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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인간과 뱀파이어 백합(甲乙)

Nsan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6.23 16:32:44
조회 1046 추천 29 댓글 4
														

가족을 인질로 잡은 백합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멀리까지 나갔는데..

뭐, 재밌게 봐주면 좋겠다!

################


“...”

“이로서 두 번째 만남이구나. 어서 오려무나.”


육중한 문이 닫히면서 녹이 슬기 시작한 경첩이 삐걱거리며 꽤나 큰 울림을 남겼다. 낮에는 한 나라의 각종 고위 인사들이 바글거리며, 그녀도 있는 이 공간에 남아있는 것은 이제 오롯이 그녀와,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명의 소녀뿐이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듯한 옥좌에는 무척이나 작고, 세밀한 도구들로 작업하지 않는한 불가능할 정도라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우면서, 우아한 조각이 새겨져있었다. 옥좌라는 자리 하나가 이 큰 알현실의 분위기를 가득 매울정도로 그 존재감은 거대했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왕, 검은 머리의 소녀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진심, 인가요?”


옥좌에 앉은 왕은 옥좌의 팔받침대에 올려 놓은 와인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리곤 잔을 기울여 입술에 얹고는 그 잔에 채워진 포도주를 가볍게 입 안에 머금고 그 풍미를 느끼고자 혀를 굴리면서 눈 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넓은 알현실에서,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수정 샹들리에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이 우연히 그녀가 서있는 곳이 된 것처럼, 그녀의 몸은 그림자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왕이 그녀에게 하는 말을 듣고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왕에게 닿는 것은 약간의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뿐.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응? 아아. 내 생각보다 성격이 급한 것 같구나. 바로 그것을 묻다니.”

“...빨리 대답해주세요. 에르메스 님. 정말, 진심으로 말씀하신 건가요?”

“...루니. 너에게는 내가 거짓말쟁이로 보였던 것인 것 같구나.”


약간 충격적이구나. 에르메스는 입술 밖으로 마지막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 안에 가둔채 웅얼거렸다. 생각 외로 성격의 급한 면을 발견한듯한 저 아이는 재미없게도 곧바로 본론을 찔러들어온 것이다. 조금 더 애태우면서 그 반응을 즐기고 싶었는데, 아쉽구나. 에르메스는 들고있던 잔을 살며시 빙글, 작은 원을 그리듯이 돌리기 시작하며 입술을 열었다.


“ 그래. 맞단다. 난 진심으로 한 말이란다. 루니.”

“..공주라고 붙여주시길 바래요. 에르메스 님.”

“그러는 그대야말로 내게 에르메스 폐하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패전국의 공주에게 베풀 수 있는 배려로는 그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틀렸나?”

“...아니, 에요.”


에르메스에게는 멀리 서있는 루니의 얼굴에서 보이는 건, 그림자가 덮고있지 않은 입술과 턱 부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루니가 자신의 입술을 깨물며 분함을 참고 있는 것은 훤하게 보였다.


“ 자, 그러면 내게 답변을 들려주려 온 것이겠지. 공주?”

“...”


내게 공주로서의 의무를 강조하기 위해서, 날 공주라고 부른 것이구나. 루니의 꽉 쥔 손은 어느새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주먹을 쥐고 있었는지 눈같이 희던 손에 핏기가 사라져서 창백하게 보일 정도였다.


“...맹세,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 당신께서, 저를 조건으로 제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들 말입니다.”

“으음. 너희 종족의 안녕을 지켜주며, 왕족, 즉 네 친족들을 인간의 왕족처럼 대해주겠다는 말이라면, 그래. 내가 확실히 네게 내세운 말이긴 하구나.”


물론 어느정도는 거짓이지만 말이다. 큰 희생을 떠안고 손에 넣은 뱀파이어다. 그것들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지 않으면 그것만큼 백성들에게 아둔한 왕이라고 불릴 일이 달리 없겠지. 에르메스는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잔을 멈추고, 다시금 자신의 입술에 그 주둥이를 대어 안에 담겨있는 포도주를 완전히 다 마셨다.


“....제대로 말씀해주십시오!”


에르메스의 말에 루니는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분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수정 샹들리에에서 쏟아져나오는 밝은 빛이 루니의 머리 위에서 별처럼 흩어졌다. 밤하늘에서 반짝거리는 별 마냥 순수한 금빛의 빛을 자아내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쏟아져 내리는 듯한 별들의 무리처럼, 금색의 머리카락과 그 별들의 무리에 어울려져서 같이 따라왔는지 그녀의 눈 안에는 청아한 바다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기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 눈 안에 담긴 바다도 거칠게 출렁거렸다.


“..정말 아름다운 눈이로구나.”


정말이지, 내 것으로 만들지 않고는 못 참겠군. 에르메스는 입 안에 머물러있는 포도주의 잔향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물론이지, 루니. 난 거짓말쟁이가 아니란다.”

“....”


에르메스의 말이 끝나자 루니의 굳게 닫힌 입술은 그녀 스스로의 치아에게 짓눌리면서 괴롭힘을 당했다. 그런 루니를 바라보는 에르메스에게는, 그런 루니의 모습조차 무척이나 매력적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채로.


“...저는 이곳에서 당신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마침 저를 막을 만한 기사는 아무도 없으니깐요.”

“그렇다면 나는 네 손에 죽게되는 것이구나. 돼지같은 귀족들에게 압살 당하는 것보다는 퍽 낭만적이지 않은가. 후후.”


한참을 고민한 끝에 루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덫에 걸려버린 피식자에 무의미한 발버둥, 포식자의 접근을 막으려고 위협하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어째서, 당신은 제게 이런 선택권을 주신 건가요.”

“네게 기회를 준 것 뿐이다. 자, 슬슬 결정의 시간이다. 공주. 내 것이 될 것인가? 아니면, 망국의 공주로 남을 것인가.”


이미 밤은 깊었다. 이렇게 루니를 놀리는 것도 재밌지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은 에르메스는 오만하게 다리를 꼬면서 잔을 받침대에 다시 내려놓았다. 수없이 생각하고, 수없이 고민하는 루니는 시선을 위로 돌려 에르메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루비보다 짙은 진홍색 눈동자에 담긴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눈 안에 담겨있는 자신은 어쩐지 포식자의 사냥감만 같았기에, 루니는 무서웠다. 그 눈의 주인이 무서웠고, 자기 자신의 선택으로 바뀌게 될 사람들의 운명이 무서웠다.


하지만, 루니는 공주였다. 이제는 없는 나라의 공주. 나라의 백성들에게 나라를 지켜냈다는 자긍심을 주지 못했으니, 하다못해 그들의 생활의 평안이라도 남겨주어야 진정한 왕족이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루니는 선택을 하였다. 부디 이 선택이 옳은 것이기를, 그녀조차 모를 누군가에게 간절히 빌면서.


“...되겠습니다.”

“..들리지 않는구나. 루니.”

“...폐하의, 것이 되겠..습니다.”

“그 결정, 돌이킬 수 없단다. 가엾은 루니.”


루니는 알현실의 바닥에 깔려있는, 인간의 왕을 상징하는 붉은 융단위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분명히 바닥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은 두터운 융단에 막혀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그 무릎에 느껴지는 온기는 무척이나 차가워서, 아팠다.

루니의 얼굴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또르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서 턱에 맺히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아찔했다. 멈추지 않는 눈물에 당황하면서도 눈물을 닦아낼 마음조차 들지 않는 루니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융단 위에 손을 얹었다. 마침내 턱에서 떨어져내린 눈물이 뚝뚝, 그녀의 손등위에 안착했다.


“..윽, 흐윽..”


내 눈물 한 방울조차, 이곳에 바치기는 싫어. 그러니까..딱, 오늘. 오늘까지만 우는 거야. 루니. 오늘까지만.. 루니로 사는거야. 자신의 손등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루니에게는 송곳처럼 느껴졌다. 자기 자신을 눈물로 바꿔서 한 방울 , 한 방울 조심스럽게 떨어뜨리는 것만 같아서 아플 뿐이었다. ‘루니’ 라는 뱀파이어의 공주는 여기서 죽을 것이다.


루니가 자기 자신을 위한 장례식을 치르고 있을때, 에르메스는 그런 루니를 보면서 마음 한 구석에 동정심을 가졌지만, 그 동정심을 뛰어넘을 만족감이 그 직후, 그녀의 마음에 솟아올랐다.


“..너는 그 눈물조차 아름답구나. 루니.”

“...”

“ 너의 주인으로서 첫 번째 명이 되겠구나. 루니. “


앞으로는 절대, 절대로.


“ 네 눈에 담기는 존재는 나 하나로 족하다. 루니. 그러니 네가 보는 것도 오롯이 나뿐이며.”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 눈물을 바치지 마렴. 루니.


“ ...네 눈물도 오롯이 나의 것이란다.”


에르메스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마음 한 구석에서 차오르는 만족감이 기분이 좋은 것인지 자기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그리곤 다시금 입술을 열어 두 번째 명을 내렸다.


“자, 이리로 오렴. 루니.”


가볍게 턱을 까딱거리며 자신의 발밑을 눈빛으로 가리킨 에르메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등으로 자신의 뺨을 괴며 그 진홍색의 눈으로 루니를 바라보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마지막 한 조각 눈물조차, 자신의 옷으로 슥슥, 닦아낸 루니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일어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건 에르메스의 다음 말로 인해 막히고 말았다.


“루니. 내게 언제 일어서서 오라고 했나? 기어서 오거라. 개처럼 말이지.”


에르메스의 말을 듣자, 루니의 머리는 순간적으로 기능을 정지한 것만 같았다. 어이없음, 분노, 체념, 슬픔, 한심함, 절망 등의 감정이 뒤섞여 하나의 망치가 되어 루니의 머리를 둔중하게 내리쳤다.


“...다시, 말씀..해주시겠나요..?”

“ 저런, 가엾은 루니. 얼마든지 말해주마. 개처럼 기어서 오렴, 내 발밑으로 말이지.”


루니를 바라보는 에르메스의 얼굴은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입술 한 가득 , 무척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녹아내릴 듯한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는 루니에게 명령했다. 루니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분노와 절망으로 떨리는 다리는 자신의 다리가 아닌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이대로 주저앉아, 다 쏟아낸 것만 같은 눈물을 다시 펑펑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면,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 루니, 그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었고, 그녀가 정한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루니는 자신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치고, 입술을 씹어가면서 몸을 다시 굽혔다. 한 쪽 무릎씩, 천천히 바닥에 다시 꿇고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하는 듯이 자세를 취하고 천천히, 그 무릎과 손을 움직였다. 기어오는 루니의 몸은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한 뼘씩 나아갈 때마다, 루니의 몸은 느려지고, 떨렸지만 결국엔 에르메스의 발치에 닿았다. 루니의 시선에, 에르메스의 발끝이 보였다. 언제 벗은 것인지 구두를 벗고 완전히 드러낸 맨 발이 루니의 눈 앞에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서러워 루니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려는 것을 자신의 입술을 괴롭히는 것으로 겨우 막았다.


“잘했어. 루니. 고개를 들어도 좋아. 그럼.. 상을 줘야겠구나.”


루니의 시선과 에르메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에르메스의 진홍빛 눈동자에는 짙은 환희와 만족감이, 루니의 푸른 눈동자에는 짙은 절망과 슬픔이 담겨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교차에 짜릿함을 느낀 것인지 에르메스는 몸을 가볍게 떨고는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손 위에서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곧이어 얇은 단도 한 자루가 쥐어졌다.


에르메스는 단도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고는 자신의 반대쪽 손을 활짝 펴서, 그 가운데에 단도의 첨단을 쿡, 찔러넣어 아래로 지긋이 그었다. 에르메스의 오목하게 모인 손바닥에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루니는, 루니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다. 루니의 코를 뚫을 것만 같은 강렬한 달콤함이, 끈적하게 피부에 달라붙어오는 느낌과 함께 동시에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맥동했다.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절로 입술을 달싹거렸고, 코도 그 향기를 더 맡기 위해 벌름거렸다. 그것은 그녀의 본능이었다.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의 본능. 피의 본능.


“이래봬도, 난 내 피가 맛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단다. 어렸을때부터 뱀파이어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입이 아플정도로 말할 수도 있어.”

“아, 아으...윽”

“그래서 ,나는 내 피가 갖는 위력이 네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상은 할 수 있단다.”


자제심이 강한 성숙한 뱀파이어조차 내 피 냄새를 맡으면 눈을 뒤집어까며 달려들 정도였단다. 에르메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루니의 상태를 확인했다. 분명히 어린 루니는 본능을 억누르는 이성이 강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달려들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아무래도 루니는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성숙한 것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런 아이를 뺏길 수 없지.


“머리가 울리겠지. 강렬한 향에 코가 마비될 것도 같구나.”

“이가 가렵겠지. 온 몸에 강한 흡혈 충동이 돌면서 내 목을 물어뜯고 싶을 것이야.”


에르메스는 자신의 손바닥에 고여있는 피를 보고, 루니를 바라보았다. 본능과 이성의 강렬한 충동으로 루니의 뺨에 땀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루니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으로 이 고통을 감내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니..


“..단언컨데, 네가 내 피를 맛보면 다른 이들의 피는 눈길도 가지 않을거야. 다들 그랬거든.”


에르메스는 팔걸이에 놓아둔 와인 잔을 천천히 들어올려 그 잔을 기울이고는 자신의 손바닥에 모인 피를 잔으로 옮겼다. 잔의 밑부분까지 차올라, 딱 먹기 좋은 양의 와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에르메스는 잔을 가볍게 원을 그리듯이 돌렸다. 그러자 루니의 얼굴이 시시각각 찡그려지며, 황홀하다는 듯이 눈이 반짝거리고, 에르메스의 피에 반응하는 자기 자신을 억누르기 위해서인지 자신의 몸을 팔로 감싸안아 꾹 누르는 것 같은 루니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지, 넌 날 한 순간도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루니. 자, 그러니. 상이란다.”


에르메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루니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상처를 새긴 손이 아닌 반대쪽의 손으로 잔을 붙잡고, 상처를 새긴 손으로 루니의 턱을 가볍게 잡아 들어올렸다. 코 밑에서 올라오는 피의 향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루니의 푸르던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 싫,어…”

“거부하지 마렴. 루니. 네 본능이란다.”

“싫,어..싫,윽..”

“상이란다. 루니. 자.”


루니의 몸은 계속 움찔거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팔로 감싸고 꾹, 누르는 루니의 이성과, 그 팔을 다 풀어헤치고 당장이라도 눈 앞의 에르메스의 가녀린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어 생피를 빨아마시는 본능이 거친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런 루니를 보면서 생글생글, 웃는 에르메스는 루니의 턱을 가볍게 잡아당기고는 잔을 루니의 입술 위에 얹었다. 그러자 루니의 입술이 들렸다가, 닫혔다가. 들리고, 닫히고를 반복했다. 그런 루니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에르메스는 루니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확실한 낙인을 찍기 위해서 잔을 기울였다.


“..!?”


잔이 기울여지자 놀란 루니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마시지 않으려고 버텼다. 하지만, 아무리 입술을 꽉 깨물어도 액체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처럼, 잔에 담긴 에르메스의 피도 그랬다. 처음에는 몇 방울만 그 입술을 비집고 들어가 그녀의 혀 위에 떨어진 정도였지만, 그 순간 혀 전체에 퍼지는 황홀한 정도의 달콤함과 진득하게 달라붙어오는 풍미에 루니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녀의 피를 받아마셨다.


그런 루니가 너무나도 귀여운 에르메스는 내내 황홀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잔에서 흘러나온 피가 루니의 입술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런 루니가 그렇게 예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자. 상은 여기까지.”


이건, 네가 너무 귀여운 탓이란다 루니. 에르메스에겐 짓궂은 장난심이 생겨났다. 잔 안에 찰랑이는 피를 전부 루니의 입 안에 흘려넣은 에르메스는 잔 안에 아주 작은 양의 피만 남기고 잔을 루니의 입술에서 떼어냈다.


“하아아….”


에르메스의 잔이 떼어지자마자, 루니에게선 짙은 한숨과 함께 황홀하다는 듯한 눈빛이 촉촉히 배어나왔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 완전히 풀려져서 일그러진 미소를 띄는 입술, 조금전의 루니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정도였다.


“자. 루니. 어때, 상은 충분하니?”

“아,아니...요.. 부족,해요..”


에르메스의 질문에, 약에 취한 듯한 루니는 마음의 숨김없이 진솔한 속마음이 새어나왔고, 에르메스는 그런 루니를 보며 정복감과 만족감에 몸을 떨었다.


“..더 마시고 싶니? 그럼, 마시렴.”


에르메스는 루니쪽으로 기울인 몸을 다시 뒤로 빼서, 왕좌에 등을 기대며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그리고는 잔을 든 손을 천천히 움직여 앞으로 내밀더니 그대로 잔을 뒤집어 자신의 정강이에, 남은 피를 털어놓았다.


에르메스의 새하얀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들이, 기괴했지만 자극적이었다. 핏방울들이 정강이에서 흘러내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발등까지 흘러갔다.


“..자. 루니. 마시고 싶다면, 마시려무나.”


그렇게 말하는 에르메스의 루니를 바라보는 눈빛은, 명백히 즐겁다는 감정이 서려있었다.


“....”


에르메스의 발등의 맺힌 핏방울을 바라보는 루니의 눈 안에선 순간적으로 깊은 고민이 스쳐지나갔다. 정말, 귀엽기도 하지. 에르메스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지 빤히 보이는 루니를 보며 히죽, 웃었다.


“ 선택하기 어렵다면, 다른 선택지도 주마.”


에르메스는 상처가 남은 손에 여전히 적게나마 고여있는 피를 손가락에 곱게 펴서, 자신의 입술 위를 부드럽게 훑었다. 그녀의 입술이 붉은 피로 번들거려서, 그녀의 웃음이 한결 짙게 매혹적으로 풍겨나갔다. 자,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이니. 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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