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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크리스마스) 러브 픽션 어드벤처 - 3

모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12.21 18:31:54
조회 259 추천 14 댓글 3
														

러브 픽션 어드벤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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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기도 전에 차였다.' 수진은 어디선가 들어본 문장을 떠올렸다.


릴리는 자신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지만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결국 똑같은 게 아닐까. 그럼에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왜일까. 수진은 스스로의 감정이 신기했다.


"수진, 빨리 와요!"


"네!"


모처럼의 외출. 쉬는 날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냐는 수진의 물음에 릴리는 등산을 제안했다. 동네의 야트막한 뒷산에서 정상을 노리는 일은 등산이라고 하긴 민망했지만 두 사람의 좋은 산책 코스가 되었다.


"너무 예뻐요."


릴리가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말했다. 정상까지 올라온 두 사람의 발밑에는 조막만해진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그럴듯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네요."


릴리와 만났던 늦봄을 지나 계절은 이제 완연한 여름이었다. 별별 일이 다 있었는데. 수진은 시린 초록에 미간을 좁히며 회상에 잠겼다. 잠에서 깨어나니 릴리가 나타나 있던 일, 새 옷을 시착하는 그녀를 보고 두근거렸던 일, 단골 카페에 사촌동생이라며 그녀를 소개한 일, 그녀가 한 침대에서 자자고 제안했던 일...


그 제안은 보름 내내 이어졌지만, 수진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나서부턴 끊겨 있었다. 릴리가 나름대로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멋쩍어진 수진은 괜히 뒷머릴 긁적였다.


"어릴 때 말이에요."


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부드러운 목소리. 릴리는 먼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주 이렇게 뒷산에 올랐었어요. 아버지랑 오를 때도 또 삼촌이랑 오를 때도 있었죠. 뭐...다 '설정'된 기억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릴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적어도 수진이 보기엔 그랬다.


"다른 세계인데도 여기는 정말 많이 닮았네요."


언젠가 보았던 비슷한 풍경을 떠올리는 것처럼 릴리는 작아진 마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진은 곁에서 그녀가 사색에 잠길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



드물게 수진이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가끔은 PC의 모니터를 또 가끔은 휴대폰 액정을 노려보는 그녀는 저녁 식사를 잊어버릴 정도로 열심이었다.


철컥


"다녀왔어요."


릴리의 인사에도 수진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뭘 하는 걸까.'


뭘 하길래 지가 좋아하는 사람이 와도 모르나 같은 폭언은 속으로만 삼킨 채 릴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수진에게 다가갔다.


"안드로이드...프로그래밍..입문?"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진은 꼭 용수철이 튀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랐잖아요."


"인사해도 아무 말이 없길래... 뭐하고 있었어요?"


"그냥...공부요."


"흐음-"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었나요, 수진 어린이. 릴리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진지한 얼굴로 하고 있는 수진 때문에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그건...저한텐 알려줄 수 없는 건가요?"


"아, 아뇨. 그냥 좀 더 진척이 되면 말하고 싶었어요."


수진이 당황하며 말했다.



저녁상에 마주 앉아 얘기하길, 수진은 요즘 게임을 다시 구동시키기 위해 열심이라고 했다. 프로그래밍 공부가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아직 알려줄 수 없었다고.


"....그것만 어떻게 하면 켜질 지도 모르겠어요."


"네."


수진이 늘어놓은 프로그램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라 릴리는 적당히 대답하며 흘려넘겼다.


"릴리가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툭. 이제는 완벽에 가까워진 젓가락질을 우뚝 멈춘 채 릴리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결의에 찬 표정의 수진. 릴리는 그 고동색 눈동자를 마주치면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릴리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바닥에는 잘 개어진 이불만이 남아있었다. 요근래에 몇 번이나 봤던 장면. 수진은 휴일이면 프로그래밍에 능통하다는 친구를 만나 저녁 늦게야 돌아오곤 했다. 자신의 귀환을 위해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어쩐지 기분이 다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릴리는 이곳에 와서 수진의 곁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수진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 때문에 일하는 시간만 빼고는 그녀의 옆에는 항상 수진이 있었다.


"이 방이 이렇게 넓었군요."


릴리의 목소리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진이 그렇게 작다, 작다 말하던 침대도 쓸데없이 커보였다. 릴리는 살그머니 침대에서 내려가 수진의 이불 위에 누워보았다.


"......"


이런 느낌이었군요. 들어줄 이가 없어서 릴리는 그냥 속으로 말했다.


'여기 누워서 수진은 무슨 생각을 했나요. 갑자기 나타난 여자 때문에 침대를 빼앗겨서 화가 났나요? 아니면 좋아한다고 말을 못해서 답답했나요?'


릴리는 수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켰을 때의 표정을 떠올렸다.


'내가 떠나면 또 그런 표정을 지을 건가요? 그런 얼굴로 여기서 혼자 잠을 자고, 혼자서 밥을 먹을 건가요?'


릴리는 어느새 자신이 화가 나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 자신은 화를 내는 것일까. '수진은 좋은 사람이에요.' 따위의 말을 던져놓고서.


해가 벌써 중천인 것을 보고 릴리는 처음 그대로 이불을 개어놓기 시작했다. 수진이 돌아오기 전 저녁상을 차리려면 준비할 게 많았다.



******



"벌써 팔기 시작한 데가 있더라구요."


답지 않게 들떠있는 목소리로 수진은 붕어빵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오늘은 친구와 도서관에서 만나느라 평소와 다른 루트로 이동한 그녀는 다음부터 귀가할 땐 그쪽길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수진을 태평한 생각으로부터 끄집어 올린 것은 평소와는 뭔가 다른 릴리의 반응이었다. 전 같으면 뭔가 더 호들갑스럽고 아이처럼 눈을 빛냈어야 할 그녀는 그 대신 눈이 휘어지도록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


의아해하는 수진의 얼굴도 본체만체 릴리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상냥한 목소리의 한마디도 잊지 않으며.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가는 수진의 앞에서도 릴리의 미소는 계속되었다. 물론 수진에게 있어 그녀의 미소는 최고의 선물이었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계속되는 건 역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저..."


수진은 괜히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네."


"무슨 할 말 있어요?"


"네."


즉답.


수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겐 이제 릴리의 '할말 있어요.', '얘기 좀 해요.' 같은 건 트라우마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수진은 저도 모르게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나랑 얘기하기 싫었어요?"


"아뇨!"


수진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럼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릴리의 목소리에 수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놓여있는 그녀의 접시엔 아직 한 입밖에 베어물지 않은 샌드위치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이거 혹시....


"화...났어요?"


"네."


릴리가 내뱉는 세 번째의 '네'는 화사한 미소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단호했다.



******



이것이 데자뷰인가.


수진은 언젠가 이 상황을 본 적이 있었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방에서 릴리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그때. 차이점은 그때와는 다른 이유로 마음이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릴리가 운을 떼지 않자 수진은 머뭇대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있으면 어쩌려구요."


수진은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그렇게까지 공격적인 말이 릴리에게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또 한번 수진의 생각을 비껴가듯 릴리의 얼굴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책임...지겠습니다."


평소라면 기뻐했을 릴리의 미소를 보면서 수진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요. 그럼, 따라하세요.


'가지마세요, 릴리.'"


릴리는 꼭 수진의 성대모사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네?"


"책임지신다면서요."


당황해 허우적거리는 수진의 모습을 릴리는 남일처럼 바라보며 까르르 웃었다. 도대체 이게 누구 때문인데. 수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녀를 원망해보았다.


"장난이에요. 하지만, 게임 연구는 이제 그만해주세요."


"그렇지만..."


"어차피 그 오류는 제가 그 세계에서 사라져서 생긴 거예요. 제가 돌아갈 수 없다면 영원히 해결할 수 없겠죠."


릴리의 말은 정론이었다. 수진은 그저 릴리에게 돌아갈 기회를 찾아주고 싶어서 판단력이 흐려졌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수진은 신기하네요."


릴리는 갑자기 수진을 입에 올렸다. 덕분에 그녀는 또다시 심각한 표정이 되어가던 얼굴을 좀 느슨하게 바꿀 수 있었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돌려보내려 하잖아요."


수진은 언젠가 제가 선택했던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마주치는 릴리의 눈빛은 수진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래요."


'그래서' 가 무슨 뜻인지 수진은 설명하지 않았다.


"저는 릴리가 행복하길 바라요."



******



릴리가 찾아오고 나서 맞는 두 번째 환절기. 어느새 바람이 차가워져 다시 외투를 꺼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비까지 더해져 뚝 떨어진 체감온도에 수진은 제 팔뚝을 문지르며 비 내리는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우산은 가지고 갔을까.'


수진이 보기에 최근의 릴리는 멍때리는 일이 잦았다. 그녀가 처음 화를 냈던 날, 그래도 대화로 잘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릴리는 그날 이후 사색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적어도 수진이 보기엔 더이상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원인은 외부에 있는 걸까.


수진은 릴리의 퇴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손에는 노란 우산을 들고서.



릴리는 유니폼으로 지정된 셔츠와 모자 등을 라커에 집어넣고 있었다.


'모자까지 커피색이라 귀여워요.'


언젠가 두 사람이 손님으로 카페에 방문했을 때 수진이 유니폼을 보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을 보고도 그렇게 말해줄까. 릴리는 힐끔 거울을 곁눈질했다 고개를 붕붕 저었다.


'미쳤나봐.'


귓볼이 뜨끈뜨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가게를 나섰다.


"릴리."


가게 밖에는 노란색 장우산을 든 수진이 서있었다. 샛노란 지붕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꼭 키만 큰 유치원생 같아서 릴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우산 안 가져갔죠."


수진은 약간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귀여워.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들어와요."


수진은 오른손으로 우산을 고쳐들었다. 그리고 가을비를 피해서 릴리도 수진의 오른편에 섰다.


'전 릴리가 행복하길 바라요.'


그날 이후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말. 그것은 수진이 처음으로 릴리에 대한 제 마음을 표현한 문장이었다. 좋아한단 말 한마디 없는 사람이 무슨 용기였을까. 릴리는 한 우산을 핑계로 수진의 얼굴을 마음껏 훔쳐보았다.


두근, 두근


힘찬 심장의 펌프질 소리가 온몸을 돌아서 릴리의 고막까지 전해져왔다. 그녀는 수진의 곁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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