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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한 물간 영화감독 X 세 물간 영화배우 (재업)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12.18 02:09:03
조회 2271 추천 35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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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웃기지 않아? 아니, 씨발... 그러니까 지들이 뭔데, 내 필모를 그딴 식으로 판단하냐고. 어?”


 “적당히 좀 마셔. 지금 너 완전 취했어.”


 한 물간 영화감독 윤정향은 자신의 오랜 동기이자, 세 물은 가버린 여자배우 차예리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부탁 받은 음향 일을 끝내고, 오랜만에 쉬는 날이어서 적당히 밀린 영화나 해치울까 했는데... 


 역시 세상 일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단 하나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술에 떡이 된 차예리가 소주병이 가득 담긴 검은 봉지를 들고, 막무가내 정향의 집을 찾아왔다.


 이번엔 또 어디서 까이고 온 걸까. 필모부터 따지는 걸 보면 대충 어떤 감독인지 알만하다. 란 생각은 들었지만, 정향은 굳이 그것을 언급하진 않았다. 반면 예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다시 잔을 정향에게 내밀었다. 눈은 한껏 풀린 채였다.

 

 “아, 안 취했어, 나 안 취했어. 아, 생각하니까 더 꼴 받네.”

  

 자기 입으로 안 취했다는 사람은 취한 거다. 그것은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렇다.


 “뭐가.”


 그걸 알면서도 정향은 결국 소주를 잔에 따라주었다. 소주를 들이 킨 예리는 오뎅탕 국물을 마시는 대신에 또 다시 울화통을 터트렸다.


 “야. 존나 웃기지 않아? 얼굴 팔아야 된다고 이것저것 찍으라고 시킬 땐 언젠데... 이젠 급이 떨어져서 안 된다. 이 지랄. 시나리오 보는 눈이 없다 저 지랄. 하,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 사람들이 잘못했네.”


 정향은 술잔을 들고 목가에 살며시 기울였다. 하얀 솜털이 난 목선이 술 방울에 젖어든 것은, 다름 아닌 차예리 때문이었다.


 “진짜, 정향아 나 너무 억울해. 진짜. 응? 나 요즘 이상한 소문 도는 거 너도 알고 있어?”


 예리가 정향의 두 손을 콱, 하고 잡아왔다. 아니, 잡아챘다고 표현해야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깜짝 놀란 정향의 콧잔등 위에서 안경이 흘러내렸다. 살짝 찰랑인 술잔이 흘러 넘쳐 정향의 목선을 탔다. 


 정향은 예리의 손아귀에서 한 쪽 손을 빼낸 뒤, 다시 안경을 밀어 올렸다.


 깜짝 놀랐네, 진짜.


 “대충.”


 예리에 대해 돌고 있는 소문을 정향은 대강 알고 있었다. 충무로에서 여배우에게 도는 말은 으레 성상납이라거나, 성추문, 혹은 남배우 아니면 감독들과의 동거같은 안 좋은 이야기겠지만...


 “감독님들이 나보고 충무로 국밥이래... 아니, 그 감독님들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 아니 여자보고 국밥이 뭐야, 국밥이! 나... 돼지고기... 입에 안 맞아서... 국밥은 진짜 평생동안 입에 대본 적 한 번이 없는데. 한번이이!”


 예리는 결국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꽉 쥐려 했지만, 손에 소주잔이 있어서 뭔가 웃기는 폼이 되었다. 

 

 그만큼 지금 예리의 처지는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정향은 손을 뻗어 티슈를 들었다.


 농담 식으로 이야기 했지만 안 좋은 소문이라면 안 좋은 소문이다. 특히 한번 흥행 보증 수표가 영원한 흥행 보증 수표인 이 바닥에서, 자타공인 흥행 부도 수표가 흥행 보증 수표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운이 필요하다.


 갑자기 쾅, 하고 소주잔을 탁자 위에 내려치는 예리. 예리의 몸이 기우뚱, 기우뚱 넘어갈락 말락 흔들리고 있었다.


 “정향.”


 “왜.”


 “나, 조금 피곤해. 누울래.”


 그렇게 말하며 마룻바닥에 얼굴을 비비는 예리였다. 정향이 늘 생각하는 거지만, 예리는 배우치고 얼굴을 참 함부로 쓴다.


 뭐, 그런 마스크여서 비주류의 감독들이 더 선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도 차예리는 상업영화보다는 독립영화에서 더욱 강한 면모를 보여주곤 했었다. 


 “어련하시겠어요.”


 정향은 상을 대충 치우고, 거실에 이불을 깔았다. 그리고 예리 옆에 자신도 누웠다. TV를 킬까, 하다가 그냥 리모콘을 머리맡에 두었다.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영화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밀린 영화를 해치우는 건 다음으로 해둬야겠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비가 투둑, 하고 내리는 소리가 정향의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잠을 자기 시작한, 새액 새액 거리는 예리의 숨소리도 나지막이 정향을 간지럽게 했다. 


 새삼 드는 야시꾸리한 생각에 정향은 예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향은 소리에 민감했다. 그 덕에 선배들로부터 넌 음향 감독 쪽으로 나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도 꽤 들었다. 


 한 번의 중박 이후 두어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난 뒤, 정향은 음향 감독 전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지만 역시 정향은 영화 전체가 좋았다. 영화의 소리를 포함해서 영화의 분위기, 영상미, 감독이 은연중에 보내는 메타포 같은 것들. 그리고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그 점이, 정향은 좋았다.

 

 그래서 정향은 다시 한 번 메가폰을 잡았다. 간신히 잡은 기회. 마지막 기회라면 마지막 기회였다.

 

 비 오는 소리가 좋다. 예리의 숨소리도 좋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정향은 잠에 들었다.




 “아... 아... 씨...”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예리는 콧잔등을 부여잡았다. 소주병들을 들고 윤정향의 집까지 찾아온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이 필름이 편집된 것처럼 없다.


 영화감독한테 깨지고 나면 꼭 윤정향의 집을 찾는 버릇이 있다. 하필 윤정향이 영화감독이어서 그런 걸까. 자기 내면의 구질구질함에 예리는 다시 질려버렸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술기운에 잠들었던 쓰린 속을 달래줘야겠다. 누워 있는 예리의 콧날로 북어국 냄새가 날아와 가라앉았다. 


 속이 쓰린 날, 누군가 북어 국을 내주는 달콤한 상상과 그 발칙한 착각을 정향은 항상 자신에게 현실로 보답했다.


 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향이 앉아 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늘 미안하지만... 그래도 잘 먹을게.”


 의자를 끌고 자리에 털썩 앉는 예리. 예리는 북어국 한 술을 떠서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역시 정향의 북어국은 자신이 먹기에 딱 좋다. 


 간이 맞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예리는 밥그릇을 그대로 들어서, 북어국에 확 말아버렸다. 국그릇과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야, 차예리.”


 “응?”


 막 밥 한술을 뜨려던 차에 정향은 예리에게 말을 걸었다. 정향은 헛기침을 한번 한 뒤에 말을 이어갔다. 


 “미안하면 너, 나랑 같이 영화 하나만 하자.”


 그 목소리가 마치 어설픈 연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예리는 피식 하고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뭐야, 최민식?”


 키득, 웃는 예리의 얼굴에 정향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름대로 센스 있는 권유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뭐 그렇지. 뭐. 


 “아니, 핀트 쪼개지 말고....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좋아, 나 지금 찍는 것도 없고. 완전 백수니까. 충무로 대국밥 차예리 님께서 특별히! 출연은 해드릴게~”


 예리도 박성웅을 따라하면서 정향의 부탁에 응답했다. 정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한 단계는 넘어섰다. 


 “그래서 어떤 역할인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설렌 예리였다. 정향이 자신의 영화에 직접 출연을 요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늘 우정출연으로 한 번 넣어달라고 해도, 늘 사양하던 정향이었다.


 “그게... 주연은 주연이긴 한데...”


 “뭐? 주연? 야, 나 자타공인 충무로 국밥인데 주연으로 써도 되는 거야? 제작사에서 돈 잘 안 대줘?”


 우물쭈물한 정향의 말을 예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확 끊었다. 정향의 눈가가 기분 나쁜 듯, 한 번 꿈틀거렸다.


 “아니... 말을 좀 끝까지 들어봐.”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향은 말을 꺼내기 힘든 듯, 계속 뜸을 들였다. ‘다시 닦달해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예리. 그런 예리의 머릿속에 정향은 폭탄 한 방을 떨어트렸다.


 “그게... 니 역할이...그... 레즈비언이거든.”


 “뭐?”


 촬영장 막내 스태프들이 말하고 다니던 갑분싸가 이런 걸까. 예리의 눈동자가 살짝 멈췄다.


 “이번 역할... 다른 여배우들은 아무도 안 하겠다고 해서... 그... 노출 씬도 쬐금, 아주 요오만큼 있고... 아니, 숟가락은 놓고, 놓고오! 얘기하자!”


 “언니한테 좀 맞자. 윤정향.”


 그 작은 집에서... 정향과 예리는 추격자를 시원하게 찍어버렸다. 비유의 의미가 아니라 진짜 ‘추격자’였다. 진짜잡히면 죽는다는 느낌으로 정향은 도망쳤다. 


 방문을 쾅, 닫고 정향은 숨을 몰아쉬었다.


 “야! 윤정향! 너 이거 농담으로 한 말이면 오늘 나한테 뚝배기 깨질 줄 알아!”


 예리가 문 앞에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안 그래도 기분 싱숭생숭한데, 너 오늘 잘 걸렸다. 아주 나랑 죽어보자.


 예리의 눈에 분노가 그득했을 그때,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 살며시 문은 열렸다. 

 

 “농담 아니야. 진심으로 얘기한 거라니까, 진짜.”


살짝 열린 틈으로 들린 정향의 진지한 말에 예리도 결국 귀를 기울였다.


 “야, 요즘에 퀴어 영화 네 생각보다 괜찮아... 예전보다 사회적 시선도 엄청 괜찮아졌고.... 아가씨 찍은 김태리도 지금 엄청 잘나가고, 김민희도 그... 홍감독이랑 그렇게 되기 전엔 잘나갔었잖아. 이번에 단발성으로 눈도장 확, 뜨이면 이제 너 일 끊기는 것도 없어질걸?”


 정향의 말엔 분명한 논리가 있었다.


 “아니, 그래도 걔넨... 그 스타성이 있고... 나같은 건.. 나같은 건 그냥 국밥...”


 예리가 지니고 있던 배우로서의 프라이드가 한없이 낮아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그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정향은 예리의 말을 끊었다.

 

 “너도 있어.”


 더 이상의 의문은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어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리는 정향의 말에 토를 달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예리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틈을 향해 물었다. 정향과 이어진 아주 작은 틈을 향해, 그녀는 물었다. 


 “네 졸업작품 찍어 준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군데, 설마 내가 그거 하나 모르겠어?”


 XX대학교 연극영화과 0X학번 졸업작품의 주인공. 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차예리였다. 


 정향은 이따금 비 오는 날이면 그 작품을 다시 돌려보곤 했다. 


 오래 된 VTR에 비디오를 넣고, 정향은 그것을 감상했다. 오직 VTR을 쓰기 위한 낡은 TV에서, 활짝 웃고 있던 예리의 모습. 정향은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차예리는 남들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란 걸.


“없는 재능 탓은 안 하고, 미숙한 배우 쥐어짜면서 작품 만드는 감독 새끼들 다 엿이나 처먹으라해, 그냥. 야. 내 말 잘 들어, 차예리. 넌 이번 내 작품 촬영하고, 흥행 부도 수표, 국밥, 핵잠수함. 이런 개거지같은 네이밍 다 떼는 거야.” 


 정향은 문을 열었다. 예리가 붉어진 눈가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니 무시했던, 엿먹였던 감독들 보란 듯이 뜨는 거야. 확, 뜨는 거야. 알겠어?”


 예리의 눈엔 아직도 눈물이 가득 고인 상태였다. 정향은 흘러내리는 안경을 밀어 올리고, 살짝 웃었다. 


 예리는 정향의 모습에 진한 그리움을 느꼈다. 


 정향의 그 웃음은, 어쩐지 그 옛날 졸업 작품을 같이 찍자고 부탁 했을 때의 그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손을 내밀면서 했던 대사마저도,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찍자. 영화.”


 윤정향은 손을 내밀었다.


 “응.”


 차예리는 손을 잡았다.

 


 “아, 예... 대표님. 레즈비언 역할 하기로 한 배우... 그... 섭외했습니다. 네... 그... 예전에 말했던 차 배우 아시죠? 예? 하필이요? 아... 그게... 대표님한텐 죄송하지만 그 역할은 딱 생각나는 게 차 배우라고 여전히 전 생각해요. 정말 이미지에 딱 부합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대표님 생각은 어떨진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 배우가 저랑 또 동문이라 집중하기에도 편할 것 같아요. 영화는 전에도 졸업작품으로 한 편 찍어본 적 있고... 아, 절대 동문이라고 뭐 연줄 이런 건 아니니까요! 제가 또 그런 거엔 확실한 사람이잖아요. 아! 네...!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또 연락드릴게요!”


 자신을 아끼는 제작사 대표와의 전화를 끝마치고, 정향은 다시 짚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너무 갑자기 전화가 와서 뭐라 답변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대충 이해는 하고 넘어간 눈치였다. 아마도.


 저 멀리서 예리가 손을 흔들었다. 너무나 멀리 있어서 예리가 무슨 표정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갈게~! 하고 소리치는 예리의 목소리가 정향의 귓가엔 너무나도 잘 들렸다.


 목소리가 아니라 저 얼굴에도 좀 익숙해져야 영화를 잘 찍을 텐데. 


 영상 연출에 집중한다고 예리를 섭외했다가, 되려 얼빠가 되버리는 건 아니겠지.


 영화를 찍을 것이 벌써부터 불안한 정향이었다. 정향도 예리의 손에 맞춰 손을 한번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예리도 다시 한번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게 좋아서, 두 사람은 계속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냥 불안함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마음속에서 차분히 차오르고 있는, 어느날의 아침이었다. 


-


 예전에 썼던 거 간만에 재업.


 조아라 연재 소설 희와희. (희희낙락) 많이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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