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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자작 소설 - 자매들 (프롤로그)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11.29 20:53:16
조회 395 추천 15 댓글 5
														



 한 시대가 끝을 고하고 있었다.


 이브노아 공국의 남부와 북부는 오랜 시간 갈등을 거듭해 왔다. 두 지역은 많은 것이 달랐고,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념이었다.


 남부는 동쪽의 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고 그를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남부는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고, 이는 대공과 황실 사이의 혼약을 통해 더욱이 확고해졌다.


 점점 제국의 손길은 공국의 깊숙한 부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중앙 귀족 대다수에게 제국의 입김이 닿아 있었으며 이들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했다.


 지방 귀족들이나 평민들은 공국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제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선 제국은 공국을 집어삼키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야심만만한 침략자나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공국의 독립을 소망했다. 나아가 왕정의 몰락 이후 약해진 공국 내부의 결속력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중심에는 바로 북부가 있었다. 북부의 주민들 대다수는 강경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남부와 북부의 명백한 이념 차이는 두 지역 간의 불화로 이어졌으며 이백 년이 넘는 기나긴 시간 동안 크고 작은 분쟁을 겪으며 서로 앙숙과도 같은 관계가 되었다.


 남부와 북부의 오랜 갈등은 이윽고 내전의 단초가 되었다. 독화살에 맞아 아만다 이브노아 대공 부인이 숨졌고, 암살의 배후로 북부의 대귀족인 프리기두스 가문이 지목되었다. 율리우스 프리기두스는 남부로 내려와 재판대에 설 것을 요구받았고, 이에 거절한 프리기두스 가문은 군사를 일으켜 남진했다.


 이브노아 대공 가문이 주축이 되어 남부는 북부에 격렬히 맞서 싸웠다. 두 가문간의 분쟁은 이윽고 온 공국을 아우르는 전쟁의 파동으로 변했다.


 처절한 사투 끝에 승리한 것은 남부였다. 율리우스 프리기두스는 전사했으며 두 아들 또한 죽었다. 그의 군대 또한 몰살되었으며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 모두가 보복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전쟁 다음에 찾아온 것은 숙청의 피바람이었다.


 귀족들이 저들간의 권력 다툼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민심은 날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이단 신앙이 빈민들 사이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나날이 크게 성장해 나갔으며 곳곳에서 혁명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국은 점점 황폐해져 가고 있다. 부패했으며 탐욕에 눈이 먼 통치자에 대한 불신과 원망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원래부터 깊었던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은 그 시점에 이르러 폭발 직전에 달해 있었다.


 그러한 불안한 정국 속에서 제국으로 유학을 갔던 라예리아 솔리스 이브노아 공주가 본국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했다.


 하나의 시대가 끝을 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시대가 알 속에서 껍질을 두드리며 깨어나려 꿈틀거리고 있었다.




 라예리아는 대성당 지하 납골당의 한편에 서서 여인의 석상을 바라봤다. 석상은 몸의 조형은 완벽했으나 얼굴은 윤곽만을 대강 잡아놨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라예리아는 그것이 결코 그 일을 맡은 자의 게으름 때문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부터 여신의 직계 혈통인 사람을 한낱 조형물 따위로 완벽하게 표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공백으로 남겨둔 것은 겸손함과 배려심이 이유였으리라고 라예리아는 생각했다.


 라예리아는 석상에 가까이 다가갔다. 아래를 내려 보며 오른손을 내민 모습의 석상 뒤편으로 납골단지가 안치되어 있었다. 그 작은 방의 위쪽에는 석판에 녹인 금을 부어 새긴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만다 솔리스 이브노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영면에 드셨나이다.’ 라예리아는 글자에 손을 대어 만졌다. 그녀는 도중에 ‘솔리스’라 적힌 부분에서 손을 멈췄다.


 “공주님의 어머님께선 자애로운 분이셨습니다.”


 뒤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제사장이 그곳에 서있었다. 이방카 플라니타스는 거의 한 세기에 가깝게 삶을 연명하고 있지만 아직 나이에 비해 기운이 넘쳐 보였다. 물론 그 기운이 점점 빠른 속도로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때에 비해 이방카는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사실 누구나가 그랬다. 요즘 같은 정국엔 오히려 기운이 넘치는 자가 이상하게 보였다.


 이방카는 주름진 손을 비비면서 다가와 석상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리곤 잠시 후 돌아보며 말했다.


 “아만다 님께선 생전에 죽은 뒤에 본국인 페르상투스가 아닌 이곳에 안치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송하게도 여기에 모시게 되었죠. 이 나라에 대한 애정이 정말 각별하신 분이셨습니다.”


 라예리아는 얼핏 그게 당연한 얘기처럼 들렸다. 어머님께선 결혼한 후로 쭉 이 땅에서 사셨다. 수십 년에 이르는 시간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이 땅에서 살았다면, 인정받을 만도 할 터였다.


 “아만다 님의 일은 유감입니다.”


 이방카가 그 얘길 꺼냈다. 라예리아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돌아서서 납골당을 나가며 말했다.


 “도시가 혼란에 빠져 있어요. 아버님께선 심신이 모두 지치셔서 대응을 하지 않고 있고요. 교단은... 당신들은 자기 일을 훌륭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어요. 오히려 문제만 늘리고 말았죠.”


 라예리아가 질책했다. 이방카는 그 말을 듣곤 오히려 날이 선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뒤따르며 탓하듯이 말했다.


 “이 땅은 저주받았습니다.”


 라예리아는 그 말을 듣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머님보다도 더 긴 세월을 이곳에서 살면서 자식에서 손자까지 둔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교단은 성실히 일했습니다. 다만 불경한 자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죠. 솔직히 말해, 우리가 그들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여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들 말입니다. 그 배교자들은 아무리 정화해도 끝이 없더군요.”


 이방카가 열변을 토했다.


 라예리아는 광장에서 십자가에 묶여 불타 죽어가던 이들을 떠올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교단은 그러한 만행을 태연하게 저질렀다.


 “그래서, 그게 당신의 대답인가요? 이 땅이 저주받았다는 게?”

 “이대론 아무리 대책을 강구해도 힘듭니다. 여신께서 이 땅을 버렸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하고 불화가 끊이지 않는 등 망조가 드는 것입니다. 다시 태양이 이 땅을 비추게 하기 위해선 자식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라예리아는 이방카의 말이 품고 있는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넌지시 제국이 개입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라예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사장을 쳐다봤다. 그녀는 이내 완고하게 부정했다.


 “제국은 절대 안 돼요. 또 다시 그들의 손을 빌렸다간 나라가 뒤집어질 거예요.”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습니까? 제국의 손길을 왜 거부하시는지요?”

 “그들은 이 땅의 주인이 아니니까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해요. 외부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면 다음에도 또 그러게 될 거예요.”


 그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바였다.


 층계 앞에서 이방카가 멈춰 섰다. 라예리아가 돌아보자 그녀가 얘기했다.


 “제국도 그 우리 중 하나입니다. 공주님께서도 그렇고, 이 땅의 모든 것이 그렇죠. 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초승달 반도로 이주한 자들은 본래 페르상투스에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공국과 제국을 분리해 본다는 건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잊은 것이나 다름없죠.”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끝이 없어요. 중요한 건 현재예요. 당신네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국이 공국의 문제에 개입하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런 자들은, 또한 솔리스 이브노아가 통치권을 거머쥐는 것 또한 내심 불쾌해하기 마련이죠. 공주님께선 제국과 깊은 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간과해선 안 돼요. 그게 공주님의 가장 큰 힘이니까요. 오히려 공주님께선 좀 더 적극적으로 그 힘을 사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신성술을 다루듯이, 그 특권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라예리아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이방카를 바라봤다. 이방카는 벽을 붙잡고 힘겹게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라예리아는 그녀의 옆에서 팔을 붙잡고 부축해 오르는 걸 도와주었다.


 회랑으로 나온 뒤에 이방카는 라예리아에게 감사의 의미로 손을 모아 절을 하고는 한 발자국 물러서서 말했다.


 “달리 공주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만.”

 “뭐죠?”

 “공주님의 여동생 분에 관한 얘기입니다.”




 밤이 깊어져 감에도 연회장은 아직 환했다. 샹들리에에선 수십 개의 촛불이 활활 타올랐고 술과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의 발걸음은 쉴 새가 없었다.


 복도의 한편에선 곡예사들이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높이 든 고리를 뛰어서 넘거나, 짤막한 횃불 여러 개를 공중에 던져 돌리거나, 그 근처에선 악단이 그때그때 분위기에 맞춰 음악을 연주했다. 귀족들이 서로 재잘거리는 소리와 합쳐져 연회장은 제법 시끌벅적했다.


 검은 머리의 소녀, 제니아 이브노아는 황금 의자의 옆에 방석을 여러 개 깔고 앉아 그 광경을 따분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곧이어 연주 소리가 작아졌다. 새로운 곡예사가 도구를 들고 걸어오더니 이내 다른 곡예사의 머리에 끈으로 고정한 사과를 올려놓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서 한손에 든 단검을 겨누었다.


 쿵, 쿵,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빨라진 음악의 박자가 긴장감을 조성했다. 곡예사는 잠시 집중한 뒤에 단검을 던졌다. 단검은 정확히 사과에 적중해 움푹 박혔다. 지켜보던 귀족들이 감탄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곡예사가 꾸벅 절을 하곤 퇴장하려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시시하구나.”


 순간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 말을 한 건 황금 의자에 앉아있던 사내였다. 원래 갈색이었던 머리칼은 군데군데 희어졌고 두 뺨은 움푹 들어가 날카로운 인상을 보다 신경질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카인 이브노아 대공은 불과 몇 년 새에 부쩍 늙은 모습이었다. 자랑이던 탄탄한 근육은 축 쳐졌고 수염이 덥수룩했으며 피부도 창백했다. 손과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예전처럼 사냥을 나가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오래 서있지도 못했다.


 그는 요즘 위대하신 분, 혹은 미치광이 둘 중 하나로만 불렸다. 그 말을 한 자들도 대개 둘 중 하나로 갈렸다. 죽었거나, 혹은 곧 죽을 운명이거나.


 “네놈이 감히 왕의 어전에서 그따위 유치한 술수를 부려 내 눈을 속이려 하다니!”


 대공은 들고 있던 술잔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쾅 내리치며 성을 냈다. 그는 이내 끙 하고 소리를 내며 힘겹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제니는 지켜보고 있다가 일어나 아버님을 부축해 도와주었다.


 카인은 딸의 도움을 받아 곡예사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곤 사과에 박힌 단검을 빼 들어 살펴보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가짜로구나. 감히 이 따위 가짜 검으로 흉내를 내어?”


 카인이 근처의 하인에게 돌아보더니 명령했다.


 “여봐라, 새 사과와 진짜 단검을 가져와라.”


 순간 연회장 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인이 명령받은 물건을 가져오자 카인이 곡예사의 머리에 새 사과를 고정시키곤 아까 단검을 던진 곡예사에게 진짜 단검을 건네어 쥐어주었다.


 “던져 봐라.”


 카인이 물러서며 명령했다. 곡예사는 단검을 쥔 채로 사과와 대공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공포로 떨렸다.


 “어서.”


 대공이 재촉하자 곡예사는 자기도 모르겠단 식으로 단검을 던졌다. 날아간 검은 아슬아슬하게 이마의 바로 앞에서 한 바퀴 돌아 사과에 꽂혔다. 이어서 안도하는 소리와 함께 귀족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만!”


 대공이 소란을 잠재우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곡예사를 노려봤다. 그는 수염을 손으로 만지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흥이 돋질 않는구나.”


 대공이 이내 하인에게 돌아봐 명령했다.


 “여봐라, 안대를 가져오너라!”


 하인이 우물쭈물하자 카인이 재차 말했다. “안대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제야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인은 단검을 뽑고는 곡예사의 머리에 새 사과를 올려 고정시켰다.


 “왜 이리 조용한 것이냐, 분위기를 띄우란 말이다!”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허나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박자가 제멋대로였다. 이윽고 웅장하며 경쾌한 음악이 연회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즈음 하인이 안대로 쓸 만한 검은 천을 가지고 돌아왔다.


 카인은 하인에게 곡예사의 눈에 그것을 씌울 것을 명했다. 작업이 끝나자 카인은 곡예사에게 다가가 손에 단검을 쥐어주며 말했다.


 “표적은 저 앞에 있다. 어디 한 번 맞춰 보거라. 만약 성공한다면 내 네게 큰 보상을 약속하겠다.”


 그가 보지 못할 텐데도 카인은 손을 들어 저 앞을 가리켰다. 그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고 입가엔 묘한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곡예사는 얼굴을 떨면서 망설였다. 카인이 말했다. “던져라.” 그러나 곡예사는 거칠게 숨을 내쉴 뿐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러자 카인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노성을 냈다.


 “던져라 이 쓸모없는 것아!”

 “그만둬요!”


 그때 연회장의 저편에서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아가씨가 이쪽으로 걸어오며 외쳤다. 귀족들이 그녀를 보곤 옆으로 물러섰다. 라예리아 공주가 자신의 아버지의 앞에 서더니 곡예사의 눈을 가린 안대를 풀어주었다.


 “이런 건 옳지 않아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요.”

 “여긴... 여긴 나의 나라야!”


 카인이 노발대발했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일그러진 표정의 한편엔 크나큰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감히 내게 명령을 해!”


 이내 그가 들고 있던 금으로 된 잔을 라예리아에게 던졌다. 라예리아는 잔에 머리를 얻어맞아 뒤로 넘어졌다. 이내 그녀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순간 귀족들 사이에서 헉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예리아는 바닥을 짚으며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카인은 여전히 분이 식지 않아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씩씩거렸다. 그가 이내 비틀거리면서 쓰러지려 하자 제니가 뒤에서 부축했다.


 “지치신 것 같아요. 좀 쉬세요.”


 제니가 속삭였다. 그녀는 하인을 불러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된 대공을 침실로 옮길 것을 명했다.


 대공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 가고 난 뒤에 제니는 언니의 근처로 다가가 말없이 내려 봤다.


 그녀는 이내 주위의 귀족들을 향해 돌아봐 말했다.


 “자, 이제...”


 제니는 악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서서 손뼉을 쳐 연주를 재개할 것을 명했다.


 “하던 거나 다시 하죠.”




 라예리아는 새벽이 되도록 떠들썩한 연회장을 멀리 그늘진 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라봤다.


 요즘 연회는 쉬지 않고 열렸다. 갖가지의 이유를 붙여 매일 성대하게 열렸다.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도시 곳곳에서 굶어 죽어가는 이들이 속출하는 것과는 달리 궁전은 언제나 축제 분위기였다.


 이번 연회는 라예리아 공주의 생일이 코앞이라는 명목으로 열렸다. 앞으로 며칠간은 그런 이유로 하여금 더 열릴 예정이고, 생일이 지나면 또한 그런 이유로 하여금 더 열리리란 걸 쉬이 예측할 수 있었다.


 라예리아 공주의 시선엔 짙은 무력감이 담겨 있었다. 무력감. 그건 그녀의 삶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단어였다. 언제나 찬란했던 그녀의 삶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건 불과 최근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라예리아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불행과 역경의 벽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라예리아 공주는 손에 쥔 피 묻은 붕대를 내려 봤다. 아까 전 하인이 감아주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불필요한 배려였다. 그녀의 이마에 났던 상처는 벌써 깨끗이 나았다. 흉터조차 남기지 않고. 그녀가 가진 치유의 힘을 발휘하면 그 정도 상처는 순식간에 낫는 게 가능했다.


 허나 마음의 이 쓰라린 상처는 결코 낫지 않는다. 라예리아는 침울한 표정이 되어 붕대를 꽉 쥐었다.


 “많이 아팠나요?”


 고개를 들자 언제 온 것인지 여동생이 서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엔 술잔을, 왼손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보았음에도 라예리아는 아직도 그 모습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여동생이 절름발이가 된 건 라예리아가 유학을 간 뒤였다. 듣기론 사고로 인해 발을 크게 다쳤다고 한다. 하필이면 신경 부분이 손상되어서 신성술로도 완벽히 치유가 불가능했다.


 여동생은 옆으로 와 앉으며 지팡이를 내려놓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기울였다. 일이 년 전만 해도 새끼 고양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진했던 여동생은, 어느새 이처럼 표정의 변화 없이 술을 마실 수 있는 숙녀로 변해 있었다.


 여전히 작은 체구이며 가냘픈 몸을 하고 있지만 라예리아는 최근 들어 여동생을 대할 때마다, 배후에 가려진 그림자처럼 겉에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아버님을 이해해 줘요. 요즘 정신이 많이 불안정해요. 오늘도 그 탓에 그런 걸 거예요.”

 “알아. 원래 상냥하시던 분이었으니까. 혹시 너한테도 그랬니?”


 라예리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여동생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여동생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 가벼운 말이 어쩐지 신경이 쓰이고 속을 쓰리게 했다.


 라예리아는 낮에 제사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버님이 여동생을 편애하고 있다는 말을. 의회를 그 아이의 측근들로 채우고 이런 연회에도 그런 자들만 뽑아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플라니타스 가문,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어머님이 살아계실 적에 의회를 주도했던 귀족들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라고 했다.


 ‘이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 저들이 먼저 선수를 칠 겁니다.’ 이방카가 강경한 어조로 경고했다.


 라예리아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지금껏 여동생과 사이가 나빴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비록 유학을 떠난 일이 년 새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곤 하나...


 “계속 앉아 있을 건가요?”


 여동생이 일어나 앞으로 와 서며 물었다. 그녀는 연회장의 밝은 곳을 향해 돌아봤다. 그리곤 다시 이쪽을 봐 한손을 내밀었다.


 “같이 춤출래요?”

 “그 발로?”

 “못할 건 없어요. 딛는 게 불편할 뿐이지 움직이는 건 잘 되니까요.”

 “음...”


 라예리아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결국 응했다. 이런 식으로 여동생이 먼저 제안을 해온 건 처음이었기에. 손을 붙잡고 일어나자 여동생이 다른 한손도 내밀었다. 라예리아는 당황해 물었다.


 “어, 여기서?”

 “여기가 좋아요. 그늘진 곳.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


 라예리아가 망설이자 여동생이 휙 손을 낚아채 붙잡았다. 그러곤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마주보며 몸을 살며시 흔들기 시작했다. 라예리아는 여동생에게 맞춰 움직였다.


 “난 어둠이 좋아요. 내 약점을 가려주죠. 내 의도를 숨겨주고요.”


 라예리아는 여동생의 검은 머리칼을 바라봤다. 그녀의 금발과는 두드러지게 차이가 났다. 둘은 어머니가 달랐다. 여동생은 사생아였다.


 라예리아는 여동생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완벽히 그러지는 못했다. 라예리아는 단 한 번도 어둠에 기대어 자신을 숨긴 적이 없었다.


 “누구로부터?”


 라예리아가 물었다. 여동생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입가에 지으며 대답했다.


 “내 적들.”


 라예리아는 마음 같아선 그게 확실히 누군지 묻고 싶었으나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불안이 적중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아니에요. 가족이니까요.”


 여동생이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은 다정하게도 들리는 한편에, 묘한 악의를 품고 있어 오싹하기도 했다. 라예리아는 그 악의가 누굴 향한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자신인가, 아니면 정말로 다른 누군가인가.


 라예리아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는 사이, 저편에서 들려오던 음악이 좀 더 느릿하고 가라앉았으며 다만 서정적인 것으로 변했다. 그러자 여동생은 본격적으로 춤을 출 준비를 취했다.


 그녀가 손을 놓고 한 발자국 물러나더니 드레스의 양쪽을 잡고 위로 올리며 무릎을 굽혀 간단하게 인사했다. 라예리아는 뒤늦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입술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어 쪽 하고 소리를 내며 마찬가지로 인사를 건넸다.


 라예리아는 여동생과 춤을 출 때면 항상 자신이 남자 역을 맡아서 했다는 걸 떠올렸다. 함께 마지막으로 춤을 춘 게 꽤 된 일임에도 저 아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위안이 되었다. 너무나 달라져 버린 현재의 여동생에게서, 과거와 이어지는 연결점을 하나 찾아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불안으로 덧칠되었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것이 아닌가 하고. 그저 자기 혼자 쓸데없이 의미부여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여동생은 열심히 춤을 췄다. 거침이 없으면서도 실수 또한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동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함께 했을 땐 그렇게나 실수가 많았는데.


 “잘 하네.”


 라예리아는 여동생의 팔을 붙잡고 한 바퀴 돌린 후, 바싹 붙어서 허리로 손을 내리며 말했다. 이윽고 그녀는 여동생을 위로 들어 올렸다. 여전히 여동생은 가벼웠다. 어른스러워졌지만 늘 한편으로 걱정스러웠던 연약함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라예리아는 오묘한 기분이었다. 그 사실에 기뻐해야 되는 것일까?


 “언제 이렇게 능숙해졌어?”

 “언니가 없을 때요.”

 “...내가 없을 때 많은 걸 배웠구나.”


 라예리아는 갑자기 슬퍼졌다.


 “다들... 너무 많이 변했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라예리아는 여동생을 내려놓곤 물러나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갑작스레 슬픔이 북받쳤다.


 “왜 울어요?”


 여동생이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라예리아는 뒤로 가 의자에 앉았다.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낸 끝에 그녀는 겨우겨우 감정을 다잡고 울음을 멈췄다.


 “난... 모르겠어.”


 라예리아가 손등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세상이 너무 많이 달라진 것 같아.”


 그러자 여동생이 얼굴을 찡그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겐 너무도 다르게 보여.”


 라예리아는 이내 일어나며 말했다. “지친 것 같아. 미안, 돌아가서 좀 자야겠어.” 그리곤 연회장을 떠났다.




 라예리아는 한밤중에 식은땀에 젖어 그녀의 방의 침대에서 깨어났다.


 라예리아는 탁자가 있는 곳으로 손을 뻗어 어둠 속을 더듬다가 이내 물병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가서 벌컥벌컥 마시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한숨을 돌리고 나자 겨우 진정이 되었다.


 무척이나 기묘한 꿈이었다. 무섭고 섬뜩하기도 한 반면에 묘하게 안정이 되기도 했고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다. 분명한 건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그건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분명 그렇다. 끔찍할 터이다.


 꿈속에서 라예리아는 목을 졸리고 있었다. 명백히 살의가 담긴 손아귀였다. 주위는 캄캄했으며 그 억센 손아귀를 뻗치고 있는 자 또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라예리아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 손아귀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결국 조금씩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시야가 점멸하며 점점 뿌옇게 번져가는 와중에 손아귀의 주인이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어둠이 그녀의 뒤편으로 물러나며 감춰져 있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단지 윤곽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라예리아는 ‘역시.’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숨이 끊기기 전 찰나의 순간에 확실해진 의심이 어쩐지 안도감을 주었다.


 의식이 한계에 달할 즈음 라예리아는 꿈에서 깼다. 암흑에서 다시 암흑 속으로 돌아와 있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마치 미래에 대한 예언과도 같이 현실적이게 느껴지는 악몽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할 터였다.


 그때 너머의 문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라예리아는 화들짝 놀라 그쪽을 보았다.


 “누구야?!”


 이내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리며 한손에 등불을, 다른 한손엔 지팡이를 쥔 소녀가 들어왔다. 제니였다.

 

 여동생은 문을 닫고 안쪽으로 걸어와 탁자에 등불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옆에 지팡이를 세워두고 침대로 올라왔다.


 라예리아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옆으로 물러나자 여동생이 이불 윗부분을 살짝 들춰 안으로 들어왔다. 여동생이 가까이서 올려보더니 물었다.


 “자고 있었군요. 나 때문에 깼나요?”

 “...아니, 잠깐... 목이 말라서 깨어났어.”

 “많이 졸려요?”

 “왜?”

 “잠깐 대화를 나눌까 해서요.”

 “상관없어.”


 라예리아는 등불에 비춰져 절반만이 선명하게 드러난 여동생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여동생은 이 짙은 어둠과 잘 어울렸다. 검은 머리칼도, 어두운 색채가 다소 강한 회색의 눈동자도, 파리한 몸도 그녀의 주위에 감도는 음침함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라예리아는 여동생의 본성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전에 알던 여동생은 그랬다. 하지만 그런 믿음도 서서히 깨지고 있었다. 시간은 여동생의 한쪽 발을 못 쓰게 만들었고 어쩌면 그보다 더한 변화를 가져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라예리아는 그 동안에 여동생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건...”


 라예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우물쭈물 하고 있자 여동생이 말을 이었다.


 “현재의 체제는 오래 가지 못해요. 아래에서부터 점점 불이 올라오고 있죠. 아직은 따뜻한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머지않아 발목을 태울 정도로 거세지겠죠.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미래예요. 우리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몰락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건.”

 “...그렇겠지.”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죠. 궁정은 아부하는 자들로 꽉 찼고 그나마 능력이 있는 자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문제엔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우리가 나서야만 해요.”


 라예리아는 여동생이 말하는 ‘우리’에 과연 어디까지 포함되고 어디부턴 포함되지 않는지 무척 신경이 쓰였다.


 “난 권력에는 관심 없어요.”


 여동생이 말했다. 그녀가 이내 덮쳐와 라예리아를 눕히고 위에 올라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에 강압적인 의지가 엿보였다. 여동생의 그런 모습은 무척 생소했다.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그런 모습은.


 “단 하나에만 관심이 있죠.”


 여동생의 잿빛 눈동자가 불빛을 반사해 어둡게 반짝였다. 입가엔 비틀어진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라예리아는 여동생의 그런 모습으로부터 짙은 욕망의 기색을 느꼈다. 광기에 가까운 충동과, 극단적인 갈망을.


 “이 나라를 전부 가져도 좋아요.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처단하겠어요. 여태껏 해왔던 대로 하면 돼요. 언니는 밝게 빛나는 태양, 나는 그 뒤편에 머무는 그림자... 모든 필요악들, 죄, 잘못은 내가 짊어지겠어요. 나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여동생이 손을 뻗어 볼에 대었다. 그 손은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그 말 또한, 무척이나 냉혹하게 들렸다.


 “대신에 언니를 내게 줘요.”


 그 기이한 제안에 뭐라 반문할 새도 없이 여동생이 턱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라예리아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저항하려 했으나 예상 외로 두 팔을 붙든 손아귀의 힘이 셌다. 한순간 틈을 허용하자 혀가 입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라예리아는 결국 그 강압적인 애정 공세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둘은 한참을 타액을 교환한 후 여동생이 먼저 물러나는 것으로 하여금 떨어졌다.


 여동생이 입술을 축축하게 적시고 흘러내리는 것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덧붙였다.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줘요.” 라예리아는 얼굴을 붉힌 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여동생이 입술을 포개어 오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또 다시 허용하고 말았다.


 여동생이 튜니카 안쪽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주무르자 라예리아는 놀라 크게 소리를 내었다. “딱딱하게 서있어요.” 여동생이 유두를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게 죄책감을 갖고 있단 거 알아요. 날 받아들이면 전부 용서해 줄게요.” 귓가에 닿은 속삭임은 무척 감미로웠다. 가슴에 닿는 손의 감촉이 보다 민감하게 느껴졌다. 라예리아는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신음했다.


 “우린, 우린 이러면 안 돼.”

 “왜죠?”

 “자매니까...”

 “그건 확실한가요?”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라예리아는 신경이 쓰였지만 능숙하게 민감한 곳을 찾아 애무하는 여동생의 손길에 정신을 빼앗겨 되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여동생은 좀 더 아래로 손을 내렸다. 허벅지 사이로 손이 비집고 들어오자 라예리아는 몸을 떨었다.


 “그만해!”


 라예리아는 여동생의 손을 쳐내곤 일어나 침대 구석으로 도망쳤다. “이제, 이제 그만해. 이건 도가 지나쳐.” 라예리아는 여동생에게서 나는 희미한 술 냄새를 맡았다. 취했고, 오래 떨어져 있다 보니 외로워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여동생이 흥이 깨져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뭘 그만두길 바라는 건가요?” 여동생은 젖은 손가락을 자신의 튜니카에 문질러 닦았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자연히 끝나는 건 없어요. 오히려 휘몰아치듯 시작되어 자비 없이 휩쓸고 갈 뿐이죠. 그런데, 대체 누가 뭘 그만두길 바라는 건가요?”

 “넌, 넌 취했어.”

 “그렇다고 해서 다를 건 없어요.”

 “그래서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거야.”

 “이성적으로 세상을 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요. 언니는 뭐가 중요한지 몰라요. 혼자만 그릇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죠. 세상은 처참히 뒤틀려 있는데 똑바로 보려 하니 늘 벽에 가로막히죠. 여기서 뭐가 보이죠? 여기 있는 건 언니와 나밖에 없어요. 하지만 내 뒤엔... 무수한 의도가 꿈틀거리고 있죠.”


 여동생이 두 손을 내려 네 발로 기어서 성큼 다가왔다. 연약하고 작은 체구였으나 눈빛에는 반항심이 가득했다. 꼭 작은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발톱을 숨긴 검은 고양이.


 튜니카 아래로 뻗은 얇은 두 다리가 불빛에 비춰져 희미한 광택을 띠었다. 라예리아는 어째선지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동생이 이처럼 소녀가 아닌 여자처럼 보이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난 언니를 죽여야 해요.”


 여동생이 코앞으로 다가와 어깨와 볼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라예리아는 순간 오싹해서 몸을 떨었다. 여동생이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려 라예리아의 손에 포갰다.


 “세상이 내게 그러기를 강요하고 있죠. 다른 방법 따윈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그런 식으로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우리 둘 중 하나가 서로를 죽여야 온전히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여동생은 바싹 다가와 껴안았다. 그리곤 어깨에 고개를 두고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예요. 세상이 자기와 언니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내게 강요한다면 나는 언니를 택하겠어요. 나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세상을 처참히 무너뜨리고 짓밟아서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하겠어요. 그 대가가 무엇이든 간에...”


 그 목소리로부턴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여동생은 이내 물러나더니 침대에서 내려가 도로 지팡이와 등불을 들고는 이쪽으로 돌아봤다.


 “좋은 꿈 꿔요.”


 여동생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며칠 뒤 라예리아 공주의 생일 연회가 열렸다. 연회장은 평소보다도 더 북적였다. 이번 생일이 성인식을 겸하고 있다는 점과 라예리아 공주에게 아직 짝이 없다는 걸 고려하면 이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참석했어야 됐을 터이지만, 시기를 고려하면 딱 현실적인 광경이기도 했다.


 “성인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공주님.”


 플라니타스 가문의 차남이 찾아와 인사했다. 공주는 연회장을 두리번거리다가 뒤늦게 그에게 돌아보곤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곤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제사장이 보이지 않는군요.”

 “증조모께선 현재 몸이 편찮으십니다.”


 라예리아는 며칠 전에 만났을 때 이방카가 건강했음을 떠올렸다. 신성술을 구사할 수 있는 그녀가 갑작스레 병에 걸렸을 리도 없을 터였다.


 “당신 형은요?”

 “형은 현재 아버지와 함께 루푸스로 떠나 있습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고향으로 돌아가 안정될 때까지 머무실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긴 나 혼자로군요.”


 라예리아가 침울해져 말했다. “당신도 몸을 사리는 게 좋겠어요.” 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란 걸 떠올리고 라예리아가 동정하며 말했다.


 그가 고개 숙여 절한 후 떠나자 라예리아는 원형 기둥에 등을 지고 서서 다시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다.


 라예리아는 문뜩 생일날에 이처럼 한가한 게 올해가 처음임을 떠올렸다. 굳이 생일날이 아니더라도 예전엔 어떤 자리든 간에 그녀가 모습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소란이 일고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현 황제의 조카이자 대공의 첫째 딸, 라예리아란 이름에 뒤따르는 권력은 그처럼 막강했다. 솔리스, 그리고 이브노아. 각자의 나라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두 개의 가문.


 ‘사람들은 제국을 증오해.’


 라예리아는 그 점을 떠올렸다. 그건 최근에야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한창 어머님의 그늘 아래에서 보호받던 때에는 어렴풋이 눈치는 챘지만, 확실히 느끼지는 못했다. 그 누구도 그녀가 황가의 피를 지니고 태어났다고 해서 안 좋게 보는 일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그건 동경의 대상이자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얼핏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대륙을 제패한 제국의 위대함과 강력함은 선망할 만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철저히 제국인의 관점으로 봤을 때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공국의 입장에서 제국은 자신들이 사는 대륙을 넘어 다른 대륙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멈출 줄 모르는 침략자일 뿐이다. 단지, 자신이 솔리스 이브노아이기에 그렇게 느끼지 못했을 뿐.


 라예리아는 제사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그녀의 말대로, 황실에 도움을 청한다면 그들은 흔쾌히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그들의 손을 적절히 빌리면 현재 공국에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도 있으리라. 라예리아는 그 부분은 의심하지 않았다.


 허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예리아는 여전히 그 부분이 의문이었다. 제국의 도움을 받아 아버님을 뒤편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다면 그건 이브노아가 아닌 솔리스가 거머쥔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라예리아는 시선을 연회장의 저편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푸른색의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의 곁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시녀가 서있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을 한 아리따운 여자였다. 두 사람은 어느 중년의 남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머리에 차려 입은 모양새가 수수한 자였다. 라예리아는 그의 이름이 티베리우스란 사실을 겨우 떠올렸다. 그녀가 유학을 간 사이에 여동생의 교사로 성에 초청받아 온 자였다.


 라예리아는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기묘했던 짧은 순간을. 여동생은 그 이후로 한 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았다.


 ‘여동생은 이제 권력의 중심에 서있어. 나와 동등한 입장이 된 거야. 언제나 올려보기만 했지만, 이젠 저 아이가 나를 내려 보려 하고 있어. 점점 나는 저 아이에게 있어 눈엣가시나 다름없게 되어가겠지.’


 제니아 이브노아는 서녀였다. 그렇기에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태생은 늘 약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오히려 동등해지는 게 가능했다. 그녀는 솔리스가 아니었다. 솔리스가 아니면서 라예리아의 다음 가는 위치였다.


 ‘우린 서로 적이 될 수밖에 없어.’


 “좋은 날에 왜 그리 표정이 어둡느냐?”


 생각에 잠겨 있던 라예리아는 황급히 돌아봤다. 어느새 옆에 아버님이 와 서있었다.


 “아뇨 그냥...”

 “혹시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이라면 내 사과하마. 그날은 내가 좀 예민했던 것 같구나.”

 “전 괜찮아요.”


 라예리아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상냥한 아버님의 모습은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으나 얼마 안 가 평소처럼 신경질적으로 변하리란 불안한 예감이 그녀를 마냥 안심하지 못하게 했다.


 차라리 미워할 수 있다면 한결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예리아는 아버님의 고충을 이해하기에 그가 처참히 망가져 갈수록 오히려 동정심이 들었다.


 아버님은 형제와 배우자를 모두 암살당해 잃었다. 나아가 반란을 일으켰던 율리우스 경은 아버님의 절친한 벗이었다. 내전 이후 아버님에게 남은 것은 이제 지탱하기조차 힘든 금관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는 불안한 권좌뿐이었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라예리아는 변해버린 아버님을 그저 슬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같이 건배나 하고 싶구나.”


 아버님이 들고 온 술잔을 건네면서 말했다. “그래요.” 라예리아는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버님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 더불어 자신의 생일 연회까지 망치고 이곳의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기에 순순히 응했다.


 라예리아는 근처의 식탁에서 포도주 병을 집어 마개를 딴 뒤에 먼저 아버님의 술잔에 따르고 그 다음 자신의 술잔에도 따랐다. 그런 후 둘은 서로의 잔을 부딪쳐 건배했다.


 아버님이 술을 마시지 않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가 눈짓으로 하여금 먼저 마시라고 지시했다. 라예리아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살짝 기울여 포도주를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지독히도 쓴 맛이 혀를 자극했다. 라예리아는 얼굴을 크게 찡그렸다.


 “으, 이 맛엔 도저히 적응하질 못하겠어요.”


 라예리아가 잔을 내리며 말했다. 아버님이 슬쩍 웃음을 짓더니 잇따라 술을 마셨다. 그는 잔을 비울 때까지 쉬지 않고 단번에 마셨다. 그리곤 크으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을 내렸다.


 “네 어미가 생각나는구나. 넌 아만다와 무척이나 닮았지.”


 아버님이 말했다. 라예리아는 엷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어머님처럼 되려면 한참 멀었죠.” 그 얘길 하고 있자 몹시도 그분이 그리웠다.


 “글쎄...”


 아버님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이내 그가 기침을 했다. 그것이 그치지 않고 오히려 정도가 심해지자 라예리아가 다가가 걱정스레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다. 그가 또다시 기침을 하자 이내 피가 튀어 라예리아의 드레스에 묻었다. 라예리아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릴 듣고 연회장 내의 사람들이 모두 그쪽으로 돌아봤다. 아버님은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에 찬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이내 바닥에 쓰러져 입과 코에서 피를 쏟아냈다. 라예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다가가 신성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독이야...’


 라예리아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머님을 앗아간 그 저주스러운 물건이 이번엔 아버님을 노리고 사용되었음을. 라예리아는 아버님을 품에 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안 돼요. 제발, 가지 마세요...” 


 그가 떨리는 손을 들어 옷깃을 부여잡더니 힘겹게 소리를 내었다. “네가... 네가...”


 정적에 휩싸여 있는 연회장에 대공의 죽기 전 한 마디가 적나라하게 퍼져 나갔다.


 “네가 독을 탔구나...”







===========================================


이하 잡담.


자매들 Sorores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올해 5월 경에 조아라 GL 장르에서 다른 제목으로 연재했었고


내용이 너무 부실해서 습작으로 전환한 뒤에 리메이크에 돌입했습니다.


이 글에 올린 부분은 약 1만 8천자 분량으로,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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