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
3시 정각, 사이 도착.
드르륵 -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수의 경호원을 이끌고 사이가 문을 열었다.
사이는 오늘도 ‘역시나’였다.
수수한 짧은 단발에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칙칙한 우리와는 다르게, 긴 머리칼과 주홍 빛 치렁치렁한 블라우스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놀러 나온 듯한 복장, 우리와는 정반대의 스타일, 이는 의도된 복장임이 분명했다.
자존심, 신경 쓴 모습이 유난스럽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이는 늘 그랬다.
보다 화려하게, 하지만 과하지 않고 진지하게,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느낄 정도로.
물론 란란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방법이기는 하지만.
"차오~ 보고 싶었어!"
"난 별로."
란란은 그런 사이를 보고서 또 다시 사이에게 달려 들었고 나는 그냥 뒤에서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사이는 매우 자연스럽다는 듯이 달려오는 란란을 살짝 빗겨 치고선, 내 옆 자리에 조신하게 앉아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리리, 오랜만이야."
"으응... 안녕."
새콤한 라벤더 향과 그에 상응하는 자상한 미소.
하지만 이유 모를 어색함에 멋쩍은 미소만 짓는 나였다.
란란은 그런 리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시큰둥하다는 얼굴로 틱틱거리기 시작했다.
"치이이... 바보."
"여기 카메라 있어 란란, 조심해."
"어차피 너 때문에 보안 다 깨졌거든?"
"알아, 그냥 네가 싫어서 그래."
보안.
차오 컴퍼니의 딸들에게는 한가지 보안 규칙이 존재한다.
사이 한 명을 제외하고선 모두 지켜야만 하는 규칙인데, 모든 차오들은 차오 컴퍼니 외에서 만나야 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서로 같은 복장에 같은 화장, 같은 머리 길이를 유지해야만 했다.
또한 서로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아야 하고, 오로지 서로를 '차오'라고 불러야만 한다.
그게 차오들이 지켜야 할 보안 규칙이었고, 방침이었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치... 너무해."
"잠깐 이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이렇게 입고 온 거야, 딱히 보안을 어길 생각은 없었어. 양해 부탁할 게 리리."
"나한테도 미안하다고 말해줘."
"시끄러워."
별 거 없다, 그냥 이렇게 란란이 사이 때문에 삐칠 뿐.
차오들끼리의 사적인 자리거나 회사 건물일 경우에는 보안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규칙은 규칙인지라, 당연히 제재가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 제재를 가하는 사람이 바로 차오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별 있으나 마나 하는 규칙이었다.
적어도 차오 컴퍼니가 관리할 수 있는 곳이라면, 보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보안은 그냥 차오들끼리의 암묵적인 룰이자 놀이일 뿐이었다.
"손 다쳤어?"
"아... 이건 -"
"어디 보여줘 봐, 병원은 갔어?"
하지만 보안을 잘 지키다 보면 가끔 이런 오해가 생기곤 한다.
보안을 가장 안 지키는 사이가,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나의 손바닥을 살피는 모습이 참으로 모순스럽다.
물론 이건 나의 상처가 아니라 란란의 상처였지만.
"뭐야, 여기 다친 게 아니야?"
"날 걱정해줘 차오... 내가 다친 거란 말이야..."
사이가 오히려 안도하는 얼굴을 보여버려서 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란란은 내 눈 앞에서 사이에게 더 더 달라붙기 시작했다.
마치 일부로 나의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하듯이 말이다.
'자기가 일부로 잡은 거면서.'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란란은 보란 듯이 성공해냈다.
옆의 거울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쌀이 절로 시무 해져있었고, 절로 입안에서 군소리가 나돌고 있었다.
“차오~”
나는 란란이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둘이 어떤 사이였던 간에, 이유가 어찌 되었던 간에, 일단 나를 선택했으니 나는 란란이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둘이 있을 때 그러는 건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앞에 있을 때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란란은 참 나쁜 아이.
.
하지만 질투를 느끼는 나와 달리, 사이가 아양 떠는 란란을 봐줄 리는 없었다.
사이는 란란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묵묵히 붕대를 풀어 젖히며, 내게 걱정 섞인 조언을 당부했다.
"리리, 굳이 이런 자리에서까지 보안 안 지켜도 되니까 풀어 놔. 답답하고 불편하잖아."
"난 괜찮은데..."
괜스레 다시금 사이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사이는 날 위해주는데, 나는 그런 애한테 질투나 하고 있고, 사이는 이런 사소한 것들도 신경 써주고.
그렇지만 사이는 단호했다.
"내가 보기 싫어, 네가 란란에게 휘둘리는 모습이 답답해. 그리고 굳이 란란 따라다니지 말고 -"
"차오... 나 바로 앞에 있는데?"
"넌 빨리 치료나 받아, 그 정도는 애들 시켜도 괜찮잖아."
"절대 싫어! 걔네는 꺼림직하단 말이야!"
"근데 그런 애가 아버지한테 의무 등록 법안이랑 지원정책 안건을 제시해?"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지!"
"내가 오늘 시간내서 너를 왜 만나야 하는데!"
급 과열되는 분위기.
평소와 같은 티격태격.
둘의 성격들과 가치관은 항상 대립되곤 했다.
어떻게 둘이 절친이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둘은 어릴 때부터 자주 싸우고 다퉜다.
그리고 나는 이 둘 사이에서 엉성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나는 후계자 계승 순위 2위, 1위는 란란, 그리고 사이는 3위.
하지만 사이가 나보다 성과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나보고 휘둘린다 말한다.
그 이유야, 내가 란란에게 휘둘리고 있기에 그런 것이겠지.
여태까지의 성과 중에서, 나는 내 스스로 성과를 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이는 전부 란란의 몫, 이름은 내 앞으로 돌려놓고 란란은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다른 작업을 마치고 나서도 내 이름으로, 또 내 이름으로, 또 내 이름으로.
그렇게 하면서도 란란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젖혀내고 있었다.
마치 사이를 놀린다는 듯이.
하지만 사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내가 란란의 허수아비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차오들에게서 점수를 넘겨받지 않았다.
경쟁에서 포기한 차오들이 란란에게 모든 걸 넘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진짜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듯이.
그리고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걸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불쌍해 보였던 걸까.
란란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냥 심심풀이 땅콩, 애완동물처럼 보일까
티격태격 싸우며 맞장구 치는 둘은 왠지 모르게 내게서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분명히 둘은 내 눈 앞에 있고, 같은 차오라는 이름 안에 섞인 쌍둥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일까.
우리가 진정 쌍둥이라면 우리는 같아야 할 텐데, 우린 어째서 이렇게나 다른 걸까.
"리리를 곤란하게 하지마, 란란. 난 너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아."
"너나 곤란하게 하지마! 흥!"
조금은 기분 나쁠지도,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오래 끌렸다. 회의 시작할 게."
그리고 이런 생각 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지독하게 부끄러웠다.
"오늘의 주제는, 란란이 개입했다는 종교사업에 대한 찌라시에 대해서야."
//
오늘의 모임 주제는 란란이 판을 키우고 있는 베수비오 교단 사업에 대한 피드백이었다.
도시국가 폼페이에 자리잡고 있는 저 활화산, 모든 것을 망가트렸던 그 베수비오 산을 믿는다는 엉터리 같은 신흥종교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널리 퍼지고 있었는데, 이에 란란이 대대적으로 개입했다는 소문이 돌아 확인 차 나선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결과는 -
“일단 바로 물어볼 게, 네가 한 작업 맞아?”
“응, 맞아. 내가 손을 조금 썼어. 근데 그게 왜?”
사실이었다.
란란의 입에서 사실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사이는 딴죽을 걸기 시작했다.
"이해 안돼. 물론 잘나신 란란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만, 특정 종교를 지지한다는 게 기업 입장에서 얼마나 큰 패널티인지 알잖아. 그런데도 굳이 나서서 신흥 종교를 지원하고 있는 이유는 뭐야, 무슨 꿍꿍이야?"
사이의 말처럼, 기업체의 입장에서 어느 한 종교를 대대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작업이었다.
이미 차오 컴퍼니의 주가는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이 정도로 흔들릴 그런 기업은 아니라지만, 란란이 대대적으로 그들을 지원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가가 떨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입으로 ‘손을 조금 썼다.’ 라고 말하는 건,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기에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란란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꿍꿍이라니, 우리 베수비오 교단을 무시하지마! 얼마나 깨끗하고 청렴한 집단인데.”
란란이 종교를 믿는다니,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
사이는 그런 란란을 한껏 비웃어주며 말했다.
“아무렴, 네가 참도 종교를 믿겠다. 그지? 저 되도 않는 화산을 말이야.”
“아까부터 너무 날카로워… 차오.”
“왜 그랬는지 대답하기나 해.”
“알았어.”
분위기가 과열되기 전에 란란이 한발 뺐다.
사이가 유난스럽게 날카롭기는 했지만 란란도 조금 과하긴 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일하는 시간이니까 – 사이는 공적인 일에서의 장난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잠깐만…”
그러니까 장난은 여기까지, 사이의 어투를 보니 마지막 경고임이 분명했다.
란란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거두고 주머니에서 작은 리모컨을 꺼냈다.
그리고 전원버튼을 누르자, 주위가 어두워지고 푸른 프로젝트 빔이 사방에 펼쳐졌다.
여러 가지 정보와 글, 사진들이 찍혀있는 화면.
란란은 그 중 CCTV화면이 띄워져 있는 - 우리의 모습이 찍히고 있는 – 화면을 클릭해서 넓게 보여주더니, 자신만만하게 –과장적이게- 팔을 내어 벌리며 말했다.
“완벽한 통제, 그게 목적이야.”
그리고 곧장 사이의 태클이 걸려왔다.
“종교와 통제, 관계성은 있어? 게다가 요즘 시대에? 더군다나 우리 사업은 전부 크게 진행되어있고, 우리에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어. 그런데 굳이 우리가 위험부담을 가져야 해?”
날카로운 지적.
요즘 시대에 종교와 통제가 관련 있을 수가 있나?
이미 과학적 원리와 이 세상이 그리 좁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가득한데, 통제라니.
조금은 과장된 – 허황된 - 소리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란란은 이를 예상했다는 듯이 넉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우리 나라가 가지고 있는 폐쇄성 때문이지.”
"뭐?”
“말 그대로야, 현지 우리 국가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잘살고, 훨씬 더 발전되어있고, 훨씬 더 땅덩이가 좁지.”
란란의 말처럼, 우리 국가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땅덩이가 15~20배는 작았다.
비록, 그들이 제작에 망치를 사용하고 있을 때 우리는 자동화 기계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땅덩이가 훨씬 좁은 건 사실이었다.
란란이 보여주고 있는 내수시장 그래프가 그러했다.
더 이상 볼 것이 없기에, 우리들에겐 문화라는 것도 없기에, 관광 사업의 그래프는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그에 맞춰 관광지의 음식 가격은 올라가고 있었다.
개인 문화 사업, 게임이나 도박, 컨텐츠 분야의 시장은 하락하지는 않았지만 규제에 의해 한계를 겪고 있었고, 소비 의욕을 잃은 사람들은 더 이상 편의에 돈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정부는, 그 돌지 않는 돈 만큼 돈을 찍어내고 있다.
그래프의 어딜 보더라도 좋은 상승은 없었다.
눈에 선명히 보이는 하락과 유지, 그 둘만 있을 뿐.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차오 컴퍼니가 아니라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다.
란란은 이 문제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시장은 좁고, 정보는 한정적이야. 게다가 우리는 큐브라는 한정적인 공간 때문에 하늘조차 제대로 바라볼 수 없지. 결정적으로 마법사들과 일반민들 사이의 신분 차이도 극명하고. 사람들은 금방 답답함과 질림, 그리고 한계를 느끼기 시작할 거야.”
“그걸 종교로 해결하시겠다?”
“당연하지, 마법사들을 다르게 부르는 단어에, 선인이라는 단어가 있잖아? 난 종교를 통해 그들이 느끼는 박탈감을 해소시켜주려고 해.”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로 치부하던 사이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박탈감을 해소시킨다고 끝나는 상황은 아니잖아, 소비를 어떻게 우리 쪽으로 늘릴 건데?”
“소비를 늘리진 못해, 이건 소비를 늘리려고 짜둔 설계는 아니니까.”
“뭐라고?”
“이건 일종의 투자야. 후에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 위한, 그리고 우리 편을 더 만들기 위한, 더 나아가 우리 국가의 발전을 위한, 그런 의미의 투자.”
꽤나 의아한 답변.
기업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일한다니, 아무리 우리가 16살 철없는 어린애들이라고는 하지만 약 200년도 안 되는 국가에 자긍심과 충성심을 가질 만큼의 멍청이는 아니었다.
“우리는 이익집단이라는 걸 알고 있지?”
그러니, 사이가 당연히 이렇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금 반정부적이면서, 사이가 무엇을 하려고 했을 때마다 그들에게 많은 제약을 받았었으니까.
어찌 보면 화를 내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국가에 충성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잖아.”
“마법부와 함께 우리를 규제하고만 있는 그들에게 충성하자고?”
물론 란란은 사이와 반대로 친정부적이었다.
“충성하자는 게 아니야, 나는 다만 –“
“게다가, 난 이 사업을 이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해야 할 사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애초에 우리가 종교를 쥐락펴락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될뿐더러,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우리에게 닥칠 여파도 생각해야 하잖아.”
“그 뒷감당에 대해서는 –“
“생각을 다시 해보는 게 어때?”
“저기,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난 아직 제대로 된 주제도 말 못했어… 차오, 일단은 전부 다 들어보고, 내가 질문 받을 때 질문해주지 않을래? 토론의 기본이잖아.”
하지만 불만일 불만일 뿐이고, 토론은 토론이었다.
란란은 자꾸 말을 끊어내는 사이의 말을 짜증난다는 듯이 끊어냈다.
사이 또한 본인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좋아, 어디 말해봐.”
“협조 고마워, 그럼 계속해볼게."
그녀답지 않은 행동을 해서 그런가, 나쁜 말로 본 모습을 숨기고는 있지만 사이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듯 보였다.
이윽고, 란란은 사이가 입을 온전히 다문 것을 확인한 후에야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화면에는 베수비오 교단의 교리가 적힌 비석과, 신자들이 찍혀있는 사진이 띄워졌다.
란란은 그 사진들을 손으로 짚으며, 핵심 교리로 보이는 구절을 우리에게 요약해주었다.
“베수비오 교단의 신서에 따르면 ‘그날을 기다리며, 남들을 도우고 받아들여라. 그럼 너 또한 그들과 같아지리라.’라는 구절이 있어. 지극히 이타적이면서도 베타적이지. 교리를 요약하자면, 그 날엔 믿는 자들은 구원받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하지만, 교리를 실천하며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다 보면 성령이 깃들어 그들과 같아질 수 있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교리.
사이 또한 이상함을 느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절인데.”
“고대 종교의 짝퉁이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아마 우리들 밖에 없을 거야.”
그야 우리들은 원주민이 아니니까.
사실 이 도시 폼페이의 원주민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기야 할까?
우리들은 모두 피난민이자 추방자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로부터 전해져 온 지식들과 행동 지침들을 배우며 자랐다.
그리고 이 구절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읊어주셨던 구절 중 하나였다.
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분명히 내 기억엔 그랬었다.
그나저나 그 이름이 뭐였더라… 왜 자꾸 기억에 남는 걸까.
“그 전에,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 누굴까? 한번 차오가 대답해봐.”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어지는 침묵.
그 다음, 내게로 쏟아지는 부담의 눈빛들.
란란과 사이가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 나?”
“그럼, 이런 거 대답해줄 사람이 차오 말고 누가 더 있어? 저쪽 차오는 지금 너무 예민하잖아.”
아차차, 다른 생각 중에 불현듯 닥쳐오는 질문.
당연히 사이일 줄 알았건만, 당황한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리고야 말았다.
“그… 글쎄, 신?”
“신이라니.”
한탄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사이.
아무래도 란란 때문인지 화가 많이 나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한심스러운 발언이긴 했다.
더군다나 토론 중에 집중하지 않는 모습까지 보이다니, 바보 같은 나.
하지만 란란은 그런 까탈스러운 사이의 태도에 정면으로 반박이라도 하듯이, 나의 말을 두둔해주었다.
“그래, 신일 수도 있고, 그들이 꿈꾸는 마법사일수도 있지. 아니면 그들이 상상하는 천사일 수도 있고. 모호한 표현이 가지는 장점 다들 배웠잖아? 해석하기 나름인 거야.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마.”
“내가 뭘.”
“방금 차오한테 빈정거렸잖아.”
“내가?”
사이가 재빨리 부끄러움으로 푸르딩딩해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겁지겁 숨겨보려고는 했지만, 내 얼굴은 이내 사이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미안해 리리, 조금 흥분했나 봐.”
“아냐, 괜찮아.”
내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과를 받아버리니 더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짐을 느낀다.
“나한테도 아까 못되게 군거 사과해주면 안될까…”
“시끄러워.”
몇 번이고 말하지만, 물론 귀여운 척 하는 란란에게 통할 리는 없다.
란란은 이젠 알겠다는 얼굴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교리를 믿는 혹은 교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점점 더 끌어 모을 거야. 물론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속아넘어가지 않겠지만, 그 사람들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통제 가능해.”
“글쎄, 사람들이 과연?”
“경영은 논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차오도 잘 알고 있잖아? 때론 감성에 치우쳐야 할 때도 있는 거지.”
경영이란 논리로만 하는 게 아니다.
지겹게 들은 말이었다.
물론 감성에만 치우치는 것도 안될 짓이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너는 그걸 어떻게 발전시킬 계획인데.”
“화제성을 키울 거야, 과학자들과의 대립을 통해.”
란란의 손짓에 화면이 바뀌고, - 미개한 – 다른 국가의 종교전쟁 장면과 마법사들의 사진이 화면위로 떠올랐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 분명하잖아? 더군다나 우리 세상에는 실존하는 미지의 물질이 있고 말이지.”
마나.
실존하는 미지의 물질.
실생활에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성분과 원리를 찾지 못해 안달 나있는, 그런 물질.
더군다나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도 그 원리를 설명하지 못하는 그런 미지의 물질.
란란은 그 물질을 통해 싸움을 붙일 예정이었다.
란란의 계획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혀오기 시작했다.
“차오들도 알다시피, 마나라는 건 아직까지도 100% 밝혀지지 않은 영역이잖아. 더군다나 현재 마법부의 고위층들은 자기들만의 비밀을 밝히고 있지 않지.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부당한 일이라 생각하겠지.”
“아니, 발전을 막는 일이라 생각할 거야. 왜냐하면 우리는 늘 발전해왔으니까.”
란란의 손짓에 폭발로 폐허가 되었던 우리의 땅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눈부시게 발전된 우리의 땅, 그리고 우리의 회사 사진이 등장했다.
하지만 란란은 자랑스럽다는 듯 눈빛 대신,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사회가 제대로 구성 된지 200년지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발전해왔어. 멸망까지 갈뻔했던 화산폭발 이후에도 우리는 살아남아 다시 이 사회를 구축해냈지. 압도적인 기술력과 발전으로. 하지만 지금은? 지금만한 정체기가 있을까. 이 정체기는 우리가 땅덩이를 넓히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거야.”
좁은 땅.
비밀로 감춰진 우리의 존재 때문에 우리는 내수시장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 도시국가, 폼페이는 지금 그 한계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우리사회는 다른 국가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늘 자랑스러워했어. 그들의 미개함을 TV로 송출하며,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는 착각을 끈임 없이 교육시켰으니 말이야. 하지만 실상은, 우리는 내쫓긴 피난민들일 뿐이고, 그들이 우리를 추방시켰지. 우리의 역사는 보잘것없어, 단지 그들보다 잘나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위할 뿐. 거기에다가 우리는 미지의 사막을 앞에 두고 있지. 진짜 괴물들이 나뒹굴고 있는 그런 황야. 선조들은 이 곳을 어떻게 찾아온 걸까?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해.”
란란의 말처럼, 현재 TV프로그램에서 가장 잘 나가는 건 –미개한- 바깥의 전쟁과 학살, 연희를 보며 조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때문인지 사람들은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방송사들은 본인들의 이익만을 위해 나쁜 것을 송출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세상이니까, 과거에 잠깐 있었던 예술가는 점점 더 줄어들고, 사람들은 안정된 직장만을 찾아 다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란란은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
“쉬워, 수를 줄이면 돼.”
설마.
란란의 수를 줄인다는 말에 사이의 눈이 곧장 휘둥그래졌다.
“란란, 너 설마 –“
“물론 반대파의 수! 차오들은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여?”
사이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둘의 눈치를 살짝 보다가, 그냥 조용히 한번 끄덕였다.
왜냐하면… 솔직히 란란은 그럴 사람 같았으니까.
“차오 너도…?”
나까지 고개를 끄덕거리자 란란은 굉장히 충격 받았다는 얼굴로 한탄하기 시작했다.
“하아…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란란.
아마 란란의 기준에서는 재미있는 농담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물론 당연하지만, 통할 리도 없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대답이나 해.”
“알았어…”
란란을 재촉하는 사이는 굉장히 바빠 보였다.
란란은 한번 훌쩍이더니 다시 토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건드려서 싸움을 만들 거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게 만들어야지, 교단을 통해 얻은 군중들의 힘을 통해서.”
군중들의 힘.
어쨌거나 우린 표면적으로는 민주국가이니까, 군대나 마법사들이 그들을 전부 쓸어버리지 않는 이상 여론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광신도들의 힘이겠지만 말이다.
“불만이 터지는 건, 베수비오 교리에서 언급한 ‘해방의 그날’처럼 순식간일 거야. 우리가 조약 때문에 땅덩이를 넓힐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해. 하지만 그 적이 정부와 우리가 되면 안되지.”
“과정은 단순해. 피해를 받는 건 저쪽, 이익과 정보를 취하는 건 우리 쪽. 우리가 교단을 지원한다는 정보는 결국엔 밝혀지게 될 거야. 그럴 바에 좋든 나쁘든 우리 손으로 공개해 화제성을 키우는 게 더 낫겠지. 안 그래?”
“그 마법이란 기술들은 우리가 독점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어. 그게 더 나은 발전의 시발점이 될 테고.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모든 걸 장악했을 때, 그때 가서 평화조약을 깨트려도 늦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군중들을 종교로 현혹해서 세력을 키운 다음, 그들에게 시비를 붙이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챙길 것만 챙기고 있으면 되는 거지. 어때?”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되묻는 란란.
더 할말이 있을까, 란란의 계획은 현실성 없지만 그럴싸했고, ‘필요한 행동’이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고, 사이 또한 고개를 저었다.
마침내, 란란은 모두를 설득했다는 기쁨의 기지개를 피며 프로젝트를 마쳤다.
“끝! 오늘은 개요였고, 나머지 사업 계획은 차오 메일로 보내놓았어. 그거 확인해주라.”
“그래 너답게 치밀하고 완벽하네.”
“칭찬 고마워!”
독기 서린 저 사이의 말투를 칭찬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란란 뿐일 것이다.
“좋아. 오늘은 여기서 마칠게. 다음 피드백 시간에 보자고."
“일도 끝났는데 커피 한잔 어때?!”
“꺼져.”
다같이 커피나 한잔 하자는 제안이 사이의 신경이라도 건드렸던 걸까.
사이가 나갈 때,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쾅 -
“에구구… 끝까지 날카롭기는, 힘들다. 가자 차오.”
“으응…”
//
사실상 댜음편부터 백합다운 이야기가 나오려나..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