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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길어요) 백합 판소 올리면 보나요??

ㅇㅇ(122.47) 2019.05.03 01:05:55
조회 930 추천 35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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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이지만 판소 색채도 강한 그런 글이에요


1만 5천자라 상당히 길어요 (25쪽 정도 분량)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연재 중인 건 아니고 방금 스토리 구상하고 막 써서 올리는 따끈따끈한 글이에요


혹시 보는 중에 오타나 이상한 문장 보이면 내일 확인하고 수정할게요. 올리고 자러 갈 거라.


작품 제목은 임시로 정해둔 건데 "검은 달과 금빛 태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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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예리아는 지하 감옥의 독방 구석진 곳에 우두커니 앉아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으레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을 때 품는 감정과는 사뭇 달랐다. 분노도 아니었고 두려움도 아니었으며 증오나 원망도 아니었다. 그녀가 무릎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순수하게 슬퍼서였다.


 라예리아는 영리한 아이다. 과거에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렇다. 이제 17살이 된 그녀를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어의 정의로는 잘못 되었을지 모르나, 그럼에도 주변에선 라예리아를 아이로 대했다. 마치 언제까지나 그럴 것처럼.


 그녀는 영리했지만 순진했다. 좋은 쪽으로 말하자면 착한 것이었고, 나쁜 쪽으로 말하자면 세상 물정을 몰랐다.


 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말이다. 혹자는 인간이 선하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쉴 새 없이 악행을 저지르며, 그것이 현재에 이르러서도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라예리아는 그 혹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주변에서 벌어진 많은 악행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선하다는 사실을 불과 얼마 전까지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 건 어쩌면 그 대가였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그렇다. 모른다였다. 이 순간에 이르러서까지도, 여동생에 의해 죄인으로 전락하여 감옥에 갇히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까지도 그녀는 인간의 본질이 악함에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틀렸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고집도, 아집도, 고지식함도 아니었으며 단지 신실함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슬펐다. 왜 이런 잘못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라예리아는 소리를 죽여 울었다. 역적들만이 갇히는, 그러나 더는 처형할 사람도 남아있지 않아 그녀가 있는 방 외엔 텅 비어버린 공동에서조차 소리를 죽여 울었다.


 불현듯 계단의 저편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곧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느릿하고 큰 발소리였다. 라예리아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곧이어 나타난 사람은 흰머리와 검은머리가 섞여 희끗희끗하고 탈모가 온 덩치가 큰 사내였다. 무장을 한 상태였고 두 자루의 검을 각각 허리와 등에 차고 있었다. 하나는 그의 키만큼 컸으며 다른 하나는 비교적 작았다. 몸집에 비하자면 단도 같은 크기로 느껴졌으나, 다른 사람이 들으면 충분히 장검이라 부를 만한 길이였다.


 그는 살벌해 보이는 분위기와는 달리 인상이 매우 선했다. 라예리아가 알고 있는 한 실제로 성격 또한 그랬다. 그러나 믿음이란 쉽게 배신당하는 것이란 사실을, 그녀는 얼마 전에 뼈저리게 경험했다.


 “윌라 경.”


 그를 경이라고 부르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 그렇게 부르곤 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러지 않게 되었었다. 그녀가 무례해져서가 아니라, 윌라 경은 실제로 경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때 장군의 자리에 올랐지만 아주 잠깐이었으며 얼마 못 가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 이후론 쭉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경이란 표현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그는 복직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실력에 응당 걸맞은 자리였지만, 그럼에도 반발이 일 만큼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동생이 보내서 왔나요? 날 데려오라고 하던가요?”


 라예리아는 희망과 의심이 각각 절반 뒤섞인 무엇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애처롭게 물었다. 그러나 윌라 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날 처형하라고 시켰나요?”


 희망이 깨져버린 라예리아는 나머지 절반의 의심을 떨리는 목소리로 입 밖에 내었다. 사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수순이었다. 그녀는 합리성을 증오하지만 그랬다. 실권을 손에 쥔 동생에게 있어서 이제 남은 단 한 가지의 걱정거리는 친언니였으니까.


 죽은 왕의 두 후계자 중 한 명이자 제 1 공주인 라예리아가 죽어야만 권력 계승이 완벽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왕위란 그랬다. 하나의 무리에 두 명의 우두머리 사자가 있을 순 없다.


 윌라 경은 말없이 라예리아를 내려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머리숱이 다소 부족한 이마를 장갑을 낀 두툼한 검지로 긁적였다. 그리곤 천천히 말을 했다.


 “저는 공주님을 구해주러 이곳에 왔습니다. 용사는 아니지만요. 음... 제 모자란 어휘력이 오늘따라 저주스럽군요.”


 그는 벨트에 찬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자물쇠를 풀고 쇠창살을 열었다. 옆으로 비켜서며 나와도 된다고 손짓했지만 라예리아는 그 자리에 앉은 채 윌라를 빤히 올려봤다.


 “왜죠?”


 아무리 순진한 그녀라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동생의 최측근이자 장군인 그가 자신을 도와줄 이유는 없었기에.


 윌라 경은 어리숙하게 말을 골랐다. 기사나 장군답지 않게 그는 글도 몇 문장을 겨우겨우 쓰는 사람이었다. 본래 무인들은 그쪽이 더 자연스러울 테지만, 이 나라는 긴 시간 동안 작은 분쟁 외에는 평화가 유지되면서 검을 찬 시인이나 허세꾼들이 너무 많아졌다. 많아지다 보니 그쪽이 자연스러워졌고, 검만 휘두를 줄 아는 자는 경박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제 주변의 사람들을 살리는 게 제 일입니다. 공주님도 그렇죠. 선왕께서는 살아생전 제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 간에 가장 먼저 두 분을 지키라고요. 제가 보기에 제니아 님은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라예리아 님께서는 필요하시죠. 그래서 공주님께 온 겁니다.”


 라예리아는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당신은 장군이에요.”


 윌라 경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가 그런 거에 목맸다면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겁니다.”


 윌라 경은 갑옷 안쪽에서 해진 망토를 꺼내 라예리아의 앞에 놓으면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얼른 이걸 걸치십시오. 병사들을 물렸지만 얼마 안 가 돌아올 겁니다. 이 틈을 이용해 어서 나가야 합니다.”


 라예리아는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도망쳐봤자 붙잡힐 거예요. 내가 붙잡히면 윌라 경도 처형당해요. 또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죠. 동생은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고, 난 차마 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없어요. 보고 싶지 않아요.”


 라예리아가 거부하자 윌라 경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이내 말했다.


 “무례하다면 사과드리겠지만 공주님, 이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이건 의무에 관한 얘기입니다. 저는 선왕을 받드는 사람입니다. 선과 악, 정치와 권모술수, 탐욕, 그 모든 것을 떠나 저의 명예를 위해 일합니다. 저는 저의 본분을 다하려는 것이고 그것은 공주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에겐 이 나라를 위해 일할 의무가 존재합니다. 그 방향성이 옳은지 틀린지는 제가 감히 판단할 수 없겠죠. 하지만 살아있는 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만은 분명히 옳다고 할 수 있겠죠. 고로 여기에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길이 열렸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의무를 진 자가 멈춰 설 수 있는 건 의무를 다했거나, 죽었을 때뿐이니까요.”


 라예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윌라가 손을 내밀었다. 라예리아는 결국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리곤 망토를 주워 단숨에 걸쳤다.


 “그럼 가요.”


 라예리아의 눈동자에 미약한 의지가 되살아난 걸 본 윌라 경은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앞장서서 감옥을 나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과거, 10년 전-



 

 마차가 덜컹거렸다. 두 소녀가 벨벳 방석이 깔린 좌석에 앉아 있었다. 한 소녀는 창문의 턱에 두 팔과 턱을 기댄 채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봤고 한 소녀는 두꺼운 책을 무릎으로 부축해 양손으로 들고 읽고 있었다.


 “제니.”


 언니가 이름을 부르자 제니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품을 하곤 따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언니.”

 “시녀들한테 너무 못 되게 굴지 마. 그 사람들도 나나 너와 같은 귀족이야.”


 라예리아가 책장을 넘기면서 말했다. 제니는 다시 창밖을 쳐다봤다. 그리곤 심술이 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걔네들이 나한테 더러운 옷을 줬어요.”

 “실수였겠지.”

 “아니에요!”


 제니는 화가 나 소리쳤다. 라예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말없이 주의를 주자 제니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몇 번이고 그랬다고요. 주의를 줬는데도 매번 그러면 그건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가요?”

 “네 시녀가 몇 명이지?”

 “몰라요. 그게... 많아서 못 외웠어요.”


 제니가 의기소침해 변명하듯 중얼거리자 라예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책을 덮고 일어나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서 옆자리로 온 뒤에 바싹 붙어서 앉았다. 그리곤 여동생의 손을 살포시 붙잡고 말했다.


 “네 시중을 드는 사람은 한 사람은 아닐 거야. 그렇지? 그들은 맡은 일이 자주 달라지고 널 대하는 사람들도 수시로 바뀌어. 그게 네가 그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일 테고. 그렇지? 그러니 네가 여러 번 말했다고 생각해도 시녀들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거야. 네가 그들을 배려해 주렴. 너는 그럴 수 있는 위치니까. 네가 그들을 다루는 입장이잖아?”


 라예리아는 제니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녀를 살며시 품에 끌어당겼다. 제니는 라예리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대답했다.


 “예, 언니...”



 라예리아, 제니아, 그리고 둘의 어머니 아만다까지. 셋은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 속의 숲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발단이 된 일은 며칠 전 밤에 잠들기 전까지 동화책을 읽어 주며 잠자리를 지키던 어머니에게 라예리아가 밖에 나가 보고 싶단 말을 꺼낸 것이었다. 마침 그녀의 방 창문 밖으론 산이 보였고 라예리아는 그 말을 한 뒤 한참 동안 창문 밖을 바라봤다.


 아만다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러자고 말했고 라예리아는 순진하게 기뻐했지만 그게 설마 이 정도의 대규모적인 일이 될지는 몰랐다. 아직 어린 그녀는 공국의 제 1 후계자가 어떤 위치인지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고, 많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금으로 된 휘황찬란한 마차를 눈앞에 뒀을 땐 다 접고 돌아가고 싶단 생각까지 했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어머님이 자신을 위해 신경 써 준 일이란 걸 알아서였다.


 라예리아는 제니를 불러 같이 가자고 제안했고 원래는 두 사람이서 가기로 했던 계획은 한 사람이 편승해 셋이 되었다. 라예리아는 제니가 어머니를 무서워해 같이 있으면 미묘한 분위기가 된다는 걸 알았기에 어머니에게 둘이서 있고 싶다고 부탁했다. 자리가 남는 마차는 얼마든지 있었기에 아만다는 흔쾌히 그러기로 했다.


 라예리아가 숲으로 향하는 동안 마차 안에서 제니에게 시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주의를 준 이유는 시녀들이 그녀에게 부탁해서였다.


 라예리아는 성 내의 시녀들보다 아직 한참 어렸지만 그럼에도 문제가 생기면 시녀들은 종종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러 오곤 했다. 라예리아는 나이에 비해 아는 것이 많고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알아내는 데에 무척 능숙했다. 그녀가 해준 조언들은 어른들 사이에서도 무척 유용했으며, 시녀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를 왕족으로 떠받들었다.


 최근에 한 시녀가 걱정거릴 말했고, 그건 제 2 후계자이자 라예리아의 여동생인 제니아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제니아가 시녀들에게 종종 난폭한 행동이나 발언을 한다는 건 라예리아 또한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럼에도 방관한 것은 제니아가 결코 나쁜 의도로 그러진 않았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는 한, 제니아 이브노아는 겁이 많은 소녀였다. 그녀가 봐온 사람들 중에선 가장 그러한 경향이 클 정도로, 겁이 많고 내성적이며 소극적이기까지 한 안쓰러운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화를 낸다면 오히려 그건 용기를 낸 거라고 봐야 했다. 라예리아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끼어들기 이전에 원인을 알고자 했다.


 기회를 기다리던 중에 시녀가 고민 상담을 해왔고, 그래서 마차 안에서 얘길 꺼냈던 것이다. 라예리아는 여동생의 말을 듣곤 마음이 놓였다.


 그것으로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거라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라예리아는 문제를 바로잡는 데에 있어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답을 듣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문제에 있어 어느 한 사람이 원인이라면 그 사람에게 일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시켜 나가게끔 의지를 부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여겼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서로가 해결에 힘쓰게 되고, 어느 한쪽만 불리하거나 내몰리거나 혹은 손해 보는 일 없이 최선의 결과에 다다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언제부터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라예리아도 몰랐다. 그러한 재능은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쥐어졌다. 물론 그녀는 그 점을 꺼려했다. 그녀의 재능과 위치와는 정반대로 라예리아는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통솔하는 행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마차가 도착해 멈춰선 뒤 라예리아는 제니의 손을 붙잡고 내렸다. 시녀들이 곧바로 옆에 따라붙어 드레스 자락이 흙바닥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들어 주었다.


 제니아는 말없이 걸었다. 뒤쪽 마차에서 아만다가 내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라예리아는 붙잡은 손에 힘이 가해지는 걸 느꼈다. 동시에 떨림도 느껴졌다. 제니아는 어째서인지 어머니를 무서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동생에게 있어선 양어머니였다. 제니아는 서녀였다. 불과 몇 달 전에 성에 들어온.


 “네 말대로 바깥에 나오니 좋구나. 꽉 조인 코르셋의 실을 한 겹 푼 기분이야.”


 아만다가 한손으로 양산을 든 채 라예리아에게 말했다. 그녀는 성큼 다가와 두 사람에게도 그늘을 마련해 주었다. 정확힌 라예리아에게 그랬다. 라예리아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렸고, 왠지 슬퍼졌다. 그러나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도 입고 있으시잖아요.”


 라예리아가 웃으면서 농담 삼아 말했다. 아만다는 “그렇구나.” 하고 대답하곤 근처를 둘러봤다. 그리곤 먼 곳의 언덕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가 좋겠구나. 저기에 쉴 자리를 마련해야겠어. 나무 그늘도 있고, 풀을 조금 베면 불을 피우기에도 적당하고.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숲을 둘러보는 게 어떠니? 너무 깊게 들어가진 말고, 호위도 대동하는 게 좋겠구나. 이 숲은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히 안전한 건 아니니까. 부담스럽다면 몇 명만 데려가렴.”

 “예 어머니.”


 라예리아가 대답했다. 그리곤 살며시 붙잡은 손을 옆으로 움직여 여동생의 무릎을 가볍게 쳤다. 너도 대답하란 의미였다. 그제야 제니도 입을 열었다.


 “...예, 어머니.”


 제니는 땅을 보면서 말했다. 아만다가 제니에게 다가와 그녀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곤 타인의 딸을 똑바로 내려 보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가웠다.


 “말할 땐 그 사람을 똑바로 봐야 한단다. 그게 예의인 거야.”


 제니아의 눈동자에 아만다의 모습이 비춰졌다. 내리 쬐는 태양만큼이나 선명한 금발, 푸른 벽안, 가느다란 턱선, 화사한 피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제니아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낯설고 또 어딘지 모르게 무서웠다.


 제니아의 머리카락은 그녀와는 대비되게 흑색이었다. 그건 라예리아에게도 적용되는 얘기였다. 라예리아 또한 금발이었다. 시녀들은 금발, 혹은 갈색의 머리카락이었고 제니아처럼 순수하게 흑발인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병사들 중 몇몇이 그럴 것이나 투구를 쓰고 있어 또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한 대비가 소리 없이, 그러나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아만다는 제니의 턱을 잡은 손을 천천히 들어 그녀의 볼가에 닿게 했다. 달아오른 듯 붉은 뺨을 천천히 부드럽게 그리고 상냥하게 매만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여운 것.”


 그녀는 제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옆으로 돌아봐 라예리아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곤 두 사람을 내려 보며 말했다.


 “잘 놀다 오렴.”




 “이 숲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곳이래.”


 라예리아가 제니의 손을 붙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으면서 말했다. 그 뒤로 시녀 두 명과 호위병 넷이 따랐다. 시녀들은 이따금씩 둘을 보면서 무언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럴 때마다 제니는 그쪽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라예리아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책에서 읽었는데 선조들께서도 이 숲을 보곤 이 근처에 성을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나 봐.”

 “왕께서요?”


 제니아가 물었다. 라예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공국에는 왕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이브노아 공국 말이야. 물론 아버님께서는 전하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만 실제론 왕인 건 아냐.”

 “하지만 아빠, 아니... 아버님은 공왕이시잖아요?”

 “공국의 왕이란 의미지. 그건 사실 그리 좋은 의미가 아냐. 풀어서 말하자면 작은 왕이라는 의미거든. 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공왕이라는 호칭이 생긴 건 최근의 일이야. 원래는 그런 호칭을 쓸 수 없었는데 바뀌었거든. 정확힌 페르상투스의 왕이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면서부터.”

 “페르상투스...?”

 “이브노아 공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제국이야. 제국이란 건... 말하자면 엄청 큰 나라라고 할까. 이브노아 공국은 페르상투스 제국을 섬겨. 그렇기에 아버님은 왕이지만 더 큰 왕의 신하이기도 한 거지.”

 “그렇구나... 언니는 정말 많은 걸 알고 있네요.”


 제니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라예리아는 쑥스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평소엔 늘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시간을 보내니까. 너도 점점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거야. 난 성 밖의 세상이 실제론 어떤지 잘 모르지만 궁정 도서관에는 단지 읽는 것만으로도 한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책들이 있거든.”

 “하지만... 저는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라요.”


 제니아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여나 누가 들을까 라예리아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라예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이제부터 알아 가면 돼.”

 “내가 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걸.”


 제니는 그제야 안심한 듯 표정을 풀었다. 뒤쪽에서 시녀들이 수군거렸다. 제니는 그쪽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별 말 아닐 거야.”


 라예리아가 말했다. 제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붙잡은 손을 꽉 쥐면서 말했다.


 “난 언니처럼 되고 싶어요.”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라예리아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다.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라예리아는 제니를 돌아봤다. 갑자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곁에 있는 여동생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너는 그래선 안 돼.”

 “...왜요?”

 “난... 나보다 더 나은 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럴 수 있을까요...?”


 제니의 물음에 라예리아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뭘 하면서 놀까? 정작 밖에 나오니까 뭘 해야 될지 모르겠어.”


 라예리아가 제니에게 돌아보며 물었다. “넌 다른 곳에서 지낼 때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 제니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을 했다.


 “술래잡기요.”

 “술래잡기? 그게 뭔데?”

 “한 사람이 기다리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숨고, 기다렸던 사람들이 숨은 사람들을 찾으러 다니는 거예요. 모두 찾으면 그 사람의 승리인 거고, 아니면 전원의 승리에요.”

 “재밌어 보이네. 근데 우린 둘인데 할 수 있을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럼 하자. 네가 술래 할래?”

 “숨는 쪽 할래요. 숲을 더 돌아보고 싶거든요.”

 “그래. 얼마나 기다리면 돼?”

 “100초 세면 돼요. 눈은 가리고 있어야 해요.”

 “알았어. 참, 너무 멀리 가진 마.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네.”


 그렇게 둘은 숲 속에서 술래잡기를 하게 되었다.




 제니아는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 숲 속을 걸었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점점 생각에 빠져들었다.


 불과 얼마 전에 엄마와 이런 숲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엄마와. 여기보다는 나무가 훨씬 적고 있는 것들도 대부분 나무꾼들이 베어가 그루터기만 남아있었지만 느낌만은 비슷했다.


 엄마는 손재주가 좋았다. 풀잎으로 피리를 엮었는데 입에다 대고 불면 신기한 소리가 났다. 제니는 그 피리가 좋았다. 진짜 피리보단 볼품없고 음색도 좋지 않았지만 그저 좋았다. 아무런 의미부여가 필요 없는 좋음이었다. 그 시절엔 자신이 무언가를 좋아하면, 그 무언가가 왜 좋은지 따윈 따지지 않았었다.


 과거를 떠올리고 있자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제니는 애써 머릿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기억들을 지워버리려 했다.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어린아이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제니의 아빠는 무척이나 강력한 사람이다. 그는 제니가 다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다루며, 제니 또한 그 세상에 속한 것들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처음엔 강제로 엄마와 헤어져 성에 들어와 살게 한 아빠를 많이도 원망했다. 지금이라고 아닌 건 아니다. 단지 포기했을 뿐이다. 세상을 쥐고 흔들 정도로 강한 사람이며, 심지어는 제멋대로이기까지 한 사람을 어찌할 순 없다고 제니는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던 것이다.


 문뜩 제니는 언니가 말했던 황제란 사람에 대해 떠올렸다. 황제는 아빠보다 더 세다는 말도 떠올렸다. 그렇담 그 사람에게 부탁하면 다시 엄마와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더 훗날의 이야기이리라. 그리고 분명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제니는 생각했다.


 제니는 근처의 풀을 뜯어 여러 가닥을 굵은 한 줄로 엮었다. 그 위에 나뭇잎을 덧대어 모양을 만들고는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다 대어 후 하고 불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제니는 시무룩해져 애써 만든 것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백! 이제 찾으러 갈게!”


 멀리서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니는 얼른 숨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땅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러던 중에 제니는 눈길을 끄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풀잎의 위에 앉아있는 작은 나비... 아니 나방이었다. 신기한 건 그 나방이 무척 검다는 것이었다. 단지 검기만 할 뿐이 아니라 날개가 흔들릴 때마다 검은 가루가 마치 밝게 빛나는 세상에 쏟아져 내리는 검은 비처럼 사뿐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제니는 호기심에 눈동자를 빛내며 천천히 나방이 있는 풀잎으로 다가갔다. 단숨에 덮쳐 붙잡으려 했지만 나방은 손이 가까워지자 곧바로 날개를 펄럭이며 머리 위로 날아갔다. 그리곤 마치 작은 소녀의 헛된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적당히 높은 위치에, 절묘하게도 아무리 손을 뻗어도 어린 소녀로선 닿을 수 없는 위치의 나뭇가지에 앉아 다시 유혹하듯 날개를 천천히 휘저었다.


 제니는 열이 올라 숨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나방을 붙잡으려 뛰어 보기도 하고 까치발을 해보기도 하고 여러 시도를 하며 안간힘을 썼다. 급기야 드레스를 입은 채로 나무를 타고 오르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나 제니는 나무를 타는 재주가 없었고, 나방은 질렸다는 듯이 또 다시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빠르진 않아 따라가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제니는 쥐를 쫓는 고양이처럼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나방은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다가 커다란 나무의 둥치로 들어갔다. 어린아이만 들어갈 수 있을 법한 구멍이었다. 제니는 흙바닥에 웅크린 채 드레스 자락을 질질 끌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 애를 썼다. 드레스 자락이 뾰족한 돌멩이에 걸려 걸리적거리자 짜증이 나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드레스가 찢어졌지만 지금은 그보다 나방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제니는 개의치 않았다.


 제니는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져 손으로 사방을 더듬었다. 그러던 중에 발을 헛디뎌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다행히 밑이 깊지는 않았지만 소녀를 곤란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제니는 올라가는 길이 어딘지 알아내려 벽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한구석에 앉아있는 나방을 발견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나방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나방이 주위를 뒤덮은 어둠보다도 한층 더 짙은 어둠을 간직하고 있어서였다. 그 색은 칠흑보다도 더 강렬했다. 어쩌면 그 나방의 색을 정의하기 위해서 이제껏 없었던 색을 일컫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제니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리곤 손을 뻗는 데에 걸린 시간보다 서너 배는 될 정도의 긴 뜸을 들이다가, 용기를 내어 두 손을 단숨에 모았다.


 성공이었다. 이번엔 저 재빠른 나방도 도망치지 못했다. 그러나 기뻐함도 잠시, 제니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순간 빛이 번쩍했다. 머릿속에서 그랬다. 주변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제니의 머릿속에선 여러 번 번개가 치듯이 빛이 번쩍이고 순식간에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제니는 끔찍한 두통에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부여잡았다.


 빛 속에서 무언가 글자가 떠올랐다. 나방의 색처럼 검은 글자가. 제니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게다가 그 글자는 그녀가 봐왔던 글자와 사뭇 달랐다. 전혀 다른 종류의 것처럼. 그럼에도 어째선지 그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밤은 어둡고 모든 것을 가릴지니.’


 글자는 이윽고 다른 형태로 변했다. 좀 더 다른 조합으로.


 ‘그러나 자신만은 분명하게 비추리라.’


 “아악!”


 전보다 더 심한 두통이 엄습했다. 이윽고 빛은 사그라지고 그 너머에 또 다른 형태가 나타났다. 좀 더 뚜렷하고 구체적인. 그것은 어딘가의 장소였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정확히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니는 그 장소에 서있었고, 주변은 어두웠다. 그러나 칠흑은 아니었다. 이윽고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며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좀 더 멀리까지 비추었다. 그러자 어둠이 숨기고 있던 것을 드러냈다. 그 안에 품고 있던 건 섬뜩한 핏빛과, 그녀가 익히 아는 사람의 죽음이었다.


 “아빠...?”


 공왕 카인 이브노아가 피 웅덩이의 한가운데에 두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 있었다. 조금의 미동조차 하지 않고.


 제니는 놀라 뒤로 넘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매우 위험하단 것과 두려움만은 확실히 느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주저앉은 채로 기어서 멀리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뒷목을 붙잡았다. 거친 손아귀였다. 제니는 겁에 질려 돌아봤다. 채 누군지 보기도 전에 머리에 무언가가 씌워져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제니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오히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끅끅거렸다. 제니는 어둠 속에서 두리번거렸다. 얼굴을 가린 것이 너무 단단히 목을 조이고 있어 돌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제니는 입술을 떨다가 이내 눈물을 터트렸다. 공포에 질려 흐느꼈다.


 곧 근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의 것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아직 어린아이라고요!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이건 잘못됐어요.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청년은 누군가에게 격하게 항의했다. 곧이어 다른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좀 더 차분하고, 가라앉았으며, 건조한 겨울바람처럼 그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사내의 목소리였다.


 “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구나. 허나 이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 계획은 단 하나의 오점조차 허용해선 안 되니까. 지금은 약하고 그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는 어린 소녀일지 모르나 그녀의 안에는 왕족의 피가 흐른다. 이 아이는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매 순간 우리의 목을 조여 올 거다.”


 이윽고 날카롭고 긴 것이 비좁은 무언가로부터 서서히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송곳으로 쇠를 긁는 듯한 예리한 소리가. 제니는 더욱이 격렬하게 흐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느꼈던 것이다.


 “물러서 있거라. 나로부터 시작된 일이니 죄 또한 내가 짊어지겠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안 돼. 가지 마요. 날 외면하지 마요. 제니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발소리는 멀어지다가 멎었고,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니는 몸부림쳤다.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곧 누군가가 어깨를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제니는 절규했다. 이윽고 공포심은 타오르는 분노로 변했다.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원망스런 말을 쏟아냈다. 제니는 살아생전 그런 악의를 품었던 적이 없었다.


 “부디 용서하기를.”


 사내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리곤 다음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뒷목에 와 닿았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다. 찰나의 시간. 그것은 차가웠고, 예리했고, 살점에 파고들어 자르는 것이 아닌 난폭하게 으깼다. 피부를, 살점을, 그리고 힘줄과 뼈를.


 제니는 그 고통을 생생하게 느꼈다. 죽음이 코앞까지 도달해 스스로를 완전히 망가뜨리기 전까지 짧지만 그 어떤 순간보다도 길게, 그리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느끼고 또 느꼈다. 그것은 그녀가 살면서 느껴 본 그 어떠한 통증과도 격을 달리 했다. 단지 느끼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죽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고통이었다.


 “아아아아아악!”


 제니는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환상은 깨지고 그녀는 다시 현실의 나무둥치 안 어둠 속 장소로 돌아와 있었지만 고통은 아직도 생생하게 그녀의 신경에 남아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고 차라리 몸부림치다가 벽에 부딪치고 살점이 돌조각에 찔리는 게 나을 정도의 끔찍한 통증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차라리 이대로 머리를 부딪쳐 기절하길 바랐지만 의식은 너무나 선명했다. 스스로 벽에 머리를 부딪치기엔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고가 가능하지도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제니의 모습은 마치 질긴 가죽을 두른 짐승의 목을 톱으로 자를 때의 모습 같았다. 혈흔은 없지만 필시 짐승은 달아나려 몸부림 칠 것이고, 그러나 여러 번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체념하게 되면 기쁜 사람이 웃는 것처럼 슬픈 사람이 우는 것처럼 생생한 고통을 온몸으로 보여줄 것이었다. 그 순간의 제니가 그랬다.


 제니는 한참을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치다 결국 기운이 다해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따금씩 신음을 흘리면서 발작적으로 튀어 올랐다가 쓰러지길 반복했다.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그러나 아직도 무슨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감각이 반복되고 있을 즈음엔 그나마 울 수 있게 되었다. 눈과 입에서 무엇인지 모를 체액이 흘러내리던 것이 멈추고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통 외에 다른 느낌을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을 만큼 그나마 상황이 ‘나아졌을 때’ 제니는 나무 둥치 밖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릴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 그건 언니 라예리아의 것이었다.


 “제니! 어디 있는 거야! 네가 이긴 걸로 해줄 테니까 숨어있는 거면 어서 나와!”


 라예리아가 애가 타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제니는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나아가 입술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린 소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어둠 속에서 우는 것뿐이었다.


 “제니! 대답해 줘... 제발.”


 어쩌면 이대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제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되새기게 될 날이 오는 거라면 차라리 이대로 그것보다는 상냥한 죽음의 품에 안겨 모든 걸 놔버리고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제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 죽게 해줘. 제발.


 바람은 한순간, 근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라예리아가 말했다. “찢긴 드레스 자락... 설마 여기 있는 거야?” 곧 머리 위에서부터 한줄기 빛이 비춰졌다. 빛이 쏟아지는 자리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금빛 머리칼, 언제까지고 그 상냥함만은 사라지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다정한 얼굴. 라예리아는 상반신 일부를 구멍 너머로 내민 채 아래에 있는 여동생을 발견하곤 걱정이 가득한 표정의 한편에 미약한 미소를 띠었다.


 “제니.”

 “언...니...”


 제니는 힘겹게 그녀를 불렀다. 그리곤 기력이 다해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본 건 저 너머의 빛 속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언니 라예리아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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