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버워치 세계관에 대해 잘 모름. 사실 슈타게 팬임.
* 하나와 앙겔라의 나이차는 12살로 설정. 18살은 감이 안 와서...
* 아래 짤방 3개를 보고 삘 받아서 씀.
“와, 씨발. 존나 예뻐.”
그것이 내가 박사님을 본 순간 내뱉은 첫마디였다.
***
흔히들 말하는 주마등이란 게 이런 걸까?
눈앞에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깜깜한 터널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분명 몸은 가만히 있는데,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한 감각도 있고.
폭발에 휘말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아, 그래, 폭발.
그러고 보니 직전에 윈스턴 아저씨의 제2 연구실이 폭발했었지. 아무리 임시라곤 해도 윈스턴 아저씨가 아끼던 연구소라, 아깝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옴닉과 자멸할 수는 없어서 탈출 후, 폭발을 기다리는데… 박사님이 안 보였다. 건물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는데, 박사님이 의식을 잃은 부상자를 이끌고 나오고 계셨다. 황급히 달려가서 박사님을 도와 부상자를 옮기는데, 갑자기 옴닉이 나타났고-
박사님을 감싸는 순간에 폭발이 일어났었지.
그래서 그런가, 머리가 너무 아프다.
머리뿐만이 아니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욱신거린다.
한 번 상처를 인지하자 감각이 하나둘씩 살아나는 것처럼 통증이 온 몸을 두드려댔다.
“아프면 소리 내도 괜찮아요.”
박사님이라면 이렇게 말 해주겠지. 그러고 보니 박사님은 괜찮으신 걸까? 걱정이 되어 떠지지 않는 눈꺼풀에 힘을 주어 들어올렸다. 어두운 터널의 끝에 다다라 빛이 쏟아지듯 밝은 불빛이 눈으로 뛰어들었다.
“정신이 드나요?”
“아… 박사님.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네? 저는 무사한데요… 저를 아세요?”
흐릿한 시야에 비친 윤곽은 분명 박사님의 것이었다. 시야가 가물가물해서 박사님의 상태를 알 수가 없어 묻자, 박사님이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질문 안 하셔도 전 멀쩡해요.”
“멀쩡한 것 치고는 만신창이인데요.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도록 해요.”
“아뇨, 얼른 여기서 피해야…….”
끙끙대며 몸을 일으키고서 고개를 들어 박사님을 보는데… 뭔가가 다르다. 시야가 천천히 또렷해진다. 원래도 예쁜 박사님이었지만, 뭔가… 달라. 뭐지? 주위를 둘러보니 의무실이다. 언제 이리로 옮겨진 거야?
일단 안심하고 유심히 박사님을 살펴보는데 뭔가 반짝반짝하는 느낌이다. 원래도 예뻤지만 지금은 약간 다른 느낌으로 예쁘다. 어쨌든 박사님이 예쁘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와, 존나 예뻐…….”
“…네?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보통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면 ‘예쁜 입으로 그런 말 할 거예요?’ 하며 나를 나무라셨는데…….
문득, 박사님의 가운이 깨끗하다는 걸 눈치 챘다. 아까는 부상병의 피에 젖어있었는데… 의무실에 가운이 남아 있던가? 얼마 전에 물품이 다 떨어져서 새로 보급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됐어요? 박사님 어디 다친 곳 없는 거 맞죠?”
“환자에게서 걱정 받을 정도로 다친 곳은 없어요. 일단 눕도록 하세요.”
붕대를 둘둘 감는 박사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박사님의 여린 어깨 뒤로 벽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2067년 7월 22일이라고 써져있다. 내 눈이 잘못된 걸까?
멍하니 앉아있는 사이 치료를 끝낸 박사님이 내 앞에 앉아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셨다.
윈스턴 아저씨의 연구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는데, 먼지가 다 가라앉고 나자 웬 여자애가 상처를 입고 누워 있었다고. 그래서 일단 의무실로 옮겨 상처를 치료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윈스턴 아저씨의 기존 실험실과 제2 실험실은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게다가 나는 건물 밖에서 폭발에 휘말렸는데, 나타난 곳이 제1 연구실 안이라고? 공간 이동이라도 했단 말이야?
거기다 시계. 몇 번을 다시 봐도 시계는 2067년을 표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주는 사이 오후 1시 24분에서 1시 25분으로 바뀐다. …고장 난 게 아니다.
레나 언니도 아니고, 이게 뭐지. 설마 윈스턴 아저씨의 실험실 폭발에 휘말려 시간여행을 하게 된 건가?
“어디에서 온 건지, 왜 연구실에 들어가 있었는지 알려주었으면 해요.”
“연구실에 대해선 모르겠어요. 전 임무 때문에 연구실 밖에 있었고… 정신 차리니 여기 의무실이었다고요.”
“임무? 그럼 어디 소속인 거죠?”
“…오버워치 돌격부대 소속의 송하나 대위인데요.”
소속을 묻는 박사님에게 일단 말해본다. 맞네요, 하며 박사님이 웃어주기를 조금 기대해보면서. 물론 그 기대는 바로 박살났다.
“돌격부대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거기에 아직 10대로 보이는데 대위라니, 말이 되질 않잖아요.”
아, 나 지금 22살인데. 아니, 지금 이 시간대로 따지면 12살이라고 해야 하나?
박사님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계신다. 어쩌지?
“10년 후에는 그래요. 어쨌든 박사님, 지금 스물넷인 거죠? 와, 저보고 동안이니 뭐니 했어도 최강은 역시 박사님인 것 같아요! 완전 예뻐…으윽!”
신이 나서 박수를 치다가 격통에 시달려 몸을 웅크렸다. 맞다,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 10년 전의 박사님을 봤다는 기쁨에 순간 내 몸 상태를 잊고 있었다.
박사님은 끙끙대는 내 손을 잡고 조심스레 침대에 눕혀주셨다. 일단 쉬라고 말씀하시고는, 커텐을 쳐주시고 사라졌다.
네모나게 보이는 의무실 천장을 바라본다. 아까 둘러보았던 의무실은 10년 전과 별 차이가 없다. 시계에 나타난 시간 표시만 아니었으면 내가 있던 시간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내가 이 시간대로 와버렸으면 내 시간대의 박사님은 어떻게 된 걸까? 걱정이 마구 밀려온다. 12살의 나는 한국에 있으니 마주칠 일이 없지만, 박사님은 계속 오버워치에 계셨으니 미래의 자신과 만나서 타임 패러독스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윈스턴 아저씨가 레나 언니에게 누누이 경고하던 말이 뇌리에 떠올라서 살짝 몸을 떨었다. 윈스턴 아저씨한테 가서 되돌려달라고 하면 될까? 아저씨가 시간 가속기를 발명한 게 언제라고 했지?
머릿속을 곰곰이 되짚는데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어쨌든 아저씨를 만나면 될 일이다. 10년 후의 내가 멀쩡히 오버워치에 입대한 걸 보면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선잠에 들었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커텐 바깥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박사님인가? 커텐을 걷고 조심하면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박사님은 생각에 골몰해 있는 듯,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있다.
“무슨 일 있어요?”
“…연구 결과가 좋지가 않아서요. 계속 실패하네요. 아무래도 신경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문제 같은데…….”
소리 없이 길게 숨을 내쉬며 박사님이 말한다. 아마 내가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겠지. 19살에 처음 만난 겐지 아저씨가 수술에 성공했을 때가 5년 전이라고 했으니, 이 시간대의 박사님은 아직 연구를 완성시키지 못한 것 같다. 최소한 2년 후에는 연구에서 성과를 내놓으시지만. 그렇다고 내가 의학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라 무슨 힌트도 못 드리고.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하지?
“…박사님은 기계신경과 중추신경을 잇는데 성공하실 거예요.”
걱정 말아요, 이런 말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타임 패러독스! 그 단어가 경고등처럼 머릿속에서 깜박인다. 박사님은 흠칫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셨다. 어쩌지, 하고 패닉이 된 머릿속과 달리 입은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구하실 거예요. 박사님 덕분에 살아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박사님은 분명 할 수 있어요.”
“…꼭 보고 온 것처럼 말하네요.”
“제가 장담할게요.”
씩 웃으며 말하자 박사님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 미소지으셨다. 무슨 뜻이 담기지 않은 그냥 미소였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박사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나 제가 모르는 사이에 돌격부대에 새로 배치된 요원이 있나 알아보고 왔어요. 역시 없더군요. 이름이… 송하나라고 했죠? 송하나 양은, 미래에서 왔나요?”
“송이 성이고 이름이 하나예요.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시더니.”
박사님의 표정이 다시 굳어진다. 잠시간의 침묵 후, 박사님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정말… 미래의 내가 기계신경 연구에 성공하나요?”
“그럼요. 그래서 의학계에서 박사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져요.”
에라 모르겠다. 이 정도쯤은 타임 패러독스에 걸리지 않겠지, 하고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미래 따윈 알 게 뭐람. 난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박사님이 제일 중요하다. 언제나 그랬다.
박사님의 표정은 아직 풀리지 않는다. 주저하며 박사님이 다시 물었다.
“내가 정말 모두를 구할 수 있나요?”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박사님이 줄곧 안고 있는 물음이 이것이었나. …바보 같은 사람. 내게 묻지 않아도 본인이 답을 알고 있을 텐데. 세상에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가능하면 신이지. 그러나 이 의문에 답하고자 10년 동안 끊임없이 노력해온 미련하고도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딱 하나뿐이다.
나는 입가를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일상인 지겨웠던 나날에도 좋은 점이 있었긴 했구나 싶었다. 표정관리 하나는 잘 되잖아.
“그럼요, 물론이죠.”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내 얼굴은 확신에 가득 차있었을 거라고 장담한다.
***
이미 저질러 버린 뒤지만, 혹시라도 모를 타임 패러독스를 위해 더 이상의 미래 기술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박사님 또한 이해해주셨다. 남은 문제는 내 신원과 거처 문제였는데, 이 건에 관해서는 박사님의 권한 하에 임시 환자로 등록되었다. 기지의 기밀엄수를 위해 의무실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지만, 별로 상관없다. 어차피 박사님이랑 의무실에 처박혀 있는 게 생활이었는데, 뭘.
박사님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윈스턴 아저씨가 어떻게든 해주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두 폭발 모두에 윈스턴 아저씨가 얽혀있는 것 같으니까.
윈스턴 아저씨가 의무실로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1시간 후였다. 연구실을 혼자 청소하기라도 한 건지 턱이랑 팔뚝에 먼지가 묻어 있다.
윈스턴 아저씨 역시 별로 바뀐 게 없어 보였다. 턱수염이 더 짧았을 뿐.
나는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의 미래에서 왔다고 설명하고, 윈스턴 아저씨의 제2 실험실이 폭발한 것을 전했다.
짧은 턱수염을 엄지와 검지로 쓰다듬던 윈스턴 아저씨가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시간가속기가 폭발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군요.”
“벌써 시간가속기를 발명하신 거예요?”
“이론은 이미 완성되었고, 시제품으로 만들어 놓은 샘플들을 작동시켜보려다가 폭발을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버렸네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신기한 경험도 해보는걸요. 박사님 젊은 시절도 구경해보고.”
씩 웃자 윈스턴 아저씨가 따라웃었다.
“그건 그렇고, 10년 후엔 옴닉 때문에 제2 연구소가 폭발한다는 거지요?”
“네. 아저씨가 폭발 결정에 대해 굉장히 아쉬워하셨어요. 옴닉에게 넘기느니 폭발시키는 게 낫다는 결론 아래 행한 일이지만.”
“제2 연구소는 머릿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일입니다만… 안타까운 일이네요.”
아저씨는 과학자답게 연구소의 폭발을 아쉬워하셨다. 그러나 잠시 후, 안경을 반짝이며 내 상황을 되짚었다.
“하나 양은 레나처럼 시공간에 갇힌 게 아니기 때문에 아마 계기만 있으면 원래 시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계기요? 무슨 계기요?”
“시간가속기를 다시 한 번 폭발시키는 거죠.”
태연한 대답에 반응하기도 전에, 박사님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폭발이라니! 윈스턴,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아까 낮에 있던 사고를 토대로 생각했을 때, 시간가속기가 폭발하면 반경 3M이내의 시공간이 잠시간 비틀리게 됩니다. 10년 후의 제2 연구소에 있는 시간가속기는 보다 개량된 모형이라 범위가 더 넓은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하나 양이 언제까지나 이 시간대에 있을 수는 없어요. 사실 지금까지 타임 패러독스가 벌어지지 않는 것도 천운입니다.”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윈스턴 아저씨와는 달리 박사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가속기를 착용한다던가…….”
“그렇게 되면 자칫 신체를 이루는 분자의 시간만이 움직이게 됩니다. 즉, 하나 양의 나이가 여기에서 더 어려지거나 나이 들거나 하는 거죠. 이 시공간에 갇힌 채로 말입니다.”
“하아…… 어째서 그런…….”
“박사님, 걱정 말아요. 폭발에는 익숙하거든요.”
내 특기가 자폭일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박사님은 내 말에 더욱 안색을 굳혔다.
“대체 미래는 어떻게 되어 있기에 하나 양처럼 어린 사람이 폭발에 익숙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거죠?!”
“아니, 그게… 생각보다는 별 일 아니에요, 박사님. 진짜예요. 항상 안전하게 귀환하기도 하고.”
“안전하게 귀환한다는 게 만신창이로 10년 전으로 시간여행 하는 건가요?”
“그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 피치 못할 사정이 박사님을 구하려던 것인 걸 말 할 수는 없어 쩔쩔매자 윈스턴 아저씨가 나섰다.
“하나 양에게는 안전복을 입힐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어요. 지금도 위험한 겁니다. 하나 양이 이 시간대에 머물면 머물 수록 하나 양의 목숨이 위험해져요.”
윈스턴 아저씨의 무거운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박사님이 한발 물러났다.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윈스턴 아저씨의 말마따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연구실에서 또 시간가속기를 폭발시킬 수는 없으니 내일 새벽에 기지 밖으로 나가도록 하죠. 다른 사람의 눈에 띄면 안 되니까요. 참호에서 폭탄을 실험한다고 하면 별 문제없을 겁니다. 새로 개발 중인 폭탄의 테스트라고 하고 말입니다.”
“고마워요, 윈스턴 아저씨.”
“아닙니다. 원래대로라면 제 책임인 걸요. 그럼 전 이만 준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테스트 신청은 제가 할 테니 치글러 박사님과 하나 양은 내일 새벽 3시에 기지 후문에서 보죠.”
윈스턴 아저씨가 떠난 후, 의무실의 분위기는 다소 가라앉았다. 박사님은 미래에 불신을 갖게 된 게 분명했다. 지금도 여전히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에 약하게 주름이 잡혀있다.
큰일이다. 박사님이 미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거야말로 대참사가 될 거다. 전장의 천사를 내가 망가뜨린 건 아니겠지?
하지만 기분이 좋든 좋지 않든, 박사님은 의무실에 들어오는 온갖 환자들을 돌봐야했다. 나는 얼굴을 가릴 겸 의료용 마스크를 쓰고 박사님을 따라나섰다.
의무실에는 환자들이 계속 들락날락거렸고, 가뜩이나 내 일로 기분이 저조한데다 피곤해보기까지하는 박사님이 무리하는 게 싫어서 나는 일손이 부족한 박사님을 돕기로 했다.
의무실에서 보낸 3년이 헛되지는 않아서, 박사님의 보조를 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박사님은 처음엔 무슨 환자가 보조냐고 말리셨지만, 내가 하겠다고 우기자 어쩔 수 없이 양보하셨다. 척척 맞는 보조에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익숙해지셨다.
한창 바쁘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저녁시간 되었을 무렵에는 진이 빠져서 침대 베드에 기대어 앉을 수밖에 없었다. 박사님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타주셨다.
“미안해요, 환자한테 무리를 시키고.”
“괜찮아요, 제가 한다고 한 거잖아요.”
“…하나 양은, 돌격 부대 소속이라고 했죠? 그런데 의료 보조에 익숙하네요.”
“우리나라 속담에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소리가 있죠. 영어로는 The sparrow near a school sings the primer?”
씩, 웃어보였다. 19살에 박사님을 처음 만나고 3개월 후부터 의무실에 자리 잡았으니 그 정도도 못하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다. 그러나 박사님은 따라 웃지 않고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하나 양 나이가 어떻게 되죠?”
“스물두 살이요. 얼마 전에 생일이 지났죠.”
“…그렇다면 하나 양은 소년병이었다는 건가요? 오버워치로 온 뒤로 3년이나 제 곁에 있었다는 건…….”
으음, 소년병이라. 박사님이랑 처음 만났을 때 그 문제로 좀 다퉜었지. 박사님은 이 전쟁을 자기 세대에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또다시 그 때의 일은 반복할 수 없었기에 얼른 박사님의 말을 끊고 얼버무렸다.
“물론 그냥 속담이 그렇다는 거죠. 설마 그러겠어요? 게다가 오버워치에서 미성년자를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만 19세면 성년이다. 생일 지나고 오버워치에 왔으니 사실이지 뭐. 소년병 출신이 아니라곤 말 안 했다. 나는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활짝 웃었다. 박사님은 그제야 살풋 따라 웃으셨다. 10년 전의 박사님은 더 순수한데다가 귀엽기까지 하다.
말을 돌리려고 했는데, 어느 샌가 박사님의 미소에 잠시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박사님이 조금 당혹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자기 얼굴을 쓸며 물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뇨, 그냥, 신기해서.”
“뭐가 신기한 건데요?”
“박사님은 지금이나 10년 뒤에나 변한 게 없어서요. 존…, 아니 진짜 예뻐요.”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자 박사님은 곤란한 듯 시선을 돌리더니, 하나 양이 더 예뻐요, 하고 말하셨다. 하하, 귀엽기도 하셔라. 기분이 급속히 좋아진다. 박사님이 아까의 안 좋은 기분을 잊어버린 것 같아 더 좋다.
박사님은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건네주셨고, 마침 배가 고팠던 나는 금세 그것을 먹어치웠다. 의무실에 비치된 일회용 칫솔로 이를 닦고 나서 뒤돌아보니 박사님이 의무실 침대에 푹신한 담요를 깔고 계셨다. 보급품으로 주는 녹색 담요가 아닌, 회색의 두툼하게 생긴 담요다. 딱 보니 박사님이 쓰시던 것 같았다.
“웬 담요예요?”
“하나 양이 자기엔 의무실 침대가 좀 딱딱한 것 같아서요.”
“박사님은 어떻게 하시게요?”
“전 당직이라 밤 새야해요.”
“당직이 내일 새벽에 외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이 22일이니 제2 의무실이 당직 서는 걸로 아는데요.”
날카로운 내 대답에 박사님은 조금 놀란 듯하더니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양은 의무실이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네요.”
“박사님이랑 지낸 지가 몇 년인데요.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어요.”
“보통은 잘 모르던데…….”
물론 보통은 잘 모른다. 의무실에서 살다시피 한 나니까 알고 있는 거지. 10년 전에도 똑같은 시스템일까 싶어 떠보자 당첨이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박사님의 저런 태도가 항상 나를 미치게 한다는 걸, 지금의 박사님께는 말 할 필요가 없겠지 싶으면서도 화가 난다. 물론 미래의 박사님께도 말 못할 일이지만.
“저 의무실에서 잘 자요. 그러니까 담요는 필요 없어요. 게다가 여름인데 무슨 담요예요. 박사님 덮으세요.”
“밤에는 쌀쌀해요. 게다가 하나 양은 환자니까…….”
“그렇게 걱정되면 10년 후에나 잘 대해주세요.”
부루퉁하게 나온 말에 박사님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가 하나 양을 안 좋게 대했나요?”
“어- 그게……. 잘 대해주셨어요. 아, 진짜예요. 그렇게 미심쩍은 표정 짓지 마세요. 정말이라니깐요. 그냥, 더 잘 대해주라는 소리예요.”
“…그렇게 할 테니 담요 깔고 자요.”
“아휴… 알았어요, 박사님. 내가 또 박사님 말은 잘 듣거든요. 박사님이 워낙에 예뻐야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박사님의 태도에 결국 꺾인 것은 나였다. 나를 생각해서 그러신다는 데, 어쩌겠어. 박사님의 이 한결같은 친절함이 좋다가도 가끔씩은 답답하기도 하다. 박사님을 먼저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질 것 같아서 얼른 누워 눈을 감았다. 의무실 전등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박사님이 의무실 옆 침대에 몸을 뉘는 소리도.
“왜 여기서 주무시는 거예요. 연구실에 간이침대 있잖아요. 거기서 주무세요. 평소에도 의무실 침대는 딱딱하다고 해놓으시고선.”
“…하나 양은 저에 대해 잘 알고 있네요.”
“그거야… 알고 지낸 지 오래됐으니까요.”
“하나 양은 자주 다치나요?”
“아뇨, 저 원래 잘 안 다쳐요. 메카 조종사거든요. 다칠 일이 잘 없죠.”
대신 한번 다칠 때마다 크게 다치지만. 쓸데없는 말을 해서 박사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박사님이 말을 잇는다.
“그런데 의무실에 대해 그렇게 잘 알아요?”
“……그냥 알아요.”
내가 박사님을 좋아해서 하루 종일 의무실에 짱박혀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대답이 '그냥'일 건 또 뭐람. 속으로 말주변 없는 내 자신에 대해 욕하고 있는데 박사님이 웃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각 정보가 차단되니 청각이 급격히 활성화된다. 박사님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은 생각해요. 정말로 내가 꿈꾸는 세상이 오긴 오는 걸까, 하고. 그런데 하나 양이 딱 시기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서 힘을 주네요.”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에요.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박사님은 존재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거든요.”
“하나 양이 하는 제게 말은 모두 희망적인데, 정작 하나 양이 처한 현실은 희망적이지 못한 것 같아 그게 마음에 걸려요. 오늘도 이렇게 다치기나 하고.”
“아니에요, 박사님. 저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저 원래 되게 유명한 사람이거든요? 돈도 잘 벌고, 인기도 많고.”
박사님이 그래보여요, 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에이, 여기서는 웃는 게 포인트인데.
“하지만 오버워치에 오기 전의 삶과 온 후의 삶을 고르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고를 거예요. 오버워치에 오고 나서부터 매일이 충실해졌어요. 그 전에는 모든 게 시시했거든요. 마음 먹은 대로 되니까, 그냥 되는 대로 살았던 것 같아요. 아, 물론 지금은 달라요. 모두 박사님 덕이에요.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은 떨쳐버리세요.”
“…하나 양은, 미래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네요.”
“물론 두렵기도 하죠.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다 보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용기가 생겨요. 더 다가가고 싶다는 용기, 어떤 일이 닥쳐도 헤쳐 나가겠다는 용기 말이에요.”
아, 분위기에 휩쓸려 너무 말해버렸다. 다행히 박사님은 별 말이 없으셨다. 하긴,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궁금할 게 뭐 있겠어. 고백을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반응이 너무 없으니 조금 섭섭해졌다.
잠시 있자 졸음이 몰려와 눈이 스멀스멀 감기기 시작했다.
잠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는 내 귀에 박사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용기 내줘서 고마워요, 하나 양.”
***
“와, 씨발, 존나 예뻐.”
그것이 내가 박사님을 본 순간 내뱉은 첫마디였다.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다. 반쯤 넋을 놓고 해버린 말에 박사님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미소지으며 말했다. 웃는데 후광이 비쳤다.
“예쁜 입으로 그런 말 할 거예요?”
“아, 아니…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돌격부대에 배치된 코드네임 D.VA, 송하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송하나 양, 전 앙겔라 치글러예요. 의무관이고 코드네임은 메르시. 잘 부탁해요.”
“송이 성이고 하나가 이름이에요. 하나라고 편히 불러주세요.”
박사님은 긴장해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내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럼 하나 양. 나이가 어떻게 되죠?”
“네? 만으로 19살인데요…….”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부드럽던 박사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박사님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나 사령관님을 보았다가, 곧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제는 속담일 뿐이라더니…….”
“네?”
“아나, 소년병을 오버워치에 데리고 오다니 이게 무슨 짓인 거죠?”
“진정해, 앙겔라. 디바는 대한민국 육군기동기갑부대의 대위야. 엘리트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갓 생일을 지난 19살 애를 대리고 오다뇨! 거기다 엘리트라고요? 소년병이 어떻게 엘리트가 될 수 있죠? 이건 인정할 수 없어요! 상부에 항의서를 보내겠어요.”
“앙겔라! 이건 이미 결정된 사항이야. 게다가 본인의 의사로 온 거라고.”
“적어도 소년병은 아니죠, 소년병은! 어떻게 아이들을 끌어들일 수가…….”
박사님은 불같이 화를 내고선 가운자락을 휘날리며 저 멀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당황한 내게 아나 사령관님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 양, 미안하네. 앙겔라는 소년병 징집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하나 양의 잘못은 없어. 나중에 따로 사과하게끔 하지.”
아나 사령관님의 말씀에 얼떨떨하고 속도 상했지만, 속마음에 상관없이 웃음을 짓는 것은 내 특기였다. 직업상 몸에 익은 일이기도 했다. 상관없어요, 하고 말하고서 그렇게 그 날은 지나갔다.
그 날 그렇게 화를 내고 돌아간 박사님을, 나는 계속 피해 다녔다. 나름 소년병 출신으로 대위까지 진급한 엘리트인데, 마냥 애 취급이라니. 자존심이 상했다.
제1 의무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다쳤을 때도 방에서 의료용품으로 혼자 치료했다. 몇 번이고 박사님이 검진을 받으라고 문자를 보내거나 숙소에 찾아와도 없는 척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자잘한 상처뿐이라 이대로도 괜찮겠다는 알량한 생각이 무너진 것은, 3개월 후의 일이었다.
폭발의 여파로 건물 잔재에 깔려 다친 나는, 정신차려보니 제1 의무실에서 박사님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첫 날 이후로 피해 다니던 사람에게 상처를 치료받았다는 사실에 자존심도 상해서 모르는 척 눈을 감아버리자 박사님이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요, 하나 양.”
난데없는 사과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박사님이 붕대를 감아주며 말을 이었다.
“나는 하나 양이 싫은 게 아니에요. 하나 양처럼 어린 사람이 전장에 끌려와야하는 이 상황이 싫은 거예요. …그 날은 화내서 미안했어요. 진심이에요.”
박사님의 말은 몹시도 진지했고,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꽉 메어서, 말이 목에 걸린 듯 바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인 끝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겨우 ‘괜찮아요.’ 이 한 마디였다.
박사님은 그저 첫날 보여주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처음 박사님이 그 미소를 지어주었을 때부터 박사님을 좋아하게 된 것이었다.
***
이튿날 새벽 3시, 박사님과 나, 그리고 윈스턴 아저씨는 차를 타고 기지 밖으로 나갔다. 10여분 정도 이동하자 참호가 보였다. 박사님은 시간가속기-미래보다 두 배 정도 컸다-를 들고서 참호 한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리고 작은 기기를 설치했는데, 그게 시간가속기에 충격을 줘서 폭발시키는 장치라고 했다.
안전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제가 돌아가면 폭발 순간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 양의 존재는 유일무이하고, 시간의 흐름은 주관적이니까 아마 돌아갔을 때는 다음 날로 가 있을 겁니다. 이 곳에서 지낸 시간만큼 미래에는 공백이 생기는 거지요.”
그렇다면 23일 새벽으로 가겠구나.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 왠지 불안해진다.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준비는 됐습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윈스턴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고민했다. 윈스턴 아저씨는 이렇게 함으로써 미래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었다. 지금 하는 말이 마지막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덜컥 겁이 밀려왔다. 시선을 들어 박사님을 바라보았다. 박사님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없어요.”
하지만 설령 이게 마지막 말이라고 해도, 고백을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꼭 고백 장소가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축축한 흙냄새가 풍기는 참호 속에서는 절대로 아니었다.
윈스턴 아저씨와 박사님이 참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준비 되었느냐는 말에, 나는 그저 씩 웃고 외쳤다.
“박사님, 약속 지키세요! 잘 대해주기로 한 거요!”
참호 밖에서 박사님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윈스턴 아저씨가 ‘폭발합니다!’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 펑 소리와 함께 하얗게 시야가 물들어갔다. 새삼스럽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아, 좋아한다고 말할 걸 그랬나……. 찰나가 후회로 물들뻔 할 때,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박사님의 미소 진 얼굴이었다.
***
“하나, 하나! 정신 좀 차려 봐요!”
으으……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프다. 끙끙대며 눈꺼풀을 겨우겨우 들어 올리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박사님?”
“그래요, 저예요, 하나.”
시간여행을 하면 온 몸이 아프고 시야가 흐려지는 게 특징인가보다.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며 시야를 확보하려 애를 쓰자, 점차 박사님의 얼굴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박사님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왼쪽 뺨에는 작은 생채기까지 나 있었다.
미래로 오자마자 보이는 게 박사님의 상처라니. 속이 상했다.
“박사님, 많이 다쳤어요? 괜찮아요?”
“나보단 자기 자신의 걱정을 하도록 해요. …저는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요! 붕대까지 감고, 아윽!”
“그대로 누워있어요.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뭐? 건물 폭발에 휘말렸을 때도 멀쩡했던 갈비뼈가 왜 부러져? 윈스턴 아저씨의 작은 소형 폭발물이 생각보다 위력이 셌나보다. 끙끙대며 몸에 힘을 빼자 박사님이 지팡이로 갈비뼈를 금방 붙여주셨다. 통증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며 숨을 깊게 내쉬자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이제는 박사님이 또렷하게 보인다. …10년 전과 정말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아름답고, 멋지고, 사랑스럽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제2 실험실이 무너진 후에 바로 지원군이 도착했어요. 옴닉은 모두 소탕되었고, 지금은 다시 기지 복구 작업 중이에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윈스턴 아저씨가 많이 섭섭해 하겠어요.”
아저씨의 노력을 알기에 그렇게 말했더니, 박사님은 묘한 얼굴로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남 걱정 하지 말고 자기 몸부터 챙겨요. 하나가 항상 하는 말 아니던가요?”
칫, 내가 아무리 말해도 듣질 않았으면서 이럴 때 그 말을 돌려주시다니. 할 말이 없어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의무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2077년 7월 22일 오후 1시 7분.
…뭐지?
오늘은 23일이 되어야 하는데? 심지어 시간이 더 빨라져 있잖아!
“박사님, 저 어떻게 된 거예요?”
“건물이 무너진 후에 잔해 속에 부상을 입고 쓰러져있던 걸 발견해서 의무실로 옮겼어요. 갈비뼈가 두 대 부러졌고, 가벼운 뇌진탕과 타박상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편이에요.”
“……아.”
얼굴에 열이 오른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꿈을 꾼 거야? 박사님이 다쳐서 부상을 입었는데 나는 태평하게 꿈이나 꾸고 있었다니. 죄책감과 실망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정신 차리자마자 과거에서 박사님을 만나고 왔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다 갑자기 몰려드는 현기증에 이마를 짚자 박사님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하나? 정신이 든 게 맞아요? 어디 소속의 누구죠?”
“…오버워치 돌격부대 소속의 송하나 대위입니다.”
“맞네요.”
박사님이 미소 짓더니,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곤 더 누워있으라며 조심스레 몸을 눕힌다. 침대에 누워 귀를 기울여보니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분주하다. 기지가 습격당했으니 당연한 소리지만 부상자가 많을 테고, 박사님도 바쁜 몸일 것이다.
“가 보세요, 박사님. 저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조금 있다 올게요. 미안해요.”
박사님이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커튼이 쳐져 네모나게 보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꿈의 내용을 곱씹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천장과 똑같이 네모난 천장이다. 아, 박사님 진짜 예뻤는데. 내가 박사님께 얼마나 빠져있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꿈까지 꾸는 걸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불킥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커튼이 흔들리며 누군가가 불쑥 들어왔다.
“아, 하나 양. 정신이 들었군요.”
“윈스턴 아저씨… 괜찮아요?”
“전 괜찮습니다. 하나 양 덕에 연구시설도 무사하고요.”
“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한 일이라곤 무너지는 건물더미를 피해 박사님을 감싼 것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박사님이 상처 입은 걸 생각하니 시무룩해진다. 그런 내게 윈스턴 아저씨가 말했다.
“하나 양이 제대로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10년 전의 제가 꽤나 무모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군요. 하나 양의 주관으로 인해 시간축이 고정되지 않았다면 하나 양은 시공간의 미아가 될 뻔 했습니다.”
“…네?”
“하나 양은 14시간 동안 행방불명 상태였습니다. 오늘 새벽 3시경에 건물 잔해 속에 쓰러져 있던 걸 치글러 박사님이 발견해 의무실로 옮겼죠. 다른 요원들이 만류해도 박사님이 계속 그 자리에서 밤새 기다렸어요. 어때요, 몸은 괜찮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지금 시간여행을 한 게 맞다는 거죠? 그쵸? 10년 전에 우리 만난 적 있는 거 맞죠?”
윈스턴 아저씨는 씩 웃으며 내 말을 수긍했다. 뭐야! 꿈 꾼 줄 알았잖아! 박사님이 행방불명 이야기를 쏙 빼놔서 착각하고 말았다.
“아- 다행이다. 꿈 꾼 줄로만 알았잖아요! 저기 시계도 어제 날짜고!”
“아, 저건 기지가 습격당했을 때 고장 난 모양입니다. 제가 고치도록 하죠.”
윈스턴 아저씨는 시계를 잠시 만지더니 뚝딱 고쳐냈다. 다시 표시된 시계에는 2077년 7월 23일 오전 3시 45분이라고 되어 있었다.
“혹시 박사님도 시간여행을 하신 거예요?”
“아니요, 폭발에 휘말린 건 하나 양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양이 알려준 덕에 오늘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그 결과 경미한 피해로 끝났습니다. 다 하나 양 덕분이에요.”
“아저씨는 제2 연구소가 무너져서 어떻게 해요?”
“시간가속기를 제외한 모든 기기는 다른 곳으로 옮긴 후였습니다. 가속기가 있어야 하나 양이 시간여행을 해서 과거로 만나러 올 테니, 적절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죠.”
“왜 미리 말해주지 않고요?”
“그랬다면 타임 패러독스가 일어날 게 아닙니까. 당시 하나 양은 이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최대한 과거와 비슷하게 만들어야만 하나 양의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이 꼬이지 않고 이 시간대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거기에 더해 조금만 일이 틀어져도 자칫 옴닉의 습격에 완전히 당해버리는 일도 생겨버릴 수 있으니, 최대한 안전한 방법을 선택한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알면 안 되는 모양이었나 보다. 윈스턴 아저씨는 다시 한 번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라며, 푹 쉬라고 말하고는 홀가분하게 떠나갔다. 나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다. 박사님이 식사하러 가자며 나를 깨운 것이었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은 꿈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포기하고 박사님을 보았다. 여전히 눈부신 외모다.
“박사님, 존나 예뻐요.”
“존나라니… 예쁜 입으로 그런 말 할 거예요?”
“아뇨!”
나는 씩 웃으며 박사님에게 매달렸다. 박사님은 미소지으며 내 등을 쓰다듬더니 나를 일으켜 세웠다.
“배고프죠? 식사하러 가요.”
“네. 아, 박사님, 아까 왜 저한테 그 말 안 하셨어요?”
“그 말이라니요?”
“저 행방불명이었다는 말. 박사님이 계속 거기에서 저 기다리셨고, 또 우리 10년 전에 만났다는 거요.”
박사님은 빙그레 웃고는 그저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뭐지? 대답을 안 하시네.
“아, 그리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박사님 잘 해주기로 했으면서 화냈잖아요! 그건 뭐예요!”
“하나가 소년병 출신 아니라고 거짓말 했잖아요. 난 하나가 적어도 스무 살은 된 후에 우리가 만났다고 믿어왔었거든요. 소년병 출신, 그것도 엘리트라니까 하나가 고생했을 거 생각하니 순간 화가 나서… 미안해요.”
“거짓말 한 건 아니고 얼버무린 건데… 그게 그거긴 하네요, 뭐. 미안할 건 없어요. 그냥 떠올라서 말 한 거니까.”
우리는 기지 복구 중인 현장을 지나 식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옴닉의 침공을 받아 파괴된 건 윈스턴 아저씨의 제2연구소가 있는 북서쪽 구역만이라고 했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식사 중이던 부대원들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식사를 끝내고 다시 의무실로 돌아왔다.
박사님의 기분이 묘하게 좋아보여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물었다.
“박사님, 지금 기분 좋으세요?”
“네, 좋네요.”
“왜요?”
“10년 동안 품고 있던 걱정이 끝나서요.”
응? 이게 무슨 말이람? 10년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시간 여행 관련된 이야기 같은데. 알쏭달쏭한 내 얼굴을 보더니 박사님은 잔잔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10년 전에 하나가 시간가속기의 폭발과 사라진 후에, 제대로 이 시간대에 도착했는지가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다행히도 잘 도착했지만, 혹시라도 잘못됐을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요.”
“사실 저도 걱정이 좀 되긴 했는데, 어쨌든 이렇게 도착했잖아요. 그보다 박사님한테 별 일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박사님은 내 말에 눈꼬리를 휘며 또다시 잔잔한 웃음을 지으셨다. 아, 진짜 기분이 좋으신가보다. 정말로 기분 좋을 때나 가끔 짓는 웃음이어서 나도 따라서 가슴이 설렜다. 그리고 곧바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박사님이 갑자기 다가오시더니, 내 이마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하나가 무사한 게 제일 다행인 거죠.”
“어… 어……?”
“고마워요, 용기 내줘서.”
어… 그러니까 지금 이게……?
“박사님.”
“네, 왜 불러요, 하나?”
“제가 혹시 새벽에 자다가 박사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물은 건데, 박사님은 또다시 눈꼬리를 휘어가며 웃으셨다. 아, 진짠가봐. 아씨, 쪽팔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참호에서 좋아한다고 소리칠 걸 그랬다. 뭐야, 이게. 자다가 잠꼬대로 고백이라니. 이딴 일은 내 계획에 전혀 없었단 말야!
“다시 해요! 그런 건 무효야! 흠흠, 박사님, 저 박사님이 좋아요! 박사님이 저 어리게 보는 것도 알고, 제가 아직 한참 부족한 것도 알지만, 그래도 좋아해요!”
박사님은 이제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몸을 떨며 웃기 시작하셨다. 아니, 이게 지금 뭐야? 수많은 고백을 상상하며 생각했던 박사님의 반응 중에 이런 건 없었다. 정중하게 거절하거나, 미안한 듯 웃으며 거절하거나, 난처한 듯 거절하거나 하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혹시나 장난으로 알아들은 건가 싶어 나는 박사님의 왼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박사님! 나 정말 진지하단 말이에요! 내가 너무 무드 없이 고백했나요? 내일 다시 할까요? 네? 그렇다고 말해줘요!”
상상도 못한 반응에 반쯤 패닉이 되어 외치자 박사님이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 나를 보셨다. 그러나 얼굴에는 참지 못한 미소가 한 가득이다. …이게 지금 무슨 반응인 거야? 대체 뭐지?
“미안해요, 하나.”
…아. 역시.
단번에 가슴이 가라앉는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에이씨, 이게 뭐야! 나 진짜 장난 아닌데… 엄청 진지한데……. 미처 못 다한 말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친다. 어떻게든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달싹이는데, 박사님이 황급히 말을 이으셨다.
“웃어서 미안해요, 정말. 웃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하나를 10년 동안 기다린 걸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그만.”
“…네? 뭘… 뭘 기다려요?”
나를 10년 동안 기다리셨다고? 이제는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박사님의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10년 전에… 그러니까 제가 스물 네 살일 때, 하나가 미래에서 왔었잖아요. 사실 그 때부터 하나가 절 좋아하는 걸 알았어요.”
“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서 예쁘다고 연발하는데 어떻게 못 알아채요. 더군다나 의무관의 스케줄 같은 건 어떻게 외우고 있고. 제가 연구실에서 잔다는 것도 알고. 그걸 안다는 건 밤까지 종종 같이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의무실에 하루종일 있는 경우가 뭐 얼마나 있겠어요. 하나는 원래 잘 안 다친다고도 했고.”
“아…….”
“그 뒤로 하나랑 다시 만나기까지의 7년 동안, 미래가 두려워질 때마다 하나가 했던 말을 종종 떠올렸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일이 닥쳐도 헤쳐 나갈 용기가 생긴다고…….”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때는 말해놓고 별 생각 없었는데 직접 들으니 낯 뜨거운 이야기다.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낸 것도 모자라 본인을 앞에 두고 몰래 고백했던 걸 박사님이 알고 있었다니!
박사님 옆에서 보낸 지난 3년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부끄러워서 수치사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 그 때일 거다.
“열아홉 살의 하나가 절 좋아하기 시작한 건 금방 알아챘어요. 그 때는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서, 더 눈치 채기 쉬웠거든요. 나도 대답해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스물 두 살의 하나가 제게 용기 이야기를 안 해줄까봐. 그때의 하나는 혼자 짝사랑하는 것처럼 말했거든요.”
“아…….”
“웃어서 미안해요. 가슴이 후련해지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그만.”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만, 만약에 고백에 성공한다면 아마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자그마치 3년, 박사님의 옆에서 박사님을 좋아하며 보낸 시간 동안 나날이 깊어가는 마음이 결실을 맺는 것일 테니까. 혼자 애달프게 박사님을 좋아한 세월이, 보상받는 거니까.
그러나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나도 어느새 박사님을 따라 웃고 있었다.
“와! 그럼 제가 3년 동안 좋아하는 걸 처음부터 알고 계셨단 말이죠? 심지어는 좋아하기 전부터? 완전 너무하잖아?! 티도 안 내고!”
“제 나름대로 내색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걸요?”
박사님은 웃으며 내 머리를 다시 쓰다듬으셨다. 그러고 보니 머리 쓰다듬는 거, 나한테밖에 안 해주셨지…? 의무실에 놀러 가면 내가 자주 씹는 풍선껌도 종종 주시고. 휴일에는 잘못하면서도 같이 게임해주고. 한 번 의식하자 연달에 떠오르는 기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매 순간 다가가는 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하나가 용기를 내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예요. 나도 하나가 좋아요. …이거면 대답이 됐을까요?”
나는 참지 못하고 박사님을 끌어안았다. 박사님도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따라 박사님의 맥박이 춤추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박사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박사님, 정말 예뻐요. 첫눈에 반했어요.”
빙그레 웃는 박사님의 눈동자 안에 내 얼굴이 보인다.
박사님과 함께라면 어떤 미래도 두렵지 않다.
나는 행복한 기분으로 박사님과 마주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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