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Y7bNBP55D1I
의심치 않았다.
인생에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고, 오르막길이 있으면 또 내리막길도 있다는 걸.
불행한 만큼 행복해지고, 또 행복한 만큼 불행해지리란 걸.
“있잖아...”
그래서, 난 모르겠어.
정말로 모르겠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네가 죽어 가는데, 울어야 할지 아니면 평소처럼 애써 담담한 척 견뎌야만 할지.
항상,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분명 다음엔 좋은 일이 있을 텐데.
이번만은...
견디질 못하겠어.
나와 애리는 케빈스 3번 가에서 자랐다.
케빈스 3번 가의 윌리엄 포프 교회. 기묘하게도 둘 다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름. 다만 나는 대체로 내가 알아야 할 것들 외엔 관심이 없기에 지명이 왜 그딴 식이며 교회 이름도 왜 그딴 식인지는 모른다.
단지 케빈스란 사람이 유명한 총기 제작자였으며 동시에 이 도시의 시장이었고 윌리엄 포프는 그가 살던 시대에 동시에 존재했던 유명한 성직자라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단지, 한편으론 부러웠다. 누구나 죽은 뒤엔 잊히기 마련인데 이런 식으로 단편적으로나마 기억될 수 있다는 게. 그 수법이 상당히 치졸하긴 해도.
우리가 7살일 때, 단체 생일 파티에서ㅡ고아들의 생일 따위 일일이 알고 있을 리 없으니 그런 식으로 다 같이 축하하는 게 포프 씨 교회에선 일반적이었다.ㅡ나와 애리는 케빈 씨 2정을 선물로 받았다.
케빈 77. 그런 이름이었다. 10mm 탄환을 사용하는 자동권총이었는데 아주 심플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안전장치에는 끈이 달려 있었고 방아쇠는 일반적인 위치보다 더 아래였다. 요컨대 정말로 7살짜리 아이라도 쓸 수 있게 개조한 물건이었다.
한계까지 작게 개조했으면서 그 안엔 10mm라는 괴물 같은 탄환이 들어간다는 게 우습게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가 그걸 받은 후로 정말로 괴물 잡이를 다녔다는 걸 감안하면 우스운 얘긴 아니다.
포프 씨 교회에선 7살이 된 소년 소녀들을 그때부턴 신사 숙녀라고 불렀다. 여자에겐 드레스를 입히고 남자에겐 멜빵이 달린 셔츠와 청바지를 입혔다. 그리고 손엔, 잃어버리면 ‘죽인다’라고 총집에 강조해 써놓은 케빈 77을 쥐어줬다.
나와 애리는 케빈 씨를 받고 나서 약 두 달간 방아쇠를 당기는 법을ㅡ결코 총을 쏘는 법이 아니다. 정확히 조준하는 법도 아니고.ㅡ훈련받고 본격적인 싸움터로 투입됐다.
여기서 싸움터란 건 우리가 사는 동네를 의미했다. 케빈 3번가뿐만 아니라 케빈 시 전체. 그때만 해도 나는 시라는 게 뭔지 몰랐다. 읽는 시도 몰랐고 내가 사는 시도 몰랐다. 내가 아는 건 딱 내가 들은 정도에 한했다. 가끔 케빈에 괴물이 출몰한다는 것. 그리고 내 손 안에 쥐인 케빈엔 항상 괴물이 잠들어 있었다.
그 괴물이란, 또 다른 신사 숙녀를 의미했다. 우리 같은 덜떨어진 고아들로 이루어진 가짜 신사 숙녀가 아니라, 아 물론 그쪽도 가짜 신사 숙녀이긴 하다. 하지만 겉보기엔 정말로 신사 숙녀다운 사람들.
괴물, 또 다르게 사람들은 그들을 두고 흡혈귀라 일컬었다.
이제 감이 오는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그래도 굳이 설명하자면 우리 같은 아이들은 보모ㅡ마찬가지로 총기로 무장한ㅡ와 같이 다니다가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쐈다. 말 그대로 쐈다. 수상한 사람인지 어떻게 아냐고? 밤에 돌아다니는 신사 숙녀가 있다면 바로 그 자가 수상한 사람이다.
케빈 시는 밤 11시부터 오전 4시 30분까진 외출이 금지된다. 집밖으로 나오면 체포되거나, 이처럼 살해당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즉결 처분은 결코 불법이 아니다.
우리 같은 괴물 사냥꾼들은 서로 못 알아보고 사격하는 일이 없도록 밤에도 잘 보이는 형광 페인트를 칠한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다.
주의에 또 주의를 기울여도 매 순찰 때마다 나갔던 아이들 중 몇몇은 돌아오지 않는다. 가끔 전원일 때도 있다. 포프 씨 교회의 성당의 어른들은 돌아오지 않은 아이들이 부모님 곁으로 갔다고 했다. 물론 그 말을 믿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포프 씨 교회의 미스터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그곳을 졸업할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신사 숙녀들 중 가장 덜떨어지고 실력도 좋지 못했고 의지도 미약했으며 온갖 약함은 다 가지고 있었던 내가 반면 나보다도 더 뛰어났던 아이들이 다 부모님 곁으로 갈 동안 교회에 남아있었다는 것 말이다.
나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안다. 내겐 애리가 있었다.
애리는 숙녀답지 않게 활발하며 말이 많은 아이였다. 적어도 내가 아는 신사 숙녀들이란 포프 씨 교회의 아이들처럼 늘 겁에 질려 있고 신경질적이거나, 아니면 밤마다 바깥을 돌아다니는 신사숙녀들처럼 인간 말보다는 짐승 말 위주로 더 많이 하는 야만적인 자들이었다.
하지만 애리는 뭐랄까, 아이 같았다. 평범한 우리 나이대의 아이 말이다. 물론 애리가 그렇다 하여 겉모습처럼 속까지 아이인 건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 애리는 단 한 번도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 주저를 한 적이 없다.
총을 쥐고 있을 때의 애리는 귀부인 같았고 그렇지 않을 때엔 소녀 같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녀가 상류층 출신 같다는 점이다. 머리는 금발이고 눈동자는 파랬다. 피부는 창백했고 부드러웠다. 그러한 특징들은 귀족의 피를 몸속에 지니고 태어났단 증거였다. 게다가 그 아인 말을 또박또박 했고 이름을 쓸 줄 알았다.
애리는 교회의 아이들 중에선 가장 늦게 들어왔다. 그녀는 케빈 씨를 받기 몇 달 전에 들어와 그 후 얼마 안 되어 생일을 치르고 곧바로 순찰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와 애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첫 순찰에서 나는 주저하다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포프 씨에게로 돌아온 후 보모는 내 케빈 씨 안에 잠자는 괴물이 그대로 들어있는 걸 보고는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회초리를 가져와 종아리를 스무 대 때렸다. 종아리엔 피멍이 들었고 나는 울면서 방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나를 외면했다. 총탄을 쏘지 않은 건 겁쟁이 같은 짓이며 또한 비열한 짓이었다. 그로 인해 다른 아이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 본인의 무름으로 인해 다른 아이가 죽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유일하게 그 아이, 애리만이 밤중에 내 침대로 올라와 위로해 주었다. 맞은 곳에 피멍이 든 걸 보고는 보모가 너무 심했다며 내 편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끝에는 너도 그래선 안 됐다는 말을 덧붙였다.
‘너 자신을 소중히 여겨.’ 애리가 말했다. ‘선택의 순간이 닥쳤을 때 그 일이 옳은지 틀린지는 절대 생각하지 마. 쓸데없으니까. 누군들 알겠어? 그런 건 아무도 몰라.’
애리는 그녀의 얇은 가운 안쪽에서 숨겨뒀던 잠자는 괴물을 꺼내어 손바닥 안에 둔 채로 살며시 보여주며 말했다. 어떻게 저걸 갖고 있을까? 그때 너무도 순진했던 나는 설마 그게 훔친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오로지 너 자신을 위해 쓰도록 해.’
애리는 내 베개 아래에 그 섬뜩한 물건을 숨기면서 말했다. ‘선물이야. 내 선물. 알지? 선물은 특별한 사람한테만 주는 거야. 잘 간직해 둬.’ 아, 멍청하기도 하지. 난 그걸 받고는 정말, 뭐라고 할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마 내가 애리에게 품게 된 다양하면서도 그러나 한 가지로 귀결되는 이 감정은 그게 시작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실은 따지고 본다면 다른 의미였다. 애리는 아마 나 같은 그녀가 속에 품고 있는 의도는 꿈에도 모른 채 그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순진한 아이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리라. 그녀는 그냥 탄환이 필요할 때까지 나한테 떠넘긴 거였다. 혹여나 들키더라도 내 책임으로 돌리기 위해.
하지만 다행히도 들키는 날은 오지 않았고 애리가 그것을 필요로 하게 되는 날도 오지 않았다. 그녀가 죽게 되는 날까지.
18살이 되면 신사 숙녀들은 포프 씨네 교회에서 나가야 한다. 그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고, 다만 생각하던 것만큼 좋은 일도 아니었다.
독립한 신사 숙녀들은 땡전 한 푼 없이 케빈 시의 길거리에 놓이게 된다. 케빈 씨는 생전에 부자였음에도 인심이 각박해서 돈 없이는 무엇도 주지 않는다. 당장에 나와 애리는 돈을 벌 곳을 찾아봐야 했다.
나와, 애리. 그렇다. 포프 씨 곁을 떠났어도 나는 애리와 함께 했다. 아마 내가 들러붙었다고 보는 게 좋으리라. 나는 생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리만큼 뭐든 척척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리는 금방 일자리를 구하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애리에게 빌붙어 살기로 작정했다. 물론 이유는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 즈음엔 나도 애리도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단 걸 눈치 챈 뒤였다.
그러나 우린 아직 아이였다. 18살이 되었고, 월경도 여러 번 겪었지만 아직 아이였다. 우리는 평범한 어른들이 말해 주는 교훈 같은 걸 하나도 몰랐다. 세상의 풍파를 겪은 사람들이 알려주는 적당적당 삶을 사는 법도 알지 못했다.
우린 처음 마주하는 인생의 자유 앞에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이제부턴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열심히 살자. 이제부터 열심히 살아서 남부럽지 않게 살자. 그렇기에 서로에게 무슨 감정이 있든 그건 뒤로 미뤄졌다.
우린 결국에 우리의 옛 본업으로 돌아왔다. 괴물 사냥 말이다.
딱히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케빈 시엔 정신에 이상만 없다면 별다른 자격증이나 학력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 꽤 되었다. 다만 그런 일자리는 대개 박봉이었다.
우린 삶을 정말 잘 살기로 작정했기에 따라서 많은 돈이 필요했다. 괴물 사냥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직업 중에서 가장 보수가 짭짤했다. 다만 당연히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소장은 우리가 포프 씨네 교회 출신임을 알아보고 곧장 채용해 주었다. 우리에겐 어린아이용으로 제작된 미니어처 케빈 씨 대신에 이제 그보다는 더 크고, 다만 그보다는 더 작은 괴물 씨가 들어가는 권총이 주어졌다. 그 권총의 탄환은 신사적이라 할 수 있는 크기의 5.56mm였지만 탄두가 은으로 되어있는 특수한 물건이었다.
우린 그 무기를 들고 그날 밤부터는 보모 없이 둘이서만 사냥을 나갔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결국에 적응했다. 우린 포프 씨네 교회의 졸업생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곱하기를 배우기 이전에 10mm 탄환을 맞은 인간의 두개골이 어떤 식으로 쪼개지는지를 먼저 배웠음을 의미했다.
물론 처음엔 잘 됐지만 그게 쭉, 정확한 기간을 말하자면 아마 평생 동안, 그 일이 없었다면 평생 동안 이어졌을 그 일에 마찬가지로 평생 동안 그 운이 이어졌을 리는 없을 터였다.
뒤늦게 찾아온 후회를 써보자면 그건 우리가 너무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다. 마치 삶의 예찬자처럼. 늘 피곤에 절어 돌아왔고, 때론 피에 절어 돌아왔고, 때론 신경질적이었고, 그래서 서로 다투는 날도 있었다. 결국엔 다음날이 되면 한쪽이 사과했지만.
우리에게 여유란 없었다. 누가 뺏어가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다. 생사가 걸린 현장에선 항상 그렇다. 감정은 메마르고 이성만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온갖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후회하는 건 늘 우리가 두려워한 부분에 관해서다. 두려워서 내딛지 않은 한 발걸음.
동거하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나와 애리는 더욱 진한 스킨십을 주고받았다. 처음엔 한 소파에서 뒤엉켜 자는 게 시작이었고 그게 침대로 변했고 가끔 손을 붙잡았고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다가 하루는 생일을 기념해ㅡ포프 씨 곁을 떠났어도 우리의 생일은 같았다. 둘 다 이젠 원래 생일이 언제인지 잊어버린 것이다.ㅡ둘이서 와인을 마시다가 술기운에 입을 맞췄다. 그 후엔 그냥 바닥에 엎어져 더 적극적인 키스를 하거나 목덜미를 깨물거나ㅡ마치 우리가 사냥하는 괴물처럼,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무척 묘했다.ㅡ가슴을 주무르거나 혹은 그보다 더 아래의 민감한 부분을 애무하거나 했다.
여자 둘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대충 그 정도다. 그리고 딱 그 정도,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했다. 하나 빼놓은 게 있다면 우리 둘 다 서로에게 결코 고백하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한쪽이 고백하는 순간 이 일은 끝장이 난다는 걸. 더는 사냥을 나갈 수 없게 되리란 것 말이다.
우리의 용기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에서 나왔다. 생명의 가치를 모독하고 부정하고 그런 끝에 얻은 냉정함을 주저 없이 발산함으로서 타인의 삶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삶을 견고히 해나갔던 것이다.
그렇기에 고백은 안 됐다. 고백만은 안 됐다. 삶이 무거워지면 덩달아 손도 무거워질 테니까.
하지만 평생, 평생동안 감정을 숙인 채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면 언젠가 그 날은 오게 될 터였다. 사랑을 묵혀두기만 하는 건 치즈를 발효시키는 것만큼 유쾌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다만 하루 더. 좀만 더 벌고. 더 벌면 남은 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을 테니까. 마치 포프 씨네 교회에서 탈출할 날을 꿈꾸며 밤마다 케빈 씨를 닦고 기름칠하고 숨겨둔 10mm 탄환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던 시절처럼 기한 없는 유예를 둘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그날은 스모그가 잔뜩 꼈다. 깨끗하게 빨은 목도리가 고작 세 시간 만에 검게 변해버렸을 정도였다. 그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미신들을 늘 대해왔던 태도로, 그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넘겼다.
우린 그날도 사냥을 나갔다. 이런 날엔 괴물도 기운이 나질 않는지 새벽이 거의 다 가도록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우린 케빈 씨의 등 뒤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보면서 오늘은 이대로 종을 치겠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즈음엔 아직도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돌아갈 때 술이나 사 가자고 애리와 한담을 떨 만큼 마음이 풀어져 있었다.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스모그 너머로 희미하게 빛을 내는 형광 페인트를 보고 그가 우리처럼 별 소득 없이 돌아와 축 늘어진 사냥꾼이라 생각했다.
젠장, 날씨도 최악이었고 우리의 자세도 최악이었다. 둘 중 하나만 최악이 아니었어도 우리는 그의 어정쩡한 자세를 충분히 수상하게 여겼을 테고, 이내 그가 피투성이란 사실도 깨달았을 터였다.
그는 뒤늦게 우릴 발견하곤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그제야 우린 처음으로 의심을 느꼈다. 정말로 그가 사냥꾼이 맞다면 이미 멀리서부터 빛나는 목도리를 보고는 알아차렸을 터였다.
그는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권총을 봤다. 거기서 우리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러나 어정쩡한 자세였기에, 우리는 미처 알고도 선제사격을 가하지 못했다.
사내가 먼저 움직였다. 그가 인간의 탈을 벗어던지고 포악한 짐승으로 변해 길쭉길쭉 날카롭게 솟은 손톱으로 찔러온 건 한순간이었다. 나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눈 깜짝할 새에 그것이 배에 쑤셔 박혀 살점과 그 아래의 기관을 무자비하게 으깨고 찢어발겼다. 그러나 내가 아니었다. 그걸 실감한 건 피가 쫙 튀겨 내 몸을 적셨을 때였다. 애리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다행인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치명적 부상에 정신이 나갈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다는 거였다. 딱 그 정도만 어리숙하지 않았다. 나는 총구를 놈의 머리에 겨누었고 그것이 다음 행동을 하기 전에 발사했다. 은탄환은 정확히 놈의 머리에 쑤셔 박혔다.
‘애리!’
애리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내장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피가 그녀를 부둥켜안은 내 손과 가슴을 푹 적시고도 더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가 살아남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녀도 그걸 아는 듯했다.
‘있잖아...’
애리가 덜덜 몸을 떨면서 말했다. 그녀는 추운 듯 힘겹게 내 가슴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애리는 내 가슴에 볼을 댄 채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온갖 소리가 점점 작아짐에 따라 나는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머지않아 그녀의 숨소리마저도 끊기게 되리란 것을.
‘그런데... 지금 하면 안 될 것 같아.’
애리는 떨리는 입술 끝을 살짝 들었다. 웃고 싶었던 것이리라.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농담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 우습지도 않은 말은 나를 슬프게 할 따름이었고 나는 소리 죽여 울었다.
내가 울자 애리도 울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소리쳤다.
‘죽고 싶지 않아. 리나, 난 죽고 싶지 않아!’
그것이 그녀의 유언이었다. 유언이 될 터였다. 그러나 문뜩 내 시야엔 죽은 사내의 시체가 잡혔고, 그걸 보자 나는 스스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갔다.
감이 좋다면 말하지 않아도 그때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아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를 되살렸다. 괴물로. 내가 죽인 흡혈귀의 피를 그녀에게 쏟아 부었다. 피는 그녀의 상처 곳곳으로 스며들었고, 이윽고 그녀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애리는 되살아났지만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녀의 부상은 심각했고 그 부상을 수복하는 데에는 다량의 흡혈귀의 피가 필요했다. 그 사내 하나로는 부족했다.
나는 새 파트너를 얻었고 그와 함께 평소처럼 흡혈귀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몰래 흡혈귀에게서 피를 뽑아내어 숨겼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방에 숨겨둔 괴물에게 그것을 가지고 갔다.
이전에 애리였던 괴물은 여전히 그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안에 깃든 건 전혀 달랐다. 그녀는 날뛰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부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방에 가구를 두지 않았고 그녀의 손과 발에 은으로 된 족쇄를 채웠다. 족쇄는 마찬가지로 은으로 된 사슬로 연결해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켜 두었다.
은은 그녀에게서 활기를 뺏어갔다.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녀는 언제나 잠에 취해 있었다. 그녀는 하루 중 대부분을 잠에 소비했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내가 그녀의 깨어있는 모습을 보는 건 하루 중 단 한 순간, 피를 공급할 때였다.
나는 그녀를 통해 왜 흡혈귀가 서로의 피를 빨지 않는지 빠삭하게 알게 되었다. 흡혈귀에게 있어 다른 흡혈귀의 피는 고문용 도구에 가까웠다. 영양분을 주긴 하지만 아마도 맛이 끔찍이 없는 듯하며 더군다나 흡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나는 애리에게 흡혈귀의 피를 먹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가장 유용한 방법은 내 피를 흡혈귀의 피에 떨어트려 섞는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의 앞에서 칼로 팔을 그어 피를 뚝뚝 흘렸다. 그럼 고기 냄새를 맡은 짐승처럼 애리는 자다가도 퍼뜩 눈을 떴다.
나는 그 피를 흡혈귀의 피가 담긴 잔에 담아 애리에게 먹였다. 애리는 가끔 잔에 담긴 피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나에게서 직접 피를 뽑아내려 시도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거리를 두고, 그녀가 손발을 구속한 사슬 때문에 더는 올 수 없는 거리까지 물러나 끄트머리에서 잔을 기울여 피를 먹였다.
만약 피를 주는 쪽이 애리였고 내가 묶인 처지였다면 애리는 그 일을 퍽 재미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통하지도 않을 농담을 한 마디씩 던지면서 혼자만의 유쾌한 분위기를 일궈냈으리라. 하지만 나에겐 그런 재주가 없었고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그 일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 따름이었다.
나는 나날이 늘어나는 팔의 상처를 숨기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들키지 않고 흡혈귀의 피를 뽑아내기 위해 별 수를 다 써야만 했다.
날이 지나갈수록 나는 내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암울한 인간인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애리가 옆에서 기운을 북돋아주지 않는 나는 괜히 무거운 분위기를 풀풀 풍겨대며 농담도 할 줄 모르고 시종일관 진지해 빠졌으며 그 어떤 가벼운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신경질적이고 딱딱한 인간이었다.
나는 여러 번 파트너를 갈아치웠고, 결국엔 혼자 사냥을 나가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둘이서 해도 목숨이 간당간당한 일을 혼자서 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허나 나는 해야만 했다. 피가 필요하니까. 돈이 필요하니까. 더 나은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 나의 삶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위해서.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면 나는 베란다에 나와 걸어두었던 빨래를 걷어 안으로 가져가는 주부나 혼자 사는 여인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택할 수 있었던 평범한 삶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애리는 이 일을 그만두면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간호사는 이 일만큼은 아니더라도 돈을 꽤 받으며, 그만큼 고되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확실히 애리라면 그게 아무리 고약한 환자라도 잘 보듬어 줄 것 같았다.
넌 뭐가 되고 싶어? 애리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다시 고개를 들어 주부나 평범하게 가정 일을 하는 여인을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는 거의 다 핀 담배의 불을 빗물로 끈 뒤 바닥에 떨어트려 짓이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화분이 되고 싶어.’
내 대답에 애리는 웃으면서 되물었다. ‘화분? 꽃이 아니라?’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응.’ 다만 나도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냥 화분 정도면, 누군가가 그곳에 꽃을 기를 예정인 화분 정도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역시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가.
하고, 나는 옆구리의 거의 갈라지다시피 깊게 난 상처를 내려 보며 생각했다. 내 앞엔 죽은 흡혈귀의 시체가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힘겹게 바닥을 기어 근처 건물의 처마 밑으로 들어가 주저앉아 닫힌 철문에 등을 기댄 채 외투의 안쪽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내었다. 젖은 성냥을 겨우겨우 점화시켜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옆구리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고통에 얼굴을 찡그린 채 하염없이 비를 쏟아내는 칙칙한 색의 하늘을 올려 봤다.
너는 뭐가 슬퍼서 그리 우니?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의 기분 따위 생각도 해본 적 없구나 하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나도 그렇고, 포프 씨네 교회의 신사 숙녀들은 잘 울지 않았다. 잘 울던 아이도 7살을 넘겨 케빈 씨를 손에 쥔 시점부턴 우는 일이 없었다. 나는 뒤늦게 이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케빈 씨 안에 잠들어 있던 10mm 매그넘 탄환이란 이름의 잠자는 괴물은 실은 우리에게서 뽑아낸 눈물로 이뤄져 있던 게 아닐까 하고.
정말 실없는 생각이었다. 누군가의 눈물이 그 정도 위력을 가졌다면 하느님,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케빈이든 포프이든 하느님, 왜 우리에겐 단 한 번도 운명을 바꿀 만한 기회를 주지 않으셨나요.
나는 멍하니 비가 내리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쭉쭉 쏟아내는 검은 하늘을 바라봤다. 서서히 눈이 감겼다. 이대로 편히 잠에 들고 싶다. 하지만 나는 곧 눈을 떴다. 한 가지, 하고 갈 게 있었다.
애리에게 피를 주지 않았다.
나는 힘겹게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우리의 집. 정확힌 애리가 계약한 집이었다. 나도 돈을 절반 냈지만, 명의는 그 애 앞으로 되어 있었다. 정말, 정말, 그런 쪽으로 머리 잘 돌아가는 여자다.
나는 피를 뚝뚝 흘리며 계단을 올라 집 문을 열고 안으로 겨우겨우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쓰러졌다. 의식이 곧 끊길 듯 희미한 와중에도 차분히 신발을 벗어 한쪽에 정돈해 두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문을 닫았다. 그리곤 현관을 넘어 안쪽의 방으로 갔다.
몇 겹의 자물쇠를 조바심을 느끼며 연 다음 들어가자 자고 있다가 피 냄새를 맡고 깨어난 애리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올려 보았다.
“잘 잤어?”
나는 피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애리는 경계하며 물러나 나를 쳐다봤다. 아마 내가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기본적인 인지 능력조차 이제는 그녀에겐 없었다.
“식사 시간이야.”
나는 한쪽에 둔 칼을 내려 봤다. 그러나 오늘은 구태여 저것이 필요하진 않으리라. 나는 대신에 옷 안쪽에 항상 가지고 다니던 열쇠를 꺼내었다. 그리곤 그것으로 애리의 양팔과 다리를 구속한 은으로 된 수갑을 풀었다.
구속에서 풀려난 애리는 순식간에 나를 덮쳐왔다. 우리는 바닥을 뒹굴며 몸싸움을 벌였다. 술에 취해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던 날처럼.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거칠게. 마침내 애리가 나를 아래에 눕히고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애리를 올려봤다. 광기에 차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는, 그러나 숨이 막혀 시야가 흐릿해져 감에 따라 점점 불분명하게 변해 그리운 그때의 느낌을 띠었다. 애리의 손이 목덜미를 상냥하게 쓰다듬고 점점 얼굴로 올라와 상냥하게 어루만진다. ‘많이 힘들었어?’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상냥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생각난다. ‘힘들면 쉬어도 돼.’ 그녀의 상냥한 속삭임이 고통스럽지만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몸을 안정시키고, 너무나 애틋하게, 너무나 소중하게, 너무나 사랑스럽게, 너무나 그립게, 이제 더는 견딜 수 없는 몸과 마음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끝내려 한다.
‘응. 이젠 좀 쉬고 싶어.’ 나는 그렇게 소리 없이, 어떻게든 웃어 보이며 대답한다. ‘고마웠어, 늘.’
그리고 의식은 더욱이 희미해져 가, 이윽고 끊겼다.
조각 난 의식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의식이 희미해졌을 즈음 목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러다닌 어떤 물건.
끈으로 묶어 늘 목에 걸고 다니던 10mm 매그넘 탄환.
애리는 그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그쪽으로 주의가 쏠린 탓일까, 손아귀의 힘이 약해지고, 이내 믿기지 않게도 놓아졌다.
애리는 그것이 떨어진 곳으로 가 주워들었다. 그리곤 한참을 말없이 거기에 앉아 바라봤다. 마치 처음으로 생일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그 선물을 나중에 꺼내어 보는 어른처럼, 신기해하면서도 애틋한 눈빛으로.
이윽고 애리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또르르 떨어졌다. 가장 소중한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은 울고 있었다. 그 기적과도 같은 광경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마 몇몇은 눈치 챘을 것이다.
그때 내가 죽었다면 지금 이 글을 쓰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나는 다음날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내 옆엔 애리가 작은 동물처럼 등을 구부린 채 누워 잠에 들어 있었다.
깨어나기 직전까지 나는 쭉 긴 꿈을 꾸었다.
애리가 나를 눕히고 옷을 벗긴 뒤에 몸 곳곳을 어루만지고 핥는 꿈을. 그건 내가 애리와 가졌던 그 어떤 관계보다도 진하고 깊었다. 애리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고 볼을 맞대어 비비적거리다가 입을 맞췄다.
애리의 입을 통해 액체가 전해졌다. 애리는 혀로 그것을 내 입에 밀어 넣었다. 나는 그게 처음엔 타액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맛이 쓰고 비릿했다. 내가 알고 있는 애리의 침 맛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더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것으로부터 애리의 애정과 사랑을 느꼈다. 그 행위 모두로부터.
그 꿈은 내가 꾸었던 그 어떤 백일몽보다도 달콤했다. 애리와 나는 그런 식으로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몸을 섞고 입술을 나누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진지한 애리는 그래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처음엔 그게 꿈일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 돌이켜 보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도 든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몸엔 누군가의 침 자국이 있었고 부상은 말끔히 나아 있었다. 아마 그때 내 입을 통해 들어온 건, 애리가 스스로 입 안에 상처를 내 흘린 자기 피였으리라.
다만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는 흡혈귀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사냥꾼 직을 관뒀다.
그리고 집을 처분하고ㅡ애리의 유산은 모두 나의 앞으로 남겨졌다. 그녀는 미리 그런 것들도 대비하고 있었다. 정말, 그런 부분으론 빈틈이 없다.ㅡ수중에 있던 모든 것들을 팔아넘겼다. 내게 있어 정말로 소중한 것들만 제외하고.
나는 새 집을 구했다. 교외에 있는 숲에 지어진 작은 주택이었다. 원래 부자의 별장이었던 그 주택은 그가 죽음과 함께 경매에 내놓아졌고, 한동안 빈집으로 있다가 매물로 나온 것이었다.
마당이 딸려 있고 근처에 나무들이 많아 가장 맑은 날에도 낮부터 어스름이 졌다. 무엇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가끔 짐승이 근처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단 걸 제외하면 조용하고 한적하며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새 삶을 살기로 했다. 애리와 함께. 애리는 그날 이후로 온순해져 수갑을 채워놓지 않아도 날뛰거나 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좀 더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녀에게 야생성은 아직 남아있어 그녀는 곧잘 물건을 깨거나 방을 어지럽혀 놓았다. 주로 배가 고파지면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피를 자주 먹일 순 없었다. 그건 모두 나에게서 나오는 거니까. 내가 주고 있는 양은 나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양, 딱 그 정도였다.
나는 애리에게 참을성을 기르게 할 방법을 찾다가, 그녀의 기분을 안정시키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연히. 애리는 내가 가까이 있으면, 그리고 몸을 밀착시키거나 가벼운 스킨십을 하면 배가 고파도 날뛰지 않았다. 그걸 알게 된 뒤로 나는 좀 더 애리의 옆에 있어주려 노력하고 있다.
언제쯤 애리가 원래대로 돌아올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의 최후는 가끔씩 내가 마음속으로 품곤 하는 그런 두려움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애리가 나를 죽이거나, 내가 애리를 죽이는.
그날이 결국에 오게 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더 소중하게 여기려고 한다. 애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나는 여전히 10mm 매그넘 탄환을, 애리가 주었던 선물을 목에 걸고 있다. 나와 그 아이의, 그리고 너무나 이르게 신사 숙녀가 되어야 했던 모든 아이들의 눈물이 담겨 있는 그것을.
그 10mm 탄환은 우리 모두의 불행과 고통, 슬픔, 그것이 결정화된 것. 그리고 그 10mm 탄환은 우리의 인생을 지탱해 주었다. 나에게 새 삶이 가능케 했다.
내가 지금의 삶이 소중하다 여길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이 아픈 탄환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나는 요즘 글을 쓰고 있다.
이 글도 그중 하나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누군가는 날 알아차리고, 나에 대해서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마주쳐도, 혹여나 알아봐도 인사는 하지 말아 달라. 그건 나를 상당히 곤란하게 만들 테니까.
다만 그럼에도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당신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소중한 것을 가장 소중히 여겨 주세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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