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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집 5-1

검은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03.23 00: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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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1 : https://m.dcinside.com/view.php?id=lilyfever&no=10503

집 2 : https://m.dcinside.com/view.php?id=lilyfever&no=10840

집 3-1 : https://m.dcinside.com/view.php?id=lilyfever&no=17444
집 3-2 : https://m.dcinside.com/view.php?id=lilyfever&no=17445

집 4-1 : https://m.dcinside.com/view.php?id=lilyfever&no=21438
집 4-2 : https://m.dcinside.com/view.php?id=lilyfever&no=21441

집 4.5-1 : https://m.dcinside.com/view.php?id=lilyfever&no=40439
집 4.5-2 : https://m.dcinside.com/view.php?id=lilyfever&no=40443







[박사님, 오늘도 늦게 들어오세요?]

하나는 완성된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입 밖으로 내어 물을 수는 없어 아침에도 입안에서 맴돌다 삼킨 말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 박사인데 보채는 것처럼 들릴까 봐 걱정되었다. 글을 지우고 다시 입력했다.

[박사님, 저녁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박사님, 이번에 새로 개봉한 영화가 재밌다던데 혹시 들어보셨어요?]
[박사님, 오늘 날이 좋던데 이따 저녁에 산책하러 가실래요?]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사의 성격 상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휴대폰을 보고 답장을 주겠지만, 그래도 일하는 시간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꺼려졌다. 멍하니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는데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입력한 글을 보고 하나는 흠칫했다.

[박사님, 보고 싶어요]

깜짝 놀란 와중에도, 잘못 눌러서 보내기 버튼이라도 누르면 큰일이기 때문에 손가락을 들어 신중하게 X 버튼을 터치했다.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 요 며칠 하나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문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곧 까맣게 꺼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왠지 모를 허탈감에 사로잡혀 앉아있는데, 반 친구가 옆자리에 털썩 걸터앉으며 말을 걸었다.

“야, 송하나. 남친 연락 기다리냐?”
“…남친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아직도 고백 못 했어? 와, 징하다 진짜. 내가 너였으면 진작 고백하고도 남았다니까?”

수학여행에서 같은 방을 쓴 친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러 차례 해명했으나, 이미 친구들 사이에서 하나는 '짝사랑 상대에게 고백도 못 하고 바라만 보는 순정파'가 되어 있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상대가 남학생이 아닌, 무려 18살이나 많은 여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사실이었으니까.

“야, 그렇게 하루 종일 핸드폰만 쳐다보지 말고 네가 연락해봐. 그쪽도 너처럼 연락 기다리고 있을 줄 어떻게 아냐?”

친구가 시무룩한 하나를 위로하듯 어깨를 툭 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직 3시 50분, 박사가 퇴근하려면 앞으로도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게다가 여름 휴가를 다녀온 이후 박사의 귀가 시간이 부쩍 늦어져서, 어떤 날은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퇴근하기도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어깨가 축 처지는 것 같았다.

“어? 송하나 왜 이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얘 어디 아파?”

다른 친구가 의아한 듯 다가오자,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말을 받았다.

“응, 아픈 것 같아.”
“조퇴하지 그럼.”
“상사병이라 안 시켜줄 듯.”
“상사병? 아, 그 짝사랑남? 아직도 고백 못 했어?”

도돌이표처럼 시작되려는 고백 운운에 하나는 인상을 팍 썼다. 말이 쉽지, 고백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건 줄 아나. 아이들의 이어지는 수다를 들으며 하나는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

여름 휴가 마지막 날, 하나는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박사가 너무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하듯 볼 뽀뽀를 할 수도 있다고 말은 했지만, 자꾸만 그 일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한숨, 한숨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마다 온갖 상상에 시달렸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심란함을 더했다. 그저 제가 귀여운 동생처럼 보여서 볼 뽀뽀를 했다는 생각과 아주 낮은 가능성이지만, 박사가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사이에서 한참을 갈팡질팡했다. 머리는 전자라고, 가슴은 후자라고 치열하게 다퉜는데 결국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아침이 되었다.

박사의 휴대폰 알람 소리를 듣고 그제야 일어난 척하며 몸을 일으키던 하나는, 박사의 얼굴을 보고 서로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박사는 눈이 마주치자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하나는 그 표정을 보고서야 밤새 끝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던, 박사가 저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게를 둘 수 있었다. 그저 어린 동생의 볼에 한 뽀뽀 때문에 밤을 지새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사 역시 예외가 아닐 터였다.

그러나 박사는 다음 순간, 표정을 관리하고서는 평소의 박사로 돌아왔다. 다정스레 잘 잤냐고 인사를 건네기에 하나도 웃으며 잘 잤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하나는 속으로 헬륨 가스를 집어넣은 풍선이 들뜨는 것처럼 마음이 팔랑거리는 것을 참느라 큰일이었다.

태풍으로 인한 비 때문에 오전 내내 호텔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박사는 태연스레 행동하려 했지만 전날과 비교하면 태도가 묘하게 달랐다. 하나와 시선을 잘 마주치지 못했고, 때때로 얼굴이 약간씩 붉어졌으며, 어딘지 안절부절못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하나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내리눌렀다. 당장이라도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고백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는 수순이어야만 했다.

서울로 돌아온 직후부터, 하나는 박사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전에는 박사에게 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표정관리도 하고 웃는 것도 자제하고 했으나 박사가 제게 마음이 있는 것 같자 더이상 마음을 억누를 필요가 없어졌다. 전보다 더 자주, 밝게 웃었고 박사를 향한 마음을 담아 다정하게 그녀를 대했다.

그러나 하나의 간접적인 애정 공세는 휴가 이후 부쩍 바빠진 박사 때문에 좀처럼 효과를 보지 못했다. 최근 들어서는 연이은 야근으로 인해 마지막으로 같이 저녁 식사를 한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그동안에는 아무리 바빠도 이렇게 연일 야근을 하는 일이 없었다. 아무래도 박사가 저를 피하는 듯했다.

하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박사를 살폈다. 아침저녁으로 잠깐잠깐씩 마주할 때의 박사는 여전히 다정하고 부드러웠고, 하나를 보는 눈동자 역시 따스한 온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박사의 마음이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를 왜 피하는 걸까. 짧게 고민한 끝에 결론이 나왔다. 박사가 마음을 접으려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하나는 속이 몹시 상했다. 박사의 그런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를 맡고 있는 보호자 입장이나, 18살이란 나이 차나, 같은 성별이나, 뭐 그런 것들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갔다. 하나 역시 그 문제로 몇 개월 동안 마음고생을 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에게 있어서는 결국 부가적인 문제였다.

박사는 하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아무런 속셈 없이 끝없는 호의를 베풀어준 따뜻한 사람이었다. 박사와 함께 있으면 하나는 안정감을 느꼈고,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해지며 마음 끝자락까지 따뜻하게 덥혀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조금의 가능성만 있다면 꼭, 어떻게 해서든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욕심의 대상이었다.

그런 대상이 제게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하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최대한 빨리, 박사와 진심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박사의 지친 얼굴을 보면 그런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번 주말에는 아마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희망을 품에 안고서 하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

학교를 마친 후, 하나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놀이터에 들렀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봤자 혼자일 게 뻔하니 가을볕이나 쬐고 들어가자는 마음에서였다.

가방에서 얇은 수필 책을 꺼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었다. 도서관 사서를 맡고 있는 아이에게 아무거나 추천해달라고 해서 받아온 책이었는데, 하필 내용이 짝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그냥 덮을까 하다가 이왕 빌렸으니 읽기로 하고 책을 펼쳤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떠드는 목소리를 배경으로 한참 독서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책 위로 그림자가 졌다.

“야.”

들은 적 있는 목소리에 하나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눈에 익은 근처 여고 교복이 보였다. 그 끝에 있는 얼굴 역시 눈에 익었다. 하나는 퉁명스레 내뱉었다.

“뭐.”
“여기서 뭐 하냐?”
“뭔 상관인데. 꺼져.”

새엄마의 딸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여태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으나, 서로가 서로를 모른 척하고 지나갔었다. 그러던 것이 남자의 집을 나온 지 9개월 만에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이다. 같은 집에 살 때도 서로를 공기 취급하며 말 한마디 섞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지 하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리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잘 사는 것 같더라? 그 여자네 집에서.”

박사를 무례하게 지칭하는 말에 하나의 오른 눈썹이 들썩였다. 어조를 보아 시비 거는 게 목적인 듯했다.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박사를 언급했다는 점이 신경 쓰여서 하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남 이사 잘 살든 말든 뭔 상관인데?”
“근데 그 집에서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길래. 그냥, 다음 갈 곳은 정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말 걸어봤지.”
“…무슨 개소리야?”

박사는 하나가 홀로서기를 할 때까지 같이 살아도 된다고 말을 했었다.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여태 단 한 번도 말을 허투루 한 적 없는 박사였기에 하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내려놓고 지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다음 갈 곳이라니. 짜증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자, 새엄마 딸이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 여자 요즘 맨날 데려다주는 남자 있던데, 조만간에 결혼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럼 너 갈 곳 없어지잖아. 한때 같은 지붕 아래에 살았던 사이니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
“……남자라고?”
“어. 벤츠 타고 다니는 남자던데? 꼬박꼬박 아파트 현관까지 데려다주더라고.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더라.”

안 그래도 밉상인데 말 하나하나가 신경을 거슬리는 것들뿐이었다. 이 성질머리 나쁜 계집애는 하나의 속을 들쑤시려고 일부러 말을 건 것이 분명했다. 하나는 짜증으로 열이 나는 와중에도 감정과 정보를 분리하려 애썼다. 남자와 차. 남자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차에 대해서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요 근래 박사가 차 키를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불길한 기운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을 무시하며 하나가 대꾸했다.

“남 일에 관심 되게 많네. 네가 신경 안 써도 될 일이니까, 그만 꺼져.”
“남 일이 아니지. 혹시라도 니가 '우리 집'에 다시 들어오려고 하면 어떻게 해? 그럼 내 공부방 뺏기는 꼴이잖아.”

'우리 집'에 강세를 두는 점이 정말로 얄미웠다. 하나는 이를 뿌득 갈고 말했다.

“그럴 일 없으니까 관심 꺼. 그리고 뭐? 공부방? 네 성적에 공부방이라니, 가당키나 해? 반에서 10등은 하냐? 이번 10월 모의고사는 잘 봤고?”

같이 살 적에 하나가 전교 1등을 했던 것을 알고 있는 새엄마 딸은 표정을 일그러뜨렸으나, 다음 순간 얼굴을 펴고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네가 성적 운운할 때야? 너 대학은 어쩌니? '아버지'가 너 대학 등록금은 꿈도 꾸지 말라던데.”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남의 인생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앞길이나 걱정해.”
“아니이~, 난 그냥 네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지. 조만간에 집도 돈도 없이 길바닥에 나앉을 텐데 날도 추워질 거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으로 올 생각은 하지 마라? 아버지가 문도 열어주지 말랬거든.”
“그딴 지랄 맞은 집구석엔 죽어도 안 들어가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반응하면 지는 것이란 걸 알면서도 화가 훅 뻗치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상대는 하나의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입가를 비틀어 조소를 지었다.

“찔리니까 화내는 것 좀 봐. 성질머리하고는. 그러니까 네가 그 모양이지.”

하나는 순간 눈앞이 벌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상대가 마지막에 덧붙인 한마디는 남자가 하나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다. 절로 올라가려는 손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눌러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폭력 사태가 일어나면 이 밉살맞은 계집애가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남자 혹은 새엄마를 끌어들여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인 것 같았다.
하나는 깊게 호흡하며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낮게 으르렁댔다.

“…아까부터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는데, 수준 낮은 도발 따윈 상대 안 할 거니까 이제 그만 꺼져.”

위험하게 번뜩이는 눈빛에 새엄마의 딸이 흠칫했다. 살벌한 시선이 둘 사이를 오가는데, 놀이터 한켠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던 애 엄마들이 이쪽을 살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도 그 눈길들을 알아챘는지 재미없단 표정으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 오랜만에 재미있는 꼴 보나 했더니, 아쉽게. 너 없으니까 좀 심심하더라고. 뭐, 조만간에 재밌는 꼴 나겠지만. 어쨌든 나 간다! 안녕!”

마지막 인사는 흡사 친구에게 하는 듯 친근했다. 하나는 분노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절로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느끼며 거친 손길로 책과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정말 기분이 거지 같았다.

*

9개월 만에 마주한 새엄마의 딸은 하나의 기분을 완벽하게 망쳐놓았다. 하나는 분을 이기지 못한 채로 집에 돌아와 헤드폰을 낀 뒤,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음량을 키우고 음악을 들었다.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에 맞춰 하나의 심장도 격하게 뛰었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풀 겸 시끄러운 음악을 듣다가 잔잔한 곡으로 바꿔 틀고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꾸만 박사를 바래다주었다는 '남자'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박사가 매일 늦는 이유가 혹시 그 남자를 만나기 때문이었을까. 저를 향한 마음을 접기 위해서 남자를 만나는 것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러지 말라고, 저도 박사를 좋아하니 솔직해지라고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하나는 곧 제가 놓인 입장이 평범치 않음을 깨닫고 고개를 수그렸다. 저는 어디까지나 박사의 호의에 기대어 얹혀사는 처지였고, 그렇기에 떳떳하게 마음을 밝힐 수가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박사는 적령기의 여성이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저를 선택하는 것보다는 아마도 사회적 지위도 있고 재력도 있을 남자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이익일 터. 게다가 사회적 지위가 있는 박사가 한참이나 어린, 심지어는 같은 성별인 하나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간절히 바라는 일이더라도,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하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남자의 집에서 살았던 것이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이야기였으므로. 오랜만에 지독한 무력감이 하나를 짓눌렀다.

참고 버티는 것은 하나의 특기였다. 골프채로 맞아서 이마가 찢어졌을 때도 늑골에 금이 갔을 때도 하나는 버텼다. 스무 살, 독립하는 그 날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틸 자신이 있었다. 박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박사의 포근한 보호와 따스한 배려 아래에서 하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말랑말랑해졌다. 품고 있던 독기가 빠져나가고 그사이를 박사에 관한 호의와 연모가 채워나갔다. 그렇게 부풀어 오른 감정은 여름 휴가 때 절정을 이뤘고, 더욱 깊어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참고 버틸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단단하게 마음의 벽을 치고 있던 저를 이토록 무방비한 상태로 만들어 놓고서 이제 와서 피하기 시작한 박사에 대한 원망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하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박사에게는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정도인데,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생각인지.

박사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다가 불안해지다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가 자책했다가를 반복하게 됐다. 자꾸만 속이 엉키며 마음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하나는 공부도, 게임 제작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밤 10시가 지나 있었다. 어느새 창밖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하나는 가방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무음으로 설정해놓았던 휴대폰에 여러 메시지와 SNS 알림이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박사가 보낸, 늦겠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어지는 이유가 일이 아니라 남자 때문이었다니…….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이 다시금 속을 흩트려놓는 바람에 더이상 집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카디건을 걸치고 현관을 나섰다. 박사를 매일 바래다준다는 남자가 어떤 놈인지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았다. 아파트 입구를 서성이며 하나는 지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살폈다. 박사는 요새 차를 몰고 다니지 않는 것 같고, 새엄마 딸의 말에 의하면 남자의 벤츠를 타고 다닌다고 했으니 벤츠 차량을 살펴봐야 할 텐데 하나는 차에 대해 무지한 터라 눈에 들어오는 차마다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박사의 차는 어디에 있는 걸까. 병원에 주차해놓고서 남자의 차를 얻어타고 다니는 걸까.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초조한 마음을 안고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는데, 저 멀리에서 검은 차량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10m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선 차량 뒷좌석 문이 열리며 키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고개를 떨구며 휴대폰을 살폈다. 밤 11시가 넘어가는데 아직도 박사는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많이 늦느냐는 물음에 답이 없는 휴대폰을 꼭 쥔 채로 한숨을 내쉬는데, 익숙한 단어가 하나의 귀에 꽂혀 들어왔다.

“치글러 과장님, 제게 기대시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보자, 차에서 내린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고 허리를 숙인 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나는 빠른 걸음으로 벤츠로 추정되는 차량에 다가가며 박사를 불렀다.

“박사님.”

그 목소리에 남자가 하나를 돌아보았다. 하나는 몸을 비튼 남자와 벤츠 문 사이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박사를 볼 수 있었다. 박사는 뒷좌석에 몸을 기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저렇게 취한 박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나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을 느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어, 너 전에 치글러 과장님 따라서 같이 병원에 왔던 애 아니야?”

남자가 알은체했다. 하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가로등에 비친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누군지 떠올리려 노력하기도 전에 생각이 났다. 박사와 여름 휴가 때 쓸 수영복을 사러 간 날, 병원에서 박사에게 끈질기게 식사 제안을 하던 남자였다.

“잘 됐다. 치글러 과장님이 한사코 혼자 가실 수 있다고 하셔서 곤란하던 참이었거든. 과장님 집 알지? 내가 부축할 테니 넌 앞장 서.”
“아뇨, 제가 모셔갈 수 있어요.”
“여자애가 어떻게 술 취한 사람을 부축해? 쓸데없는 오기 부리지 말고…….”

하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벤츠 뒷좌석으로 몸을 반쯤 밀어 넣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훅 끼치는 알코올 냄새에 하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뭐 술독에 빠졌다 나온 것도 아니고, 옷차림은 멀쩡한데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신 건지. 속상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박사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박사님, 정신 차려 보세요, 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박사가 하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에 은은한 웃음꽃이 피었다. 좀처럼, 특히 이번 달 들어서는 거의 본 적 없는 밝은 미소였다.

“어어… 하나… 하나 양이네요.”
“네, 저예요. 집에 다 왔는데, 저 잡으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물론이죠.”

박사가 느릿느릿 그렇게 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가녀린 몸을 하나가 얼른 옆에서 부축했다. 순간 휘청일 뻔했지만 남자가 쳐다보고 있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확실히 술 취한 사람이라 중심을 가누지 못해 버거웠다. 그러나 두손 두발 다 멀쩡한데 박사를 남자에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 아니, 무리하지 말고 내가…….”
“안녕히 가세요.”

일단 박사의 지인이었으니 인사는 해야 했기에 예의만 갖추고 박사를 부축하며 돌아섰다. 살짝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박사가 연신 웃음을 흘리면서도 제 발로 걸으려 했기 때문에 부축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공동현관까지 걸어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며 슬쩍 뒤돌아보자 다시 조수석에 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운전석에 있는 건 대리운전기사 같았다.

“어딜 보는 거예요, 하나 양. 저 여기 있잖아요.”

박사가 하나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오싹,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박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주한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어딘가 평소와는 달라 보이는 박사의 모습에 하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 독촉에 못이겨 쓴 곳까지만 올림.
일단 올리면 미래의 내가 후다닥 써주겠지.
비록 여학생x아줌마 썰이나 스무 살내기가 30대 중반 언니 뇸뇨로뇸 하는 썰이나 재회 2나 여우 3이나 오메가버스 같은 게 남아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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