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이자 현역 고등학생인 시라사기 치사토는 스케줄로 짜인 삶에 익숙했다. 그렇기에 등교한 치사토가 교실에 들어서서 하는 일에 정확한 순서가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 먼저 급우들에게 인사하고 2. 자기 자리에 앉아서 3. 심호흡한 다음 기대 반 두려움 반의 마음으로 손을 책상 안에 넣는다.
하나의 의식처럼 매일 반복되는 그 행위의 의미를 아는 것은 치사토 본인뿐이었다. 그래서 책상 안이 텅 빈 것을 알아챘을 때의 실망감 역시 온전히 그녀 혼자만의 것이었다. 비어있는 책상만큼의 허전함을 느끼며 치사토는 며칠 전 일을 생각했다.
시발점은 마을에서 열린 핼러윈 행사였다. 시간도 남았기에 가볍게 일반인 코디로 돌아다니던 치사토의 등을 누군가가 콕콕 찔렀다. 혹시 팬이 알아차렸나 싶어 조마조마하며 돌아본 치사토는 긴 검은 머리의 미소녀와 눈이 마주치고 안심했다. 그녀의 학교 후배인 하나조노 타에였다.
"해피 핼러윈이에요, 치사토 선배. 그리고, 트릭 오어 트릿~"
"어머, 타에 짱. 해피 핼러윈."
상큼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돌려준 치사토는 타에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아이는 가끔 어린 아이 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말을 걸어줬는데 미안하지만, 지금 과자는 가지고 있지 않아. 미안해."
"어...? 가지고 있지 않아요? 어쩌지, 장난을 생각 안 했는데. 음..."
진지한 표정으로 쓸데없는 일을 고민하던 타에는 오래지 않아 개구쟁이 같은 표정과 함께 나름의 답을 내었다.
"지금 생각나진 않지만, 뭔가 놀랄 만한 것을 선배 책상 안에 넣어둘게요."
"무, 무리해서 장난치지 않아도 돼, 타에 짱."
그 자리에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 뒤로 등교할 때마다 책상 안 미지의 존재를 상상하는 치사토의 발걸음은 한층 들떠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타에의 \'장난\'은 오지 않았고, 이제 치사토는 아쉬움을 넘어 초조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런가. 그게 우리 줄리엣의 기분이 언짢았던 이유구나."
치사토의 소꿉친구, 세타 카오루는 그렇게 말하고는 찻잔 속의 홍차를 우아하게 홀짝였다. 마치 동화 속의 왕자님 같은 모습이어서 치사토는 그녀가 학교에서-정확하게는 근처 다른 마을에 걸쳐- 누리는 인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치사토 입장에선 예전에 같이 연극을 한 이후로 계속 자기를 줄리엣이라고 부르는 카오루를 멋지게만 볼 수는 없었지만.
하지만 그런데도 치사토가 카오루를 카페로 불러낸 이유는 치사토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최적의 상대가 카오루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랜 시간을 같이하며 치사토의 수많은 \'처음\' 타이틀을 가져간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 처음으로 키스를 나눈 사이, 처음으로 같이 잔 사람, 그리고 처음으로 헤어진 사이까지.
치사토의 전 여자친구인 카오루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질문했다.
"그 타에라는 아이는 어떤 사람이지?"
"너도 알잖아. 하나사키가와 여학원 2학년 학생. 밴드 포핀파티의 기타리스트. 취미는 러닝과 점토 공예. 좋아하는 것은 토끼."
"아니, 그런 것들 말고. 내가 듣고 싶은 건 타에라는 사람이 치사토에게 어떤 존재냐는, 그런 것이다."
카오루의 질문 덕분에 치사토는 자기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닭살이 돋는 말투 등 이겨내야 할 고난이 많기는 했지만, 역시 카오루는 좋은 상담 상대라는 것을 치사토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카오루가 따뜻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장고하던 치사토의 입에서 이윽고 답이 튀어나왔다.
"...사선. 그 아이는 내게 있어 사선이야."
"설명해 줄 수 있겠어?"
"여태까지 내가 만난 좋은 인연들은 나랑 평행선을 그었어. 나와 선이 겹치지는 않지만, 손을 잡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 주는 그런 사람들."
마치 너처럼 말이야. 치사토는 일부러 한마디를 생략한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타에 짱은 달라. 그 아이는 내 선을 침범하고, 뚫고, 조각내버려. 그래서 사선이야."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야말로 운명의 짝으로밖에 안 들리는데, 왜 그녀랑 안 사귀는 거지?"
카오루의 물음에 대한 치사토의 답은 다소 의외였다.
"그 애는 미인이고 스타일도 좋으니까."
"치사토의 전 연애 상대를 생각해보면, 취향이 남들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은근슬쩍 자기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비친 카오루였지만, 치사토 역시 카오루의 외모는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 부분은 무시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이게 혹시 애정이 아니라 그저 욕정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어서. 성욕에 이끌려 시작했다가 망한 지난 연애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거든."
말을 마친 치사토는 홍차로 목을 축이려다 앞의 카오루를 보고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 카오루가 나빴다는 말은 아니야. 넌 확실히 좋은 연애 상대였어."
나 같은 애 상대로는 지나칠 정도로. 치사토는 마지막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오루는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치사토. 내가 사랑의 증거를 알려줄 테니."
카오루는 길고 멋진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 옆 가를 툭툭 쳤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눈에 마법이 걸린다고 한다. 얼마나 멀리서든, 얼마나 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든 그 사람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마법이."
정말로 그런 게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카오루와 헤어지고 다음 스케줄 장소로 가는 택시 속에서 치사토는 생각했다. 그녀는 한동안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별 의미 없이 눈 속에 넣었다.
먼저 알아챈 건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이었다. 매끄러운 흑발 다음으로는 큰 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난기가 섞인 미소로 웃는 얼굴까지. 치사토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람이 웃어주는 상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라는 현실 때문에.
타에는 장을 보고 오는 길인 듯 매장 마크가 프린트된 봉투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타에의 선배이자 치사토의 급우인 히카와 사요가 같은 매장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이지적인 미인이라 타에의 취향일 것 같다고 치사토가 막연히 생각했던 사요는 실제로도 타에와 잘 지내는 것으로 보였다. 입맛이 써진 치사토가 두 사람을 시선에서 놓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타에가 손을 뻗어 사요의 손을 잡는 모습이었다.
"어째서 내가 아닌 건데!"
치사토가 소리 지르며 책상을 밀자 넘어진 책상이 교실 바닥에 닿으며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치사토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를 들어 올리고는 그것마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분을 못 참고 씩씩대던 치사토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굴러떨어졌다.
"눈물.... 나, 그 애를 진짜로 좋아했던 거네."
마치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기라도 할 것처럼 치사토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표정이 가려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슬픔과 분함이 섞인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그 미소가 나를 향해줬으면 했어! 그 손이 내 손을 잡아줬으면 했어! 그런데 왜! 왜 내가 아닌 거야...."
치사토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점점 울음에 잠기어 가다가 끝내 조용해졌다. 잠시 동안 침묵으로 멈춰졌던 시간을 다시 움직인 것은 감독의 목소리였다.
"컷!"
치사토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여전히 눈물범벅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었지만 이미 슬픔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대신 거기에 자리 잡은 것은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스태프가 그녀의 얼굴을 정리해주는 동안 감독이 다가와서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연기 멋졌어, 치사토 씨! 이거 기대 이상인걸?"
"어머, 그럼 제 연기를 별로 기대하지 않으셨다는 뜻인가요?"
무례했던 감독의 말에 무심코 평온한 목소리로 날을 세운 답을 해버린 치사토는 아차 싶었다. 다행히 감독은 자기 잘못도 있어서인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평소의 치사토 씨는 뭐랄까, 이런 질투 같은 감정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말이지. 모두에게 웃어주는 아이돌이기도 하고."
"그래요? 하지만...."
정리가 끝난 완벽한 아이돌의 얼굴로, 치사토는 대답했다.
"저도 평범한 소녀인걸요."
다음 날, 평소와 같이 등교한 치사토는 정해진 루틴대로 행동했다. 1. 먼저 급우들에게 인사하고 2. 자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약간의 변주를 주어서 3. 책상 안에 손을 넣지는 않았다. 더는 그 행동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로 일과를 시작하려는 치사토에게 급우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시라사기 씨? 아까 그 애가 찾아왔었어."
"그 애...라니?"
"왜, 자주 찾아오는 2학년 애 있잖아.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장한. 난 그 애 머릿결이 너무 부럽더라. 어떻게 관리하는 걸까?"
샴푸와 컨디셔너로. 답을 알고 있음에도 치사토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급우에게 웃어주었다. 진실이긴 해도 듣는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 대답인 데다가, 그 대답은 오직 타에와 그녀만의 비밀로 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튼 아까 찾아왔길래 시라사기 씨는 아직 안 왔다고 하니까 자리만 알려 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알려 줬는데...."
치사토의 손이 번개 같은 속도로 움직여 책상 속을 뒤지기 시작한 것을 보고 급우는 알아서 자리를 피해줬다. 치사토에게서 고맙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도 그녀는 당장 친구들한테 가 치사토가 공인지 수인지를 따질 생각에 마음이 급했기에 별로 아쉽지도 않았다.
한 편, 치사토는 책상 안에서 찾아낸 것을 보고는 급우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온 타에의 \'장난\'은 예쁘게 포장된 작은 마카롱이었다.
"아, 그거 받으셨군요."
여러 감정이 섞여서 어떻게 반응하지도 못하고 마카롱만 보고 있던 치사토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제 치사토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던 사요였다.
"사요 짱은 알고 있었어?"
"예. 하나조노 씨가 절 찾아와서는 마카롱 만드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평소처럼 점토로 선물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꼭 시라사기 씨를 놀라게 해야 한다고....그래서, 놀라셨나요?"
"...그렇네, 확실히 놀랐어."
필요 없는 질문이었네요. 사요는 치사토의 표정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타에가 별것 아닌 이유로도 남의 손을 덥석덥석 잡는 것 좀 어떻게 해보라는 말도 할 생각이었지만, 마카롱에 집중하는 치사토를 보고는 나중에 말하자고 생각했다.
치사토가 포장지를 벗기고 마카롱을 하나 꺼낸 건 꽤 긴 감상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자세히 보니 마카롱은 치사토의 반려견인 레온과 비슷한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다. 한 입 깨물어보자 얼 그레이 크림의 향이 입안에 퍼졌다. 여러모로 자신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타에가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자 치사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남은 마카롱을 마저 입안에 넣으며 치사토는 생각했다. 마카롱은 칼로리가 높으니까 선물 받은 이 마카롱들을 다 먹으려면 그만큼 추가적인 운동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 딱 좋게도, 그녀는 러닝이 취미인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었다.
다음 주말, 치사토는 동네 공원을 뛰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선 레온의 리드 줄을 잡은 타에가 같이 뛰고 있었다. 치사토의 안색을 보고는 슬슬 쉬어야 한다고 판단한 타에가 발걸음을 늦추자 치사토 역시 따라서 멈췄다.
"여기, 이거 마셔요."
헉헉대는 치사토에게 타에가 토끼 그림이 그려진 물통을 건넸다. 치사토가 물통에 담긴 스트로에 입을 대고 목을 축이는 동안, 타에는 레온을 쓰다듬으며 "시원하게 뛰니까 기분 좋지?"라고 말을 걸었다. 레온도 타에에게 애교 부리는걸 본 치사토는 둘이 같은 대형견 과라서 쉽게 친해진건가 잠시 생각했다. 그래서 갑자기 타에가 말을 걸었을 때 치사토는 하마터면 사레가 걸릴 뻔 했다.
"그래도 의외네요."
"뭐, 뭐가?"
"치사토 선배는 운동을 싫어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애는 역시 나를 잘 보고 있구나. 치사토는 속으로 기뻐하며 타에에게 물통을 건네주었다. 바로 스트로에 입을 대고 마시는 타에를 보며 간접키스 아닌가 싶어한 치사토였지만, 타에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그 부분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몸 움직이는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도 타에 짱은 좋아하니까."
치사토가 자기 대답이 다른 의미로 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입 밖으로 내고 시간이 좀 지났을 때였다.
"아니, 방금 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래도 아주 안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건...!"
허둥지둥대는 치사토를 본 타에는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그 미소에 가뜩이나 운동으로 열이 올라 있던 치사토의 얼굴이 더욱 붉게 되었다.
"지금은 그걸로 괜찮지 않나요."
타에는 손가락으로 길이 이어진 먼 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길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가도 괜찮아요."
순간,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이 어딘가 등을 밀어주는 느낌이라 치사토는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응, 그러네."
휴식 시간이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달리는 도중에 문득 옆을 본 치사토는 타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소지었다.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치사토는 앞으로도 두 사람은 괜찮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방금 그거 간접키스 아니었나요?"
"타에 짱, 이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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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는 핼러윈 이벤 때 생각한 내용인데 미루고 미루다가 타에 생일 넘어서까지 미루는건 좀 아닌것 같아서 이제 쓴 거야.
평소에 타에치사는 투시안경 이야기나 임신빔 이야기, 세 개의 밑구멍 이야기 등 변태스런 내용으로 자주 썼으니 이번엔 각잡고 풋풋한 이야기로 써보려고 했어.
그래서 백붕이들 취향에는 좀 안 맞는 글이 되었는데, 그래도 읽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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