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ih-XzWJJVds드디어 다썼다! 역시 언제나처럼 댓글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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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눈이 떠졌다. 그것이 처음에 사요가 눈을 뜨고 나서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눈을 뜬 사요의 눈에 비치는 것은 사뭇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전혀 처음보는, 마치 환상과도 같은 풍경에 사요는 절로 숨을 멈추고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하늘은 조용했고, 맑았다. 해가 지면서 달이 떠오르는 시간의 중간. 황혼의 시간과도 같은 시간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끼어있지 않고 그 주황색의 빛깔을 가감없이 비추었다.
자신이 어딘가에 앉아있다는 것은 팔걸이와 등, 다리 등의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푹신푹신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평범한 의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바로 알려주었다. 사요는 고개를 돌려 제가 앉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이건, 어디서 본 꽃인데."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황금색의 꽃들이 이곳저곳 피어있었다. 진한 갈색의 나뭇가지 같은 막대기들이 섬유처럼 촘촘하게 끼워져있고 그 사이사이의 틈에 밝은 황금색의 금잔화가 잔뜩 피어있었다.
사요는 어째서 제가 이런 의자에 앉아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팔을 스치는 바람 한 점이 사요의 옷차림에 대해서 일깨워주었다. 사요는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흰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채로 서있었다.
점점 더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의문만 생기는 사요는 그대로 있을 수 만은 없었기에 평소처럼 발을 앞으로 딛었다. 그러자 사요의 발을 차가운 물이 적셨다.
갑작스럽게 제 발에 차가운 물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놀란 사요는 제 발을 확인했다. 어째서인지 맨발인 것도 이상한데 바닥도 평범하지 않았다. 애초에 바닥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제서야 사요의 눈에 들어온 것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진 바다였다.
"..바다?"
그렇지만 그걸 '바다'라고 말하기엔 이상한 것이 꽤나 있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맞추어 잔잔하게 퍼져나가는 물결은 둘째 치더라도 드넓은 바다의 수면위에 연꽃처럼 둥둥 떠있는 수많은 꽃들. 백합과 마거리트가 수면 위를 가득 채운 채로 멀리멀리 퍼져있었다.
너무나도 이상한 풍경이었기에, 사요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납치당했다는 불길한 생각은 접어두고 발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물결을 헤치면서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사요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신기하게도 수면 위에 수없이 떠있는 꽃들은 그 물결 때문인지 저절로 뒤로 밀려나 사요가 편히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발목까지 와닿는 물을 헤치는 시원한 소리 말고는 사요가 걷는 동안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찰박, 찰박. 수위는 사요의 발목까지 올라올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사요가 그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점점 변해가는 하늘 뿐이었다. 처음에는 해가 죽어가는 것마냥 피를 흘리는 것처럼 밝은 주황색으로 가득찬 하늘이 어느새인가 거뭇거뭇한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사요는 자신이 향하는 방향에서 둥그런 달의 끄트머리가 보이자 그것으로 목표를 정했는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달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사요의 눈에 비치는 물과, 꽃과, 하늘말고 다른 것이 있었다. 어딘가 익숙하고, 그리운 실루엣. 자신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 눈에 확 들어오는 무언가가.
"..히나?"
사요는 뭔가에 홀린 듯이 그것으로 향했다. 그런 사요의 발걸음이 빨라지도록 재촉하는 것처럼 꽃들도 황급히 길을 비켜주었고 사요는 순식간에 그 실루엣이 제 앞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요의 눈 앞에 온 것은 역시나 그녀의 여동생, 히나였다. 히나도 사요가 처음에 앉아있었던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다른 것이라면 사요의 의자에 피어있던 꽃들은 금잔화였지만, 히나의 의자에 피어있는 꽃들은 붉은 아네모네였다. 피처럼 붉어서 불길할 정도인 아네모네.
"히나? 히나. 정신차려봐."
사요가 히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며 히나를 불렀다. 히나는 무릎을 꼭 껴안고 무릎에 제 머리를 박은채로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사요의 목소리가 들린 것인지 히나의 머리가 꿈틀거리더니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
"...."
"...히나?"
히나에게 다가가던 사요의 발걸음이 그만 뚝, 멈추고 말았다. 히나의 표정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언제나와 같은 히나의 얼굴이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너무 밝아서, 꽃이 피는 것만 같은 화사한 미소. 히나를 볼 때마다 덩달아서 밝아지는 것만 같았던 그 미소가 지금의 히나의 얼굴에서는 볼 수 없었다. 히나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표정은 그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울상이었다.
"히나? 괜찮니?"
사요는 그런 히나의 표정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 보지 못했다. 가을비가 오는 그날을 포함하여 손에 꼽을 정도로. 그렇기에 사요는 히나의 그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 하고 울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지금껏 히나에게 자행해온 추악한 일들이 그대로 되돌아와 쇠뭉치가 되어서 제 가슴을 강하게 치는 느낌이었다.
"....언니."
히나는 사요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조용히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찰박, 히나 또한 그 물결 위에 발을 올렸다. 역시나 히나도 제 발에 와닿는 차가운 물의 감촉에 조금은 놀란 것인지 제 발을 잠시동안 내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사요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헀다.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었다. 분명히 사요가 발을 내딛을 때는 주변에 몰려있던 수많은 꽃들이 절로 밀려나서 길을 만들었는데, 히나가 발을 내딛자 그 반대로 주변의 꽃들이 천천히 쓸려내려와 히나가 가는 길을 모조리 틀어막았다.
자연스럽게 걷던 히나는 그렇게 제 길을 막는 수많은 꽃들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잠시동안 발을 멈췄지만 어쩔 수 없는듯이 발을 들어 그 새하얀 꽃을 잘근, 밟았다.
그 순간, 이변이 피어났다.
히나의 창백한 발이 새하얀 꽃을 밟자마자 히나의 발바닥에서 진득한 피가 배어나와 새하얗던 꽃을 붉게 물들였다. 뿐만 아니라 그 피가 수면 위로 뚝뚝, 떨어지자 깨끗하던 물에 물감을 뿌린 것처럼 연기처럼 피어올라 그 맑던 푸른색을 붉은색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뿐만이 아니였다. 히나가 그 꽃을 밟자마자 히나의 발이 움푹, 꺼지더니 물 속으로 무릎까지 빠져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사요가 걸어오면서 한번도 수위가 변한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그런 변화에 놀랄법도 하다만 히나는 그저 얼굴을 한 번 찌푸리는 것이 끝이였다. 오히려 더 놀란 것은 히나가 아닌 사요였다.
"히나?! 무, 무슨 일이?! 괜찮니?! "
사요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저 한 번 꽃을 밟았을 뿐인데 히나의 발에서 피가 번져나왔다. 그 피의 양이 적지 않다는 것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순간 얼굴 가득 걱정을 머금은 채로 히나에게 달려가려는 사요의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발을 감싸는 물이 모두 늪으로 변해서 발을 잡아두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더 이상 히나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기위해서.
히나는 천천히 사요에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때마다 히나의 주위에 있던 꽃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너울너울 히나에게 다가가 히나의 옆구리를, 허벅지를, 팔꿈치를 스치면서, 스치는 족족 다 새빨갛게 다시 피어났다. 히나의 발이 움직일수록 히나의 몸은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그녀의 몸에서 퍼져나가는 피안개는 마치 매혹적인 드레스처럼 히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 파랗던 바다를 붉게 물들여갔다. 사요의 발치까지 넘실거리는 새빨간 물결은 사요가 품고있던 조금의 이성마저 그 시뻘건 포말에 난폭하고, 조용하게 휩쓸어갔다.
히나는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딛으면 그 발걸음의 거리만큼 가라앉았다. 마치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처음에는 발목에 닿았던 물결이, 히나의 무릎까지, 그 다음은 허벅지, 그 다음에는 허리, 그 다음은 가슴, 그리고 지금은 턱까지 닿았다.
이미 히나가 입고있던 백합같이 희던 원피스는 붉게 염색된 지 오래였다. 너울거리는 붉은 드레스의 자락을 자랑하듯이 히나는 사요의 발치에서 드디어 방긋방긋 웃으면서 조용히 입을 오물거렸다.
"사랑했어. 언니."
그 순간만큼은 조금씩 다가오는 물결조차 멈춰서 세상에 남은 것은 정적뿐이었다. 그렇게 조용하던 세상을 깨뜨린 것은, 히나의 침몰이었다.
히나의 머리가 붉은 물에 잠겼다. 더 이상 피가 섞여있는 연한 붉은색이 아니라, 피 자체가 된 것 같이 붉어진 바다는 그 속에 머금은 히나의 편린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히나가 사라지자, 사요는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히나의 마지막 말이 그녀의 위태로운 마음을 찔렀다. 때렸다. 겨우겨우 끌어모아 자그마한 모래산을 이루고 있던 그녀의 양심을 발로 지긋이 밟아서 뭉겠다.
사요의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던 소리는, 차마 이어지지 못한 단어의 조각이기에 그 조각은 단숨에 세상에 나왔다가, 섬광같이 침묵에 먹혀버렸다.
"히..나?"
무심코 히나를 잡으려고 들어올렸던 손이 갈 곳을 잃어서 공중에서 바들거렸다. 벌려진 입은 닫힐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입술조차 바르르, 잘게 떨고 있었다. 식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사요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 피바다가 된 물결 위에 떨어져 잔잔한 물결을 만들어내자 그제서야 사요는 인형처럼 굳은 자세로 고개를 움직여 히나가 사라진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히나, 히나, 히나!"
히나가 사라진 곳. 침묵에 먹힌 곳. 피에 잠긴 곳. 사요는 그곳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예 몸을 던져 히나를 찾으려고 했지만 바다는 그녀의 진입을 막았다. 분명히 히나의 몸 전체가 들어갈 정도로 깊은 바다였지만 사요가 팔을 뻗는 순간 사요의 손목까지만 잠기고 그 이상 밑으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무릎을 꿇고, 손을 움직여 땅을 파내는 것처럼 허우적거리면서 물을 파냈다. 하지만 얼마나 퍼내든 다시 그 빈틈을 매우는 바다 앞에서 사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고장난 오르골처럼 같은 말만 계속해서 내뱉으며 눈물샘이 터진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댈 뿐.
"히나, 히나-! 나와! 나오란 말이야! 내 동생을, 동생을 찾아야 한다고!"
아무리 손을 들어서 쾅쾅 수면을 쳐대도, 사요의 손은 그 밑으로 내려갈 수 없었기에 사요는 그 사실에 분개하며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지만 바다는 사요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다가 허락한 것은, 먹히는 것 뿐이었다.
"히나, 히나. 내가, 언니가 갈게. 기다려. 조금만..!"
사요가 보이지 않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몇 번이고 외치는 도중에 이변은 일어났다. 잔잔하던 바다에 파도가 생겨났다. 저 멀리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피를 머금은 물에 힘입어 그 기세를 불려가더니 사요가 자신에게 다가온 그 파도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바닷가에서 항상 들리던 파도 소리가 귓가에 울린 직후에 사요의 몸은 힘없이 날라갔다. 기묘한 부유감이 몸을 덮치고, 파도와 같이 일 초도 안되는 시간동안 공중을 날아본 사요의 몸은 그 시뻘건 바다의 아가리 속으로 쳐박혔다.
어떤 경계도 되어있지 않은 사요의 코와 입에 사정없이 들어찬 물들이 큰 고통을 자아내며 사요를 괴롭혔고 사요는 그 속에서 발버둥쳤다. 쓰라린 고통에 숨을 쉴 수도 없고, 갑작스럽게 식도에 들어간 물을 뱉다가 더 많은 물이 들어오기에 필사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바다가 놓아주지 않았다. 기이한 인력이 작용하여 사요의 몸을 점점 다 아래로, 밑으로 끌어당겼다. 한계에 부딪혀도 진즉에 부딪힌 사요는 결국 마지막 저항으로 굳게 닫고 있던 입마저 크게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보글거리며 생겨난 기포가 사요의 몸과는 다르게 위로 올라갔다.
그제서야 겨우 눈을 떴던 사요가 처음으로 본 것은 자신의 입안에 남아있던 소량의 산소가 자신을 떠나는 모습이었다. 붉은 바다속에서 유일하게 붉지 않은 기포가 두둥실 떠오르는 모습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정적 속에서 사요의 집중력을 극한까지 이끌었다. 이미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간 사요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힘에 몸을 맡기고 그 기포를 보았다.
둥그런 기포 방울 하나, 하나에 사요가 히나와 함께했던 순간이 담겨있었다. 정확히는 사요가 히나에게 상처를 준 그 장면이 담겨있었다. 방울 하나를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여지없이 히나에게 거친 말을 쏟아내며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쏟아내는 사요가 있었다. 그런 언니의 말과 감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웃음 한 조각을 유지하던 히나가 있었다. 사요의 시선이 닿는 방울 중 하나에는 그날의 풍경도 있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그날의 풍경이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팔로 그 방울을 잡으려고 한 걸까, 팔을 힘겹게 들어올린 사요가 손을 쥐면서 앞으로 뻗었지만 그 순간 저 멀리 있던 기포들은 폭, 하고 일시에 터져버렸다.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그저 느껴지는 유일한 감각은 온 몸을 관통하는 얼음같은 한기뿐.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는 고통도 사요에겐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죄악을 사과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같이 느껴졌던 기포가 터진 순간, 사요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히나를 구하는 것도, 히나에게 사과하는 것도. 모든 것을.
'미안해, 히나. 못난 언니라서 미안해.'
사요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힘겹게 뜨고있던 눈꺼풀마저 스르륵, 닫으려고 했을때 세상을 가득 채운 적막을 깨뜨리는 것이 있었다.
"....ㅡ니."
"...언니."
"...언니!"
익숙하고 그리운 그 목소리. 다시는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히나의 목소리가 사요의 귓가에 와닿자 사요는 천근처럼 무겁던 눈이 순식간에 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요가 눈을 뜬 동시에 사요의 몸을 잡아당기는 힘이 끊기고, 그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한 힘이 사요를 후려쳐서 순식간에 사요는 수면위까지 날아올랐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았던 하늘과, 다시는 마실 수 없을 것 같던 신선한 공기가 사요의 얼굴에 와닿자 사요는 핏물을 울컥울컥, 토해내면서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눈물, 콧물을 얼마나 쏟았을까. 괴롭던 시간이 겨우 끝나려고 하는 사요의 귓가에 스스럼없는 웃음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왔다. 눈물이 뚜렷하게 배어있는 눈으로, 뜰 수 있는 최대한으로 눈을 떠서 사요는 그 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역시, 영영 잃어버리는 줄만 알았던 히나가 서있었다.
"히, 나!"
사요는 히나가 보이는 순간, 다시 왈칵, 눈물을 쏟아내면서 히나를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사요의 턱까지 물이 와있었고, 히나는 붉은 꽃잎을 밟고 수면위에 떠있었다. 사요가 히나에게 다가가면서 입을 벌려 말을 건네려고 해도, 그 순간 순간마다 입으로 들어오는 거친 물이 사요의 말을 막았고, 히나는 그런 언니를 보면서 희미하게 웃더니 입을 열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언니."
'히나!'
"난 이제 가볼게. 언니."
'가지마, 가지마! 히나!'
동생의 말이 조용히 세상에 퍼졌고, 언니의 말은 차마 세상에 피어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파도가 멈추고, 잔잔한 물결조차도 생겨나지 않았다.
하늘에 밤이 드리운 것이 보였다. 까맣게 물든 하늘의 가운데를 향해 떠오르는 둥그런 달 하나만이 이렇게 시간으로 얼어붙은 세계를 조용히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갈 곳은.. 저기인 것 같네."
'가지마. 가지 말아줘! 히나ㅡ!'
히나가 고개를 돌려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보았다. 히나의 발이 향하는 곳. 그곳은 낮이 죽은 곳이었다. 해가 달에게 밀려나 사라진 곳이었다. 이제는 그 끝자락만이 겨우 보이는 낮의 자취를 히나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가리키며 웃었다.
"그러니깐, 작별이야. 언니."
모든 파도가 멈추고, 세계가 얼어붙자 사요의 몸조차 굳어버렸다. 그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롯이 히나뿐이었다. 히나는 그런 사요를 바라보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감추고 마지막으로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히나는, 슬프기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그런 히나가 걸어갈 길이 고독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얼어붙은 세계에서 조용히 함박눈이 내려왔다. 소리없이, 천천히 내려오는 눈이 히나의 뺨에 닿았고, 히나의 눈물에 닿아 그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뺨에 닿는 새하얀 눈의 온기에 히나는 잠시동안 멍하게 있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동시에 울었다. 차가운 눈물에 닿는 따스한 눈의 손길에 웃으면서 울었다. 사요는 그런 히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눈의 온기를 느꼈다. 사요도 그 순간만큼은, 어떤 생각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히나는 하늘을 그 손 안에 잡으려는 것인지 멍하니 손을 뻗어 허우적거렸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한 조각마저 잡지 못하는 손은, 그 손가락의 사이 사이로 별에서 쏟아지는 탄식과 하늘이 울어주는 눈물을 스치면서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마지막으로 히나는, 사요를 바라보면서 별을 잡으려고 했던 손으로 제 입술을 살며시 쓰다듬더니 그 손을 그대로 사요를 향해 뻗어서 보여주었다.
"안녕, 언니."
히나의 마지막 인사, 마지막 입맞춤. 그 순간에 사요는 멈춰버리고 말았고, 히나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사요가 히나를 향해서 굳었던 몸을 던지며 피바다를 헤쳐나갔지만 그런 사요의 움직임보단 히나의 발걸음이 몇 배나 더 빨랐다.
가까이 보이던 동생의 등이, 작아지고, 작아지더니, 이내 자신의 눈 앞을 가리는 눈 한 멍울에도 가려질 만큼 작아져서 결국에는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하늘의 가운데에, 달이 걸렸다.
마침내, 낮이 밤에게 삼켜져버렸다.
*///*
"히나!"
언제나 고요했던 새벽을 깨트린 것은 사요의 비명이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사요의 온 몸에는 식은땀이 흐른 자국이 선명했다. 목, 허리, 배, 허벅지 등등 찝찝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뺨에서는 미지근한 무언가가 흐르는 느낌이 들어서 무심코 손등으로 벅벅 닦았더니, 눈물이 손등에 잔뜩 묻어나왔다.
온 몸이 떨렸다. 바들바들 떨려서, 떨림을 다스리기 위해 팔짱을 껴서 양 손으로 양 팔을 꾹 잡고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강하게 쥐었다. 눈물을 멈추기 위해서 눈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힘을 꾹 줬다.
"그만, 그만해..!"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진정이 되기 시작한 팔을 붙잡고 사요는 제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에는 어느새인가 눈물자국이 선명하게 번져나가고 있었고, 입고 있던 잠옷은 이미 땀으로 다 젖어서 피부에 찰싹 붙은지 오래였다. 그렇게나 땀이 많이 났는데, 정작 사요는 한기만 느껴졌다. 너무나도 추워서 금방이라도 온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한기만이 그녀의 혈관안에서 흐르는 것 같았다.
"히나. 히나를, 히나를 봐야, 해."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그 이름. 자신의 여동생의 이름을 사요는 부르는 것을 주저했다. 과연 자신이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남아있는걸까? 어쩌면 이미 히나는 제게 실망해서 떠나고 없는 것 아닐까? 이곳이 현실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요는 방금까지 제가 있던 그 지옥과도 같은 곳이 꿈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사요는 침대 밖으로 다리를 돌려서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그렇지만 그 직후,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다리탓에 그 자리에서 실이 끊긴 인형처럼 무너져내렸다.
"히나가, 히나가.. 나를 떠났으면..."
어쩌지..?
겨우 멈춘 줄만 알았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짧은 시간 동안 멈췄던 것이 준비시간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전보다 더 북받쳐서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 앞이 눈물탓에 흐려졌어도 닫힌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달빛은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은 아직도 밤이었다.
"....꿈일까? 꿈이..겠지? 꿈이 아니면.."
그 뒷말은 목구멍 안으로 다시 삼켜졌다. 마치 입밖으로 꺼냈다간 진짜로 이루어질 것만 같은 불길함이 사요의 온몸에 휘감겼다. 침대에 기대서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사요의 눈물은 뚝뚝, 끊이지 않고 바닥을 적셨고 사요는 제 눈물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심함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사요의 방 문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와 문을 거칠게 열어제끼는 그 소리에 끕끕한 절망으로 덧칠되어가는 사요의 표정이 일순간에 굳어버렸다. 사요의 눈에 비친 것은 사요의 동생, 히나였다. 히나는 항상 웃음만을 남겨두는 것 같던 얼굴에 한 가득 걱정을 띄우곤 숨을 헐떡이며 사요의 방 안에 들어와서 문고리를 붙잡고 사요를 찾아 눈을 굴리다가 침대 옆에 주저앉아있는 사요를 보고 외치면서 달려들었다.
"언니!"
히나가 사요에게 달려들어서 그 자리 그대로 뛰어서 사요에게 안겼다. 결국엔 사요도 당황한 나머지 달려드는 히나를 잡아서 안고는, 그 돌진의 충격에 바닥을 굴렀다.
"언니! 괜찮아?! 무슨 일이야!"
히나는 사요에게 꼭 안긴 채로 얼굴에 띄운 걱정을 지우지 않고 사요의 눈을 마주보며 다급히 물었다. 히나는 지근거리에서 사요의 얼굴에 아직도 흐르고 있는 눈물과,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에 달라붙어있는 머리카락을 보았다. 그러자 히나의 걱정이 한결 더해졌다. 그렇지만 사요도 덕분에 바로 눈 앞에 와있는 히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히나는 방금까지 자고있다가 사요의 비명에 놀라서 한 걸음에 뛰어온 것이 분명했다. 아직 가다듬지 못한 거친 숨결과, 흐트러진 옷매무새, 약간 풀려있는 눈이 그걸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히나.."
"언니! 정말 괜찮은거야?!"
히나의 걱정이 듬뿍 담긴 말, 히나의 숨결, 히나의 체취가 사요의 품 안에서 지체없이 사요에게 안겨들었다.
그렇지만 사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 사요에게 안겨있는, 히나가 존재한다는 것이 사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고마워서 사요는 히나의 등과 뒤통수에 손을 옮기고 할 수 있는한 힘껏 잡아당겨서 꽉 껴안았다.
"고마, 워. 히나..! 고마워..!"
결국 사요의 눈물은 멈추지 못했다. 멈출 수가 없었다. 히나를 꽉 껴안은 순간부터 둑이 터진듯이 줄줄 흘러나오는 눈물에 기겁한 것은 오히려 히나였다. 흐트러진 옷탓에 히나의 드러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사요는 그 체온을 빈틈없이 느꼈다. 사요가 히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을때 사요의 눈물의 축축함과 차가움, 사요의 숨결, 땀 냄새가 히나의 예민해진 감각을 괴롭혔기에 히나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지만 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게 안겨있는 사요의 허리를 조금 더 꽉 껴안아주며 사요가 조금 더 울게, 조금 더 편해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괜찮아, 언니. 괜찮아."
그렇게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후, 겨우 진정이 되기 시작한 사요의 울음이 줄어들었을때 그제서야 히나는 사요의 등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며 사요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 해. 히나. 미안..."
"...괜찮아. 언니. 나는 괜찮으니깐."
조금 진정이 된 줄 알았건만, 고장나버린 인형처럼 같은 말,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하는 사요의 말에 히나는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히나는 귀찮지 않았다. 사요가 껄끄럽지도 않았다. 다만 언제나 굳건하고, 언제나 울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언니가 이렇게 망가진 것처럼 우는 것이 히나에겐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언니, 괜찮아. 자자. 다시 잠을 자면 괜찮을거야."
"그치만.. 다시 잠을 자면 히나가.."
"내가 있어줄게. 언니."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약속이야, 히나."
"응. 약속이야."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리는 사요의 말은 히나를 간지럽히고, 발음이 뭉개져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히나는 꿋꿋이 그것을 참으면서 성심성의를 다해 답해주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언니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준다는 약속을.
비록 그 약속이 사요에게는 다른 뜻으로 전달되었다고 한들, 그제서야 모든 걱정이 풀린 것인지 겨우 잡고있던 정신 한 가닥을 툭, 끊어버리고 사요는 죽은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히나는 그렇게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울다가 탈진해서 쓰러진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인 사요의 눈가를 쓰다듬어서 자국이 남을 것이 뻔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곤 사요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한 번. 쪽. 뺨에 한 번. 쪽. 마지막으로 다 트인 부드럽고 연약한 입술에 한 번. 쪽. 잠이 들어있는 언니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히나는 주문을 몰래 걸어주었다.
"..꽃, 냄새?"
겨우 잠이 든 사요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히나도 졸려서 스멀스멀 감기는 눈꺼풀을 겨우 받치면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히나도 결국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 눈을 깜빡이는 히나의 후각을 자극하는 한 조각의 꽃내음이 히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렇게 히나마저도 잠이 들자, 사요의 방에서 침대 옆에 사이좋게 꼭껴안고 잠이 들어있는 자매의 꿈이 평온하기를 기도하는 것일까, 창문으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그들의 머리에 다정한 이불이 되어 내렸다. 그리고 창문 밖에는 그녀들이 잠을 방해받는 일이 없게 하는 것처럼 함박눈이 소리없이, 조용히 세상에 내려와 아직 잠이 들지 않는 모든 존재들을 위해 세상을 침묵으로 가득 채워줬다.
세상에서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존재들은 이제, 밤하늘의 둥그런 달과, 반짝이는 별무리, 다정한 눈송이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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