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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가 바로 무도회장입니다. 성의 중심이죠!”

  히나가 사요의 손을 잡고 소파 앞의 커피 테이블로 이끌며 말했다.

“저기 보이시나요? 남쪽나라에서 온 와타나베 공주가 있고...저쪽엔 서쪽에서 온 마에다 왕자가 있네요! 저긴 카와시마 왕이 계시는군요! 그리고..”

  이쪽저쪽을 가리키며 히나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사요는 그 이름들이 히나와 같은 반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말을 마치고 히나가 돌아서더니 사요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사요 공주님입니다. 공주님의 드레스가 다른 모든 나라들보다 달님나라가 약한 걸 나타내도, 공주님의 빛을 숨기지는 못하는군요.”

  히나가 햇님나라의 왕자님이라면, 사요는 언제나 약소국인 달님나라의 공주님이었다. 설령 히나가 본인들의 이름에서 착안했다고는 해도, 사요는 그 설정이 좋지 않았다. 마치 동생에 비해 점점 어둡고 약해져가는 사요를 비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히나의 말에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였다.

“감사합니다, 히나 왕자님.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사요의 대답에 히나는 가슴에 손을 갖다 대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히나 왕자님의 미소가 오늘따라 더 빛나 보이네요’ 라고 말했다면 좋았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솔직한 마음을 말할 정도로 사요는 강하지 않았다.

  그런 사요를 보던 히나가 돌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언니, 선물! 선물 줘!”

“어..?”

  동생의 뜬금없는 소리에 사요는 당황했다.

“다른 나라 갈 때는 선물 가져간대. 오늘 백과사전에서 봤어!”

  사요는 동생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빨리 뭐든 쥐어주지 않으면 골치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실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는데, 마침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사요는 소파에 걸쳐져 있던 엄마의 얇은 담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히나 앞으로 돌아와 공손히 내밀면서 말했다.

“이 망토가 선물이에요. 이 망토는 걸치는 사람에게 힘이 쎄지는 능력을 준답니다.”

  말을 끝낸 후, 스스로도 뛰어난 기지를 발휘했다고 사요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히나가 눈을 반짝이며 그 담요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우와! 언니 최고! 아니, 사요 공주님 최고!”

  너무 기쁜 나머지 연극이라는 것도 잊고 히나가 방방 뛰며 ‘언니’를 외쳤다. 그리고 곧 사요에게 담요를 받아들고 망토처럼 둘렀다. 얇은 담요였기에 무게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9살짜리 아이가 두르기에는 조금 커 보였다.

  그런 히나를 바라보고 있던 사요는 히나의 양 어깨 앞으로 내려와 있던 담요 끝을 잡았다. 그리고 히나의 가슴팍에서 그것을 살며시 묶었다. 그렇게 하고 보니 제법 그럴싸한 모습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그럼 이대로 저와 춤춰 줄래요?”

  함박웃음의 히나가 언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대로 춤을 추면 망토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으려나. 염려 섞인 표정을 지으며 사요는 동생에게 손을 뻗었다.

  그 때였다.

“언니, 잠깐만!”

  갑자기 히나가 망토를 머리 위로 쑥 빼더니 손에 쥐었다. 이내 커피테이블을 지나쳐 TV 앞으로 후다닥 뛰어 갔다. 그리고 한 손에 망토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갖다 대고 의기양양하게 섰다. 이윽고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힘의 망토는 나, 북쪽의 위대한 천재 마법사가 받아가지!”

  갑작스레 바뀐 연극의 분위기와 동생의 역할에 사요는 얼이 빠졌다. 곧 정신을 차리고 설마 하는 표정으로 히나에게 물어봤다.

“..히나가 둘 다 연기하는 거야?”

“응!”

  다른 설명도 없이 씨익 웃는 히나의 대답은 딱 한 단어였다.

“엣헴! 나는 나쁜 마법사다!”

  방금 전 까지만해도 자신을 ‘위대한 천재’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혼란스러운 사요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히나는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나는 북쪽에 눈이 펑펑 내리는 아름다운 마법의 성에서 왔다!”

  그러면서 그 마법사는 이것저것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성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가해달라며 이웃의 여러 나라에 초대장을 보냈다. 그런데 축제가 열리기 시작한 어제, 성을 방문한 사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화가 난 마법사는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이 어딜 갔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햇님나라의 축제에 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와타나베 공주, 마에다 왕자 등등 마법사는 축제에 오지 않은 인물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중에 사요 공주의 이름은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히나 왕자! 너한테도 초대장을 보냈는데, 오지 않았어!”

  마법사가 사요 쪽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외톨이가 된 저 마법사는 퍽 동생을 닮은 것 같았다.

  마법사의 대사를 마친 히나가 사요 앞으로 돌아왔다. 이내 망토를 다시 뒤집어쓰고 사요를 등 뒤에 두고 섰다. 그리고 자신이 나쁜 마법사로서 서있었던 방향을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축제를 시작했는걸! 그리고 넌 사요 공주님을 초대하지 않았잖아!”

  시시각각 역할을 바꾸는 동생을 바라보며 사요는 생각했다. 이전에는 외톨이 마법사가 등장하는 일은 없었는데. 그저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사요 공주님이랑 함께 있고 싶다구! 그러니까 네 축제는 안 가!”

  귀여운 고백과 동시에 히나는 사요를 한 손으로 껴안았다. 동시에 흘끗 사요 얼굴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또다시 사요에게서 떨어져 망토를 벗고 나쁜 마법사의 자리로 갔다. 참 이래저래 바쁘네, 라고 동생을 바라보며 사요는 생각했다.

“사요 공주? 앗, 아니! 이렇게 예쁜 공주님이 있었다니!”

  외톨이 마법사가 사요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사요 공주님이랑 친구가 되고 싶어!”

“어..?”

  또다시 갑작스러운 전개에 사요는 할 말을 잃고 벙 쪘다. 그런 언니는 신경도 쓰지 않고 히나는 또 사요 쪽으로 달려와서 섰다. 망토를 쓰고 휙 돌아서더니, 나쁜 마법사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안 돼! 사요 공주님은 나쁜 마법사랑은 친구 안 해! 게다가 넌 축제도 방해했잖아! 얼른 너네 성으로 돌아가!”

  방금 내가 말했어야 할 타이밍이 아니었던 건가. 혼자서 저렇게 잘 할 거면 굳이 날 부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자신의 역할‘들’을 훌륭히 해내는 동생을 바라보며 사요는 생각했다.

  그 와중에 히나는 다시 나쁜 마법사를 연기하러 달려갔다.

“뭐라고..? 화가 나는 군! 에잇! 받아라! 스노우 매직!”

  일요일 아침에 하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의 악당이 사용하는 마법을 히나가 사용했다. 그리고 곧장 사요의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언니! 빨리 마법 맞은 척 해!”

“어...어? ...으아악?”

“으아악!!”

  지금 너를 보고 있기만 해도 정신이 없단다,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꾹 참고 사요는 공격받은 척을 했다. 그런 사요를 따라서 히나 왕자님도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조심히 쓰러졌다.

“크윽..나쁜 마법사 녀석! 사요 공주님, 괜찮나요?!”

  퍽 긴박한 표정으로 히나가 사요에게 물어봤다.

“네..저는 괜찮아요..”

  물리적으로는 말이지. 정신적으로는 조금 피폐해진 기분이 든 사요였다.

  사요의 대답을 들은 히나는 다시 나쁜 마법사가 되었다.

“하하! 이제 나의 모든 힘을 써서 이 나라를 얼어붙게 만들겠다! 이야압!”

  이번에는 주문도 외지 않은 채 나쁜 마법사가 마법을 휘둘렀다. 그리고 망토가 묶여있던 부분을 풀더니 커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망토는 테이블을 전부 뒤덮고도 한참 남았다. 그러고 나서 히나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히나? 공주님 놀이 끝난 거야?”

  아무런 말도 없이 부엌으로 달려간 동생에게 사요가 물었다. “아니!” 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 히나가 물이 반쯤 들어있는 페트병을 양손에 들고 나타났다. 냉장고에 있었던 것인지 페트병 겉에는 금방 김이 서렸다.

“히나, 그건 뭐니..?”

“물병!”

“아니, 그건 보면 아는데..”

“히히, 기다려봐! 어제 테레비에서 재밌는 거 봤어!”

  동생은 장난스럽게 웃더니 물병을 망토가 깔려있는 테이블 한 가운데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이내 외톨이 마법사의 자리로 돌아갔다.

“보아라! 저건 내 힘을 다 써서 만들어낸 세상에서 제일 큰 나무다! 내 능력 그 자체지!”

  마법사가 페트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무가 태양도 가려서 여기엔 아주 추운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먼 옛날 공룡들도 태양이 가려져버리는 바람에 다 죽었어!”

  사요는 며칠 전 공룡이 멸종한 얘기를 히나와 함께 책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이 나무의 뿌리와 가지가 성을 뒤덮어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히나 왕자의 망토는 나무 밑에 있으니까 힘을 쓸 수도 없지! 이대로 여기서 죽음을 맞이해라! 하하하!”

  사요의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외톨이 마법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나무 꼭대기에서 너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겠다. 잘 있어라!”

  나쁜 마법사의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히나는 사요 곁으로 돌아왔다.

“사요 공주님. 이대로는 전부 다 죽고 말겁니다. 저와 함께 망토를 되찾고 나쁜 마법사를 물리치러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결연한 표정으로 히나 왕자님이 말했다.

“...네, 그렇게 해요. 왕자님.”

  히나 왕자의 부탁에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사요 공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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