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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사심백일장 ] 몽골공주하나와 전속의사메르시1 (재업)

랑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9.04 02:01:25
조회 1042 추천 61 댓글 16
														

“어머니께서 허락하셨단 말이야. 응? 바드마.”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왠 기마를 하시겠다는 거에요, 공주님. 저번에도 칸에게 들키셔서 한달 간 외출금지 당하신 거. 기억 안나세요?”

 

바드마, 라고 불린 시종이 질린다는 듯 후-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맞추듯 온몸이 밤처럼 새카만 말이 지루하다는 듯 푸르르- 하고 소리를 내며 땅을 긁었다. 위대한 칭기즈칸의 후예 바투 칸이 제일 사랑하는 딸이자 킵차크 칸국의 젊은 공주인 이지르부칸도르하나는 고삐를 꼭 붙들고 부드럽게 말의 잘생긴 얼굴을 쓰다듬었다.

 

“거봐. 검은화살도 지루하다잖아. 원래 기마하는 시간보다 조금 이른 것뿐인데 뭐 어때. 바드마는 참 이쁜데 너무 고집불통이라니까. 융통성이 없어요 융통성이.”

 

바드마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공주를 살짝 흘겼다. 그 눈빛에 살짝 움츠러든 듯 보였지만 공주는 다시 아랑곳하지 않고 짐짓 근엄한 척을 해댔다.

 

“음. 이 방법까진 안 쓰려고 했는데... 바드마. 이건 공주로서의 명령이야. 지금 바로 마굿간 문을 열어.”

 

“어차피 그러실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러면 결국 저만 혼난다구요. 공주님이 명령하셨다는 핑계때문에 제 목숨이 아직까지 붙어있는거지... 딴 시종 같았으면 목숨이 열백개도 달아나고도 남았어요.”

 

“에이 어머니가 바드마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아무 일 없을거야. 해가 지기 전까지는 꼭 돌아올게.”

 

공주가 호언장담을 하듯 시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또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던 바드마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불쑥 솟은 말 안장에 머물렀다.

 

꽤 많은 양의 식량과 값어치 나가는 재물들이 그 밑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의심할 것이 분명했기에 공주는 다시 한번 고삐를 당겨 말이 위치를 살짝 바꿔서 바드마의 눈을 속이도록 의도했다. 다행히도 가엾은 시종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은 마굿간의 문을 천천히 열어줄 수 밖에 없었다.

 

“멀리 가지 마세요 공주님. 요즘은 들짐승이 활개를 치고 다닐 시기라구요!”

 

“걱정마. 저기 산등성이까지만 다녀올게-”

 

화려한 꿩깃화살과 중검을 허리에 메고 공주는 잽싸게 검은 말의 등에 올라 고삐를 힘차게 휘둘렀다. 이랴!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은 언제 서있었냐는 듯 한달음에 마굿간을 벗어나 기다렸다는 듯 그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힘차게 내딛었다. 순식간에 주위 광경이 휙휙 지나갔지만, 공주는 뒤에서 여전히 시종의 걱정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바드마. 혹시나 해서 편지도 남겨놨으니 너에겐 큰 피해가 없을거야.’

 

바드마란 시종과 공주는 어릴 때부터 같이 나고 자란 친자매 같은 존재였다. 원래라면 공주는 바드마에겐 말도 함부로 붙일 수 없는 존재였지만 공주가 워낙 아끼는 것을 누구나 다 알았기에 그 무서운 칸마저 그녀에겐 너그러웠다. 그런 존재에게까지 거짓을 말한다는 건 공주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이 지긋지긋한 왕궁에서 벗어나서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칸의 명령이 아닌 스스로 내린 첫번째 결정.

자유에 대한 막연한 열망에 공주의 가슴이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음에 응답하듯, 검은 화살이 하늘을 날듯 본격적으로 초원을 내달렸다.

 

 

항상 돌아서곤 했던 산등성이의 부러진 나무를 넘어서자 처음 보는 지역이 펼쳐졌다. 수 백번도 왔다 갔다한 곳이기에 꿈에서도 외울 익숙한 풍경들. 사소한 규칙들을 어겨오는 것이 삶의 낙이었던 공주지만 단 한번도 이 부러진 나무 너머를 넘어선 적은 없었다.

 

 평야로만 이루어진 풍경에서 깎아내린 듯한 기암괴석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공주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잠시 말을 멈추고 안장에서 가벼운 음식들을 꺼내먹으며 주변에 길이 있는지를 살폈더니 역시나 사람이 지나다닌 듯한 흔적이 있었다.

 

해가 어느 덧 중천에 떠 있었다. 지금쯤이면 공주는 이미 황궁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다.

이제 슬슬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기에, 잡히지 않으려면 최대한 멀리 왕궁과 떨어져야 했다. 대국의 최고 명마라는 검은 화살의 발을 따라잡을 말은 없겠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말을 살살 달래가며, 공주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고려 왕족과 결혼이라뇨, 어머니. 평생 곁에 있어 달라고 하셨잖아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일지 모르는 것이다, 얘야.”

 

“전 싫어요. 자유롭게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감히 지금 내 앞에서 죽음을 논하는 거냐??”

 

칸의 노기 섞인 음성과 공주 자신의 울음이 겹쳐져 떠올랐다.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무서운 어머니의 목소리. 수많은 잘못들을 저질러 왔어도 큰소리 한번 안내던 칸이었기에 공주는 잊고 살고 싶었던 한 가지 현실을 직시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결국 자신 또한 어머니의 장기말에 불과했던 걸까. 부족끼리, 심지어 왕족끼리도 딸들을 주변 속국이나 동맹국으로 보내 결혼시켜 서로의 입지를 굳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풍습이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확실한 세습 방법 중 하나. 제왕인 칸의 자식이라면 당연한 것일진데도, 공주는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다가온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남이 정해준 삶이라니, 지긋지긋해. 왜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걸까.

그럴거면 왜 용맹한 전사한테나 지어주는 이름을 붙인거야. ‘붉은 황소’라니... 차라리 바드미같은 이름으로 짓지. 너한텐 위대한 몽골족의 피가 흐른다 할땐 언제고... 바보 같은 어머니...

 

저 멀리 절벽이 보였지만 공주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앞을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영리한 검은 말은 위험을 눈치채고 속도를 늦출 지 말지 주인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달렸지만, 그 역시 눈치채지 못하고 고삐만 더 바짝 그러쥘 뿐이었다. 어리둥절했지만 충실한 명마인 검은화살은 주인의 명에 따라 속도를 점점 더 올렸다.

 

안장에 얹은 음식으로 최소한 한 달은 버틸테고. 최대한 아끼면서 평소엔 사냥으로 식량을 마련하자. 그렇게 동쪽으로 이동하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거야. 투르크족이든 타민족이든 정체만 잘 숨긴다면 그럭저럭 잘 섞일 수 있지 않을까. 귀중품들도 조금씩 팔아 터도 마련하고. 이쯤 살다보면 어머니도 나를 잊으시겠...


 

갑자기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을 느끼면서 아래를 향해 있던 공주의 시선이 퍼뜩 정면을 향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검은화살은 말일뿐, 결코 하늘을 날 순 없었다.

 

자신이 한 눈을 파는 사이, 검은 말은 온 몸의 힘을 다해 반대편 절벽으로 도약했다.

공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며 고삐를 더욱 세게 그러쥐었다.

말이 허공에 떠있는 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이미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공주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이 제발 제대로 착지하기만을 원했다.

 

쿠르륵-

놀랍게도 말의 앞발이 절벽 반대편의 끝에 닿으면서 돌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살았다.

역시 대국 최고의 명마답게 대단한 것-

 

생각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공주의 안장이 들리며 그녀의 몸 또한 뒤로 젖혀졌다.

평소 같았으면 말의 몸에 딱 밀착돼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말의 검은 갈기는 온데간데없이 시야에 온통 크고 작은 바위들만이 엄청난 속도로 휙휙 지나갔다.

하염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공주가 깨달을 때 쯤에 둔탁한 뭔가가 공주의 머리를 강타했고,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공주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해가 뉘엿뉘엿지고 있는 해질녘이었다.

방금 전에 분명 허공에 떠있다가 검은화살이 제대로 착지했었는데...?

이 생각을 하자마자 온 몸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아윽!”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육체적 고통에 공주가 크게 신음했다. 머리에서 찐득찐득한 것이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자신의 머리랑 부딪힌 듯한 커다란 암석과 꽤 큰 나무가 있었다. 나무의 잎사귀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있는 걸로 보아 저 위로 자신이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저 나무가 아니었으면 즉사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이 떨어진 곳을 올려다보고 주변을 살펴보니 검은화살은 절벽을 뛰어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같이 떨어졌으면 만신창이가 되었을 텐데 자신만이라도 떨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려고 했던 공주는 오른다리에 불타는 통증을 느끼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흑... 으흑...”

 

공주가 고통에 다리를 붙잡고 훌쩍거렸다. 말을 타면서 수많은 부상을 겪어본 경험 덕분에, 그녀는 단박에 자신의 다리가 부러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절벽이면 힘들더라도 올라갈 시도라도 해보았겠지만 이렇게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갑자기 모든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섣불리 왕궁을 빠져나와 말 한필만 믿고 무작정 달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멀리 가지 마세요 공주님. 요즘은 들짐승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구요!’

 

바드미의 걱정섞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칸의 호통치는 얼굴과, 따듯하고 아늑한 왕궁의 침실과 맛있는 식사도 공주를 쉼없이 괴롭혔다. 무려 그 ‘검은화살’이 쉬지도 않다시피 하며 전속력으로 반나절을 넘게 달렸다. 자신을 찾아내려면 하루, 이틀 혹은 그 이상이 걸릴 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도 가도 못한 채, 오로지 이곳에서만.

 

그들이 찾으러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 전에 들짐승의 밥이 되어버려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사냥이 특기인 공주였지만 그건 말 위에서, 두 다리를 온전히 쓸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나마 나은 건, 화살통과 살은 멀쩡해서 무기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허리에 찬 검 한자루.

 

다리 대신에 손은 멀쩡해서 그나마 다행인 점인가. 공주는 쓴웃음을 짓다 곧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바드미... 어머님... 으흑...”

 

그 때, 공주의 눈 앞에 있는 덤불에서 부시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주의 얼굴이 새햐앟게 질렸다. 수풀이 움직이는 크기로 봐서는 자신보다 조금 더 큰 무엇이다. 곰일까. 아니면 다른 짐승일까. 공주는 곰이나 호랑이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랬다.

 

나머지 짐승들은 잘 맞추기만 한다면 일격에 목숨을 끊을 수도 있겠지만 이 둘은 결코 혼자의 힘으론 불가능한 짐승들이었다. 이 둘 중 하나라면, 공주는 정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가까운 곳에 검을 재빨리 뽑아놓고, 그녀는 활시위를 천천히 당겨 목표물이 튀어나오길 기다렸다.

 

실패하면 안돼...

공주는 혼자 되뇌이며 활시위를 좀 더 팽팽히 당겼다. 손가락에 땀이 베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도 한참을 부시럭거리더니, 마침내 숲 속에서 어떤 갈색 물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으아악!!!!”


팽-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는 것과 동시에 백발백중으로 유명한 공주의 화살이 목표물을 빗나가 바로 옆 나무에 깊이 박혔다. 불쑥 튀어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어디든 맞췄을텐데. 공주가 자책을 하는 것과 동시에 두번째 화살을 재빨리 시위에 걸자 갈색 물체가 다급히 외쳤다.

 

Halt! Wer da? (거기 누구죠, 멈춰요!)

 

알수 없는 언어지만, 사람의 목소리임이 분명하다. 곰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이국의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누군가였다. 자신보다는 꽤 크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거대한 체형도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자신이 보인 적의에 놀란 것이 분명해보였다. 조금만 왼쪽으로만 화살이 기울었어도 이방인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했을 것을 두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대신, 엄청난 긴장감이 팽팽히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마침내, 갈색 두건을 둘러싼 사람이 공주를 안심시키려는 듯 떨리는 두 손을 천천히 들어 그 두건을 아주 천천히 벗었다.



자신을 데리러 하늘에서 내려온 신일까?

 

공주는 고통을 잊기 위해 자신 스스로가 환상을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햇살 같은 금빛 머리카락, 저 멀리 서쪽에 존재한다는 아름다운 바다가 떠오르는 푸른 눈동자. 말로만 듣던 투르크족(러시아)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녀가 쓰는 언어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언어랑은 거리가 멀어보였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자신들과 정반대의 눈과 머리색을 가진 그들. 투르크족이라 일컬어지는 피지배인들은 소수의 타타르족, 몽골인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남쪽에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색목인은 어디선가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것처럼 보이는데, 어디서 왔을까.

 

공주의 호기심이 고통을 살짝 앞서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색목인이 공주를 향해 발을 옮기는 바람에 공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본능적으로 시위를 당긴 손에 힘을 주며 공주가 경고하듯 낮게 읖조렸다.

 

“더 이상 다가오지마. 색목인.”

 

색목인, 이라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듯 여자가 자리에 딱 멈췄다. 여자라고? 자기도 모르게 그가 여인일거라 생각한 것을 깨달은 공주가 눈을 끔벅거리며 정면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Sie, sich am Bein verletzem. ( 당신, 발을 다쳤군요.) ”

 

낮지만 어딘가 차분한 성인 여성의 목소리. 경고하듯 말하던 공주의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상대를 위협하는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달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

 

여인의 눈이 공주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천천히 훑다가 자신의 다친 오른 다리에서 멈췄다. 다리를 다쳤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경계심이 또다시 피어오르려는 찰나 여인이 빙글 몸을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고르듯 꼼꼼히 주변을 살피는 모습에 뭘 저렇게 열심히 고르나 궁금해지려는데, 품에서 작은 단검같은 것을 꺼내더니 비슷한 크기의 굵은 나무가지를 열심히 자르기 시작한다. 툭, 툭, 하고 작은 가지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리고 공주는 어리벙벙한 채로 슬쩍 활시위를 풀었다.

 

활을 겨누고 있는 사람을 등지고 나뭇가지나 베고 있다니. 이상한 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마침내 필요한 만큼 다 잘라내었는지 여인이 나뭇가지를 한아름 안고 공주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의 손이 자연스레 공주의 얼굴에 와닿자 공주는 저도 모르게 움찔, 하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여인의 손은 멈추지 않고 피가 살짝 굳어있는 머리쪽으로 움직여 꼼꼼히 공주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무엇인가를 찾듯 인상을 살짝 찌푸린 여인의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차가운 그녀의 손가락이 기분좋게 느껴져, 공주는 자기도 모르게 여인이 좀 더 오랫동안 그렇게 해주길 원했다. 아쉽게도, 여인의 손가락은 금방 그녀의 머리카락을 빠져나갔다. 어딘지 모를 섭섭함을 느끼는 공주였지만, 오른 다리를 강하게 꾹 눌러오는 여인의 돌발 행동에 그런 생각들은 모조리 날아가고 말았다.

 

“아아악!! 뭐하는 거야 지금?”

 

억지로 일어서려 할 때보다 몇 배의 고통이 밀려와 공주는 울음을 터뜨렸다. 기마를 하거나 사냥을 하면서 수없이 넘어지고 다쳐왔던 공주지만 이렇게까지 아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분명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닌데. 사람에 대한 공주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격한 공주의 반응을 보더니 여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며 품에서 뭔가를 부시럭거리며 꺼냈다. 눈물로 그렁그렁해진 눈을 훔치고 바라보니 작은 호리병같은 것이 그녀의 손에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 곧 퐁- 하는 소리와 함께 호리병이 열리고 그녀가 나뭇잎에 극소량의 갈색가루를 더는 것을 볼 수 있었다.

 

Sie lecken es. (이거 핥아봐요.)”

 

여인이 나뭇잎을 공주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먹어보라는 뜻인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공주가 그녀를 바라보니 이렇게 하라는 듯 나뭇잎을 얼굴 밑에 받치고 혀를 살짝 내민다. 그 모습이 재밌어 살짝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애써 참으며 눈 앞의 나뭇잎만 뚫어져라 노려봤지만 여인은 별 미동도 없이 그대로 있을 뿐이다.

 

해치려면 활을 내렸을 그 때 해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공주는 여인이 시킨 대로 나뭇잎을 살짝 핥았다. 기대하지 않은 쓴 맛에 공주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곧 처음 느껴보는 묘한 기분이 그녀를 감쌌다. 어딘지 모르게 개운해지고, 꿈을 꾸는 듯한 기분좋은 상태. 특히 아까부터 심해지던 다리의 통증이 점점 잦아드는 걸 깨닫고 공주는 놀라움에 여인을 다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공주의 놀란 시선이 향하자 여인은 그저 빙긋 웃으며 칼을 꺼내 오른쪽 다리의 아랫단을 잘래냈다. 칼을 쓰는 게 신경쓰이긴 했지만 공주는 더이상 여인을 경계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가만히 지켜보니, 아까 들고 왔던 나뭇가지 중 제일 튼튼한 두개를 골라 다친 오른쪽 다리 양쪽에 두고 천으로 강하게 고정시킨다.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진 다리를 만지느라 여인의 손은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보는 방식이지만 이 여인은 분명 자신의 다친 다리를 치료해주고 있다. 그 덕분에 활로 목숨까지 위협받았으면서도... 그 생각에 미치자,  공주는 은인에게 되려 협박을 했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아까부터 잠이 쏟아지듯 피곤함이 몰려오고, 이 말을 한다해도 그녀가 알아들을지는 알수 없었지만. 꼭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고마워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시야가 점점 깜깜해짐을 느끼며 공주는 눈을 감았다. 제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바닥으로 끌어당기듯 착 가라앉는 느낌. 어디선가 차갑지만 다정한 손길이 느껴지는듯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공주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차갑고 서늘한 아침 공기가 공주의 코 끝을 깨우듯 어루만졌다. 그 서늘함에 눈을 뜰 뻔했으나 따듯하고 부드러운 뭔가에 안겨있는 듯한 느낌에, 공주는 여전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사실은 그 모든 소동들이 꿈이고 여긴 아직 침대인거야. 예법시간 전에 알아서 깨우러 올테니... 그동안 잠이나 실컷 자둬야지. 


공주가 만족스러운듯 몸을 뒤척였다. 손바닥에 말랑한 촉감의 뭔가가 닿았다.


“......?”


공주의 침실엔 말랑하다, 라고 표현할 말한 물체가 전혀 없었다. 양모로 만들어진 따듯한 이불과 호랑이가죽으로 만들어진 침대바닥이 전부였다. 꿈이 아니라는 현실에 공주는 눈을 뜨기가 두려워졌지만, 결국은 용기를 내어 천천히 눈을 뜨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바로 코 앞에 그 아름다운 이방인의 얼굴이 있었다. 두 눈을 굳게 감은 채 잠든 모습으로.


공주는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금방 따라오는 통증에 그대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쯤되면 깨어날 만도 했지만, 여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혹시 죽었나 싶어 놀라 그녀를 흔들어 깨우려 했지만 그녀와 맞닿은 몸에서 미세한 오르락내리락이 느껴졌다. 어제 무엇을 했는지 몰라도 제대로 골아떨어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앞에 불을 피운 흔적이 보였다. 초원의 밤은 그냥 아무것도 없이 보내기에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한 두번 황족끼리 사냥을 나섰을 때 게르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중간에 뚫은 화로를 통해 계속 불을 지폈음에도 공주는 밤새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다. 그때 걸린 감기가 생각보다 오래가서 칸이 무척 걱정하여 온갖 진미를 하사했을 정도였다.


어제 곰으로 오해했던 그 갈색 망토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동물의 가죽을 덧댄 것인지 가벼움에도 매우 따뜻했고 튼튼한 상등품이었다. 지금 공주가 아무 일 없이 깨어난 건, 아니 얼어죽지 않은 건 순전히 이 여인의 온기, 그 덕분인 것이 분명했다.


만약 나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설령 먹을 것을 주고 치료까지 해주는 호의를 베푼다고 해도 그 이상은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약육강식의 세계.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웠고 믿었기 때문에. 이 자는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해준걸까.


슬쩍 여인의 곁으로 다시 몸을 당겨 앉았다. 그녀를 다시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 손바닥에서 느껴지던 그건... 그녀의 가슴이었겠지. 말캉거리고 부드러웠던 그 촉감을 생각하며 공주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여인의 가슴께에 살짝 얼굴을 묻었다. 일정한 박동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자신을 어릴 때부터 돌봐주던 바드미에게도 똑같은 소리가 났었지. 넘어지거나 아플 때, 어린 공주는 바드미의 품을 습관적으로 찾았다. 단순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던 그 소리. 이 여인도 그녀와 같았다. 똑같은 사람이나,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국에도 수많은 여인들이 있지만, 공주는 단연코 이 여인의 미색을 뛰어넘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백옥같은 피부와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 공주의 손가락이 천천히 여인의 옆선을 따라 훑었다. 봉긋한 이마부터 높게 솟은 콧대가 이어질 쯤에 자리잡은 여성스러운 콧볼과 자신을 향해 조용히 웃어주던 그 입술까지. 여인의 미소를 생각하며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을 살살 쓰다듬었다.


다리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여인의 품에 안겨있듯 있으니 그 통증마저 가라앉는 듯 했다. 잠에 골아떨어진 이 자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스스로 깨어나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 이대로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혹시나 깨어나면 그때 같이 일어난 척 해야지. 막 놀라는 척도 하고. 그러면 좀 당황하지 않을까.


공주가 실실 웃으며 여인의 품으로 다시 파고들려는 찰나, 저 멀리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와- 하는 함성이 들렸다. 그 요란한 소리에 깊게 내려 앉아있던 여인의 긴 속눈썹이 마침내 위로 스르륵,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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