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루트 스포 주의
여광 餘光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주도록 해.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서늘하고 단단한 감촉. 두 사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겹쳐진다. 하나는 어린 소녀, 다른 하나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다. 높낮이에서 나이까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목소리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 둘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손에 잡힌 동그란 금속을 얼굴 가까이 집어 올린 그녀가 찬찬히 문양을 살펴 내려간다. 반지는 그런 데 문외한인 그녀에게도 독특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우연한 기회에 반지를 엿본 힐다가 반짝거리는 눈을 했으니 일단 미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또, 그녀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 정도로 푸른 빛을 내는 터키석은 꽤 귀한 축에 속했다.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반지의 가치를 알아보는 상인들이 상당한 값을 치르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팔지 않았다. 평소 같지 않은 선택이었다.
본래 그녀에게 물건의 가치는 재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남들처럼 무언가를 필요 이상으로 아껴본 적도 원해본 적도 없다. 소중히 한다고 해봐야 검이나 갑옷, 여비처럼 제 생존에 직결되는 것뿐이었으니까. 매일 같이 무기를 갈고 닦고 장비를 점검하는 일은 물건을 아끼는 행위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일과에 불과했다.
하지만 팔아 치우지 않은 물건 중, 반지는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내일의 편안함은 물론이고 생존에 직결된 물건은 더더욱 아니다. 지고 다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녀는 제 몸을 꾸미는 데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팔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신기했다.
반지의 가운데에는 터키석이 촘촘히 박혀서 아름다운 빛무리 문양을 하고 있다. 백색과 청색이 어울려 만들어진 반지. 한 여인을 위해 만들어진 반지다. 그녀로서는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제랄트는 항상 그에 대해 말을 아꼈다. 여인이 죽고 나서 제랄트가 간직했던 반지는 이제 그녀의 손에 있다. 죽은 자들의 반지였다.
세상엔 생각보다 훨씬 이상한 일이 많아. 어릴 적 무릎을 다친 그녀에게 제랄트는 그렇게 말했다. 동네 아이들에게 떠밀려서 난 상처였다. 그런 거에 비하면 너처럼 안 울고 안 웃는 것 정도야 별거 아니지. 아버지의 커다란 손을 기억한다. 붕대를 두르는 손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거칠고 투박한 손. 그때 아버지는 그 손으로 머리카락을 쓱쓱 헤집어 놓으며 웃었다. 그러니 넌 이상한 게 아니야. 남들보다 조금 느릴 수는 있겠지만.
제랄트 아이트너(~1180)
부모의 반지를 들고 그들의 묘비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아버지, 당신이 틀렸다고. 조금이라기엔 언제나 너무 멀고, 그래서 언제나 너무 늦고 만다고.
그녀가 빗속을 떠올렸다. 제랄트는 금방 죽지 않았다. 기절한 몸을 안고 도움을 기다리던 그녀는 어느 순간 더이상 아버지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그들을 발견했을 때 제랄트의 몸은 완전히 식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죽은 그를 어머니의 곁에 묻었다. 묘비에 여전히 어머니의 이름은 없다. 그 아래에 제랄트의 이름이 짤막이 추가되었을 뿐.
수도원에서 조촐히 치러진 장례식은 교단의 방식에 맞춰 진행되었다. 그날 그녀는 묘비 앞에 선 레아에게 물었다. 어째서 아버지를 이곳에 묻었느냐고. 레아는 고개를 숙인 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의 어머니가 묻힌 곳이니까요. 레아의 대답은 간결했다. 더 묻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분명 제랄트는 첫날 레아에게 그녀가 수도원 밖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소개했고 당시에는 그녀도 그걸 당연한 사실로 여겼다. 제랄트가 죽기 전에 이곳에서 반지를 보여주며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남긴 일기를 읽지 않았다면 레아에게 의문을 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은 그녀가 의문을 해결할 때까지 일일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수도원은 하룻밤 만에 무너졌다. 그녀가 사라진 5년 동안에도 세상은 멈추지 않고, 일발로 시작된 전쟁은 화마처럼 번져나갔다.
반지를 보여주면서 언젠가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전하라고, 제랄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진심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걸까. 기쁨도 슬픔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간한테 이런 걸 맡길 정도면.
그녀는 부모의 반지를 품에 다시 집어넣었다. 묘지 위에 놓인 꽃다발이 쓸쓸히 흔들렸다.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저 멀리 떠나버린, 돌이킬 수 없는 얼굴들. 완벽한 유리세공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는 그 얼굴들이 그녀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싸움이 끝났다. 세상은 삽시간에 다시 고요해진다. 몸을 피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면서 마을과 도시는 점차 제 활기를 되찾았다. 마치 전쟁을 겪지 않았던 것처럼. 5년간의 싸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상처만 오롯이 사람의 안에 남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결국 말이나 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 전락한다. 전쟁의 중심에 서 있던 수도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너진 성당은 제일 먼저 말끔히 고쳐졌다. 그 후에는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되어 그게 끝날 때쯤 수도원은 그녀가 아는 5년 전의 모습보다 훨씬 나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추기경, 경비원 할 것 없이 죽은 자들의 자리는 자연히 새로운 얼굴로 채워졌다. 사관학교는 전쟁의 여파로 인해 폐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어떻게 내년 봄에 다시 학생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음을 느꼈을 때 그녀는 일단 떠나려 했다. 레아가 위독하지만 않았더라면 멀리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듣기 위해 기다렸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순백의 존재가 된 레아와 그 피와 문장석을 먹고 영향을 받은 추기경들이 수도원을 또 한 번 발칵 뒤집어 놓는 일이 발생했다. 그녀가 다시 검을 들어야 했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레아마저 그녀의 품에서 숨을 거두자 그녀는 알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레아의 장례는 금방 치러졌다. 폭주한 추기경이나 거기에 휘말린 교단병들의 장례까지 함께 이루어지는 합동 장례식이었다. 장례가 진행되는 사흘간 수도원을 찾는 조문객의 행렬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세간에 레아는 병사, 추기경과 교단병은 마수의 침입을 저지하다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애도하는 군중 속에서 하얀 로브를 두른 세테스가 그녀에게 말했다.
“저들이 전부 순전히 레아의 죽음을 애도하러 왔다고 하기엔 어려워. 개 중에는 세이로스 교단을 살피기 위해서 온 자들도 있겠지. 정확히는 포드라의 미래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재회한 무렵부터 그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이야기가 있다. 포드라의 미래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 마치 아주 오래전에 쓰인 책을 외는 학자처럼, 혹은 묵묵히 정해진 길을 가는 늙은 고승처럼. 그는 결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법이 없다.
"부디 결단을 내려주게. 빠를수록 좋아. 여신의 힘을 가진 자네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레아도 그것을 바랄 거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구태여 덧붙이는 것을 봐선 세테스도 대답을 피하는 그녀 때문에 슬슬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침묵에 지친 세테스가 물러가면 다른 이들이 그녀를 찾아온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그중에는 허리가 구부러진 자도 있고 눈이 멀고 팔다리가 잘린 자도 있었다. 생긴 것과 사는 방식이 모두 제각각 다를 텐데도 그들 모두 그녀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그들의 발과 까마득히 올려다보는 그들의 눈을 보며 그녀는 자연히 레아를 떠올렸다. 수많은 이들의 경애와 경배를 한몸에 받으며 걷는 모습. 영웅이자 여신의 권속, 교단의 지도자. 무너지고 짓밟힌 땅의 구도자. 지금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병사를 부리고 칼을 휘둘러 목숨을 빼앗는 용병 따위가 아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선생님."
"선생님이 포드라의 왕이 되신다니 기대되는 걸요."
"당신 아래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저희 부모님이 편안하게 사실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살아남은 학생들이 그녀의 곁에 모여들었다.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여느 때처럼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무리를 빠져나왔다. 인적을 피해 걷는다면 그녀가 향해야 할 곳은 하나뿐이다. 탑은 이미 석양의 고즈넉한 빛에 물들어 어둑하고 고요하게 잠들어 있다. 담쟁이덩굴을 따라 계단을 오르자 그녀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석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무채색의 공간에는 창에서 쏟아져 나온 붉음이 기다랗게 번져 있었다. 그녀는 음영이 진 경계의 중간에 서서 멍하니 석실의 벽을 바라보았다. 벽의 갈라진 틈과 그 거친 표면을 눈에 담는다. 그러자 알 수 없는 감각이 밀려왔다. 안에서 한껏 두드리는 듯한 이상한 감촉이.
"선생님?"
부름에 그녀가 몸을 떨었다. 갑작스러웠기 때문인지 눈도 입도 평소보다 더 벌어져 있다. 돌아서서 상대방을 확인하자 그녀의 표정은 금방 돌아왔다.
"이런 데에 있었어요? 모두 총출동해서 찾고 있던데."
도로테아였다. 구불거리는 밤색의 긴 머리칼을 가진 그녀의 학생. 이제는 한 여인이라고 해야 하겠지. 5년이 흐른 지금, 학생 때의 앳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도로테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뭐, 전쟁도 끝났으니 잠깐 정도는 선생님을 쉬게 해 주면 좋을 텐데요."
쉰다라, 그녀가 유일하게 고개를 끄덕일만한 이야기였다. 반색하는 표정을 어떻게 눈에 담은 것인지 도로테아가 그런 그녀를 보며 소리 내 작게 웃었다.
"난 아무한테도 안 알릴 거랍니다. 바쁜 당신의 시간을 독점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니까요."
그녀는 도로테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따듯한 바다색의 눈동자는 마치 전쟁의 풍파를 조금도 겪지 않은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고맙다고 대답하자 그 눈이 다시 한 번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머, 전 그냥 제 욕심을 채우는 중인걸요?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게다가,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해드리고 싶네요. 그게 뭐든지."
말하는 와중에 도로테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얀 얼굴 위에 짙은 음영이 드리운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사람처럼 말을 마친 무희는 그러고는 말이 없었다. 시선은 밖을 향한 채로. 그녀는 그 곁에 나란히 서서 작은 창 사이로 비치는 저녁 놀을 내다보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하시면 들을 거고,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다 하시면 돕겠어요. 그러니 선생님, 기대 보는 게 어때요?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도로테아의 상냥한 말이 깃털처럼 그녀의 마음에 살며시 와 닿았다. 한편으로는 그녀 자신의 행실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잘 모르겠다. 힘들어했나? 그래 보였느냐고 물었더니 도로테아가 대답을 잠깐 망설였다. 뺨에 닿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자 찬찬히 일렁이는 옥빛 눈이 한 뼘 거리까지 성큼 다가와 있다. 밤색 머리칼에 석양이 번지는 것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가늘고 긴 손가락이 턱선을 스치고 지나가며 유령 같은 온기를 남겼다. 도로테아는 거둔 손을 살며시 말아 쥐며 읊조리듯 말했다.
"이렇게 쓰여 있어요. 나 불안하다. 외롭다......슬프다."
그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확인한바 거울 속 그녀는 언제나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인형 같다, 어딘가 오싹하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도로테아가 곧장 부정했다.
"말은 안 해도 다들 눈치채고 있을 걸요? 물론 하나같이 그게 왕위 문제나 대사교님 영향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미소가 도로테아의 입가에 스몄다.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 금방이었다. 처진 눈꼬리가 되레 서글퍼 보인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예전부터 사람의 감정을 읽는 데에는 자신이 없었다. 가까이서 본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순간의 호기심이 그녀를 부추겼다. 아주 작은 속삭임마저 전해질 만큼 둘의 거리가 긴밀해지자 도로테아의 표정이 변했다. 이번에는 알기 쉬운 표정이었다. 동그래진 눈과 붉게 물든 뺨을 지나 곳곳을 찬찬히 살펴보던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한 발짝 물러서자 도로테아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네? 소중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니, 갑자기 그런 질문을...."
역시 이상한가. 그래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 전하자 도로테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평소의 얼굴을 되찾은 도로테아가 눈을 깔고 골몰히 생각에 빠졌다.
"글쎄요.... 뭐라 말하기 어려운데. 워낙 넓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아래에서 굴러가던 시선이 별안간 덜컥하고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여기서 일반적인 의미를 말해봤자 소용없겠네요. 그쵸? 선생님이 물어보는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이번에는 도로테아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피하지 않고 마주 보자 원하던 답을 찾았는지 도로테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 먼저 한 손으로 어깨를 붙들어 온다. 그녀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정말로 소중한 건, 이렇게 닿았다가-“
어깨를 잡은 손이 목을 타고 오르더니 뺨을 감쌌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진다. 아랫입술을 핥는 감촉에 벌어지는 입을 도로테아는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눈을 감고 있는 도로테아에게서 꽃향기가 났다. 무슨 꽃이었지. 채 떠올리기 전에 향이 멀어졌다.
“.....떨어져도 절대 잊혀지지 않아요. 항상 남고 말아.”
이마를 맞댄 채 뱉는 숨의 끝이 떨렸다. 그 탓인지 도로테아의 말은 평소보다 연약하게 들렸다. 뺨에 대었던 손을 숨기듯이 뒤로 물리고서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살핀다. 눈이 만나자 다시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말로 할 순 없었어요. 가곡의 어떤 구절을 따와도 불가능한걸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이해하는 건 역시 어려우니까."
도로테아가 발끝을 관찰하는 동안 그녀는 말을 골랐다. 고개 숙인 표정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눈앞의 괴로움을 덜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어딘가 빠져 있는 미소의 원인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건네었던 시선의 의미를. 한마디 말과 말이 조각처럼 맞춰졌다. 알고 있었나. 끄덕임이 돌아온다. 어떻게?
“봤어요, 그 날. 울고 계셨죠.”
기억해, 선생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녀는 반쯤 뛰어오르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에 잠긴 석실의 벽. 그곳은 여전히 낡고 여전히 비어 있는 채로 남아 있다. 누군가가 소매를 붙잡고 흔들었다. 선생님?
"왜 그래요? 유령이라도 본 얼굴이야."
얼굴에 쓰여있다는 게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리도 잘 아는 걸 보면.
석양
붉은 길
붉은 계단
그 끝에 앉은
붉은 옷의 여인
"...당신은 적이야."
황제가 담담히 선고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검을 맞댄다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검 손잡이에 올라가는 손. 그 동작 하나하나를 보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 전에... 잠깐 어울려 줄래?"
다음에 벌어진 일은 그녀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공동안에 느닷없는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황제의 검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늘 궁금했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이지, 그 누구와도 달랐으니까. 내 앞을 막아선 처음 그때부터-"
어느새 성큼 눈앞에 다가와 선 황제가 그녀에게 손을 뻗는다. 붉은 손이 천제의 검을 쥐었고, 황제는 매끄러운 동작으로 그것을 뽑아냈다. 손안에 쥐어진 검신을 보며 생각에 잠긴 표정이 지독할 정도로 무감하다. 그녀는 황제의 손안에서 검이 붉게 빛나는 광경을 상상했다. 문장석만 있었다면 상상만으로는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내가 왜 당신에게 끌렸는지 알고 있어?"
반 발자국씩 가까워진다. 여전히 검을 든 채다.
"눈이야."
그리 말하며 황제는 웃었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요요히 휘어지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덜컥. 깊은 곳이 요동친다. 등에서 퍼지는 강렬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황제의 모습만은 선명하다.
"무언가를 빼앗긴 눈은 나도 잘 알고 있거든."
단단한 벽과 부드러운 몸이 그녀를 짓누른다. 귓가에 숨결이 닿았다. 서서히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다음에 만날 때는 당신과 나, 둘 중 누군가의 길이 끊어지겠지. 그래도..."
손가락이 스타킹 사이를 파고들었다. 부드럽지만 서늘한 감촉이었다.
"그래도 기억해, 선생님. 이 순간을."
어둠 속 뺨과 뺨이 맞닿은 거리. 끝이 날 때까지 표정이 보이는 일은 없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곳은 생각 이상으로 초라했다.
전쟁의 패자. 망국의 황제. 사상 최악의 이단자.
죽은 황제를 부르는 호칭은 많았다. 사람들의 입에 황제의 이름이 오르는 일은 이제 극히 드문 일이 되었다. 그녀와 가까웠던 자들조차 공공연한 언급을 피했다. 예민하고 위태로운 시기였다.
때문에 황제의 묘비에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아드라스테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딱딱한 글씨로 쓰여 있는 묘비는 그보다 간결할 수가 없었다.
시신은 제국이 수습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묘의 상태는 일국의 황제가 묻혀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심지어 이곳은 변방에 있는 평범한 묘지에 불과했다. 본래 대로라면 황제의 시신은 황제의 아버지와 형제자매가 묻힌 땅에 나란히 묻혔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녀도 당연히 먼저 황가의 묘를 찾았다. 하지만 그곳의 묘지기는 황제의 얼굴은커녕 관짝조차 보지 못했노라고 말했다. 때마침 페르디난트가 앙바르에서 정무를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포기하거나 아주 멀리 돌아가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재상의 아들이었던 그는 옛 궁정에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꽤나 많은 연줄을 두고 있었다. 알고 보니 무덤의 위치도 오래전에 이미 파악한 모양이었다.
“반대편에서 싸웠다지만 그녀는 엄연히 내 조국의 황제였어. 어딘가에 잘 묻혔다는 것 정도는 확인하고 싶었지. 적어도 말이야.”
앙바르에서 말을 타고 꼬박 한나절. 그녀는 페르디난트가 붙여준 길잡이를 돌려보낸 후 홀로 무덤 앞에 섰다.
황가의 묘에 안치하지 않은 것은 혹시나 모를 시신의 훼손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다. 작위가 낮은 귀족이 쓸 법한 작은 사당의 형식을 취한 것도 같은 의미에서였다. 황제의 무덤은 최대한 시선을 끌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녀는 비석 주위를 둘러싼 낮은 기둥을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보았다. 거기에 기대고 앉자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 묘지는 어린 시절의 그녀에게 비밀 기지나 다름없었다.
괴롭히는 아이들이나 손가락질하는 어른들이 없는 곳. 그 어떤 악의 섞인 조롱도 비웃음도 닿지 않는, 모든 것에서 떨어진 곳. 여기에서는 소리조차 희박하다. 어쩌다 부는 바람과 멀리서 우는 벌레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다.
그녀는 앙바르의 함락을 떠올렸다. 그녀의 검에 수많은 목숨이 스러지던 날. 끝끝내 그 칼날이 주저앉아 있는 황제의 목까지 드리웠을 때 어쩔 줄을 모르고 굳어버린 건 황제 쪽이 아니었다. 궁성의 문이 부서지고 그 안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리고 최후의 최후까지 항전하는 적병들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 답은 이미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망설였다.
베어줘. 적어도 당신의 손으로.
조금이라기엔 언제나 너무 멀고, 그래서 언제나 너무 늦고 말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진정으로,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녀의 얼굴에 붉고 미지근한 피가 튀었다. 아드라스테아의 황제는 단칼에 죽었다. 전쟁의 끝이었다.
마침내 평화가 도래했다고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습관처럼 최악을 대비했다. 많은 꿈을 꾸었고 덕분에 밤에 편히 잠드는 일은 드물었다. 풀리지 않은 의문들, 스스로를 괴롭히는 질문들이 항상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예를 들어, 만약에. 시답지 않은 이야기다. 만약 거기서 그때 그랬다면.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강했더라면. 약간은 달라졌을까, 하는 것들. 거기에는 같은 길에서 만나 손을 맞잡고 걷는 나날도 분명히 있었다. 모든 소음에서 벗어나 단둘이 밀월의 시간을 보내는 나날도.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주도록 해.
실로 잘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다. 반지가 묘비 위에서 빛을 받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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