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은 침대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개화의 달 1일, 화창한 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7일 동안은 봄꽃 축제, 아프릴리스의 성직자들이 일부러 맑은 날이 유지되도록 힘을 썻다. 말이 봄꽃 축제지, 황도 벨칸에 있는 모든 초목들이 자기 계절을 망각하고 저마다 자신의 꽃을 훌쩍 피우는 축제다. 이 축제를 보기 위해 제국 곳곳에서, 또 해외의 온갖 왕국이나 공국 같은데서 유명 인사들이 찾아온다. 어디 왕, 어떤 여왕, 무슨 왕자, 이런 공주, 저런 공. 여기 후, 저기 백, 기타 등등. 아프릴리스의 공식적인 축제이기 때문에, 그 상징성 때문이라도 백금기사단이 나서서 누구의 호위를 맡는 게 기사단의 공식 업무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농한기를 틈타 남쪽 곡창지에 흘러들어간 사교단체를 비밀리에 성공적으로 뿌리뽑았기 떄문이다. 사교단체는 그 특성상 일반적인 군사단체가 맡을 수는 없었고, 신성의 가호를 받는 무력단체가 비밀리에 토벌해야 했다, 작전 중 단장을 포함한 단원 몇명이 소식이 끊기긴 했으나, 전원 무사 귀환하였다. 또 시기 적절한 토벌로 전염병에 오염된 곡물이 제국 전체로 퍼지는 것을 막고, 제국 행정부에서도 중요한 행사로 여기는 봄꽃 축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니, 성공적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확실한 성과가 있으니만큼, 단장은 단원 전부에게 큰 포상을 내렸다. 따로 제국 정부에서 내려온 금 포상이 있었지만, 단장은 모든 기사단원과 사용인들에게 봄꽃 축제 기간 전부를 포상 휴가로 주었다. 매년 이맘때마다 어떤 누구를 경호하느라 한숨을 푹푹 내쉬며 제대로 축제를 즐겨본 적이 없었던 단원들은 포상금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함께 삼삼오오 모여 기쁘게 돌아다녔다. 축제에 놀러온 몇몇 여왕이나 왕후들은 여자로만 된 기사단의 호위를 못 받는 것에 좀 아쉬워했지만.
물론, 그 전에 나쁜 일도 있었다. 상벌은 엄격함은 단장 자신이 줄곧 얘기하고 다녔다. 상은 상. 벌은 벌. 이번 작전때 미흡했던 사람들은 상을 받기 전에 벌을 먼저 받았다. 앤과 비비안, 제인은 각각 태형 20대를 벌로 받았다. 그리고 단장은 엘리자베스 발렌시아 벨탄 라비안느, 즉 자기 자신에게 태형 200대를 선고했다. 누가 봐도 미친 소리였지만, 단장은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단장이 된 몸으로써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제 멋대로 뛰쳐나가 적에게 붙잡혔다 - 라는 게 죄명이었다. 결국 살살 치면 같은 대수만큼 너도 맞는다라는 단장의 협박아닌 협박에, 서른 몇명의 단원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단장을 매질했다. 개 중에는 우는 단원도 있었다. 그렇지만 단장은 그 매질을 온전히 맞고, 다시 단복으로 옷을 갈아입고는, 포상 전수행사를 끝까지 진행하고, 단원들을 축도한 뒤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숙소로 돌아갔다.
후- 앤은 한숨을 쉬었다. 누가 보면 땅이 꺼지겠다고 핀잔을 줄 법도 하건만, 앤이 있는 기숙사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인과 비비안이 같이 나가서 놀자고 여러번 얘기했지만, 나갈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앤의 머리맡에는 포상금과 휴가증이 놓여 있었지만, 앤은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실, 앤은 죽고 싶었다.
앤은 침대에 누워 한 여인을 생각했다. '애미애비 없이 고아로 자라서 젖동냥이나 얻어먹던 년. 걸음마보다 구걸을 먼저 배우고 남들 학교 다닐때 소매치기나 하던 년. 도둑질이나 하면서 하루하루 빌어먹고 살던 년. 어쩌다 운이 좋아서 기사단에 들어갔지만 거기서도 매일 욕만 처먹던 년.' 그 잔혹한 평가에, 앤은 한줄을 더 추가했다. '맹세 같은건 잊어버리고 마에 홀리기나 한 나약한 년. 그리고...자기 은인을 강간한 개쌍년.'
앤은 자괴감에 미소지었다. 분명 단장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스스로 자신을 미워하는 건 어쩔수 없었다. '왜 날 용서한 걸까. 니 정조를 뺏은 년인데. 쓸데없이 배포만 커가지고...'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하는 것도 지칠 지경이다. 물론 그럴 수야 없었다. 스스로 죽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단장님한테 죽었으면. 그게 좋겠어.'
작전이 끝나고 신상필벌도 끝난 후에, 앤은 매질로 아픈 몸을 쉬지도 않고 도서관으로 갔었다. 거기서 앤은 법과 관련된 책을 모조리 뒤져 봤다.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 사전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황족을 강간했다? 사형. 상관을 강간했다? 사형. 마에 홀려 성기사단을 강간했다? 사형. 군법으로도 국법으로도 성법으로도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다 따지고 보아도 사형이었다. 사형이냐 아니냐보다 사형 중 어떤 형을 골라야 할 정도로.
앤은 그 사실이 좋았다. 신상필벌의 엄격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단장이다. 스스로에게 매질 200대를 가한 것만 봐도 그렇다. 자신이 받은 스무 번의 매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의 벌이 이걸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모든 법에서 날 사형선고하고 있으니, 아마 화형이 준비되겠지. 기사단이니까 사약이 내려질 수도 있지만......아무럼 어때.'
기사단의 일은 기사단 내부에서 해결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를 일은 절대 공론화시켜선 안 될 일이다. 이 두가지를 놓고 봤을 때, 앤은 이번 축제 기간동안 분명 재판이 따로 이뤄질 거라고 예측했다. 저번 신상필벌 이후로 단장이 숙소에서 나오지 않는것도 그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 재판을 준비하는 거겠지.' 극히 최소한의 인원만 참여하는 재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처벌은, 단장이 직접 내릴 것이다. 앤은 자신의 예측이 마음에 들었다.
'그나마 내가 할수 있는 일. 단장님께 용서를 구하고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속죄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앤은 그래도 같은 방을 쓰는 제인과 비비안에게 편지라도 남겨둘까 생각하다, 이내 관뒀다. 절대 퍼져선 안 될 일이니, 무언가 남기는 것도 안될 것이다. 아마 형이 집행된 후 적당히 이야기가 붙여질 것이다. 고향의 누구가 어떻게 되서 기사단을 그만두고 내려갔다는 식으로. '인생 대부분을 길거리에서 살았는데, 또 길거리로 사라지겠네.' 앤은 씁슬히 웃었다. 그렇게 앤은 자신의 처벌만을 생각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똑똑
"앤 슬럼본. 있습니까?"
"네, 있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사용장 아그니스 씨였다. 나이 여든이 다 되가는 할머니지만, 꼿꼿한 키에 강직한 얼굴이 위압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단장이 젖먹이일 때부터 단장을 키워 온, 단장이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손에, 천칭 모양 수갑이 들려 있었다. 정의와 재판의 신 유스타의 수갑이었다. 자신의 예측이 맞아떨어지자 앤은 만족스러웠다.
***
단장의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인도하는 아그니스 사용장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단원들과 더불어 사용인까지 전부 놀러 나갔으니. 넓은 장원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앤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유스타의 수갑을 찬 채 단장의 숙소로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뭔 일이 분명 낫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니까. 유스타의 수갑은 일반적인 수갑이 아니다. 단순히 누군가를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단장의 숙소 쪽으로 가는 걸 봐서는 아마 숙소 안에서 재판이 열릴 모양이다. 앤을 숙소까지 인도한 아그니스 사용장은 문을 열고 들어가라는 말만 하고는 곧바로 돌아갔다.
앤은 문 앞에서 조금 망설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죽는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망설이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앤은 숙소까지 걸어오면서 아무도 없었던 것을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 중범죄인이고, 무력을 갖춘 사람이다. 아무리 공론화 시켜선 안될 재판이라 하더라도 후송할 인원이 있어야 정상이다. 앤은 문득 이것이 단장의 믿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죽음 앞에서, 그래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리라는 믿음. 이미 한번 그녀를 배신했으니, 이번에야말로 믿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녀의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 굳게 마음을 먹고는, 앤은 단장의 방문 - 재판장의 문을 두드렸다.
"앤 슬럼본, 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들어오시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앤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개를 둘러 봐도, 보이는 건 단장 하나뿐이었다. 단장은 갑옷을 입은 채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문서를 보니 법리학 관련 용어-처럼 보이는 복잡한 문자가 가득했다. 인원 수가 극히, 너무 극히 적었지만 그래도 재판을 할 예정인 것 같았다.
"앤 슬럼본. 무슨 일로 호출받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재판이죠."
"알고 있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오. 의자가...없군. 저쪽 침대에 가서 앉아 있으시오."
침대? 앤은 조금 의아해했지만, 약식 재판이니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침대에 가서 앉았다. 그러고보니 단장의 방에는 별다를 게 없었다. 책상 하나. 책장 하나. 침대 하나. 무구 걸이 하나, 끝. 넓은 방에 자재가 많지도 않으니 더욱 휑해 보였다. 앤이 침대에 가서 앉는 걸 본 단장은 책상을 끌고 와서 앤 앞에 마주 앉았다.
"본인이 행한 행위들을 인지하며, 왜 이 재판이 이런 식으로 행해지는지 알고 있습니까?"
"네.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진행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단장은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앤은, 당연히 온갖 법률 용어로 점철된 법정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앤의 귀에 들어오는 몇몇 문장들은 있었다. '피고인' '범죄 행위' '반역죄' '군기 문란' '황족 모독' '신성 모독' '상관 모독' 그리고 '사형'.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문장과 글자들이 앤의 귀에 흘러들어왔지만, 까막눈인 앤에게 이 정도 단어만으로로 충분했다.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 눈 안쪽에서 무엇인가 끓어오르는 것을 참아내려 하고 있었다. 단장이 선고문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앤은 버텨내느라 안간힘을 썼다. 깨질 것 같은 침묵. 단장은 그것을 지켜봐 주었다. 이윽고 시간이 흐른 후, 앤은 헛기침을 몇번 하고 나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단장이 재판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시종장 아그네스가 무엇인가를 쟁반에 받치고 들어왔다. 유리로 된 호화로운 잔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탁한 갈색빛이 나는 액체가 들어있었다. 앤은 그 액체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독살형. 가장 온건하고 명예롭다 여겨지는 사형법이었다. 황제께서 하사하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고통을 사해주시는 신께 감사하며 죽는 그런 방식이었다. 단장이 유리잔을 받아 들자, 아그네스는 인사를 한 뒤 바로 사라졌다.
단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앤에게 유리잔을 건네 주었다.
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받아들이고,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죽는 사람을 배려해서일까, 씁슬하지만 단 맛이 났다. 먹고 죽는 약이 아니라면 의외로 즐겨 먹었을 법한 그런 맛이었다. 앤이 잔을 단숨에 비우는 걸 확인하자, 단장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앤을 안아들었다. 앤은 건틀렛으로 감싸져 있지만, 자신을 안아든 단장의 손이 따듯하다고 생각했다. 단장은 앤을 침대에 눕혔다. 깃털로 된 침대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단장님..."
"잠깐 실례할게."
단장 본인이 아프릴리스의 재가 사제인 만큼, 직접 기도문을 읊을 생각이었는지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채 공식적인 자리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신에 대한 결례로 여겨진다. 갑옷 안에는 의외로 평상복이었다. 목과 어깨 너머로 저번에 받았던 매질의 상처가 보였다. 단장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앤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표정을 보는 것도 이젠 마지막이네.' 손에 찬 수갑이 거슬렸지만, 앤은 단장의 손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네......참 이상하죠. 각오를 너무 하고 와서 그런가."
"각오?" 단장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장님, 있죠. 무슨 화려한 말은 못하겠어요. 미안하고, 그리고 감사하고, 또 미안하고, 다 미안해요. 전부 다......"
"앤, 무슨..."
"네. 엘리자베스, 사실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고마워요. 마지막까지......마지막이니까, 리사라고 부를게요."
앤은 끝내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울먹인다. 눈물은 아까 다 내려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엘리자베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앤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준다. 엘리자베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앤은 가슴이 더욱 뛰는 걸 느꼈다.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리사, 아까 먹은 약, 원래 이런 거에요? 듣기로 사약은 사람을 졸음에 빠뜨리다가 죽인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너무 정신이 드는데요."
"앤, 잠깐만. 아니 그게......하."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급하게 밖으로 나간다. 그러고는 어디서 구했는지, 아까 그 액체를 한 잔 더 가지고 온다. '설마, 한잔 더 마셔야 하나?' 앤이 이런 고민을 하던 와중에, 엘리자베스는 컵에 담긴 액체를 홀짝홀짝 마신다.
"리, 리사?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앤이 손이 묶인 채 바둥거렸다.
"이거, 커피베리 물에다 우유를 탄 거야. 아까부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커피벨? 그게 무슨 약인데요?"
"약 같은게 아니고, 그냥 음료야, 마시는 거라고. 잠깐, 앤, 커피베리 물 한 번도 안 먹어 봤어?"
"네?"
"오늘 개화(Aprilis)의 날 1일이잖아. 아그누스가 가져다 줄 때 눈치챘을거라 생각했는데."
"아."
귓가에서 벌떼가 우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앤은 얼척이 없었다. 아까 먹었던 약이 사약이 맞았나 보다. 사약이 아니라면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하면서 고민하고 마음 졸였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가진 않았을 테니까.
"야 이 미친 개 싸이코년아!!!!!!!!!"
앤은 욕설과 소리를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아까부터 계속 꾹꾹 눌러왔던 눈물샘이 간헐천처럼 터졌다. 엘리자베스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앤의 발길질을 맞아가면서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닦아주던 말던 앤은 계속 꺽꺽거리며 버둥거렸다. 단장이 턱에 무릎을 맞고 고꾸라지기 전까지, 욕설과 소리를 내질렀다.
***
"이제 좀 화가 풀리니?"
"그러니까! 내가 진짜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알아요? 정말 그랬는데, 단장님은 이상한 장난이나 쳐대고!"
"미안, 진짜 미안해, 응? 난 그냥 너가 너무 우울해하는 거 같아서 기분 내게 하려고..." 엘리자베스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성공했네! 기운이 나다 못해 아주 복장 터질려고 하니깐!"
앤은 누워 있으면서도 계속 씩씩거렸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앤의 옆에서 계속 빌고 또 빌었다.
"솔직히, 아까 아그누스 씨가 수갑을 들고 왔을 때 기뻤다구요. 드디어 내 죗값을 치를 수 있겠다 싶어서. 난 그렇게 마음을 먹고 왔는데. 아, 진짜......"
"......그랬구나. 미안해."
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엘리자베스는 황급히 앤을 안아 준다. 이내 진정이 되었는지, 앤은 코를 훌쩍거리며 얘기한다.
"근데, 이건 왜 안 풀어줘요?"
"풀어주면 너가 더 때릴 까봐."
"안 때릴 테니까 빨리 풀어줘요. 그리고 이 수갑, 이런 장난 같은데에 쓰면 신성모독으로 벌 받는거 아니에요?"
"그 수갑은, 여기 보면 알겠지만, 유스타의 수갑은 평행한 천칭에 음각으로 되어있는데 이건 한쪽으로 기울어진 양각이잖아? 그냥 재미로 쓰려고 조각사한테 의뢰했어. 눈을 가린 여신께서는 이 정도는 눈감아 주신단다. 사실 수갑 모양 보고 먼저 눈치를 챘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말은 진짜. 내가 유스타의 수갑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알아요? 빨리 풀어나 줘요."
"그리고, 네 말을 듣고나니까 더 못 풀어주겠어."
"네?"
엘리자베스는 앉아 있는 앤을 밀쳐 넘어뜨렸다. 앤이 침대에 파묻히자, 곧바로 앤의 위에 올라탔다. 앤은 단장의 태도가 갑작스럽게 변하자 당황스러운 나머지 선뜻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고는 어디서 꺼냈는지, 밧줄로 앤의 수갑과 침대머리를 같이 묶는다.
"이러면 좀 비슷하지?"
"뭘, 뭐랑 비슷해요?" 앤은 당황스러웠다.
"상기시켜서 미안한데, 우리가 작전 중에 있었던 일, 기억하니?"
"...기억하죠."
"너도 그랬겠지만, 나도 그날 일이 떠오를 때마다 잠이 안와서 말야."
"이해해요."
앤은 단어를 씹어서 내뱉었다. 그날 자신이 했던 일은 끔찍한 짓이었다. 앤은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미워한다 해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무거워진 앤의 표정을 보더니,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누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천천히, 부드럽게 내린다. 이마에서 미간으로, 콧날과 인중을 지나 입술로. 앤은 영문을 모른 채 눈을 깜빡인다. 검지로 톡톡, 앤의 입술을 치더니 엄지로 꾸욱 누른다.
"쉿, 그 말이 아니라......나는 분해서 잠을 못잤어. 순서가 너무 뒤바뀌었거든."
"순서...요?"
"그래, 순서. 내가 널 열심히 키워서, 네가 내 옆까지 오게 되면, 그때 내가 먼저 고백하려 했거든. 이 방, 이 침대에서."
엘리자베스는 앤의 얼굴을 이리 저리 쓰다듬었다. 앤은 조금 긴장했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그 사교 나부랭이들 때문에 순서가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어."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한쪽으로 넘겼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는 앤의 위에서 옷을 하나씩 벗는다. 조금 헐렁했던 상의를 벗어서 던져버리자, 평소에 두르고 다녔던 붕대 대신 아찔한 디자인의 브레지어가 드러난다. 앤의 가슴이 갑자기 쿵쾅쿵쾅, 아까 커피를 마셨던 것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천천히 옷을 벗었다. 역시나 평소에 입던 속바지 대신, 검은 장미 문양이 수놓아진 속옷이 보였다. 앤은 차마 눈 둘 곳을 찾지 못하자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눈을 감아?"
"너, 너무 야해서요오..."
엘리자베스는 킥킥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앤이 귀여웠는지,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자기의 손을 앤의 옷 안에 넣고 이리 저리 들춰본다. 그리고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단도를 들고는, 앤의 상의를 조심스럽게 잘라낸다. "옷은 이따가 사줄게." 그리고 앤이 입고 있던 치마도 벗겨 낸다. 순식간에 앤은 거의 나신이 되어 침대에 묶인 상태가 되었다. 앤은 어쩐지 데자뷰가 느껴졌다. '이거, 내가 그때 했던 일...그대로 따라 하시네?'
"나는 괜찮다고 했는데, 너가 너무 괴로워하니까 하나 생각한 게 있어. 그게 뭐냐면..." 엘리자베스는 혀를 낼름거리고 말을 이어갔다.
"지금 내가 너를 덮치면, 서로 비긴 샘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반박은 안 받아."
'비겼다는 말을 이럴 때 쓰던가?' 앤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는 엘리자베스 때문에 정신을 없었다. 가까이 붙어 있으니,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향수를 뿌렸는지 달콤한 향기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손으로 앤의 목을 휘감고는, 입술을 귀에 거의 밀착시킨 채 속삭였다. 그녀의 등에 난 상처들이, 앤에게는 마치 뱀의 무늬처럼 보였다.
"자, 앤.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 할래? 안 할래?" 엘리자베스가 속삭였다.
"해, 해 주세요..."
"후후, 좋아."
앤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엘리자베스는 침대에 고정시켜놨던 밧줄을 풀어 앤의 팔을 자유롭게 해 준다. 그래도 수갑은 풀어주지 않는다.
"어, 수갑은...요?"
"수갑이 있어야 벌 느낌이 나지. 사실, 너가 하고 싶지 않아 해도 그대로 할 생각이었어. 이게 네 '벌' 이야. 알았지?"
엘리자베스는 앤의 뒤로 돌아가, 등과 가슴을 꾸욱하고 그대로 밀착시킨다. 엘리자베스의 부드러운 살의 감촉이 그대로 앤의 등에서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앤의 귀를 깨물고, 혀로 귓바퀴를 핥는다. "흐읏..." 그와 동시에 한쪽 손으로는 앤의 입술을 이리 저리 만지작거리다, 이내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혀를 유린한다. 다른 손으로는 앤의 가슴을 붙잡는다. 자기 것만큼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꽤나 귀여운 모양이다. 손을 빙글 빙글 돌리며, 바깥쪽부터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한다.
"황궁의 성교육은 말야, 꽤나 엄하면서도 실전적인거 아니? 이제부터 각오하는게 좋을거야."
"흐읏...네에..."
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엘리자베느는 그 손에 깍지를 끼며 속삭였다.
***
"저 이제 시집 못가요오....."
"나한테 오면 되지 뭘 그래?"
"그 뜻이 아니잖아요!"
"기분 별로였어?"
"아, 몰라! 젠장!"
***
다 올려놓고 나니 부끄러운 거에요
여아장은 마저 시험공부하러 가는거시에요 하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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