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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카논] 그저, 친구.

NiTR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3.24 01:54:38
조회 1120 추천 2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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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밝은 것과 동시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직 2학년이라는 생각에 낙관적으로 살아왔지만, 올해는 학기 초부터 모두들 어딘가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느낌입니다. 수험생이란 건 다들 이런 걸까요……. 나날이 변화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지만, 조금만 더 천천히 변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이런 부정적인 변화만 있는 게 아니라 즐거운 변화도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걸즈 밴드 파티때 같이 공연했던 로젤리아의 사요쨩과 린코쨩이 같은 반이 된 것입니다.


학생회장이 된 린코쨩과, 그녀의 옆에서 아직 미숙한 그녀를 보조해주는 사요쨩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엄해 보이는 인상 덕분에 자주 오해를 사곤 하지만, 사실 사요쨩은 무척 친절한 사람입니다. 다들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게 정말로 안타까울 만큼,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줍니다. 그리고 말수가 적은 린코쨩도 행동 하나하나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있다는게 잘 나타나는 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올해도 치사토쨩과 같은 반입니다! 올 한해도 무척 행복한 1년이 될 것 같아 무척 기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걸즈밴드파티 하나사키가와 2학년 중 아야쨩 혼자만 다른 반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야쨩, 힘내!


신학기를 맞아 이런저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무렵, 치사토쨩이 불쑥 카페에 가자고 해 저희는 지금 세 역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와 있습니다. 홍차 블렌드가 무척 좋다는 정보를 들었기에 무척 기대하는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치사토쨩과 함께하는 티타임도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배우이자 아이돌인 치사토쨩은 정말 바쁩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바쁜 새해를 지나 잠시 잠잠해졌던 치사토쨩의 활동도 봄을 맞이해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그리고 오프인 날도 저와 시간이 맞지 않은 날이 많아 이렇게 같이 카페에 온 건 거의 한 달 만이네요.


그런 이야기를 하며 홍차와 케이크를 먹으며 잠시 환담하던 치사토쨩은, 가게 안이 조용해지자 작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저기, 그…… 카논? 할 말이 있는데…….”

“응 왜 그래, 치사토쨩?”


평소답지 않게 잔뜩 더듬는 그 모습에 걱정이 앞섰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저와 눈이 마주쳐도 치사토쨩은 평소처럼 환하게 웃어주기는커녕 흐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일 뿐이었습니다.


“치사토쨩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야?”

“아니! 일이라기보단 그, 저…….”


잠시 심호흡을 한 치사토쨩은 미지근해진 찻잔을 단숨에 비웠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계속 머뭇거리기만 할 뿐, 괜스레 가늘고 섬세한 손길로 텅 빈 찻잔만 쓰다듬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수심이 가득한 그윽한 표정. 하지만 그 모습도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만 같아서 저는 멍하니 그녀의 모습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아무런 대화 없이 서로의 작은 숨소리만 들리는 테이블 위에서, 치사토쨩은 오후의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제 시선을 눈치챘는지 살짝 볼을 붉게 물들인 치사토쨩.


그녀는 결심한 듯 자세를 다잡으며 가볍게 다시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사실은 좀 더 빨리 말하고 싶었는데, 학교에서 말하긴 좀 그래서.”

“응. 뭔데?”

“……나 오늘 타에쨩에게 고백받았어.”

“어?”


치사토쨩이 지금 뭐라고 말한거죠? 타에쨩한테 고백?

손에서 힘이 빠지며 찻잔이 받침 위로 떨어졌습니다. 빙글빙글 도는 시야 속에서 치사토쨩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절 바라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아, 치사토쨩이 걱정하지 않게 밝은 표정으로 맞아주어야 하는데…….

의자에 몸을 깊숙히 누이며 당황한 제 귀에 치사토쨩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와 닿았습니다.


“……카논은.”

“응?”

“카논은, 어떻게 생각해?”

“나, 난…….”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답했습니다.


“……응원할게.”

“정말로?”


날카로운 초침 소리만이 가게 안을 울려펴졌습니다. 침묵 속에서 치사토쨩이 다시 말문을 열었습니다.


“……카논.”

“…….”


치사토쨩의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니, 어두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든 치사토쨩은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울 듯 하면서도 화가 난 것 같은, 처음 보는 표정. 하지만 무척 차가운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습니다.


“친구니까?”

“……응.”


간신히 제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무척 작았습니다.


치사토쨩과 전 친구……. 중학교 처음 만난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친구.

처음엔 그 단어가 좋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경외 섞인 시선을 받곤 하지만, 사실은 무척 친절하고 저를 잘 챙겨주는 친구.

항상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저까지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지으며,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긍정해주는 좋은 친구.

그리고 작년엔 같이 커플링까지 맞춘 소중한 친구.



……하지만 그저, 친구.


“정말 대단해.”


저도 모르게 감탄이 새어 나왔습니다.


“…….”

타에쨩. 정말 대단하네.


제 두서없는 말에도 치사토쨩은 별 말 없이 제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저와 비슷한, 하지만 약간 붉은 기가 감도는 보라색의 눈동자엔 제 얼굴이 흐리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그녀의 시선에 전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래를 보자 새하얗게 힘이 들어간 손에 원피스가 말려 잔뜩 구겨져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친구라는 단어가 커다란 벽이 되어 있었던 건. 아마도 그녀와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고 기억합니다.

항상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하던 전 치사토쨩의 곁에서 그녀를 지탱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묵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처럼 미래를 꿈꾸며 같이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겐 한걸음 뻗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제 실수로 치사토쨩에게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를 없애고 싶지 않았습니다.

연예인으로서의 입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치사토쨩의 커리어에 해를 끼칠 순 없었습니다.

아아, 적어도 치사토쨩과 저, 둘 중 하나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평범하게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이런 생각에 치사토쨩도 절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갔습니다. 그저 흘러갔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도망치는 절 치사토쨩은 끈기 있게 기다려줬습니다. 그리고 전 그런 그녀를 내내 저버렸습니다.


타에쨩은 얼마나 큰 용기를 냈을까요? 여성끼리라는 벽을,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는 벽을 뛰어넘을 용기를 내다니요. 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손조차도 뻗지 못하던 저와는 정말 다른, 강한 아이입니다.


“정말 눈부셔.”

“그것 뿐 이야?”

“…….”


만약 제가 여기서 제 마음을 밝혀봤자 그건 타에쨩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갈 뿐인 비겁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습니다.

창 밖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왠지 모르게 흘러내리려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볼 위를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방울을 막는 덴 역부족이었습니다.


멍해진 귀에 의자가 드르륵 밀리는 소리가 들려 황급히 눈을 떴지만 치사토쨩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직 찬 초봄의 바람만이 제 뺨에 와 닿았습니다.




-----------------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날씨가 좋았기에 모두와 함께 정원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아니, 모두는 아닙니다. 빈자리가 하나. 저 멀리에 크림색의 머리카락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로 보이는 그 머리카락은 마치 봄의 전령 같아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정원은 어제와 같이 봄의 꽃님들이 한가득 펴 있었습니다. 간간히 부는 기분 좋은 봄바람은 꽃향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고, 주변은 온통 웃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리사쨩이 무언가를 말하자 린코쨩이 작게 웃었습니다.

아야쨩이 음식을 옷 위에 떨어뜨리자 사요쨩이 익숙한 손길로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습니다.


어느덧 익숙해진 풍경.

시간은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흘러가며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계절이 흐르고, 학년이 바뀌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결코 빠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기에 그렇게 느꼈을 뿐입니다.


다시 바람이 불었습니다. 흩어지는 꽃잎 사이로 눈물 한 방울이 섞여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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