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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소프트 백합 팬픽/피마새] 귀청소

정우(14.58) 2017.09.08 00:23:06
조회 796 추천 14 댓글 4
														

※이영도 아저씨의 '피를 마시는 새' 정우x세레지 팬픽입니다.

※백합이라기에는 너무 소프트한 감이 들지도 몰라요.

※참고로 '이영도 공식 출판 카페' 팬픽 게시판에 올린 인물과 저는 동일인물입니다.




 또각또각, 또각.

 이걸로 몇 번째일까. 집무실의 책상 앞에 앉은 정우 규리하는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시선을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서류에서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세레지 파림에게로 옮겼다. 세레지는 평소 눈치가 매우 빠른 그녀답지 않게 정우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정신이 온통 자신의 귀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 열심히 귀를 쑤시고 있는 세레지를 보고, 정우는 저러다가 세레지의 귀에서 갑자기 온천이라도 터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바보. 물은 아래서 위로 솟아나는 거지, 옆으로 터지는 게 아니잖아.’ 아직 수문의 존재와 그것이 터졌을 때 생길 수 있는 불상사를 모르는 정우는 엉뚱한 생각이나 하는 자신을 책망한 뒤 세레지에게 말을 걸었다.

 “세레지, 귀가 이상해요?”
 “아니요, 규리하공. 그냥, 좀, 이쪽 귀가 먹먹하다고 할까. 답답해서요.”

 인상을 찌푸린 채 열심히 귀를 파고 있던 세레지는 곧 화들짝 놀라면서 귀에서 손가락을 빼내고 정우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문제로 정우가 정무를 돌보는 것을 방해해서 죄송하기 그지없다는 의사표현이었으나, 정우는 세레지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라도 발견했나 싶어서 고개를 숙여서 세레지의 발밑을 살펴보았다. 당연히 먼저 허리를 편 세레지는 정우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어버렸다.

 “아, 지금 웃었죠?”
 “아니요.”
 “웃었어요.”
 “안 웃었어요.”
 “절대로 웃었어요.”

 시치미 뚝 뗀 표정의 세레지와 표로통한 표정의 정우가 열 살 전후 어린애들 수준의 말싸움을 이어간다. 두 사람의 지위의 차이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몇 가지 일반적으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요소가 작용해서 정우와 세레지의 사이는 일반적인 상하 관계의 틀을 벗어나고 있다.

 그 첫 번째 요소이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서 정우가 도깨비들 사이에서 자라났다는 점이 있다. 즈믄누리의 유일한 권력자라 부를 수 있는 바우 머리돌 성주가 무사장이나 그 외 도깨비들을 상대로 어떻게 하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요소이리라. 인간들처럼 하라면 비유가 아닌 정말로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 도깨비들 사이에서 다 큰 처녀로 성장한 정우는 아랫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우 머리돌을 쏙 빼닮았다. 즉, 자신의 지위에 맞는 위엄을 챙길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요소로는 세레지 파림이라는 여성의 성격이다. 세레지는 비록 아버지가 제국군의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북부가 아닌 남부의 도시에서 자라났다는 점. 그것도 특수한 사정을 지닌 시모그라쥬의 도시에 난립한 가건물과 복잡한 거리를 뛰어다니며 성장한 세레지는 인간사회의 상하관계라는 것을 불편하게 느낀다. 물론 그녀가 모시는 사람이 정우가 아니었다면 세레지도 열심히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려고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래, 모시는 사람이 정우만 아니었다면.

 일반적인 사회의 상하 관계라는 개념 자체가 결여되어 있는 정우와, 그러한 개념을 알고는 있어도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세레지가 주종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관계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웃었다니까요! 정말, 세레지까지 시카트처럼 괴롭힐 거예요? 시카트는 동생이니까 그렇다 쳐도, 세레지는 생판 남이면서….”

 정우의 말끝이 흐려진 것은 세레지가 갑자기 매우 진지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자리에 이례나 야리키가 있었다면 ‘아, 또 시작됐군.’ 하고 한숨을 내쉬었겠지만 정우에게는 세레지에 대한 내성이 전무하기에, 세레지의 진지한 표정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으로 무슨 말이 나오나 기다려 버린다. 먹잇감이 미끼를 완전히 물어버린 것을 확인한 세레지는 입을 열었다.

 “듣고 놀라지 마세요, 규리하공. 사실…나는 규리하공의, 아니, 언니의 동생이야!”

 세레지의 폭탄발언에 정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아빠나 동생들한테 여자 형제가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요?”

 걸렸구나. 마음속으로는 메롱 혀를 내밀면서 겉으로는 서글픈 표정을 지은 세레지가 말을 이어간다.

 “거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어, 언니. 언니가 즈믄누리에 가버리고 나서 외로워진 나는 참지 못하고 언니를 찾아서 규리하를 뛰쳐나와 버렸어. 오직 언니를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산 넘고 물 건너 비바람을 헤치던 나는 방향을 잘못 들어서 남부를 헤매고 있었지. 그러다가 만난 것이 위체 파림 씨야. 당시 봉사였던 위체 파림 씨는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굶주리고 지친 나를 성의껏 돌보아 주었고, 나는 기운을 차릴 수 있었지. 어떻게든 그 은혜를 값을 수 없을까 알아보던 나는 한 스님으로부터 공양미 삼백석을 약속받고 판사이 호수에 몸을 던졌는데, 세상에나 호수의 용왕님을 만나게 되었지 뭐야. 용왕님은 내 사정을 듣고는 딱하다고 여기시고는 토끼의 간을 가져오면 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는데….”

 물론 세레지의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 이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도깨비의 영혼을 가진 정우에게 있어서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재미있으면 장땡인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세레지의 이야기를 경청한 정우는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 없이 들은 만족감에 잠겨 있는 정우를 보며 세레지는 쿡쿡 웃었다. 어느덧 자신이 정우의 동생이니 하는 이야기는 어쨌든 좋은 일로서 지나갔다.

 하지만, 정우의 동생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천성이 이야기꾼인 세레지에게 있어서 정우만한 청자는 찾기 힘들다. 이렇게 순진한 언니가 있으면 평생 놀려먹는 재미가 참 쏠쏠할 텐데.

 “아! 맞아. 그러고 보니까 세레지, 귀가 답답하다고 했지요?”

 손뼉을 짝 치면서 정우가 묻자, 세레지는 그때서야 아직도 한쪽 귀가 답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흥에 겨워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즐거운 시간이 지나가고 난니 다시금 귀찮은 일이 찾아온다. 네, 라는 세레지의 대답을 들었는지 어떤지 정우는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심히 뒤지더니, 이윽고 작은 막대기를 하나 꺼내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방 한쪽에 놓여진 기다란 의자에 가서 한쪽 구석에 앉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세레지.”
 “네?”
 “빨리요, 빨리.”

 세레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정우가 앉은 의자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온 세레지를 보고, 생긋 미소지은 정우가 다소곳이 모아있는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친다.

 “누우세요.”

 뭐라고요?

 너무도 당황스러워서 세레지는 자신의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는 멀뚱히 서있기만 한다. 그런 세레지를 보고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정우가 한 손에 들고 있는 막대기를 들면서 설명한다.

 “이거, 호랑이 뼈로 만든 귀이개에요. 아, 이거 골케 남작님이 보내준 선물이거든요? 이상하죠, 제 생일은커녕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아스캄에서 사람이 왔다면서, 뭐라고 했더라? 무슨 감사의 선물이라고 했었는데…제가 뭘 했던가요? 남작님의 성을 묻어버린 것에 대한 감사, 는 아닐 것 같고. 다시 파낸 것에 대한 감사라면 레콘 여러분께 해야 하는걸 텐데. 으~음? 레콘 여러분께 전해달라는 소리는 못 들었고, 애당초 레콘이 사용하기에는 크기가….”

 아아, 정말 이 사람은.

 큭큭 웃은 세레지는 점차 미궁에 빠져드는 정우를 구원해주기로 했다. 영차, 하고 의자에 올라간 세레지가 옆으로 눕는다. 정우의 의도는 파악한 뒤였기 때문에, 오늘 이때까지 쭉 이물질이 낀 느낌이던 귀가 위를 향하도록. 의자는 충분히 길어서 세레지가 무릎을 살짝 굽혀도 공간이 조금 남았다.

 “아, 그러면 시작할게요.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네. 잘 부탁드릴게요, 규리하공.”

 햇살이 비추는 창 밖에서 새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흥, 흐흥 하고 콧노래를 부르는 정우와 그녀의 세심하니 귀를 파주는 손길의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정우의 허벅지의 느낌이 세레지로 하여금 참을 수 없이 평화로운 감정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규리하공의 허벅지는 무척이나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다. 어쩜 이렇게 피부가 부드럽고 예쁠 수 있을까. 세레지도 다리는 쭉 하고 잘 빠진 체형이지만, 그녀의 다리 같은 경우는 부드러움 대신 단단함이 있다. 여자의 몸으로 성인 장정을 두엇 제압할 수 있는 비각술의 고수답게 세레지의 다리는 튼실한 근육으로 가득하다.

 비각술 고수의 경지에 올랐다는 증거로서 지금껏 자랑스러우면 자랑스럽지,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자신의 다리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우의 다리가 부럽게 느껴졌다. 여자에게는 민감한 문제인 만큼 자칫 서글픈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행복하다는 마음으로 가슴이 가득하다. 정우의 세심하고 상냥한 손길. 때때로 자신의 귀를 어루만지는 정우의 손길이 기분 좋다.

 딱히 요즘 피곤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말 불가사의하게, 세레지는 밀려오는 졸음에 급습 당했다. ‘잠들면 안 되는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세레지가 잠들어 버리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세레지?”

 기분 좋아.

 “잠들었어요?”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아보는 것이 얼마만일까.

 아버지가 제국군을 위해 정보를 모으는 일이 그저 동네 사람들 소문이나 주워 담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 수는 없었다. 이레를 만나고 북쪽으로 올라오는 길에서도, 그리고 규리하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 번도 마음 편하니 잠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세레지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지금껏 맛본 적 없는 충실함이 있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는 것으로 충실함을 느낄 수 있다니, 지금까지 몰랐다. 얼마나 손해 보는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충실함도, 세레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일어났어요?”
 “규리하공.”
 “조금 더 이대로 있어도 돼요.”

 일어나려는 듯이 몸을 뒤척이는 세레지를 만류하듯이, 정우의 두 손이 상냥하게 세레지의 머리를 잡는다. 억누르는 힘은 전혀 없다시피 했지만 보이지 않는 상냥함이 세레지로 하여금 그 손길을 거부할 기력을 빼앗는다.

 “우리 세레지. 언니 말도 잘 듣고, 착하네.”

 풉. 아하하, 정말이지, 이 사람은.

 석양이 집무실을 붉게 물들일 때 까지, 두 사람은 쭉 그렇게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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