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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유키란] 현세대를 표류하는 백수를 위한 생활백서. 下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10.03 23:20:15
조회 515 추천 29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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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흐름이 가끔은 달리 느껴질 때가 있었다. 특히 십대와 이십대의 시간 흐름이 그러하다. 짐작이 잘 가지 않는다면, 한 가지 생각을 해보자. 열 살과 스무 살의 시간 차이를, 이렇게 생각하면 한 번에 느껴지지 않은가? 


 아니라고? 아님 말고. 


 “그거, 권태기네! 권태기!”


 미타케 란과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였던 우에하라 히마리는 유키나와 란의 싸움을 그렇게 진단했다. 그녀의 권태기라는 말에, 란은 입에 머금고 있던 녹차를 그대로 모두 폭포처럼 뱉어낼 뻔 했다.


 “아니, 미나토 씨랑 란은 평소에도 그렇게 자주 싸우잖아.”


 히마리의 여자 친구이자, 애프터 글로우의 드럼인 우다가와 토모에가 란을 변호해주는 척 한 번 더 멕였다. 토모에의 말에는 ‘평소에도 자주 싸우면서, 새삼스럽게’란 뜻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었다. 


 “아니거든.”


 그게 언짢아 란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토모에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칼로 물을 베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란과 유키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댔으니까. 

 

 “맞잖아.”


 “또 그렇게 내 머리 위에...”


 “왔다~ 란의 필살기다~”


 가만히 오렌지 주스만 홀짝이던 아오바 모카가 느릿한 말투로 란의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대충 무마하기 위해 자폭개그를 친 거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지적을 받으니 란은 또 화끈해진다. 


 “아, 그립네... 그거.”


 앞치마를 두른 채 서빙을 막 끝마친 츠구미가, 이제는 조금 멀어진 기억을 머릿속에서 되살려냈다. 그 날 란은 누구보다 타올랐었지, 그녀의 머리 위 한 줄 기 브릿지보다 더.


 “옛날 기억나, 란~? 그때 반 혼자 떨어져서 출석거부하고...”


 “지금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샌다고?”


 모카의 놀림에, 란은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옛날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면 끝이 없다. 석양 노트부터 시작해서 제 정신으로 들을 수 없는 흑역사가 너무 많다. 적어도 술 세 병 정도는 들어가야 들어줄락 말락한 정도.


 “너희들한테 얘기한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서로 알고 있는 과거를 무기로 삼는다면, 란도 할 말이 많았지만 꾹 참았다. 뭐, 원래 소위 말하는 불알친구란 게 다 그렇다. 고민이 있을 때 위로해주는 것보다, 디스해주는 것으로 예의 아닌 예의를 차리는 게 소꿉친구고 부랄친구다. 


 마! 우리가 진짜 친구다...☆


 “별 일 없지 않겠어? 뜨거운 면이 없진 않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미나토 씨는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컵에 담긴 커피를 빨대로 휘적이던 토모에가 말했다. 평소라면 란도 토모에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오늘은 상황이 좀 많이 달랐다.


 “미나토 씨가 우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게.”


 미나토 유키나가 울었다. 로젤리아의 보컬, 바늘방석에 앉아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한, 사귀는 주제에 웃는 모습도 잘 안 보여주는 그 야박한 사람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전에도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원인이 저에게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란은 엄청나게 당황해버렸다. 


 “울렸다고는 말 안 했잖아, 란.”


 히마리가 입을 떡 벌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합동 라이브를 몇 번 같이 해서, 히마리도 유키나가 울었다는 게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게..... 죄송합니다.”


 란은 내가 죄인이요, 내가 죽일 년이오,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자그마한 먹구름이 란의 머리 위에서 비를 뿌리고 있었다. 꿀꿀해지는 기분에, 그것을 털어내려 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일단은 무조건 사과하는 게 좋지 않을까? 란 쨩?”


 “그래~ 이 소식이 만약 리사 씨 귀에 들어가면...”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이름을 언급하는 모카의 말은, 분명 환하게 웃는 것 같지만 어딘가 한 구석 그늘진 웃음을 떠올리게 했다. 란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나, 나는 미, 미나토 씨를... 그, 그래 믿으니까! 믿고 있으니까...”


 “란~? 말에 혼이 없는 걸~?”


 “모카, 그만.”


 한껏 장난기를 담은 모카를 토모에가 저지했다. 모카의 눈빛도 가늘어지고, 토모에도 그런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미나토 씨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너무 대놓고 겐세이 넣는데. 


 “아, 그러고 보면 란은 아직도 유키나 씨를 미나토 씨라고 부르는구나!”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이번에는 히마리가 다잡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십여 년이 다 되어 가고, 그렇게 서로 밀어내다 사귄 지 약 일 년이 넘었는데도, 란과 유키나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겠지만 말이다. 


 “그... 미나토 씨는 미나토 씨야.” 


 남들이 없는 곳에서는 서로 이름으로 부를 때도 있다고 말하면, 그걸로 또 뭔가 한동안 놀릴 것 같아 란은 그렇게 변명했다. 그런데도 애프터글로우의 모두가 란을 향해 ‘네 맘 다 안 다....’ 이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란은 언짢으면서도, 이제는 한 두 번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았다.


 내일 모레면 서른인데 다들 완전 애처럼 본다. 그게 불만스러웠지만, 란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스마트폰으로 막 날아온 문자를 확인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끓는점이 그렇게 낮진 않았다.


 “아, 이 시발...”


 아, 위엣말은 취소. 갑자기 들린 육두문자에 모두의 시선이 란에게로 향했다. 이를 빠득, 하고 가는 것이 그곳에 있던 모두가 유키나의 일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나이를 먹어가며 나름 철이든 그녀였지만, 여전히 미나토 유키나를 향한 끓는점은 전혀 낮아지려 하지 않았다.


 “가봐야겠다.”


 이를 어찌할꼬?



 

 란은 빠른 걸음으로 문자에 적힌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뭐 다른 메시지도 아닌, 체크카드 사용 메시지였다. 카드회사에서 온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술집의 이름이 쓰여 있으니 기분이 뭔가 묘하다. 책망하는 것 같아, 좀 그렇다.


 스마트폰은 유키나를 찾아 갈 때에도 쉬이 안 놔주려는 듯, 또 한 번 우웅 우웅하고 울려댔다. 그게 속이 아파져서,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지도 않고 란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앗, 란 쨩☆”


 기분이 좋은지, 살짝 들 뜬 목소리.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이런 목소리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고, 움직이던 발걸음도 그대로 멈춰버렸다.


 “리, 리, 리, 리사 씨?!”


 이 세상에서 무서울 것 하나 없던 란인데, 유키나와 사귄 뒤 이 지구 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하나 생겼다. 바로 이마이 리사였다. 정말 솔직히 회장하자면, 미나토 씨의 아버지보다 리사 씨의 허락을 받는 게 란은 더 힘에 부쳤다. 

 

 “오랜만이네~”


 스마트폰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리사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띈 채로 들려왔다. 누가 보지도 않는 채, 란은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공손히 들었다. 


 “네, 네... 오랜만이네요.”


 그렇게 길 한 복판서 굽실거리는 모습이 꽤나 볼만했다. 하지만 미타케 란에겐 이마이 리사는 그런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근데 어쩐 일로...”


 한없이 미안하면서도, 한없이 양보해줄 수 없는 사람.


 “아, 다름 아니라 유키나랑 연락이 안 돼서 말이야~”


 그럴 수밖에. 미나토 유키나는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갔다. 화도 강사로, 그리고 플로리스트로 일하는 란의 봉급으로 쓰는 스마트폰. 그걸 두고 갔다는 것은, 란에게 보내는 일종의 시위이자 삐졌다는 신호일 것이다. 란도 눈치가 많이 늘어,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란이라면 유키나가 뭐하고 있는 알 것 같아, 전화 했지~”


 “아, 저 그게... 뭐, 저도 지금 밖이라...”


 리사의 한 수, 한 수에 란은 미봉책만 거듭했다. 곧 있으면 한판승, KO승, 외통수, 체크메이트다. 그럼에도 무슨 일이 있으니, 별 일 없이 산다라고는 절대 먼저 얘기하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혹시 유키나랑 무슨 일 있었니?”


 “아뇨! 별 일 없었는데요!”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보고를 하는 것은, 솔직히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긍지 높은 버닝 스칼렛 브릿지에 상처가 간다. 


 “란이 그렇다고 한다면, 믿어야겠지.”


 리사는 란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태평한 말투로 말했다. 란이 생각하는 현대사회의 가장 큰 단점, 바로 말하는 상대의 표정을 알 수 없다는 점. 그래도 믿어야겠다란 말을 한 것을 보면, 정말 믿어주는 걸지도 몰라 하며 란이 마음을 놓으려던 찰나.


 “자꾸 그렇게 싸우면, 확! 뺏어갈지도 몰라.”


 리사는 그보다 더 두 수 위를 앞서나갔다. 란의 마음이 덜컥, 하고 흔들리며 차도에는 너무나도 큰 덤프트럭이 빠앙,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다시 출발했다. 


 “아하, 농담 농담~★”


 “농담이 너무 무겁네요.”


 농담이란 서리 섞인 말에 란은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간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너무 놀라 입 속에서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체인에 기름칠을 한 자전거마냥, 발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키나, 많이 신경 써줘.”


 리사 씨가 부담스러운 이유는,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별 거 아닌 이유였다.


 “언뜻 보면 강해보이지만, 그래도 많이 여린 애니까.”


 란이 아무리 유키나의 연인이라고 한들, 리사에겐 세월이 있었다. 란이 시간을 제 아무리 쌓는다 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까지 떨어진 시간보다,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몇 십 배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키나가 저를 선택해준 게 기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알겠어요.”


 그 옛날, 질투심이 많은 여자는 덕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란은 그저 저의 감정에 솔직한 것뿐이었다. 고작 그 이유 하나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욕해도 좋다. 속 좁다며 욕해도 좋다. 찌질하다며 욕해도 좋고, 욕심이 많다며 타박해도 좋다.  


 “나중에, 또 전화할게.”


 “네.”


 리사 씨의 말이 끊기고, 란은 그와 동시에 전화를 함께 끊었다. 전에는 먼저 전화가 끊길 때까지 기다렸었는데, 요즘의 란은 그러지 않았다. 


 그 전에는 원만했던 리사와 란이었는데, 유키나가 란을 선택한 뒤부터 둘의 사이는 좀처럼 예전과 같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친해 보였지만, 갈라지기 직전의 빙판길을 걷는 것마냥 어색하면서도 위험해보였다. 주변인들도 그것을 신경 써주었지만, 그러한 점이 변하진 않았다.


 그래도 어쩔까. 싫은 건 싫은 거고, 좋은 건 좋은 거다.



 

 황급히 걷던 란은 마침내 어느 한적한 바에 도착했다. 에어컨 리모콘 숨어버리듯 숨어버리더니, 결국 혼자 온 게 이런 곳이었다. 자기 돈도 아니고, 온전한 란의 돈으로. 


 “저기요, 저 번호, 번호 한번만 찍어주세요.” 


 입구에 막 도착하자마자 들리는 거지발싸개의 목소리. 영수증에 찍힌 금액을 보니, 0이 네 개가 넘어간다. 혼자 얼마나 마신 거야. 대체. 술도 약한 년이 부어라 마셔라 하며 먹어댔네. 


 “로젤리아 보컬 분 맞으시죠, 저 가끔 라이브 클럽도 가거...” 


 그것도 양주를, 이 미친년이.


 “야!!!!”


 저, 저, 저, 저.... 정신 못 차린 얼빵한 표정 좀 봐라. 분명 만나면 사과부터 하려 했는데, 막상 술에 떡이 된 면상을 보니 솟아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란은 엉겁결에 저 앞에 있던 사람의 멱살을 잡아버렸다. 


 “...뭐하세요?”


 가만 보고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히 식은 계단에서 울렸다. 블라우스의 옷깃이 부들부들한 게, 꽤나 만지기 좋은 감촉이다. 


 “미따께 산?”


 남자의 멱살이 아니라, 유키나의 멱살을 란은 잡았다. 멱살이 잡힌 유키나의 표정이 애매하면서도, 오묘하다. 둘 다 비슷한 뜻이지만, 알 게 뭐람.  


 “난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거든? 근데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잘못 된 거야.”


 계획하면서 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막 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생각처럼 안 되는 것들 중 가장 큰 것이 이젠 저의 곁에 있었다. 금 나와라 뚝딱. 도깨비 방망이로 떼어버릴 수 있는 혹이었지만, 어쩐지 떼어내고 싶지 않은, 아주 작은 마음의 혹. 


 “변상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하네오카 고등부로 진학한 뒤에 처음으로 공연을 볼 때부터, 그것도 아니면 도발에 당해 함께 합동 라이브를 했을 때부터?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 몸을 섞었을 때부터일지도 모르겠다. 뭐, 그게 어쨌든. 하나 뿐인 인생, 업어가며 살 사람 늘은 것은 분명하기에.


 “그냥 딱 한번만, 딱 한번만. 나한테 멱살 한번만 잡히십시다.”


 그 모든 억울함과 감정들을 그대로 담아, 당신의 마음에 치알쓰.

 

 “미친년...”


 그 말을 모두 듣던 남자의 입에서, 그리고 멱살을 잡힌 유키나의 입에서 동시에 그런 말이 나왔다. 분명 같은 단어인데, 그 단어에 서린 뜻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미친년이란 욕설을 들은 란의 얼굴이 그대로 화사하게 피어났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더. 




 석양이 조금 더 길어졌다. 들쭉날쭉한 게 아니라, 단순히 해가 지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의미다. 그러고 보니 조금만 더 있으면 여름이 다가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이렇게 손만 잡고 있어도 땀이 뻘뻘 나겠지.


 “미나토 씨.”


 란은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았다. 노을빛은 여전히 바뀐 것 없이 그대로다. 눈물이 날 것 같이 예쁘고, 어딘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빛깔도 고스란히 남아 있고, 한참을 그리워해도 어스름이 곁에 남아있는 것 또한 그대로다.


 “응, 미타케 씨.”


 유키나는 저의 손을 잡고, 저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가는 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걷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걸까? 그렇다면 손을 놓으면 될 텐데, 여전히 마음만 앞서 몸이 고생하는 사람이다. 붉은 노을은 붉게 타는데, 유키나는 그 노을보다 란의 브릿지를 더욱 머릿속에 그려냈다. 붉은 색을 볼 때마다, 이젠 란이 먼저 생각난다. 

 

 “우리가 만나게 된 건, 신이 점지한 게 아니라 신이 실수한 걸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실수를 해도 이런 대형 실수를 저지르다니. 이렇게 생각하면 참 신도 별 거 아니다. 설탕, 향신료, 예쁘고 깜찍한 것들과 함께 케미컬X를 섞은 것과 비슷한 정도의 실수니까. 


 “그치만 별 수 있나요?” 


 란은 여전히 유키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신의 실수라고 거창히 말한다고 한들, 골치 아픈 말들 따윈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다.


 “실수했으면 실수한 대로 살죠, 뭐.” 


 그때서야 란은 유키나를 뒤돌아보았다. 석양을 등진 그녀의 모습이 꽤나 눈에 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붉은 브릿지만은 눈에 선명하다. 역시 긍지 높은 버닝 스칼렛 어쩌구 브릿지다. 


 “그래.”


 유키나도 조용한 웃음을 입에 담고는, 그대로 란의 말을 긍정했다. 유키나의 대답을 들은 란도 다시 등 진 채로 걷기 시작했다. 등이 그렇게 넓지도 않으면서도, 그녀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걸 참 좋아한다. 믿음직해보이고 싶은 걸까?


 “그러니까, 그... 유키나.”


 란은 유키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유키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건방지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두 번 그런 게 아니라 이제는 익숙하기만 하다. 오히려 미나토 씨라고 부르는 것보다, 가끔은 그냥 유키나라고 부르는 게 더 마음에 든 것 같기도 하다.


 워낙 건방져야지, 란.   


 “너도, 나만 믿고 따라와.”


 전혀 예상치 못한, 조금 의외의 말이었다. 유키나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래졌다. 이내 란의 브릿지를 떠올리게 하는, 빨간 것이 유키나의 눈에 띄었다. 그게 맞나 싶어 유키나는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떠, 저를 방해하는 광채들을 넘어가서는 이윽고 확인했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는지 란의 귓불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그게 뭔가 귀엽고, 또 그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져, 유키나는 그대로 란을 따라잡았다.  


 그 모습이 마치, 난초에 뛰어드는 나비와 같았다. 


 “같이 걷자와.”


 우리, 느리게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죽을 만큼 뛰다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도 못보고 지나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아, 알았어요. 그만해요.


 -

 

 여전히 장기하와 얼굴들 1집을 들으면서 썻읍니다...


 멱살 부분과 마지막 걷자 부분은 1집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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