 볼 때마다 언니 오늘은 무슨 일 없었어요? 하면서 안부 물어봐주고 맛집 같은 거 탐방할 때 메르시 불러서 같이 가고(아멜리는 20대 애들이 좋아할 법한 곳을 시끄럽다며 싫어함) 저번에 그 사람이 귀찮게 안 해요? 하고 전에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되물어주니까 저도 모르게 하나가 메르시의 마음 속에 들어선 거야.
하나는 이제 메르시를 아멜리의 친구가 아니라 제 친구라고 여기게 되었고, 메르시는 하나가 저를 딱 친구로만 생각하는 걸 아니까 마음 표현은 엄두도 못 냈어. 한참이나 어린 애, 게다가 동성, 무엇보다도 제 오랜 친구를 좋아하는 애니까.
아멜리에 홀딱 반해서 다른 게 눈에 안 들어오는 하나와는 달리, 아멜리는 메르시가 하나를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는 걸 일찍 깨닫지. 그래서 메르시가 친구를 사랑하는 애를 좋아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하는 걸 알고선 어차피 자기는 하나를 동생 이상으론 보지 않으니 상관없다고 하는 거야. 졸지에 마음이 들켜버린 메르시가 당황해하자 하나 정도면 괜찮지, 라고 해.
그리고선 차라리 잘 됐네, 라는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어.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1주일 후의 일이었지. 아멜리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서 메르시와 하나를 술자리에 부른 거야. 하나가 가장 먼저 도착했고, 그 다음에 메르시가 도착했지. 아멜리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어. 하나는 몹시도 불안해하는 얼굴로 메르시에게 아멜리가 소개해주려는 사람이 누군지 아냐고 물었어. 메르시는 자기도 모른다고 대답했지.
그리고 하나의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까 속도 쓰리고 덩달아 저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어. 그리고 예감은 현실이 되었지. 아멜리가 어떤 여자와 함께 나타난 거야. 설렘과 긴장이 섞인 눈을 한 숏컷 여자를 먼저 앉히고 그 옆에 앉은 아멜리가 말했어. 얘는 레나 옥스턴. 내 애인이야.
메르시는 아멜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나를 돌아보았고, 하나의 얼굴이 쩡하니 굳었다가 떨리는 눈동자와 함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지. 하나가 황급히 일어서더니 급한 일이 생각났다면서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어. 메르시는 하나의 마음을 꼭 이런 방식으로 접게 했어야 하냔 원망 반,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해 반의 마음으로 아멜리를 보았지.
그리고 레나에게 만나서 반가워요, 다음에 볼 때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재미있게 놀다가요. 하는 말을 남기고는 화급히 하나를 쫓아갔어. 하지만 하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 계속 전화를 하며 하나를 찾아다니던 메르시는 기어코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서 쪼그려앉아 울고 있는 하나를 발견했어. 카페에서 만난 이후 처음 보는 하나의 눈물에 메르시는 크게 당황했어.
저는 하나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정작 하나가 위로를 필요로 하는 때가 되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 거야.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갈 곳 없는 원망이 가슴을 헤짚는 것 같아서 어쩔줄을 몰라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니까 일단 하나에게 다가갔어. 하나는 우는 와중에도 저를 걱정해 따라나온 메르시를 보자 애써 괜찮은 척을 했지.
아, 사실 일주일 전에 아멜리 언니가 이제 그만 마음 접으라고,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 했을 때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니깐 괜히 눈물이 나네요. 이러면서 자기 때문에 아멜리 언니 애인 소개 자리가 망쳐져서 어쩌죠… 하는데 메르시는 울컥 화가 치솟는 거야.
3년의 짝사랑이 박살났으니 울고불고 난리쳐도 모자랄 판에 아멜리 걱정을 하는 이 미련하고도 가엾은 애 때문에 제 마음이 더 찢어질 것 같은 거야. 하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려는데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추운 겨울 날씨에 두 볼이 시리게 얼어붙으니까 메르시는 하나의 손목을 붙잡고 골목길 바로 옆에 있는 바로 들어갔어. 그리고 구석진 자리에서 하나가 좀 진정이 되기를 기다렸지.
가까스로 울음이 잦아든 하나는 언니 나 술 마시고 싶어요, 라며입을 열었고 메르시는 자기가 사줄테니 돈 걱정은 말고 마시라고 했지. 그런데 애가 첫 잔부터 그 독한 마티니를 시키는 거야. 말리고 싶었는데 속이 말이 아닐 걸 아니까 말리지도 못하고 메르시도 같은 걸 시켰지. 아주 천천히 음미하듯 술을 마시는 메르시와는 다르게 하나는 빨리 취하는 게 목적 같았어.
연거푸 세 잔을 들이키더니 금방 맛이 가서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훌쩍이기 시작했지. 그걸 지켜보는 메르시도 속이 상해서 술잔을 자꾸 비웠어. 한참을 말없이 술을 마시다 사 술잔을 집어드는데, 하나가 손을 뻗어 메르시의 술잔을 잡고 원샷하는 거야.
그리고선 주절주절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지. 가족 간의 불화부터 시작해서 부모의 바람, 그리고 양 부모에게 버려지듯 강제로 독립하게 됐던 중학교 3학년 어느 겨울 날.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나쁜 마음을 먹고 방황하다가 아멜리가 우연히 끼어들어 막아줬던 것, 차가운 태도에 화가 났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생판 모르는 남인 저를 도와준 것이었다는 것 등등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기에 메르시는 하나의 불우한 가정환경에 마음 아파하며 경청했지.
이야기를 하다보니 목이 말랐는지 하나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어. 보조를 맞추느라 메르시 역시 술을 마셨는데,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새벽 1시가 넘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니 취기가 훅 밀려든 거야. 독한 술을 마셔댔던 하나는 뭐 말할 것도 없고. 하나를 부축해서 술집을 나섰는데 둘 다 발 밑이 휘청휘청해서 제대로 걷질 못하겠는 거지.
어쩔 수 없이 근처 모텔로 들어가서 하나를 눕히고 자기도 대충 씻고 나와서 자려는데, 하나가 메르시를 껴안는 거야. 그리고선 안아달라고 하는데 그 말 속에 다분히 성적인 뉘앙스가 깔려있었지. 메르시는 하나가 너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냥 재우려는데 애가 울컥해서는 메르시 위로 몸을 겹치더니 자기가 너무 애 같아서 싫냐는 거야.
그러니까 애가 지금 실연에 상처받은데다가 술에 취해서 괜히 자격지심 같은 게 발동해서 막 나가는 거지. 메르시는 당연히 아니라고 하나를 달래며 일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는데, 하나는 그게 애취급이라고 생각해서 충동적으로 메르시한테 입을 맞추지. 평소의 메르시라면 어떻게든 달래서 하나를 재웠을 텐데 애가 집요하게 키스하는 거야.
확 달아오르는 걸 가까스로 참고서 그냥 자자고 품에 안고 다독이는데 하나가 언니도 내가 싫어요?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싫으면 관둬요, 밖엔 나 좋단 사람이 한명쯤은 있겠지. 하더니 자리에서 휘청휘청 일어서는 거. 아 얘가 진짜 맛이 갔구나 싶은데 아멜리 만나기 전에도 이렇게 막 나가려던 전적이 있었으니 이대로 보냈다간 진짜 큰일 나겠다 싶은 거지.
메르시도 술에 취해서 이성이 간당간당한 상태인데 하나가 그런 말을 해버리니깐 화도 나고 속도 상하고 차마 다른 사람 찾아서 간다는 애를 보낼 수가 없어서 결국 잠자리를 같이 함. 아침이 되자 두통 때문에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 품이 너무 따뜻한 거야. 뭐지 하고 눈을 떴는데 제 품 안에 하나가 있는 걸 보고 어젯밤의 광경이 되살아나서 기겁해.
아무리 술김이었다고는 해도 한참이나 어린, 그것도 심심미약 상태의, 심지어는 일방적으로 마음에 담고 있는 애랑 일을 저질렀으니 양심이 미친듯이 찔리는 거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한참을 마른 세수만 하다가 일단 씻기로 했지.
차가운 물을 맞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을 리가 만무했지. 결국은 정공법밖에 없었지. 상대가 약해져 있는 상황에서 하는 고백만큼 비겁한 일은 없지만, 이 상황에서 어젯밤 일이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넘어갈 수는 없잖아. 게다가 그런 행동은 어린 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3년이나 아멜리를 좋아했던 하나에게 이런 상황에서 고백해봤자 거절당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전해야하니 참 참담한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여러모로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인지라 결심을 굳히고 샤워기 물을 잠갔지. 마음 속으로 할 말을 고르고 고르며 샤워실 문을 열었는데… 애가 없는 거야.
침대 위에는 당황스런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한 헝클어진 이불만이 놓여 있었어. 상황이 더 꼬여가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휴대폰을 찾아쥐고 하나에게 전화를 했는데, 오 젠장, 전원이 꺼져 있다네?
결국 그날 종일 하나와는 연락이 되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흘렀어. 메르시는 계속 하나에게 연락을 해보려고 했지만 하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지. 시간을 따로 낼 수가 없어서 당직을 선 다음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학으로 찾아갔는데, 애가 며칠째 대학에도 안 나오고 있다는 거야. 답답할 노릇이지.
애가 혹시라도 엇나가거나 그러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고 안 그래도 힘든 애가 자기 때문에 더 힘들까봐 염려되고 미안하기도 하고 이렇게 연락을 끊어버리는 건지 마음도 아파서 속이 까맣게 타는 것 같은 나날을 보냈는데, 일주일이 지나서 하나에게서 연락이 온 거야. 만날 수 있냐고 말이야.
꼬박 1주일 만에 보는 하나는 적어도 겉으로는 괜찮아보였어. 살짝 여윈 것 같았지만 어, 앙겔라 언니! 여기에요, 여기! 하면서 밝은 얼굴로 메르시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기까지 했지. 그간 아무런 일도 없던 듯이 구는 모습에 메르시는 속이 복잡했어. 잔뜩 걱정을 끼친 하나가 조금은 야속했지.
자리에 앉은 메르시가 뭐라고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하나가 입을 열었어. 언니, 저번에는 제가 실례가 좀 많았죠? 언니가 많이 곤란했을 거 알아요. 제가 혼자 생각할 게 좀 많아서 미처 언니 생각을 못 했어요. 걱정 많이 했어요? 하면서 밉지 않게 웃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연락두절에 대해선 그냥 넘어가고, 문제의 원인인 모텔에서의 일을 꺼내려 하는데 하나가 선수를 치는 거야. 언니, 그 날 일은 그냥 없었던 일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언니한테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 제정신이 아니었기도 하고… 이런 일로 언니랑 어색해지긴 싫거든요.
이러는데 순간 말이 막히는 거지. 메르시는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짓길 원했지,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아예 제 마음에 대해서는 말도 못 꺼내게 만드는, 일주일 전의 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어색한 사이가 된다는 뉘앙스의 말을 들으니까 하나가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어.
하나 양, 하고 말문을 여는 메르시에게 하나가 말했지. 저 일주일 동안 겨울 바다보러 제주도 다녀왔어요. 여기저기 혼자 다니면서 마음 정리 해보니까 이게 또 되더라고요. 사실 그 동안 마음 접어보려고 시도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당장은 아직 힘들 것 같은데, 조금만 지나면 웃으면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러는 거야.
이 지경에 이르러서까지도 아멜리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메르시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어. 메르시는 하나와 제 사이에 있던 일들을 먼저 짚고, 그리고 뻔히 차일 걸 알면서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정작 하나는 저와의 일에 대해서는 말머리를 돌리고 피하려 하는 거잖아. 하나의 의도에 넘어가줘야 할지, 아니면 기어코 그 일을 짚고 넘어가야 할지 생각하던 메르시는 결국 마음을 굳혔어.
술을 마셨든 상황이 여의치 않았든 간에 어쨌든 하나와 밤을 보낸 건 결국 제 의지에 따른 일이었는데다, 하나가 제 처음을 그렇게 술에 취해서 흐지부지 흘려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하나 양, 전 그날 일을 없던 일로 할 수 없어요. 라는 말로 입을 연 메르시가 천천히 제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지. 하나는 진솔한 어조의 메르시를 막을 수가 없었어. 결국 입술을 깨문 채로 메르시의 마음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 비록 타이밍이 더없이 나쁘지만, 저를 연모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메르시의 고백을 듣게 되었어.
하나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어.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지. 언니 똑똑하잖아요. 그런데 왜…. 차마 잇지 못하는 뒷말엔 그런데도 어째서 거절당할 걸 뻔히 알면서 고백하냐는 뜻이 숨어있었지. 메르시는 씁쓸한 웃음을 짓더니 속내를 털어놓았어.
하나가 제게 막무가내로 안아달라 몰아세웠던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길 바랐고, 동시에 처음에 대한 기억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으로 남지 않길 바라서였다고 말이야. 다정한 배려가 담긴 말에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밝은 척했던 하나의 눈앞이 부옇게 번졌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연이어 투명한 물방울이 뚝뚝 그 뒤를 이었지. 하나는 당황해서는 아, 갑자기 눈물이 나네요 하며 서둘러 티슈로 눈가를 훔쳤지만 눈물은 쉽게 멎지 않았어. 앙겔라는 하나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서 떨리는 하나의 어깨를 감싸주었지.
이렇게 끝내고 싶은데 그럼 욕할 거?
written_by_bl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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