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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나메르하나 - 버섯 소동

검은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7.30 05:01:03
조회 2909 추천 45 댓글 11
														

* 레나는 영국 출신. 영국은 요리가 끔찍하기로 유명.
웃기고 달달한 걸 쓰고 싶은데 글솜씨가 부족...













나는 초조한 마음을 안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앞에 누워있는 박사님을 보았다.
반짝반짝한 금발, 나이보다 한참 어리게 보이는 뽀얀 피부, 뚜렷한 이목구비는 언제 보아도 여전히 아름답다. 박사님은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마냥 잠이 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기절한 거다.
그것도 내가 만든 버섯구이를 드시고.

*

발단은 레나 언니였다.
기지 뒷산에 보물찾기 하러 가자는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다. 날도 좋고 바람도 좋다며 신이 나 따라간 내 죄가 제일 크다.

휴일을 하루 앞 둔 어제, 메이 박사님을 졸라서 여행 이야기를 듣고 한껏 바람이 든 나에게, 레나 언니는 술집에서 가끔씩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는 ‘뒷산의 보물’에 대해 말을 꺼냈다. 평소 여행을 다녀보지 못해 메이 박사님의 여행기를 자주 들여다보던 나는 당연히 그 이야기에 솔깃했다. 뒷산이라는 배경은 밋밋하지만, 그래도 보물이라니! 뭔가 멋져 보이잖아!

그래서 곧바로 외출 허가를 받고,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뒷산으로 향했더랬지. 야트막한 뒷산은 경사도 높지 않았고, 시원한 나무그늘 덕에 그리 덥지도 않았다. 뒷산을 한참 뒤지던 우리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동굴이었다. ‘동굴 = 비밀 통로 = 보물’이라는 심플한 공식이 떠오른 우리는 라이트를 켜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었다. 반쯤은 장난이었고, 반쯤은 분위기에 휩쓸린 거였기 때문에 진짜로 뭐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웬걸. 안에는 진짜 낡은 상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레나 언니는 주변에 트랩이 설치되지 않았는지를 유심히 살폈고, 나는 동굴 밖으로 나가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상자 안에 트랩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우리의 걱정이 무색하게 상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뒷산 지도였다. 대충 그린 티가 나는 그 지도에는 현재 위치엔 검은 점이, 그리고 조금 떨어진 부분에는 붉은 점이 그려져 있었다.

“이쯤 되니깐 좀 수상한데?”
“왜? 뭐가 수상해, 레나 언니?”
“너무 대놓고 보물 탐험 분위기잖아. 술집에서 아저씨들이 떠들던 거에 비해선 너무 유치하지 않아?”
“술 마신 아저씨들은 원래 유치하잖아.”
“아, 그건 또 그러네. 그럼 꼬맹이, 어쩔래? 가볼 거야, 말 거야?”
“가보자! 딱히 뭐 할 것도 없잖아.”
“그래.”

지도를 보니 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위 뒤 즈음에 붉은 점이 그려져 있었다. 핸드폰으로 보물 사진을 찍고, 다시 상자에 집어넣은 후에 우리는 목표로 한 지점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게 뭐야…….”
“웬 일이래, 이 아저씨들. 이런 걸 뒷산에서 기르고 있었다니.”

실망한 나와는 다르게 레나 언니는 휘파람을 불며 열이 세워져있는 통나무로 다가갔다. 통나무 겉면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안에서는 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수가 꽤 많았다.

“지금 우리가 버섯 찾으러 산에 온 거야?”
“왜, 재밌었잖아. 그나저나 의외다 정말. 술 마시면 노래 부르면서 주정만 부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착실한 짓을 하고 있을 줄이야.”
“버섯 맛있어?”
“넌 안 먹으니까 모르는구나? 이거 꽤 맛있어. 난 바짝 구워 먹는 걸 좋아하는데 맥주랑 꽤 잘 어울리거든.”
“흐음… 박사님도 좋아하실까?”
“그러지 않을까? 박사님 채소 잘 드시잖아.”

변변찮은 보물(?)로 인해 가라앉은 마음은 그 한마디에 다시 부풀어 올랐다. 나는 통나무 밑동에 있는 버섯을, 레나 언니는 반대쪽 통나무에 있는 버섯을 각각 한주먹씩 따서 배낭에 각각 집어넣었다. 버섯은 잔뜩 있었기 때문에 조금 딴 정도로는 티도 나지 않았다. 챙길 만큼 챙기고도 뭔가 아쉬워서 통나무를 다시 보고 있는데, 문득 시선을 내리니 아래쪽에 붉은 버섯이 예쁘게 피어있는 게 보였다.

“레나 언니, 이것도 먹을 수 있어?”
“처음 보는데… 통나무에 붙어 있으니까 식용 아닐까?”
“그렇겠지? 일단 가져가자.”

예쁜 색이 마음에 들어서 배낭에 집어넣고 일어서자 어느덧 해가 조금씩 기울어가는 것이 보였다. 소득은 겨우 버섯뿐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탐험이었다며 킥킥대고 산을 내려왔었다.

레나 언니와 헤어지고, 나는 바로 숙소로 돌아와 버섯을 씻은 후 레나 언니가 말했던 방법대로 버섯에 소금을 살짝 치고 오븐에 구웠다. 노릇노릇하기 구워진 버섯은 솔직히 냄새는 별로였지만, 비주얼만큼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박사님이 보시면 좋아하시겠지? 이따 박사님과 같이 식사를 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신이 났다.

저녁, 숙소로 돌아온 박사님은 날이 덥다며 맥주부터 찾으셨다. 냉장고에 넣어둔 차가운 캔 맥주를 꺼내들고, 접시에 담아두었던 버섯을 내밀자 박사님은 눈이 동그래져서 물으셨다.

“이게 뭐예요, 하나?”
“레나 언니가 그러는데 맥주에다 구운 버섯을 먹으면 맛있다고 해서요. 제가 한번 구워봤어요!”
“그래요? 그럼 한번 먹어볼까요.”

박사님은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으로 버섯을 집어 드셨고, 나는 오늘 하루 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한참 뒷산에 있는 동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박사님이 이마를 짚었다.

“박사님? 벌써 취하셨어요?”
“아뇨… 갑자기 현기증이…….”
“괜찮으세요?! 혹시 날이 너무 더워서 더위 드셨다거나… 에어컨 더 세게 틀까요?”
“그거랑 좀 다…른 느낌…이…….”

점점 말이 느려지던 박사님의 몸이 휘청이길래 깜짝 놀라 받아들고 보니 이미 박사님은 내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정신을 잃고 있었다.
박사님이 술을 마시다가 잠든 일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갑작스러운 일은 처음이었다. 뭐가 문제지?!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는 내 눈에 버섯이 담긴 접시가 들어왔다. 버섯? 버섯 때문이야? 식용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 외에 의심갈 만 한 것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괜한 짓을 해서! 삽시간에 죄책감이 피어올라 가슴속에 그을음을 잔뜩 남겼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자책하는 게 아니라 박사님을 빨리 의무실에 옮기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박사님을 들쳐 업고 숙소를 나섰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메이 박사님의 도움을 받아 의무실에 박사님을 옮기고, 당직을 서던 의무관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는 박사님에게 위세척을 시도했다. 그 동안에 혹시나 레나 언니도 버섯을 먹었을까봐 연락하자, 레나 언니도 금세 의무실로 뛰어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의무관은 우리를 꾸짖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버섯을 먹다니, 큰일 날 짓을 하셨네요.”
“죄송합니다…….”
“게다가 붉은 버섯이라니, 그런 화려한 색을 가진 버섯은 대부분 독버섯이에요. 자칫하면 큰일 날 뻔 했단 말입니다.”
“그럼 박사님은요? 박사님은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부옇게 번진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데, 의무관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빨리 위세척을 했기 때문에 별 일은 없을 겁니다. 먹었다던 버섯 좀 볼 수 있을까요?”
“잠깐만요!”

눈썹이 휘날리게 숙소로 뛰어가서 박사님이 먹다 남긴 버섯을 접시 째로 들고 왔다. 의무관은 빨간 버섯을 보고서 처음 보는 버섯이라며 독성 테스트를 하겠다고 가져갔다.
나는 박사님이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가서 늘어져있는 손을 꼭 붙잡았다. 여전히 따뜻한 손이었지만, 내가 손을 꼭 잡을 때면 같은 세기로 내 손을 잡아주던 그 힘은 없었다.

“미안, 내가 좀 더 잘 알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냐, 레나 언니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내가 그 버섯을 챙겼는걸.”

나란히 풀이 죽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메이 박사님은 의무관을 따라가 독성 검사 결과를 듣고 왔다. 다행히도 독성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왜 박사님이 기절하신 건데요?”

가운 자락을 붙들고 묻자, 의무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지금은 그냥 잠이 든 걸로 보입니다. 먹었던 당시에는 기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은 깨어나시기를 기다리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군요. 위세척도 다 끝냈으니까요.”


그런 경위로 새벽이 다 된 시각, 나 혼자 남아 의무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박사님이 깨어나시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박사님을 흔들어 깨워볼까 하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지만, 매일 계속되는 야근에 지친 얼굴을 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휴일 아니던가. 박사님이 휴일에 잠을 몰아 주무신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타는 듯한 가슴을 붙잡고 박사님이 이제나 깨어나나 저제나 깨어나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침 10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드디어 박사님이 눈을 깜박, 뜨셨다.

“박사님……!”

밤새 내내 박사님 눈을 뜨기를 기다리던 나는 박사님에게 답삭 안겼다. 환자에게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떨어지긴 했지만, 안도감에 절로 눈물이 차올랐다.

“박사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몸은 좀 어떠세요? 컨디션은 좀 어때요?”
“아…….”
“별로예요? 의사 불러올까요? 네?”
“저기…….”
“네, 말씀하세요, 박사님.”

박사님은 몇 번이나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더니, 곧 또렷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침묵하는 몇 초가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숨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사이, 박사님이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

“건강 상태는 이상 없습니다.”

의무관의 말에 나는 곧바로 항의했다.

“절 못 알아보시잖아요! 아니, 저 뿐만이 아니라 다들 못 알아보시는데! 이게 어떻게 이상 없다고 할 수가 있어요!”
“뇌파도 정상입니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으니 지켜보도록 하죠.”
“일시적인 현상…! 진짜 일시적인 거 맞죠?”
“지켜봐야 알 일이죠.”

침착한 의무관의 태도에 내 속이 다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나니까 누구에게도 화풀이 할 수 없다. 나는 아직도 어리둥절해 보이는 박사님에게 다가가 그 손을 꼭 붙잡았다.

“박사님, 일시적인 현상이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저기… 전 멀쩡한 것 같은데요.”
“아니야, 박사님이 멀쩡할 리가 없잖아요! 나를 기억 못 하는데!”
“상황이 좀 이해 안 가기는 하지만…… 오늘이 며칠이죠?”
“2077년 7월 30일이요!”
“하아…….”

박사님이 내 대답을 듣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내 연락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와 준 메이 박사님이나 레나 언니가 그 한숨소리에 다 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 마지막 기억은 2067년 4월 21일인데… 그럼 제가 약 10년의 세월을 기억 못 하는 상태란 소리네요.”
“10년? 박사님 그럼 지금 27살이란 거예요?”
“신체 나이는 37이겠죠? 어쨌든 당황스럽긴 하네요.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떴더니 10년의 세월이 지나 있다니…….”

박사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10년 전이면 박사님이 오버워치에 계실 때 아닌가? 그만큼 오래 오버워치에 있던 사람이 누구누구지?

“그럼 아나 사령관님이랑 라인하르트 할아버지, 토르비욘 아저씨는 아신단 말씀이에요?”
“아나가 사령관이 됐나요? …잘 어울리네요. 네, 방금 언급된 세 사람은 물론 알고 있죠. 아직 오버워치에 있나보죠?”
“네! 그런데 지금 아나 사령관님만 계시고 나머지 두 분은 임무로 외출하셨는데…….”
“그럼 아나를 만나러 가보죠.”

박사님이 침대에서 일어나시려고 하길래 얼른 옆에 가서 부축했다. 그러자 박사님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병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부축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또 언제 쓰러질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요, 그럼. 그렇게 걱정이 되면 같이 가요.”
“저도 같이 갈까요?”

걱정이 되신 건지 메이 박사님과 레나 언니가 물었다. 박사님은 혼자 가도 괜찮을 정도라며 정중하게 거절하곤 의무실을 나섰다.

*

본부로 향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박사님이 쓰러지면 큰일 나기 때문에 나는 박사님의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그런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몇 번인가 시선을 주던 박사님이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하나요, 송하나. 송이 성이고 하나가 이름이에요. 박사님은 절 하나라고 부르셨어요.”
“하나 양이 아니라요?”
“그건 우리가 사귀기 전까지만요.”
“……네?”

박사님이 우뚝 멈춰 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박사님을 봤더니, 박사님은 몹시 놀란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저기, 하나 양은 지금 몇 살이죠? 너무 어려 보이는데.”
“……19살이요.”
“맙소사.”

박사님이 휘청이며 이마를 짚는다. 화들짝 놀라 부축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10년의 세월을 건너뛰었을 때도 침착했던 분이 이렇게 놀랄 만큼?

“지금 제가 봐도 하나 양은 너무 어려 보이는데, 10년 후의 제가 하나 양과 사귄다고요? 오, 맙소사. 거짓말이죠?”
“진짜인걸요……. 박사님이 저 안 받아줘서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렇다고 그걸 진짜 받아줘요?!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단 말이에요!”
“그건 궤변이죠! 10년 후면 제가 37이니까… 오, 이런. 18살이나 어린 애랑 제가 사귄단 말이에요?! 믿을 수가 없네요!”

박사님은 양 손을 번쩍 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 몸으로 어이없다는 감정을 표현해내셨다. 박사님이 이렇게 감정 표현에 적극적인 건 처음 본다. 그 모습에 괜히 기분이 상해서 툭 내뱉었다.

“못 믿으시겠으면 아나 사령관님한테 물어보세요. 그분은 우리 관계 다 알고 있으니까.”
“네, 꼭 그래야겠어요. 오, 맙소사. 내가 그럴 리가…….”

박사님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독일어로 추정되는 언어로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느낌상으로는 욕 같다. 박사님이 욕이라니!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다.

본부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사령관님의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휴일에 갑자기 찾아온 우리를 보고 아나 사령관님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앙겔라, 버섯을 잘못 먹어서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건강해 보이는데?”
“오, 아나. 제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었는데 제 양심을 위해 제발 아니라고 해줘요. 알겠죠?”
“무슨 소리야?”
“제가 설마 여기 있는 하나 양이랑 사귀나요?”

박사님의 표정은 흡사 간절해 보였다. …10년 전엔 감정 표현이 되게 풍부하셨네. 새로운 모습을 봐서 좋단 마음과 박사님이 날 부정해서 속이 상한다는 마음이 서로 엉킨다. 아나 사령관님은 내게 설명을 구하듯 시선을 보냈다.

“실은 박사님이 요 10년간의 세월에 대해 기억 못 하고 계세요. 최근 날짜를 2067년 4월로 아시더라고요.”
“뭐? 앙겔라, 진짜야?”
“네, 아나. 그러니까 대답해줘요. 내가 진짜 하나 양이랑 사귀나요?”
“허… 이것 참.”

아나 사령관님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사님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아니라는 거죠? 아, 다행이다. 설마 10년 후의 내가 정말 양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파렴치한인 줄 알고 제가 얼마나…….”
“아니, 그건 맞는 말이야.”
“네?”
“앙겔라 네가 하나 양이랑 사귀고 있는 거, 사실이라고.”
“뭣…….”

흡사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내고, 박사님이 굳어지신다.
아니, 나이 차가 좀 있는 게 그렇게 반응할 정도야? 모두 다 내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러려니 하려고 했는데 이거 좀 심한 거 아니냐고.

“의사가 뭐라고 하든?”
“신체에는 문제가 없다고요. 뇌파도 정상이라고, 한동안 지켜보자고 하던걸요.”
“흠… 어떤 버섯은 잠시 정신이상을 일으키기도 한다던데, 그런 종류인가. 알았어, 당분간 앙겔라는 휴가로 처리하지.”

듣던 중 다행인 소리다. 박사님에게 다가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려는데, 박사님은 여전히 나이 차의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내가 18살 어린 애랑… 18살이나 어린 애랑…….”
“박사님?”
“내가 페도필리아일 리 없어…!”
“저기, 박사님. 저 19살이에요. 성인이라고요!”
“제가 대학에 다닐 때 하나 양은 막 태어나서 기어 다니지도 못했단 말이에요!”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현재가 중요한 거지.”
“제 기준으로 하나 양은 지금 9살이라고요!”
“박사님은 37세고, 전 지금 19살이에요! 이제 그만 인정하세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박사님의 손을 잡아당겨 본부 밖으로 향했다. 평소에 젊었을 적의 박사님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소원성취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박사님은 내게 손이 잡혀 끌려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충격이 극심한 모양이었다. 속상하기도 한데 그보다는 박사님이 걱정되어서 얼굴을 살피니 아까보다는 조금이나마 안정된 상태로 보였다.

“이제 좀 정신이 드세요?”
“…눈을 감았다 뜨면 37살의 제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네요. 양심이 너무 아파…….”
“아, 박사님!”
“휴… 알았어요. 나이 이야기는 그만 하죠. 그보다 우리 뭐 좀 먹는 게 어때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아, 그러셨죠 참. 어제 위세척까지 해서 배고프실 텐데 제가 생각을 미처 못 했네요.”

박사님이 손을 잡는 걸 몹시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길래 어쩔 수 없이 손을 풀고 나란히 식당을 향해 걸었다. 에이씨, 박사님 기억이 돌아오기만 하면 하루 종일 찰싹 붙어있을 테다. 진드기마냥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박사님이 나를 조심스레 살피더니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박사님 생각이요.”
“…….”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아, 미안해요. 아무래도 익숙지가 않아서.”

나야말로 언제나 침착하고 상냥하던 박사님과는 확연하게 다른 27살의 박사님이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됐고, 뭐 드실 거예요? 첫 식사니까 샌드위치?”
“네, 그걸로 하죠.”
“어니언 소스에 피클 빼고 양상추랑 토마토는 추가해서, 맞죠?”
“…잘 아네요.”
“박사님이랑 같이 식사한 지가 얼마인데 설마 그걸 모르겠어요.”

식당에서 주문을 한 뒤 담시 기다렸다가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포장해서 다시 나왔다. 박사님과 자주 가는 공원으로 가자, 신기한 듯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신다.

“공원이 생겼네요?”
“네, 기지를 확장하면서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지는 장소네요.”
“박사님이 좋아하는 장소예요. 종종 여기에 도시락 싸들고 와서 먹었어요.”
“그렇군요.”

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침묵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박사님은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조용히 샌드위치를 씹고 계셨다. 음료수 뚜껑을 따서 건네 드리니 살짝 웃으면서 받아 드신다. 순간 37살의 박사님 같아 보여서 좀 설렜다.

“제가 지금 오버워치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세요?”
“당연히 알죠. 의무실에서 진찰도 하시고, 의무실 옆에 있는 연구실에서 연구도 하시고, 종종 아나 사령관님을 도와서 서류 업무도 하시고요.”
“바쁘게 사네요.”
“지금의 박사님은 안 그래요?”
“비슷하죠. 하지만 뭐랄까, 목표로 하고 있는 연구가 끝나면 그 다음엔 뭘 할지 생각할 때가 있거든요. 그 앞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하고.”
“박사님은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계단 한 계단을 더듬어 올라가는 중인 거예요. 당장 앞은 보이지 않지만 박사님만의 이상이 있잖아요. 거기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중인 거죠. 너무 먼 미래는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밟아 나가세요.”
“…하나 양은 나이답지 않은 말을 하네요.”
“그래요? 박사님 영향인가 봐요.”

요새 박사님 영향을 받아서 책을 읽고 있긴 하지. 게임 9 : 책 1 비율이지만 어쨌든 조금씩 읽고 있긴 하다. 박사님도 내 영향을 받아서 인생을 조금 더 즐기면서 살면 좋겠는데. 문득 내가 박사님의 삶에 조그만 즐거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식사를 끝낸 후, 의무실로 향했다. 박사님은 의무실을 둘러보시곤 별로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하긴, 의무실이 막 변할 일은 별로 없으니까, 뭐.
의무실을 둘러보신 후 연구실로 향하셔서, 나는 그냥 의무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연구 성과를 물어보셔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고, 박사님에게서 차분히 생각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밤을 꼴딱 샜는데도 피곤하지가 않다. 박사님에 대한 걱정 때문일까. 만약 박사님이 이대로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지금의 감정 표현이 풍부한 박사님도 좋지만, 아무래도 나와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해주는 박사님이 더 좋다. 지금은 나랑 가까이 붙기만 해도 흠칫거리고 계시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이 차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27살 박사님의 반응을 보니 37살의 박사님이 나를 받아주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를 거쳤을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당시에는 내가 마냥 힘들기만 해서 몰랐는데 박사님도 많이 힘드셨겠지. 새파랗게 어린 애가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니……. 그래도 한 번도 차갑게 내친 적 없이 따뜻하게 대해주신 걸 보면 박사님은 정말 천사가 따로 없다. 박사님이 돌아오시면 진짜 말 잘 들어야지. 잠은 12시 전에 자고, 아침엔 7시에 일어나고. 군것질도 덜 하고 연습도 땡땡이 안 치고 말썽도 안 부리고… 그리고… 그리고…….

“하나 양?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박사님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박사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었는데도 눈앞이 부예서 왜 그러나 했더니 눈물이 고인 거였다. 박사님이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내 눈물을 닦아주신다. 친절한 태도는 여전하시네…….

사실대로 37살의 박사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면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 같아서 얼른 말을 돌렸다.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박사님, 10년 전에도 되게 인기 많았죠? 엄청 많았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박사님 친절하시잖아요. 예쁘기도 엄청 예쁘고. 능력도 있고.”

내 말에 박사님이 푸스스 웃는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가 앉아있는 의무실 침대 옆자리에 앉으신다.

“별로 인기 없었어요.”
“에이, 거짓말 말아요. 딱 봐도 남자들이 트럭으로 따라다녔겠는데.”
“정말이에요. 음, 사실대로 말하자면 인기는 있었을지 몰라도 딱히 의식한 적은 없네요. 연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거든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게 제 소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지금도 변함없으세요. 한결같은 분이시거든요.”

어찌나 한결같으신지 6개월 동안 이어진 내 고백에 대한 거절의 태도까지 한결같으셨지. 정말정말 미안한 듯 웃으며 거절하는데 진짜 가슴이 새까맣게 타버리는 줄 알았다.

“인기는 저보다 하나 양이 있을 것 같은데요? 혹시 유명한 사람이거나 했어요?”
“어떻게 아세요?”
“연구실 책상 위에 하나 양 사진이랑 포스터가 있길래……. 포스터가 나올 정도면 정말 유명했겠네요. 오버워치 오기 전엔 무슨 일 했어요?”

박사님의 연구실 책상에 내 사진이 있단 말야? 뜻밖의 소리에 기분이 급격히 좋아진다. 내 방 책상에도 박사님 사진이 있긴 하지만, 공과 사가 철저한 박사님의 공적인 공간인 연구실에 내 사진이 있다는 건 의미가 다르다. 기뻐서 웃으며 대답했다.

“육군에 있었어요. 대한민국 육군기동기갑부대요.”
“군대요? 소년병이었단 말이에요?”
“원래는 프로게이머였어요. 최연소. 그러다 국가에서 프로게이머를 상대로 메카 조종사를 모집하기에 자원했죠.”
“무섭지는 않았나요?”
“음- 무섭다기보다는 내가 사는 곳은 내가 지켜야겠단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마침 게임보다 더 짜릿한 걸 찾기도 했고. 아, 그렇다고 마냥 전쟁을 게임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인생에 ‘다시 시작’버튼이 없는 건 알고 있다고요.”

박사님이 염려스러운 표정을 짓길래 얼른 덧붙였다. 그러자 한결 나아진, 그러나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사실 전 하나 양이 지금 나이에도 오버워치에 있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요. 이런 전쟁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10년 후에도 전쟁이 계속되어서 결국 하나 양의 세대까지 전장에 서게 하다니 참 미안하네요.”
“박사님 잘못이 아니에요. 그리고 전 오버워치에 오고 싶어서 온 거예요. 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고 자신해요.”
“어째서요?”
“박사님하고 만났잖아요.”

37살의 박사님에게 하는 말이 아닌데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힐끔 박사님을 보니 박사님도 살짝 빨개진 얼굴로 괜히 의무실 모서리를 보고 계신다. 휴, 뭔가 박사님한테 고백했을 때의 느낌 같아서 좀 그립기도 하고…….

“흐, 흠! 기지 바깥 구경도 좀 시켜줄래요? 바뀐 모습이 궁금하네요.”
“네, 그렇게 해요.”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출하듯 의무실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기지 내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구경을 다녔다. 10년 전에 있던 건물이 사라지고 새 건물이 들어서기도 하고, 그대로 있기도 한 기지는 내가 혼자 돌아다닐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27살의 박사님은 확실히 37살의 박사님보다 감정 표현이 더 많았다. 내가 이야기하면 조용히 집중하며 들어주는 건 똑같았지만, 반응이 약간 달랐다. 안 어울리는 표현이지만 약간 발랄한 것 같기도 하고……. 박사님의 성격이 바뀐 이유는 역시 한 때 오버워치가 해체된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물어보고 싶지만 27살의 박사님은 알 길이 없고, 37살의 박사님에겐 상처일까 봐 물어보고 싶지 않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따로 알아봐야지.

*

기지 구경이 끝났을 무렵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있었다.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박사님은 내가 내 숙소가 아닌 박사님의 숙소 방향으로 같이 가자 의아한 듯이 물었다.

“하나 양도 숙소가 이쪽 방향이에요?”
“아뇨.”
“그럼 왜… 걱정되어서라면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하나 양도 오늘 저랑 돌아다니느라 피곤하잖아요. 가서 쉬어요.”
“아니 그게…….”

사실대로 말하면 작사님이 또 기함할 것 같아 망설이는데 뭔가를 눈치 채신 듯 박사님의 얼굴이 굳는다.

“설마… 설마 내가……. 아니, 그럴 리 없어. 아무리 10년이 흘렀다고 해도 기본이 나인데, 내가 그럴 리가!”

지금까지 중에 가장 격렬한 반응이다. 흡사 절규라도 하듯 외치는 박사님에게서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떨어지고 말았다. 아씨, 놀래라. 갑자기 왜 그러시지?

“왜, 왜 그러세요?”
“하… 하나 양. 설마 제가… 하나 양을…….”

그리고서는 더 이상 말을 못 잇겠는지 입술만 달싹이신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지 알아채서 귀가 확 달아올랐다.

“아, 아직이거든요! 그냥 같이 자는 것뿐이에요! …전 괜찮은데 박사님이 준비가 안 됐다고 해서…….”
“오, 신이시여. 제가 죄를 범하게 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그게 무슨 죄예요?! 몇 번이나 말하지만 저 성인이라니깐요?!”

화가 나서 방방 뛰자 그제야 박사님이 진정하시고 기도를 멈췄다. 지금 이게 환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나 찾던 신을 찾을 정도로 심각한 대목인 거야?! 박사님과 스킨십 진도를 더 빼려면 한참 걸리겠구나……. 뭔가 암울하다.

“에씨, 알았어요. 박사님도 피곤하실 테니까 따로 잘게요. 그럼 됐죠?”
“…고마워요, 하나 양.”
“괜찮다고는 안 하시네.”
“그건 제 양심상 좀…….”

제발 그놈의 양심 좀 갖다 버리라고 하고 싶다.

*

박사님이 먼저, 그 다음에 내 순서로 번갈아서 씻고 나왔을 때는 밤 9시 반이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토요일인 오늘은 정오까지 잠을 자다 느지막이 일어나 밀린 집안일과 청소를 해야 하는데. 에이, 청소는 내일 내가 하지 뭐.
박사님이 내일까지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되려나. 아나 사령관님은 2~3일씩 증상이 계속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 정도는 아니길 빌어야겠다. 위세척도 빨리 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가만, 그럼 지금의 27살 박사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냥 사라지는 건가? 아니면 기억이 남는 걸까?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다. 이왕이면 기억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오늘도 박사님이랑 함께 하루를 보낸 거고, 어떤 박사님이든지 내겐 소중하니까…….

세탁기를 돌리고 거실로 돌아오니 박사님이 소파에 앉아 뭔가를 보고 계셨다. 뭐지? 책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읽으세요?”
“일기요.”
“와, 박사님 일기도 쓰세요?! 전 자기 전에 업무 일지 쓰는 줄 알았는데!”

신이 나서 다가가는데 박사님이 일기를 그대로 들고 읽고 계신다. 봐도 된다는 뜻이려나? 박사님 어깨 위로 고개를 쑥 내밀고 보는데… 독일어다.

“…전 못 읽잖아요.”
“일부러 그러라고 독일어로 쓴 것 같은데요.”
“에이씨… 독일어를 배우던지 해야지, 너무하시네.”

투덜투덜 대자 박사님이 웃는다. 아까보다는 편한 얼굴이라 좀 의아해서 보는데 박사님이 말했다.

“하나 양 이야기가 많이 써져있네요.”
“어디…… 제 이름 하나도 없는데요?”

hana라는 단어를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박사님이 일기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주셨다. …kinder라고 써져있다. 지금 이 사람이 나를 일기에다 애라고 쓴 거야?! 여태 괜히 애 취급 한 게 아니었잖아!
왠지 모를 배신감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떠는데 박사님이 그런 나를 보고 웃으신다. 어이가 없어서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애칭인 모양인데요?”
“애칭이 아이라니, 그게 뭐예요. 토끼라든가 내 사랑이라든가 그런 말 쓸 수 있잖아요.”
“그러게요. 하지만 나쁜 뜻은 아닌 모양이에요. 칭찬이 많이 써져 있네요.”
“정말요? 속 썩인다고 써놓으셨을까봐 걱정했는데.”
“전혀 아니에요. 뭐랄까… 10년 후의 저는 생각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박사님은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37살의 박사님이 웃는 듯한 미소여서 정신없이 보고 말았다. 역시 박사님은 웃는 게 제일 예쁘다. 보고 있으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저 웃음이 오늘 하루 참 그리웠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괜히 눈물이 핑 돌아서 하품하는 척 하고 손가락으로 얼른 닦아냈는데 박사님이 그런 나를 미안한 듯이 보고 있다. 뭐야, 꼭 내 속마음을 읽은 것 같잖아. 분위기가 눅눅해지는 게 싫어서 말머리를 돌렸다.

“저 세탁물 널고 잘 테니까 박사님도 어서 주무세요. 원래대로라면 오늘 해가 하늘 꼭대기에 뜰 때까지 낮잠 주무셔야 했단 말이에요.”
“제가 늦잠을 잔다고요?”
“젊을 때야 어쨌는지 모르지만, 매일 야근에 당직에 바쁘니 몸이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그러니까 어서 주무시러 가세요.”
“하나 양은 어디에서 자게요?”
“거실 소파에서요.”
“불편할 텐데…….”
“괜찮아요. 가끔 소파에서 잤는걸요, 뭐.”
“그래도…….”
“괜찮다니깐요. 주무시러 가세요.”

박사님의 어깨를 꾹꾹 밀어 침실로 집어넣는다. 내일은 내가 저 침실에서 잠들 수 있게 되기를. 하루 종일 박사님하고 있었는데도 새삼 외로운 느낌이다.


세탁기가 동작 완료하는 걸 기다렸다가 세탁물을 널었다. 일상적인 집안일을 하니까 긴장이 풀렸는지 이제 잠이 슬슬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나 어제 한 숨도 못 잤지? 박사님이 어떻게 되실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지만 아무튼 졸린 건 졸린 거다. 밤 11시에 가까워진 시간을 확인하고 소파로 향했다. 불을 끄고 이불 겸 작은 담요를 배 위에 올려놓는다. 박사님이 평소에 배를 덮고 자라고 해서다.
눕자마자 잠이 몰려든다.

“…나 양, 하나 양.”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는데 꿈에서도 잊지 못할 목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무드등이 켜져있었고 박사님이 소파 옆에 서 계신다. 뭐지? 눈을 부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그건 아니고… 침대에서 자요, 하나 양.”
“어… 박사님이 소파에서 주무시게요? 안 돼요, 이 소파 박사님이 주무시기엔 작단 말이에요.”
“같이 자자는 소리예요.”
“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호칭은 아직 ‘하나 양’인데… 지금 내가 꿈을 꾸나? 혹시나 싶어 팔을 꼬집어보니 아프다. 내가 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었는지 박사님이 푸스스 웃으신다.

“소파에서 불편해서 어떻게 자요. 침대 보니까 넓던데, 가서 같이 자게요.”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하나 양이 소파에서 자는 게 더 마음 불편할 것 같아요.”

그 말에 배 위에 올려놓은 담요를 소파 위에 접어놓고 박사님을 따라 침실로 향했다.

약 48시간 만에 보는 침대가 반가워서 울컥했다.
내가 안쪽으로 들어가고 박사님이 바깥쪽에 누웠다. 평소라면 딱 달라붙어서 박사님 품 안에서 잘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아니, 아니지. 소파에서 잘 뻔 한 거 침대에서 자게 해주니까 고마운 줄 모르고 배부른 소리 하는 것 좀 봐.

소파에서는 눕자마자 잠이 쏟아지더니 침대에서는 눈이 말똥말똥하다.

박사님은 정자세로 누워 계신다. 배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천장을 바라보는, 잠자리의 정석과도 같은 자세다. 나와 같이 자기 전까지는 계속 저 자세로 주무셨었다. 하지만 같이 자기 시작한 후부터는 나한테 팔 베게도 해주고 그러셨는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소파에서 침대로 왔으면 감지덕지하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계속 갈증이 난다. 양이라도 세어볼까.
머릿속으로 초원에서 뛰어 노는 수많은 양들을 그리고, 목책을 뛰어넘어 한 마리씩 목장 안으로 집어넣는다. ……. 325마리까지 목장 안에 집어넣었을 때, 갑자기 박사님이 입을 열었다.

“잠이 안 오나요?”
“조금요.”
“저도 그러네요. 오늘 많이 돌아다녀서 피곤할 텐데, 이상하기도 하죠.”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10년 치 기억이 날아간 것만 빼면 오늘 하루 컨디션 좋았어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그 10년 치 기억이 가장 중요해서 문제지. 아니다. 박사님의 컨디션이 좋다는데 그 이상을 바라면 안 되지.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자꾸 조급해진다. 지금 가장 불안한 건 박사님일 텐데. 오늘따라 자꾸 내 스스로가 어리게 느껴진다. 박사님이 보기에도 그렇겠지? 좀 더 박사님에게 어울리는 성숙한 인간이 되고 싶은데 마음대로 잘 안 된다. 어떻게 해야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걸까? 역시 책을 많이 읽어야 하나…….

“무슨 생각해요?”
“박사님 생각이요.”
“…하나 양은 제 생각을 많이 하네요.”
“좋아하는 사람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갑자기 옆자리에서 콜록콜록 소리가 들려 보니 무드등에 비친 박사님의 얼굴이 좀 빨개진 것 같기도 하다. 난 시무룩한 마음에 한 말이라서 별 느낌이 없는데 박사님은 부끄러웠나보다. 27살의 박사님도 귀엽기는 매한가지네.

“하나 양은 제가 왜 좋아요?”
“따뜻하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똑똑하고, 미인이고, 좋은 냄새가 나고, 웃는 게 예쁘고, 안아주는 게 포근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고, 일이 많아 바쁜 와중에도 저랑 놀아주고, 목표를 향해 언제나 똑바로 걸어가고…….”
“그, 그만 말해도 돼요.”
“아직 안 끝났는데…….”
“하나 양이 저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네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그럼 되게 실망인걸요.”
“그건 아니지만… 그냥 한 번 듣고 싶었어요.”
“또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뇨,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아요.”
“네에…….”

더 이야기 했으면 좋겠지만 슬슬 박사님도 주무셔야겠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박사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요, 하나 양.”

그 말을 듣자 놀랍게도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박사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도 좋은 하루가 시작될 수 있기를…….

*

“…나, 하나. 이제 일어나야죠.”
“으으응…….”
“벌써 오후 1시예요. 계속 잘 거예요?”

박사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머리로는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아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48시간 만에 잠을 자서 그런지 잠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자꾸 깊은 잠으로 나를 인도한다.

“하나, 진짜 계속 잘 거예요?”
“아뇨오…….”
“그럼 일어나야죠.”
“네에…….”
“대답은 잘 하는데…….”

박사님이 웃는 듯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꼭 평소 박사님 같네. 나더러 하나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 뭐, ‘하나’라고?
눈이 번쩍 떠졌다. 벌떡 상체를 일으키자 박사님이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신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곧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아, 박사님이다. 37살의 박사님이야!

“박사님……!”

와락 안겨들자 박사님의 몸이 휘청한다. 정말 오랜만에 박사님의 품에 안기는 것 같다. 따뜻한 품을 파고들자 박사님이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는다.

“걱정했어요?”
“당연하죠……! 제가 쓸데없이 버섯 같은 걸 괜히 구워서……. 박사님, 몸 괜찮아요? 기억 다 난 거예요?”
“네, 다 기억났어요.”
“어허엉…….”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박사님은 난처한 얼굴로 내 등을 계속 다독이셨다. 어제 하루 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고생을 제법 했는지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박사님도 별 말 없이 그냥 등만 쓰다듬어 주셨다.

한참을 울고 난 뒤에야 박사님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박사님은 안쓰럽다는 표정을 하고는 손등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신다.

“박사님, 죄송해요. 앞으론 버섯 같은 거 쳐다도 보지 않을게요.”
“버섯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거 주워오지도 않을게요.”
“그래요, 그러면 됐어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하나. 확인 안 하고 먹은 제 잘못도 있는걸요.”

진짜 평소의 박사님이다. 박사님 얼굴만 쳐다보는데도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박사님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선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훑었다.

“이제 그만 울어요, 하나.”
“네에…….”
“씻고 점심 먹으러 가요. 일어날 수 있죠?”
“네.”

고분고분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실로 향한다. 아침부터 울었더니 눈이 좀 부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양치도 하고 나오니 박사님이 외출 준비를 하신다. 참고로 나나 박사님이나 음식은 사먹는 편이다. 1주일에 한 번 집에서 밥 먹자고 요리를 하는 건 너무 귀찮잖아. 식재료도 어중간하게 남고.
앙증맞은 토끼가 그려진 남색 후드티를 걸치고 박사님 옆으로 다가가자 박사님이 살풋 웃으신다.

“박사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하나?”
“혹시 어제 일 기억나세요?”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우느라 질문을 못 했었다. 내 물음에 박사님은 난처한 듯, 혹은 재미있어 하는 듯한 묘한 웃음을 짓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게 궁금해요?”
“네. 어제 27살의 박사님이랑 이야기 많이 했거든요. 돌아다니기도 많이 돌아다니고. 박사님도 기억하고 계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그럼. 그런 걸로 하죠.”
“네?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박사님은 대답 없이 그냥 웃으셨다. 이럴 땐 질문해도 답을 해주지 않으시니 그냥 포기할 수밖에. 분위기로는 왠지 기억하시는 것 같기도 한데 왜 말씀을 안 하시지?

“하나가 더 좋아졌다는 말로 대신 할게요. 그럼 됐죠?”
“네? 그게 무슨…….”
“아침을 걸렀으니 점심은 든든하게 먹어야겠네요. 스테이크 먹으러 갈까요?”
“……네, 고기 썰러 가요.”

알쏭달쏭한 대답을 하는 박사님에게서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손을 꼭 쥐었다. 박사님이 비슷한 세기로 내 손을 잡아주신다. 그래, 이거면 됐다. 왜 답을 안 알려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박사님이 돌아오신 것만으로 나는 만족한다. 27살의 박사님을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박사님과 보낸 어제가 내 안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숙소를 나오자 쨍한 햇볕이 내려쬔다. 밥 먹고 돌아와서 어제 못 다한 청소를 마저 해야지.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될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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