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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크리스마스] 어장관리.txt

ㅇㅇ(121.144) 2019.12.18 14:57:40
조회 751 추천 26 댓글 7
														

어장관리


1.
 종교와 상관없이 뭇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새하는 선배인 아영으로부터 둘이서 만나자는 말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늘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떠들썩하게 하던 선물 교환식이지만 굳이 이렇게 24일 밤에 따로 만나자고 하는 것은 분명 그 이상의 의미가 있으리라.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어정쩡한 관계였던 아영에게서 오늘은 반드시 사랑의 언약을 듣고자 새하는 기합을 단단히 넣고 먼저 약속장소에 나와 있었다.


 “아, 언니! 여기에요.”
 “많이 기다렸어?”


 아영은 차가운 바깥에서 오래 있었는지 볼이 빨갛게 얼어있었다. 홍조가 든 것은 훈훈한 카페에 쭉 앉아있던 새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뺨을 지적하며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깔깔 웃었다.


 “어때요 언니, 따뜻하죠? 이러면 좀 녹을까요?”
 “응? 아, 으응...”


 아영은 당황했다. 새하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두 뺨을 감쌌기 때문이다. 새하의 시선은 쭉 뻗은 그녀의 두 팔과 함께 아영에게로 파고들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아영에게 때마침 울린 진동벨은 구세주처럼 여겨졌다. 

잠시 후 돌아온 아영의 얼굴은 음료가 담긴 붉은 머그잔과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얼마간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곧 이 모임의 진정한 목적을 기억해냈다.


 “자 새하야. 올 한해도 고마웠어.” 아영은 편지가 동봉된 작은 초록색 상자를 건넸다.
 “저두요 언니. 선물, 지금 열어봐도 되죠?” 새하는 금색 끈으로 묶은 빨간 꾸러미를 건넸다.
 “아니, 선물은 집에 가서 열어보렴... 그, 눈앞에서 반응을 보이는 건 좀 부끄럽거든.”
 “에~ 그치만 언니, 제 선물은 지금 열어봐주셨으면 하는데요... 언니한테 어울리는지 꼭 확인하고 싶거든요.”


 빨간 꾸러미 안에는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풍기는 머리핀이 들어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사용하기 힘들 것 같았다. 생각보다 너무 유치한 선물을 보며 적당한 감사의 말을 고르던 아영이 시선을 새하에게로 돌리자 그녀는 어느새 똑같은 머리핀을 꺼내 착용하고 있었다.


 “헤헤, 커플 머리핀이에요. 귀엽죠? 분명 언니한테도 잘 어울릴 거예요.”
 “으, 으응...정말 귀여운 머리핀이야... 고마워 새하야.”

 아영이 머리핀을 어색하게 매만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새하는 말을 꺼냈다.


 “언니. 혹시 이 뒤에 시간 있어요? 언니만 괜찮다면, 애인도 없는 우리끼리 노는 게 어때요? 제가 좋은 곳도 많이 알고 있어요...”

 “미안해, 새하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아영의 거절은, 새하의 계획이 아니었다. 

 “아쉽지만 밤에 부모님이랑 같이 성당에 가기로 약속했거든... 이제 일어나봐야 할 것 같아. 다음에 만나서 더 이야기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쭉 함께일 줄 알았던 둘만의 시간은 새하의 생각보다 너무도 짧았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담담한 척을 하려고 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다음에 꼭 시간 비워놓기에요.”
 “그래, 그래. 메리 크리스마스.”


 아영은 정말로 새하를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아~ 오늘 아영언니랑 진도 나가려고 다른 약속도 다 취소하고 방도 빌려놓고 준비도 철저히 해왔는데... 일이 이렇게 되네...’

 '따라가서 언니 부모님들이랑 인사라도 나눌 걸 그랬나... 아니, 이건 좀 너무 나갔나?'
 풀이 죽은 새하는 핸드폰을 꺼내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은 친구들을 찾다가, 아영이 주고 간 초록색 상자를 떠올려냈다.
 ‘안에 뭐가 들었을까? 먼저 편지부터 볼까?’


 봉투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편지의 첫줄은 ‘새하에게’가 아니라 ‘준오에게’였고 그 밑으로는 연인을 향한 애교 섞인 문장이 다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2.
 “다녀왔습니다.”
 물론 아무런 대답도 없다. 아영의 부모님은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던 아영은 옷을 갈아입고, 씻고, 방으로 들어와 멍하니 오늘 받은 ‘선물’을 들여다봤다. 


 아영은 새하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 여자 사이의 우정이나 선배에 대한 동경을 넘어 선다는 사실을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새하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언제나 생긋생긋 웃는 얼굴로 아영에게 들이대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귀엽고 예쁜데다 성적도 좋은 새하가 왜 줄을 서는 다른 남자들을 놔두고 자신만 따라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서 무서웠다. 하지만 단과대의 유명인인 새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어느새 아영에게 있어 소중한 쾌감이 되어있었다. 

오늘 새하를 카페에 남겨두고 돌아오면서, 몇 번이나 다시 돌아가려던 것을 참았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런 관계, 더 이상은 안 되겠지.’
 마침 아영이 곧 졸업을 하니, 이쯤에서 정리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를 향한 편지를 잘못 전달한 척 하면서 우회적으로 거절하려고 했다.


 비록 새하의 사랑이 아영에게는 너무도 달콤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아영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둘은 동성이다. 남들한테 손가락질 받으면서까지 함께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런 싸구려 머리핀이라니. 새하 얘는 애가 순진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머릿속이 완전 꽃밭이야. 내가 제일 이해할 수 없는 타입이라고, 그런 사람 많은 카페에서 어떻게 이딴 걸 커플로 하자는 거야?’


 그때 새하에게서 카톡이 왔다. 


- 선배. 아무래도 선물이 바뀐 것 같아요. 제가 돌려드리러 갈게요.


 아영의 눈앞에 실망한 새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하는 지금 무슨 기분일까? 날 원망하려나? 어쩌면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스러운 새하의 눈망울이 눈물을 머금고 있을 것을 상상했더니, 다시금 아영의 몸속으로 야릇한 쾌감이 타고 흘러 애가 탔다.


- 미안해. 확인해보니까 편지만 바뀐 것 같아. 추운데 괜히 돌려주려고 오지 마. 편지는 다시 쓰면 되니까. 


 아영은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한껏 만족스러운 기분을 즐겼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뺨에서 새하의 작고 예쁜 손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새하야, 너를 이렇게 대해서 미안해. 그래도 넌 날 사랑해 줄 거지? 알고 있어, 네가 나한테 단단히 빠져있다는 걸... 고작 이정도로 충격 받진 않겠지. 계속 날 유혹해봐... 내가 넘어갈지도 모르잖아?
 
 선물 받은 싸구려 머리핀을 어떻게 처분할까 고심하던 아영은 곧 저녁을 먹기 위해 주방으로 나왔다. 

결국 머리핀은 한동안 아영의 머리카락에 매달려있었고 밤에는 침대에 누워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이게 되었다.










2-2
 “오늘 약속 있다더니. 잘 안 됐나봐?” 새하가 아영과의 거사를 위해 큰맘 먹고 예약한 방에 머리를 화려하게 염색한 여자, 미진이 들어왔다.
 “오늘은 될 줄 알았는데, 엄청 비싸게 굴더라고. 남친 없는 거 뻔히 아는데 쓸데없는 짓거리나 하고 말이야.”
 “그래도 그 선배 덕분에 내가 이런 호사를 다 누리네? 고마워, 이름 모를 선배~”
 “무슨 소리야? 더치페이 해야지.”


 볼이 부루퉁해진 염색한 미진은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쏴-하고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미 가운만 입고 있던 새하는 여전히 불러낼 다른 ‘여자’가 없나 연락처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는 카페에서 짓던 애교 넘치는 표정을 전혀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오래토록 관계가 진전되지 않는 아영에게 지쳐 하나 둘 늘리기 시작한 ‘애인’의 숫자는 새하의 매력을 입증하듯이 많았다. 


 방은 꽤나 흐트러져있었는데, 아영의 말도 안 되는 장난에 화를 이기지 못한 새하가 옷가지며 가방이며 온통 내던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아영의 선물-새하의 얼굴에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며 오래 고민하여 산 꽤 비싼 귀걸이-가 담긴 녹색 상자는 포장한 그대로 침대 밑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새하야, 이거 내 선물이야? 왜 욕실에 놔뒀어~ 귀엽긴 한데, 너무 낭만이 없는 거 아냐?”
 샤워를 마치고 나온 미진의 염색한 머리카락에는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풍기는 머리핀이 꽂혀있었다.

 “아, 그거...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준비한 건데, 싫으면 이리 주던가.”
 “아냐! 새하가 처음 준 선물인데 잘 간직해야지~”


 뜨끔한 새하는 그제서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로 올라온 여자를 끌어안았다. 

화려한 금발 머리카락에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생긴 머리핀을 보니 죄책감과 함께 사랑스러움이 느껴졌다. 

미진과 관계를 맺으면서 새하는 그 머리핀이 아영에게 준 것과 똑같으며, 자신이 아영과 커플로 꽂기 위해 산 물건이라는 사실은 반드시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있잖아, 그 선배라는 사람한테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질투나는데.”
 새하가 어질러놓은 옷가지나 소품을 정리하면서 미진이 물었다.
 “별거 없어. 그냥 오랫동안 들인 공이 아까운거야.”


 새하 자신도 이제는 아영을 좋아하게 되었던 이유가 흐릿해져버렸다. 퇴실을 하고 밖으로 나오자 여전히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반짝이는 전구들로 장식된 전나무 앞에서 미진과 헤어진 새하는 또다른 여자를 만나러 걸음을 떼었다. 

새하는 싸구려 머리핀을 찬란한 티아라처럼 여기며 좋아하던 미진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떠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라, 눈이다."

 잠깐 사이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몇년만에 찾아온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던 것이다.

 모처럼 낭만적인 기분으로 들뜬 새하의 머릿속에서 아영이 준 선물은 눈속에 파묻히듯이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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