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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여왕님 소설은 도망치지 않아 -4

ㅇㅇ(175.223) 2019.11.12 22:49:51
조회 825 추천 20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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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에서의 생활은 궁정에서의 생활과 퍽 달랐다. 데리아의 몸치장을 도와주는 시녀 따위는 없었지만, 데리아가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젊고 아름답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없었다.

 

식사는 버터 한 조각 들어가지 않은 간소한 빵과 야채죽, 그리고 물 약간이 전부였다. 다른 신전 인원들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들은 식사 준비나 시설 유지와 같은 일상 업무로 돌아갔다. 데리아 역시 일상 업무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데리아는 신전의 장서관에서 무녀들과 함께 장서들의 필사본을 만들었다. 필사본의 사용처는 여럿이었지만 데리아는 별로 관심은 없었다. 데리아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케언 신의 가르침을 양피지에서 양피지로 옮겨 적었다.

 

무녀의 결산까지 마치고 나면, 수도원에서의 업무는 끝이 났다. 신전의 안온한 분위기는 이 삶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일과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데리아가 책상 위에 작은 함이 놓인 걸 볼 때까지는 그랬다.

 

작고, 섬세하게 짜인 함이었다. 하얀 자작나무에 양각된 꽃무늬가 눈에 띄었다. 아침에 방을 나갈 때까지만 해도 없던 물건이었다. 데리아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붉은 분이 들어 있었다.

 

붉은 분, 무녀들과 수도사들은 검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들은 화장하는 일이 없었고, 화장할 이유도 없었다. 이 사치스럽고 화려한 물건은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단 한 사람, 데리아를 빼면. 데리아는 붉은 분을 입술과 양 뺨에 바르고 업무를 보았다. 전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제대로 전달한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데리아가 문을 열자 복도에는 이미 일과를 끝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란스러웠다. 수상한 사람이라고 할 만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저녁 식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복도가 조용해지자 복도는 텅 비어 버렸다.

 

식사시간인걸요. 여왕님.”

 

뒤쪽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데리아를 데려온 무녀가 있었다.

 

잠깐 생각에 빠져 있었더니 아무도 없네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데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무녀는 이 신전의 총 책임자였고, 각종 의혹에 대해 알 권리가 있었다. 데리아는 그 권리를 존중하기로 했다.

 

제 방에 누가 들어왔었나 봐요.”

 

무녀의 입가에 띈 미소는 무너지지 않았다. 단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

 

그래서, 무언가 없어진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수상한 자가 몰래 숨어든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서요.”

 

증거는 있나요?”

 

무녀는 함을 열어서는 그 안에 손가락을 가볍게 대었다. 무녀의 새하얀 손가락 위에 붉은 얼룩이 묻어났다. 색조 옅은 붉은 분.

 

무녀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색이었다. 무녀는 그 분을 바닥에 쏟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다. 비취의 성에서 여왕을 데리고 나온 건 행운 가운데 행운이었다. 공주가 돌아오고 난 뒤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여왕이, 시녀 복장으로 위장하고 마당을 기웃거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행운에 취해, 여왕을 손에 넣었다고 방심하고 있었다.

 

이 신전은 무녀의 땅이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꼬맹이 때 견습 무녀 생활을 시작했고, 그 때부터 신전 구석구석을 닦고 쓸어내는 잡일부터 헌금을 계산하고 장부를 정리하는 일까지, 손대지 않은 일이 없다. 그런 신전 안에 여왕이 있다. 정말로, 손바닥 안에 쥐었다고만 생각했는데.

 

견습 무녀들이 서로에게 작은 선물을 주는 놀이는 굳이 금지하지 않았다. 무녀 자신도 견습 시절에 책상 위에서 놓인 꽃, 곱게 싸인 과자 따위를 발견하고 기뻐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무리 견습 무녀라고 해도 순서와 예의라는 걸 갖추어야 하는 게 아닌가?

 

데리아.”

 

은근한 미소, 부드러운 말씨는 몇 년에 걸쳐서 단련한 것이었다. 이 정도 동요한 일로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무녀는 침대에 걸터앉은 데리아에게 말했다.

 

이번만은, 과한 걱정을 하신 게 아닌가 싶네요.”

 

무녀는 데리아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무녀의 기억 속 데리아의 입술은 훨씬 더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그마저도, 무녀의 손가락이 떨어지자 분은 힘없이 떨어져 버렸다.

 

이것 봐요, 보통, 이런 건 기름에 개어서 발라야 오래 가는데 이 분만 덩그러니 놓여 있죠.”

 

무녀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데리아는 숨을 내쉬었다. 이 붉은 분은 별 거 아니다. 정말로.

 

이 분만 가지고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죠. 공주님이 보낸 사람이 여기에 숨었다고 해도 이런 걸 모를 것 같지는 않네요. 그리고 색조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죠? 공주님이라면 틀림없이 같은 걸 보내겠죠.”

 

견습 무녀들 중 누구일까. 무녀는 머릿속에서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찾아내기만 하면, 장서관에 처박아서 케언 신의 기도문을 필사하게……

 

무녀의 생각은 갑작스럽게 끊겼다. 데리아가 쓰러지듯 무녀에게 기대어 왔다. 무녀는 재빨리 데리아를 받아 안았다.

 

미안해요, 갑자기…… 힘이 빠져서.”

 

데리아의 눈에는 작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무녀라고 해도, 눈빛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내는 재주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긴장이 풀린 탓에 힘이 빠진 것이겠지.

 

무녀는 데리아의 부드럽고 따뜻한 몸을 껴안았다.

 

-

 

미안해요, 식사시간인데.”

 

그렇네요, 우리, 식사하러 갈래요?”

 

마침내 데리아가 발걸음을 옮길 만한 상태가 되자 무녀는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데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녀는 발걸음을 식당 대신 신전 쪽으로 향했다.

 

무녀는 어둠이 깔린 신전 속을 거리낌없이 걸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완전히 아는 것처럼, 그리고 무녀는 데리아의 손을 잡고는 지하실로 난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무녀가 도달한 곳은 포도주 보관실이었다. 무녀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창고지기의 의자에 걸터앉아서는 열쇠를 찾아 서랍을 덜컥거렸다.

 

여기요.”

 

무녀는 나무 책상 위에 포도주를 따라 올려놓더니 저장고 한구석을 뒤져서 곱게 포장된 빵조각을 꺼내 왔다. 데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포도주를 권하는 무녀를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공범이네요. 데리아.”

 

무녀는 뻔뻔하게 말하고는 작게 미소지었다. 데리아는 마주 미소지어줬다. 둘은 건배하고, 새빨간 포도주를 들이마셨다.

 

데리아.”

 

.”

 

이름으로 불러 줘요.”

 

무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그렇게 부탁했다. 데리아는 무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르타.”

 

마르타는 두 사람의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데리아와 함께 잔을 들이켰다. 빵조각이 바닥나고 밤이 깊고, 두 사람의 입에 포도주의 진한 향이 맴돌자 마르타는 입을 열었다.

 

좋아했어요. 데리아. 지금도.”

 

-


미안 오늘은 야한 건 없어


내일은 꼭 야한 거 넣어서 가져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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