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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야구팬 X 치어리더 (재업)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8.12.28 13:08:16
조회 1958 추천 32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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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본적으로 야구란 스포츠는, 꼴찌가 1등을 이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스포츠다.


 “야. 이 개씨발...”


 아무리 못한다. 못한다. 못한다. 소리를 해도, 10번 하면 3번은 이길 수 있는 스포츠가 야구다.


 “거기서 어떻게 병살을 치냐고... 이 병신 새끼들...”


 물론 다르게 말하면, 10번 중에 7번은 무조건 진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9회말 1점차 원아웃 주자 1,2루 상황. 빙글빙글 6 - 4 - 3 으로 이어지는 야구공을 보며, 결국 은수는 뒷목을 잡았다.


 치어리더들의 열띤 응원도, 응원을 주도하던 응원단장도, 타석에 선 타자에게 새로운 배트를 가져다주려는 배트걸도, 동점을 직감한 듯 열띤 분위기를 뿜어내던 덕아웃도 그 상황에 한꺼번에 얼어붙었다.


 “씨이발~” 


 흥분한 은수가 소리치기 전에 맥주를 얼마나 마신 건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아저씨가 먼저 소리쳤다. 


 “진짜 못한다. 못한다. 소리를 들었지. 이렇게 좆같이 못할 줄은 몰랐다!”


 아저씨의 분노에 찬 함성에 동조하듯 사람들은 순식간에 들고 일어섰다.


 은수는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응원석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치어리더들과 응원단장도 이내 빠르게 사람들을 진정시킬 채비를 했다. 이런 상황이 한 두번이 아닌 듯, 그 모습은 매우 능숙해보였다. 


 서울 게이터스의 덕아웃은, 오늘도 바람 잘 날 없구나.




 끝없는 연패에 잔뜩 풀이 죽은 은수는 평소라면 꼭 봤을 선수들의 퇴근길도 고사하고, 그대로 지하철역 6번 출구로 향했다. 


 게이터스의 다른 팬들은 이어지는 연패에 힘입어 선수 및 감독 청문회에 나선 모양이다. 이번 현수막의 문구는 ‘DTD는 대물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모양이다. 아재 팬들의 절절함에, 은수는 한숨을 쉬었다. 


 네이버 스포츠 뉴스에 시시각각 올라오는 야마 도는 소식이 은수의 억장을 다시 한 번 뒤집었다.


 억대 연봉 외야수의 부상 소식, 팀 에이스의 손목 골절 소식, DTD 유전자는 올해도 계속! 이라는 얄미운 뉴스까지. 정말 오랜만의 직관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끝내주는 하루구나. 기레기들 죄다 한강에 빠져 죽었으면 좋겠다. 


 연이어 보이는 힘 빠지는 소식에, 다리가 풀린 은수는 결국 승강장에서 주저앉았다.


 이놈의 개야구 끊던가, 2호선 창문 뚫고 한강 물에 빠져 죽든가. 


 오늘 둘 중 하나는 해야겠다.


 “저희 팬 분 맞죠?”


 깊게 눌러 쓴 은수의 허름한 야구 모자 위로, 살짝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챙만 살짝 올려 바라보니 은수의 눈에는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은수는 꾹 누른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강한이 팀장님?!”


 서울 게이터스 치어리딩 팀의 팀장. 강한이였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응원단상에서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응원을 위해 땋아 올렸던 긴 머리는 이젠 하얀 민소매 블라우스의 가슴께를 살짝 덮고 있었다. 응원단상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기 위해 짙었던 화장도 많이 연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강한이는 강한이였다. 아무리 달라져도, 본판불변의 법칙이란 것은 늘 있기 마련이다. 지금 은수 앞에 서있는 사람은, 야구팬들의 여신. 응원단상의 여신이라고, 늘 언론에서 떠들던 그 강한이였다.


 “웬만하면 모른 척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우울해 보이셔서...”


 “아...”


 은수는 군데군데 사인이 들어간 자신의 유니폼을 바라보았다. 하긴 팀 유니폼은 어디서든 눈에 띈다. 특히 게이터스는 파란 색이기 때문에 더욱 눈에 띌 것이다. 꼴찌 팀 주제에 어디서 입기도 쪽팔린 유니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히려 한이의 눈에 띄었다.


 은수는 인생에 쓸모없던 개야구가 드디어 내 인생에 한 줄기 빛을 내려주는구나, 하고 마음속에서 쾌재를 불렀다. 몇 년을 입어 마킹까지 헤진 유니폼이, 데뷔 후 첫 승을 딴 신인 투수처럼 기특한 놈으로 여겨졌다.


 한이가 손을 내밀었고, 은수는 부들부들 떨면서 그 손을 간신히 잡았다. 자신의 손보다 더욱 작고, 보드라운 한이의 손을 은수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잡았다.


 “와, 저 진짜 팀장님 너무 팬이어서... 저 그 다큐도 챙겨서 봤거든요. 화장실에서 막 식사하시고... 옷 갈아입고 막... 힘들 게 일하시는 거...”


 감격에 젖은 은수의 목소리는 거의 울먹이기 직전이었다. 은수는 몇 달 전 프리 시즌에 봤던 강한이 팀장의 다큐멘터리를 기억했다. 원래부터 꽤 좋아하던 치어리더였지만, 그 다큐를 본 이후 빠심이 하늘 높이 치솟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거까지 기억하실 필요는 없는데...”


 한이는 멋쩍은 듯,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대단하잖아요. 하필 홈구장이 이런 곳이라서, 불평불만 하실만한데도 그런 거 전혀 없으시고...”


 서울 게이터스의 홈구장은 한국프로야구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낡은 곳이기도 했다. 선수들의 시설도 부족한 곳이 서울 게이터스의 홈구장이다. 치어리더의 여건 보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게 제가 할 일이죠.”


 한이가 활짝 웃어보이자, 은수는 자신의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역시 이쪽 바닥에서도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프로는 프로다.


 한이의 모습에 감격한 은수는 들고 왔던 크로스백에서 황급히 종이 한 장을 꺼내려고 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에 일단 사인부터 받아놔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은수에겐 다행스럽게도 크로스백 안엔 종이가 굉장히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혹시 선수들한테 싸인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은수가 야구장에 올때는 싸인용 종이를 항상 많이 챙기는 편이었다.  


 야구는 못하지만 그래도 덕질하는데에는 도움이 되는구나. 정말 고오맙다. 씹새끼들. 


 “와, 시발... 진짜 집에 가면 며칠 동안은 손 안 닦아야지.”


 은수가 네임 펜과 사인용 종이 한 장을 꺼내며 살며시 중얼거렸던 그때, 한이가 말했다.


 “내일... 괜찮으시면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실래요?”


 “네?”


 은수의 손에서 네임 펜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아, 잘못 들었나? 은수는 허리를 굽혀 펜을 주웠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은수는 네임 펜을 손에 들었다. 이번에야 말로 사인을... 하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한이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은수의 귀를 때렸다. 조용하지만 떨림이 없었다. 곧은 심지가 느껴지는 강한 목소리였다.


 “저, 내일 원정 없거든요.”


 서울 게이터스는 내일도 홈구장에서 경기를 치른다. 강한이 팀장은 어디가지 않는다. 


 은수는 고개를 들어 한이를 바라보았다. 분홍색 립스틱 바른 입술이, 승강장의 흐릿한 전등에 살짝 빛나는 듯 했다. 나긋나긋한 그 미소가 은수를 홀리듯, 요사스러웠다.


 동시에 은수는 생각했다. 오늘 안 죽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2.


 쏟아지는 햇볕을 못 참고 여과를 허용한 반투명 창문은, 곤히 잠들었던 은수의 잠을 깨워주었다. 자그마하게 열린 창문 사이로 참새가 조금씩 지저귀는 소리도 들렸다.


 왜 내가... 여기서 자고 있지.


 점점 말똥해지는 정신. 그러나 그런 정신을 방해하듯 솟아오르는 숙취피로 덕에, 은수는 찡그린 미간을 부여잡고 죽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머리맡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을 켜보니 시간은 어느새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차피 공강이니까 상관은 없지만... 


 은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비볐다. 도로 스마트폰을 어딘가에 두려던 그 순간, 은수는 미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홀로 자취하며 살던 은수였기에 이불은 언제나 은수의 독차지였다. 그래서 은수는 언제나 누군가의 기척에 민감했다.


 평소와 다르게 누군가가 이불을 당기고 있다. 술에 흐려진 은수의 정신이 그 사실을 조금 늦게 눈치채게 해주었다. 은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강한이 팀장이 자기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것도 나신 상태로.


 히에엑, 하고 이상한 숨소리를 내려던 은수였으나, 한이가 너무 새근새근 자고 있어서 은수는 가까스로 소리를 집어삼켰다. 그러나 그런 은수의 노력도 알아주지 못했는지, 이윽고 한이도 긴 머리카락을, 자신의 오른 손으로 한 번 쓸어 올리면서 일어났다.


 숙취는 한이 또한 마찬가지인 것인지, 단상에서 늘 미소를 띠고 있던 한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 채였다.


 “저, 저, 저, 티, 팀장님. 저, 저, 왜 지금 여, 여, 여기에.”


 렉이라도 걸린 듯, 은수의 말이 조금씩 엇갈리며 나왔다. 한이는 잠시 멍하니 은수를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 한 조각을 입에 걸고 말했다.


 “어제... 기억 안 나요?”


 “어제요?”


 살짝 허스키한 한이의 목소리가 은수의 기억회로를 기름칠해주었다. 은수의 머릿속은 그제야 돌아가기 시작했다. 톱니바퀴가 굴러간 곳은 어제 경기가 끝나고 난 뒤, 밤 11시 직전이었다.


 2호선 신천역 부근은 서울 게이터스의 성지다. 같은 구장을 쓰는 서울 판다스와의 경기가 끝난 뒤에, 게이터스의 팬들은 언제나 신천역 부근으로 모인다.


 게이터스의 팬들이 처음부터 신천역으로 모인 것은 아니었다. 한 구장을 같이 쓰는 두 구단. 게이터스와 판다스. 두 야구팬들은 서로의 뒷풀이 장소가 겹치지 않기 위해 한 가지 불문율을 정했다.


 진 팀이 신천역에 가서 뒷풀이를 한다. 라는 불문율을 말이다. 그러나 게이터스는 판다스에게 늘 성적으로도 열세, 상대전적으로도 크게 압도한 적이 없어서... 자연스레 게이터스의 팬들은 늘 신천역으로 몰렸다.


 그런 신천역으로, 게이터스의 팬들을 호객하기 위한 술집이 몰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은수와 한이는 한 호프집에서 술을 마셨다. 벽에 걸린 오래 된 TV에선 오늘 경기가 하이라이트로 방송되고 있었다. 은수의 예쁘장한 얼굴도 간혹 카메라에 잡혔는데, 그때마다 한이는 “귀여워서 잡히신 거예요.” 하고 비행기를 태워주었다.


 물론 치어리더인 한이의 얼굴도 고스란히 방송 전파를 타는 바람에, 자신이 오징어라고 생각한 은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한이는 그런 은수가 귀여웠다.


 하이라이트 영상은 마침내 오늘의 피날레인 9회말 1점차 원아웃 4-6-3 병살 장면으로 향했다. 은수는 소주 한 잔을 그대로 자신의 속으로 꼴아넣었다. 아끼는 선수의 병살타처럼 소주도 그만큼 쓰게 느껴졌다.


 “솔직히 이 씨발... 아, 죄송합니다. 야구만 생각하면 제가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게 욕을 뱉었던 은수는 화들짝 놀라며 사과했다.


 “괜찮아요. 저도 응원할 때... 가끔 답답할 때 있거든요.”


 한이가 은수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프리 시즌엔 쉬지도 않고 다른 종목의 치어리더를 하는 한이도, 야구의 중독성을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죠! 역시 저만 그런 거 아니죠?”


 강한이 팀장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에 은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눈이 반짝거리는 은수의 모습이 마치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아, 한이는 그게 귀여웠다.  


 “저는 진짜... 판다스 애들이 병신 팀이라고 놀려대도 진짜 이 팀 좋아하거든요... 아... 진짜 2002년에 야구를 보는 게 아니라, 월드컵을 봤어야 했는데...”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져 오는 게이터스의 한국시리즈. 아빠의 손을 잡고 간 서울 구장에서, 은수는 투혼이 느껴지는 그 모습을 보고 게이터스의 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이터스는 서울의 첫사랑.


 은수 또한 팀을 바꿔보자. 야구를 끊어보자. 하고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결국 은수의 첫사랑도 언제나 게이터스였다. 야구를 끊어도, 팀을 바꿔도 은수는 언제나 게이터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진짜... 가을 야구 조옷나 하고 싶다. 진짜.”


 멀어져 가는 가을의 향기에, 은수는 잘 마시지도 못 하는 소주를 부어라 마셔라 마셔댔다. 소주 몇 병과 과일 안주 한 그릇과, 땅콩 몇 개가 은수의 속으로 사라졌다. 야구 이야기로 들떴던 은수. 


 그 결과 평소보다 훨씬 많이 마신 은수였다. 반면에 한이는 가끔 몇 잔 정도만 마셨을 뿐, 은수에 비해 멀쩡해보였다.


 금방이라도 끊길듯 핑 도는 정신과 맞서 싸우던 은수는 간신히 한이의 얼굴을 보았다. 한이는 나른한 표정으로 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혀가 꼬이는 발음으로 은수는 한이를 불렀다.


 한이는 술잔을 기울였다. 오랜 열혈팬에게 못할 말인 것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미리 알려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어디가서 이런 썰을 들었다 하고 떠들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실은... 저... 올 시즌이 게이터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에요.”


 “녜? 티어리더 그만 두셰여?”


 “새로 이적해요. 저 판다스로 가요.”


 충격적인 소식에 은수는 눈이 동그래진 채로 한이를 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병나발을 불었다. 한이는 살짝 미안함을 느꼈다. 


 “아... 그러시규나... 그 망할 곰탱이네로... 네... 뭐... 가실 수도 있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은수였다. 하다하다 이제 강한이마저 판다스한테 뺏기는구나. 성적도 모자라서 이젠 치어까지. 


 덕질에 눈이 멀었지. 병신. 진짜.... 오늘 그냥 강물 더럽혔어야 하는 건데. 씨발...


 흩어지는 상실감에 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걍 제가 계산하께여...”


 계산대까지 비틀비틀 걷던 은수는 뒷주머니에 박혀 있던 지갑을 꺼내려고 했으나, 곧 자리에 놓고 온 것을 깨달았다. 탁자 위에 놓인 지갑을 주우려던 은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한이는 은수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고 계산대로 향했다. 한이를 알아본 호프집 주인이 사인을 요구했으나, 한이는 정중히 거절했다. 호프집 주인도 옆에 있던 은수를 보고 이해한다는 듯, 얼른 가보라고 손짓했다.



 신천의 거리는 밤을 모두 태우듯 휘황찬란했다. 


 은수의 팔을 목에 걸고, 한이는 신천의 밤거리를 한 걸음씩 내딛었다. 한이의 얼굴에 은수의 술 섞인 숨결이 가끔씩 딸려왔다. 쓰고도 단 게이터스 팬의 술냄새였다. 그것도 모자라서 술에 먹혀 버린 은수는, 이따금 한이에게 술주정을 부렸다.


 “팀장 님 가지 마셰여.... 예?”


 “지금은 어디 안 가요.”


 은수의 술주정에 대답을 해주고, 한이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택시는 그렇게도 많은데, 빈 차는 왜 그렇게도 없는 건지. 일단 집부터 물어보자는 생각에 한이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은수 씨, 울어요?”


 술주정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적 소식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는지.


 이미 눈물자국이 가득한 은수의 얼굴에, 또 다시 눈물이 흘렀다. 한이의 말에 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잡아먹은 술기운에도 자존심은 조금 남아있는 걸까. 


 손을 들어 닦아주고 싶었으나, 슬슬 은수가 힘에 부치는 것이 느껴지는 한이였다.


 아무리 치어리더라는 직종이 체력이 강한 직종이라고 한들, 성인 여성 하나가 계속 매달려 있으면 기운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이미 9이닝 동안의 응원단상 등판을 끝마친 상태여서, 한이도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한이의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그러던 한이의 시야에 결국 간판 하나가 박히듯 눈에 들어왔다.


 “저희... 잠깐... 좀만 쉬다 가죠.”


 은수는 고개를 들고, 흐릿한 시야를 깜빡거리며 다 잡았다. 한이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신천 휴게텔’ 이라고 아무런 필체로 휘갈긴 성의 없는 간판이었다.




 3.



 이어지는 한이의 말과 둑이 터지듯 샘솟는 기억에, 결국 은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감싼 얼굴이 어제 술을 마셨을 때보다 더욱 후끈거렸다. 솟아오르는 쪽팔림에 은수는 한강 바닥으로 자유낙하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 정신이냐, 강은수. 


 이 미친년아. 강한이 팀장님이 니 엄마야? 신천 바닥이 니네 집 안방이야? 아니 어떻게 아무리 떡이 됐다 한들, 강한이 팀장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어디 숨을 공간 없나, 쥐구멍이라도 좋으니 쫌 줬으면 좋겠다. 동네 쪽팔려서 진짜. 


 “은수 씨, 괜찮아요?”


 두 눈을 가린 은수의 귀로 한이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에도 들어도 참 좋은 목소리구나. 한이 팀장님.


 “괜찮을...걸요? 아마도.”


 이미 30분 뒤에 한강 밑바닥을 헤엄칠 시체입니다. 말리지 말아주세요.


 혼이 빠진 채 여러 의미로 좌절 중인 은수였다. 어제 하루는 은수에게 있어서, 큰 행운과 동시에 큰 불운이 공존하던 하루였다. 큰 행운의 원인과 큰 불운의 원인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은수는 안타까웠다.


 술 적게 마실걸... 성덕을 노렸는데, 레알 씹 소리가 나오는 씹덕이 되어버렸구나.


 “속 안 아프세요? 해장하셔야 될 것 같은데.”


 옆에서 한이가 걱정스럽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와중에 자신을 챙기는 마음맵시에 감탄한 은수. 결국 두 손을 살짝 내려, 한이를 보았다. 한이의 큰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은수는 더욱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쬐끔... 아프네요.”


 밸도 없는 것인지 주인 모르고 아파오는 속에 은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떻게든 만회 할 구석을 찾으려고 은수는 머리를 굴렸다. 강한이 팀장님도 어제 술을 좀 마셨으니, 속이 조금 아프지 않을까? 


 신천역 주변에... 음...


 “아! 요 주변에 콩나물 국밥 맛있게 하는 곳을 또 제가 알거든요!”


 할머니가 즈언통적으로 국밥을 잘 말아주는 곳이 이 근처에 있었다. 


 사실 저번 게이터스 여성 팬 정모 때 알아둔 곳이지만... 물론 은수는 그때도 꽐라였다. 꽐라였던 과거가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하고, 은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일단 거기로 갈까요?”


 한이 팀장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 뒤로 드러난 라인이 예술이었다. 수많은 치어리딩으로 단련된 허벅지 근육 위로, 등으로 드러난 탄탄한 등근육까지 엄청난 육체미였다.


 “어... 등.”


 몰래 몰래 한이의 등을 곁눈질을 하던 은수의 눈에 띈 것은, 다름 아닌 무언가에 긁힌 자국이었다. 가로로 무언가에 긁힌 자국인데... 뭐지?


 “등이요?”


 “아.”


 빤히 바라보던 은수의 시야를 느낀 것인지, 결국 한이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중죄라도 지은 것처럼, 은수는 한이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한이는 멀뚱히 은수를 쳐다보다가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이거... 고양이가 그랬어요.”


 “고양이요?”


 “저희 집 고양이가 원래 좀 장난기가 많거든요. 강아지 같기도 한데, 고양이였네요.”


 한이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청바지를 챙겨 입으며 말했다. 한이의 묘한 말에 은수는 멍하니 있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 고양이 키우시는 구나. 고양이 키우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고양이가 등을 할퀼 수도 있나? 뭐, 고양이 업기라도 하신 거겠지. 응. 응.


 은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척추 부근에서 느껴지는 통증 덕분에 쉽사리 일어날 수 없었다. 힘을 주려 해봐도 찌릿하고 전기처럼 일어 오르는 통증이 더욱 세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눌린 듯 근육통이었다.


 “아, 난 또 왜 이러냐...”


 아니, 내가 프로야구 선수처럼 햄스트링에 걸린 것도 아니고. 평소에 운동을 보기만 하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몇 초간 낑낑거리던 은수를 도와준 것은, 가만히 웃고 있던 한이였다. 한이는 손을 내밀어 은수를 잡아당겨주었다. 은수는 한이의 손이 한 번 더 닿은 것에 흡족해하며, 조심 또 조심하면서 청바지를 입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와, 작게 딸린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나오니 시간은 벌써 11시 반이었다. 아침보단 점심에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두 사람은 은수가 말했던 콩나물 국밥 집으로 향했다.


 콩나물 국밥에 아삭이 고추 몇 개를 썰어 넣은 것이, 참 얼큰했다. 콩나물 국밥을 먹던 은수는 문득 어젯밤의 대화를 기억해내었다. 한이 팀장이 곧 서울 판다스로 간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확실히 뭔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뒤는 영 흐릿하단 말이지...


 필름이 끊긴 뒤가 잘 생각이 안 나는 것은, 은수의 나쁜 술버릇 중 제일 가는 워스트 술버릇이었다.


 “한이 팀장님은 좋겠네요.”


 “네? 뭐가요?”


 국밥 한 술을 입에 가져가던 한이는 씁쓸하게 웃는 은수를 보았다. 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


 “판다스 올해 성적만 보면 우승권에 있는 팀이잖아요? 팀장 님 내내 게이터스 치어리딩하시면서 고통 받으셨는데, 옮기시면 우승...하실 것 같아서...”


 아무리 돈을 받으면서 한다지만, 치어리더도 결국 감정노동이다.


  매년 하위권에서 기어 다니는 팀같지도 않은 팀을 응원하면서 돈을 받을 바에야, 우승권에 있는 팀을 응원하며 돈을 받는 게 훨씬 낫다. 프로는 프로라지만, 다음 시즌부터는 판다스의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한이 팀장의 모습을 생각하니 조금 서운해진 은수였다.


 “아아, 그거요? 그냥 철회하려고요.”


 별 거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한이는 말했다. 


 은수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다가, 이윽고 숟가락을 국밥 그릇에 퐁, 하고 떨어트렸다.


 “네?! 진짜요?!”


 깜짝 놀란 은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에서 싸늘한 눈치를 보내자, 은수는 뒤늦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그 모습을 한이는 즐거이 바라보았다.


 “뭐, 어차피 판다스에서 내건 조건도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사실 응원가는 판다스보단 게이터스 쪽이 훨씬 더 좋잖아요?”


 게이터스의 응원가는 다른 팀에 비해 확실히 퀄리티는 최고 수준이다. 하긴 팬이 그렇게나 많으니 응원가를 섣부르게 만들었다간 집중포화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응원단장이 더욱 열심히 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저도 게이터스가 우승하는 거 꼭 보고 싶으니까.”


 그러나 겨우 그런 이유로 이렇게 쉽게 마음을 바꾸다니. 


 “그러니 앞으로도 은수 씨는 게이터스 응원 열심히 해주세요.”


 돈만 보는 줄 알았던 프로의 세계도, 역시 정은 있구나!


 “우으, 팀장니이임...”


 감격한 은수가 한이에게 다가가려다가, 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느끼고 그대로 다시 착석했다. 허리의 아픔도, 한이의 마음도 은수의 눈물샘을 짜기엔 충분했다.


 “진짜로 좋아해요. 진짜로...”


 “팬 분한테 직접 들으니 더 기분 좋네요.”


 한이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볼을 긁적였다. 한이는 뚝배기 속에 담긴 마지막 밥알들을 그대로 입안으로 넣었다. 그렇게 얼큰했던 콩나물 국밥이 그 순간만큼은 꿀을 탄 듯 달달하게 느껴졌다.



 손을 흔드는 은수와 헤어진 한이는 곧바로 자신의 소속사에 전화를 넣었다. 


 그 사이에 전화번호부 상단을 차지한 강은수라는 이름을 한 번 엄지로 꾹 눌러보았다. 기념으로 찍었던 셀카를 은수 번호의 저장 사진으로 콱 박아 넣었다. 은수는 셀카를 찍을 때마저도 시종일관 호들갑을 떨었다.


 한이는 강은수라는 이름을 한 번 검지로 쓰다듬었다. 액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제 느꼈던 은수의 살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한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전화가 연결되었다.


 “어, 언니? 나야. 어. 그게... 이번 주말 3연전에 판다스 프런트 쪽이랑 미팅 있었잖아? 그거 취소 좀 해달라고... 아, 왜 그렇게 또 화를 내고 그래. 진짜... 응. 응. 알았으니까. 취소 좀 해줘. 응. 미안해. 어? 아... 그게 물론 판다스 쪽이 조건이 더 좋긴 한데... 그냥... 미련이 좀 남았어. 게이터스에. 응... 의외라고? 뭐, 그렇네. 알았어. 그럼 나중에 봐.”


 한이는 갑작스레 속에서 올라오는 하품에 입을 벌렸다. 어제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게, 큰 듯했다.


 은수도 지금 쯤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겠지. 


 다음엔 어떤 핑계로 만나야 되려나?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기쁨을 주체 하지 못하고, 한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개병신 사이트 글 올리기도 힘드네.


 오래 전에 썼던 거 다듬어서 재업.


 지금보니 부족한 부분이 넘 많다.


 조아라 연재 소설 '희와희' 많이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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