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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카스아리 2세물) 미숙한 그녀들 -2모바일에서 작성

AGBMD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1.24 21:5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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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분 정도 같은 방향으로 달린 끝에 아스미는 대로변에 멈춰서서 무릎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굽힌 채로 가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헉......헉...... 진짜...... 힘드네......'

아스미는 혹시 카스미가 따라왔을까봐 자신이 달려 나온 골목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아스미는 허리를 펴고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직 숨이 가쁜지 아스미의 호흡이 거칠었다.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도로의 낙엽과 먼지가 지저분하게 날렸다. 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한기에 아스미는 양팔을 부여잡고 덜덜 떨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코트나 점퍼 없이 나온 데다가 달릴 때 흘린 땀이 마르면서 아스미의 흰 피부는 마치 얼음장 같았다.

하지만 추위 속에서도 아스미는 오늘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카스미의 눈빛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며 아스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얼핏 보면 당황한 듯한, 하지만 자세히 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서려 있는 서글픈 눈빛은 심해의 수압처럼 아스미의 가슴을 짓눌렀다. 숨이 찬 건 갑작스러운 뜀박질 때문만은 아니었나 보다.

'카스미 엄마, 울 것 같았지......'

카스미에게도 이케다에게도 사과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무슨 말로 어떻게 사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추위와 바람보다 카스미와 이케다가 무서웠다. 또 지금쯤 귀가해서 모든 걸 알아차렸을 아리사 엄마도 무서웠다. 카스미 엄마를 울린 걸 아리사 엄마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건 평소의 아리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화난 아리사를 상상하자 아스미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란 사실에 그녀는 다시 자기혐오의 늪에 빠졌다. 카스미와 이케다에게 상처 준 자신이 미웠고 그렇게 상처 주고도 아리사 엄마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스스로가 너무 속물 같아서 미웠다. 카스미의 눈을 닮은 보랏빛 하늘이 벌을 주는 듯 매서운 바람이 계속해서 아스미를 때렸다. 아스미는 추워서 덜덜 떨리는 얼음장 같은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나쁜 짓을 한 스스로에 대한 징벌로 길거리에서 잘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할 것 같았다. 구급차에 실려 가서 부모님에게 더 큰 걱정을 안겨 주긴 싫었다.

'야마부키, 혹시 오늘 너희 집에서 자도 돼?'

라인을 켠 그녀는 야마부키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갑자기 이런 라인을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지내온 소꿉친구 사이기에 조금 봐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스미는 메시지를 적었다.

답장은 거의 즉시 도착했다.

'언제든지 OK!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너희 엄마가 방금 전화하셨는데?'

'뭐? 무슨 말씀 하셨어?'

'그냥 네가 우리 집에 있냐고 막 물으시던데?'

아스미는 답장을 보고 잠시 당황하며 채팅을 이어가다가 한숨을 쉬면서 스마트폰의 화면을 껐다.

'카스미 엄마인지 아리사 엄마인지 모르겠지만 야마부키네는 안 될 것 같네.'

재워줄 수 있을 만한 다른 친구의 집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아스미는 종아리와 발의 통증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근육에 쥐가 난 것 같은 아픔이 발목과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평소에 운동을 전혀 안 하던 아스미에게 오늘 오후와 저녁 두 번의 전력 질주는 매우 격한 신체활동이었다.

'어디 앉아서 좀 쉬어야겠는데...... 진짜 오늘따라 왜 이러지? 되는 일이 없네......'

아스미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교복 주머니에 넣고 앉을 곳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낡은 공민관 앞의 벤치를 발견하고 터벅터벅 걸어가서 쓰러지듯이 앉았다. 벤치는 생각보다 차가워서 앉는 순간 엉덩이와 허벅지에 한기가 서려왔다. 서려오는 한기가 근육통을 날려 보내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곧이어 추위와 함께 공복감이 아스미의 위장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피부와 위장의 불쾌한 기분을 덜기 위해 다시 스마트폰을 꺼낸 아스미는 인터넷을 켰다가 라인을 켰다가 유튜브를 켰다가 다시 스마트폰을 끄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다른 친구네 집에 더 늦기 전에 연락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다지 절박한 심정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스마트폰을 만지다가 손이 시려서 결국 다시 휴대폰을 끄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흐린 날씨 때문인지 도심의 광공해 때문인지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보랏빛이던 하늘도 어느덧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덧씌워져 있었다. 바람은 잦아들지 않고 날카롭게 불어오며 얇은 교복 사이사이로 칼날처럼 스며들었다. 아스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몸을 최대한 웅크려 열을 보존하고 몸을 떨면서 마지막 열을 쥐어 짜내는 것이 전부였다.

"대체 뭐 하는 짓이지 이게...... 춥고 배고프고...... 이제 졸리기만 하면 완벽하네."

계속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아스미는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나름대로 자기혐오가 담긴 푸념은 그렇게 사라져 갈 터였다.

"그러면 집에 오지 그래?"

수그린 채로 혼잣말하던 아스미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검은색 정장 위에 코트를 걸친 여성이 아스미가 앉은 벤치 뒤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약간 웨이브가 들어간 기다란 금빛 머리카락이 가로등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고 팔짱을 낀 자세가 그녀의 곡선을 유려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아마 누구든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넋 잃은 채로 바라봤겠지만 아스미에게 그녀는 구면이었다. 물론 구면인 그녀가 보기에도 정말 예쁘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아스미에게 현실적인 면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이었다.

"어......엄마?"

"......"

아리사는 아무 말 없이 아스미를 바라봤다. 아리사는 애써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런 쪽에는 재능이 없는지 꽤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스미는 아스미대로 어떻게 자신을 찾아냈는지, 이제 어떤 설교를 들을지, 어떤 벌을 받을지 전전긍긍하면서 고개만 아리사를 향한 채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얼마간 말없이 아스미를 쳐다보던 그녀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아스미의 어깨에 걸쳐주면서 말했다.

"이 날씨에 그렇게 입고 있으면 감기 걸려."

아스미는 안절부절못하며 어깨에 걸쳐진 코트와 아리사를 두세 번 번갈아 바라봤다. 불편한 침묵이 계속 이어지던 중 아스미는 대충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던졌다.

"......엄마는 안 추워? ....헤...헤....에헷취!"

팔짱을 낀 채로 대체 언제 일어날 거냐는 표정을 하던 아리사는 아스미의 말과 이어진 재채기를 듣고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만 괜찮아. 엄마보다 아스미 네가 진짜 감기 걸리겠어. 저녁밥 차려 놨으니까 집에 가자. 그리고 야마부키네랑 시로카네네랑 오쿠사와네에 다 연락 돌려놨으니까 어딜 가든 넌 우리 집에서 자는 거야."

아리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하며 아스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망갈 곳은 없다는 일종의 항복 요구였다. 자식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지극히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진짜 아리사 엄마한테는 이길 수가 없네...... 대체 어떻게 찾아냈대? 내가 집에 안 들어올 건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아스미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걸쳐진 코트를 바르게 입은 뒤 아리사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리사의 손은 차가운 벤치와 다르게 정말 따뜻했고 평소보다 부드러운 것 같아서 아스미는 맞잡은 아리사의 손안에서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아스미와 아리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끔 아스미가 아리사에게 뭔가 말하려는 듯이 입이 벙긋벙긋했지만 목소리로 나오지는 않았다. 두어 번 벙긋하던 아스미의 입술은 말하기를 포기한 듯 집에 도착할 때까지 굳게 닫혀있었다. 아리사는 아리사대로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아스미를 바라봤지만 이내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색한 모녀의 산책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종료되었다.

"카스미, 나 왔어. 아스미도 같이."

"아, 아리사 왔어? ......아스미도 왔구나."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가자 카스미가 앞치마를 입은 채로 주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오후와 달리 카스미는 달라붙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카스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하지만 카스미도 표정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지 평소보다 어두워 보였다. 어두운 이치가야 가족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주방에서는 향긋하고 따뜻한 데미글라스 소스의 향이 퍼져나왔다.

"배고프지? 오늘은 특별히 햄버그를 했어. 손 씻고 와서 먹어."

"어... 알았어. 카스미. 바로 들어갈게."

아리사가 카스미에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스미는 카스미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사는 아스미를 바라보며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아스미, 밥 먹으러 가자."

"......"

아리사는 대답 없는 아스미를 바라보다 옷을 갈아입으러 안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 앞에서 아리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카스미가 피곤한 몸으로 준비한 거니까 한 젓가락이라도 먹어. 그리고...... "

아리사는 그대로 말을 끝내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은 이치가야 가의 식사 시간 답지않게 고요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아스미는 바로 샤워만 한 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목욕을 마친 아리사가 침실로 들어가자 먼저 목욕을 끝낸 카스미가 더블베드 한편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갈색 머리칼은 아직 약간 물기를 머금은 채였다. 아리사는 서랍에서 새 수건 하나를 꺼내서 카스미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머리에 갑자기 아리사의 손길이 느껴지자 숙이고 있던 카스미가 깜짝 놀라며 허리를 펴면서 바로 앉았다.

"아, 아리사! 으으...... 간지러워! 내가 말릴 테니까!"

"카스미 너 이렇게 자면 감기 걸려. 용케도 추운 북쪽에서 감기 한 번 안 걸렸구나."

"에헤헤......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고 하잖아? ...... 그래, 바보니까."

실없이 웃던 카스미의 얼굴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를 본 아리사는 열심히 두피를 마사지하던 손을 멈추고 수건을 카스미의 머리에 얹어둔 채로 안방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아리사의 손에는 두 개의 캔이 들려있었다. 아리사는 복숭아가 그려진 캔을 카스미에게 건넸다. 카스미는 캔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그것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아리사는 다른 손에 들고 온 은색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아리사, 내일도 출근인데 이 시간에 술 마셔도 괜찮아?"

"겨우 맥주 한 캔이잖냐? 이 정도는 음주 축에도 못 끼지~ 카스미 너도 맥주로 줄까?"

"아니, 괜찮아. 난 이걸로 할래."

"의외로 그것도 알코올 함량은 큰 차이 안 나는데 말이야."

"그래도 쓴 건 싫은걸."

카스미의 투정 섞인 말을 듣자 아리사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퍼졌다. 처음 만난 뒤로 이런 말투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타인의 감정을 바로 알아차리는 능력도 그대로였고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웬만하면 자신이 짊어지고 끌어안으려는 버릇도 그대로였다. 상처받기 쉬운 주제에 남에게는 상처 주지 않으려는 그 상냥함이 아리사는 때때로 답답하고 바보 같았다.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아리사."

캔을 홀짝이며 내용물을 조금씩 비워가던 카스미가 아리사에게 낮게 깔린 목소리로 힘없이 말을 걸었다. 카스미의 귓불과 목덜미가 살짝 붉었다. 그녀는 술에 엄청나게 약했다. 서투른 술까지 마실 정도로 이번에 그녀가 받은 상처는 꽤 깊었을지도 모른다.

"아리사는 내가 소설가 일을 시작한 걸 원망한 적이 있어?"

카스미가 내용물이 아직 남아있는 캔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말하고 나서 조금 민망한지 캔을 살짝 흔들며 아리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꽤 남아있는지 찰랑거리는 소리가 작게나마 들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아리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카스미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카스미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무릎에 묻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리사 회사 일도 힘든데 내가 집을 자주 비우니까 아스미 돌보는 것까지 아리사 몫이 되어버렸는걸. 아스미도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늘 보던 엄마가 갑자기 사라져서 많이 서운했을 것이고. 힘들게 일하는 아리사랑 외로워하는 아스미에게 항상 미안했어......"

카스미의 목소리가 갈수록 잠겨갔다. 이어지는 카스미의 말을 아리사는 계속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리사, 있잖아? 포피파에서 난 별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어. 아리사를 만나고 리미링을 만나고 오타에를 만나고 사아야를 만나서, 내가 찾고 있던 별의 고동을 모두가 함께 만들어 줬어. 그런데 모두 어른이 되면서 별의 고동만으로는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어. 사아야도 빵집을 물려받아야 하고 아리사도 회사에 들어가서 바빴고 리미링도 유학을 준비하고 오타에도 솔로 데뷔를 하면서...... 하지만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는 포피파니까! 포피파가 선물해 준 고동을 가지고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가기로 했어. 그런데 아리사랑 이어지고 나서 아스미를 낳고 정신없이 지내다가 문득 깨닫고 말았어. 어느새 내 마음속의 고동이 사라져 버린 거 있지? 그 고동은 포피파가 만들어 준 건데...... 잃어버린 것 같아서 너무너무 무서웠어."

카스미의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섞이고 있었다. 이따금 훌쩍이면서도 그녀는 계속 말을 만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거야. 포피파가 내게 준 반짝이는 보석이 사라졌을 리가 없을 거라고. 이 넓은 세계 어딘가에는 분명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으면서 소설을 시작했어. 이 세계를 찾아가며 혹여나 내가 잊어버린 게 있을까 봐, 놓친 게 있을까 봐 기록하고 싶어서...... 그런데 난 정말 바보였나봐. 보석에 눈이 멀어서 주변을 보지 못했어...... 아스미가 외로워하는 건 알았지만...... 그래서 집에 있을 때는 잘해주고 싶었는데...... 얼굴빛이 안 좋아 보여서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꼭 내가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너무 몰아붙였나 봐. 그 나이 여자애라면 부모에게 말하기 힘든 것도 많았을 텐데. 그런 간단한 것도 잊고 아스미를 상처입혔어......"

점점 목이 메는지 카스미의 호흡이 거칠어졌고 코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잦아졌다. 아리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빈 맥주캔을 아무렇게나 두고 카스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른 손으로 카스미의 등을 살살 두드려 주었다.

"흑......흑...... 아스미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아서...... 원망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전부 나 때문이니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렇게 슬퍼할 자격도 없는데...... 그런데도 너무 슬퍼서......"

훌쩍임은 어느새 울음이 되어 카스미의 잠옷을 적시고 있었다. 침실은 카스미의 서글픈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아리사는 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카스미를 위로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뭔가 생각난듯 한 표정을 하더니 난데없이 카스미의 옆 머리카락을 잡아서 상냥하게 묶으면서 말했다.

"카스미, 혹시 옛날에 내가 리미한테 심한 말 했던 거 기억나? 선생님한테 성적 나빠진 거로 지적받아서 열 받아 가자고 무리한 공연 일정 잡았었잖아. 그때 밴드를 못 하게 될까 봐, 소중한 보금자리가 사라질까 봐 엄청 필사적이었어. 그러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서 리미한테 짜증 내버리고 오타에도 연습 빠지고...... 그땐 진짜 위기였지."

말을 하면서 아리사의 손은 카스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땋은 뒤 두 갈래의 매듭을 만들었다. 이어서 그녀는 화장대에서 헤어스프레이를 꺼냈다. 카스미의 울음이 멈추지 않았고 아리사의 말도 끊어지지 않았다.

"하여튼 그때 난 정말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리미나 포피파가 싫었던 건 아니야. 다만 스트레스에 짓눌려서 생각했던 거랑 다른 말이 튀어나와버였던거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면서도 바보 같아. 리미한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있고."

아리사는 카스미의 땋은 머리카락에 헤어스프레이를 뿌린 뒤 두 갈래 중 한 갈래를 정중앙으로 올리면서 마무리에 들어갔다.

"카스미, 카스미가 일을 시작할 때 OK 한 건 나야. 만약 아스미가 카스미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원망을 한다면 절반은 내 몫도 있는 거야.
그런데 카스미, 아스미는 널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어.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해. 오늘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고민하고 힘들어하느라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해. 옛날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카스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아스미도 그걸 알아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말재주가 없는 그녀는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카스미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침실을 채우던 슬픈 악상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훌쩍임이 조금 잦아든 카스미의 머리카락을 마지막으로 손질한 아리사는 작은 목소리로 다 됐다고 혼잣말을 한 뒤 화장대에서 작은 손거울을 들고 침대로 왔다. 아리사는 손거울을 카스미의 머리 앞에서 든 채로 카스미에게 말했다.

"카스미. 고개 들어 볼래?"

눈물범벅인 얼굴의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코를 훌쩍이던 카스미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카스미는 그리운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머리를 보면서 카스미는 약간 놀란, 그러나 조금 먼 곳을 그리는 눈빛을 하고 자신의 머리를 보석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렇게 잠깐 머리를 만지던 카스미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리사, 살짝 비뚤어졌어."

"에? 그......그렇네?......직접 해본 건 처음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처럼 능숙하게는 못한다구......."

약간 부끄러운 듯 아리사가 볼에 홍조를 띄웠다. 부끄러운 표정을 한 아리사도 이 헤어스타일처럼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카스미는 거울 속 미완성의 별을 보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런 카스미의 옆모습을 아리사는 계속 바라봤다.

한참을 생각하던 카스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리사, 나 찾은 것 같아."

"......? 갑자기?"

"응, 뭔가......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느낌이 들어. 잃어버린 게 아니었구나. 내가 깨닫지 못했던 거였어."

아리사가 잠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면서 카스미의 손을 상냥하게 잡았다.

"카스미 넌 언제나 그런 식이지.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뭐, 그런 점이 좋은 거지만."

"아......아리사......"

복숭아 맛 알코올의 취기가 더 강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는지 카스미는 목덜미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빨개졌다. 아리사는 카스미의 빨개진 얼굴을 보고 소리내어 웃다가 양치하고 자자면서 카스미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갔다.

"그런데 머리 그렇게 하고 자도 돼?"

"아...... 풀어야 하네."

"후훗. 카스미 내가 도와줄테니 그냥 가만히 있어~"


밤새 기침과 콧물로 고생하다 겨우 잠든 아스미는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 격렬한 두통과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근육통에 휩쓸렸다.

'이거 진짜 제대로 걸린 것 같은데......'

그래도 아스미는 어머님들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감기환자의 모습이었다.
오늘은 쉬는 게 어떻냐는 카스미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스미는 입맛도 없으니 아침을 건너뛰겠다 말하고는 현관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하지만 아스미의 무모한 등교는 다리에서 올라오는 격렬한 근육통 때문에 현관 앞 복도에서 아스미가 주저앉으면서 싱겁게 끝났다. 카스미와 아리사가 기겁을 하고 달려와 아스미를 방으로 부축해 데리고 들어갔다. 강제로 파자마로 갈아입은 아스미는 침대에 눕혀졌다.

"38.3도. 그래,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고열이네."

아리사가 전자체온계의 숫자를 읽으면서 아스미의 이마에 손등을 올렸다.

"......카스미 두 번 울렸어."

아리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사의 목소리와 눈빛에 아스미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오한을 느끼며 이불을 눈 바로 밑까지 올려 덮었다. 어제 저녁에 아리사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카스미는 퉁퉁 부은 눈과 눈물 섞인 목소리로 아리사를 맞이했었다. 아스미가 가출했다는 영문 모를 말에 깜짝 놀라서 아리사는 열심히 밤의 골목길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밤에도 카스미는 츄하이를 마시고 그동안 느꼈던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울었다. 그리고 방금 쓰러진 아스미를 침실에 데려다 놓은 뒤 아스미가 걱정된다면서 또 울었다. 이번에도 카스미 자신의 탓을 하는 건 잊지 않았다. 하루 사이에 3번이나 울다니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내는 정말 눈물이 많다는 것을 아리사는 이번에 다시 한번 느꼈다. 물론 아리사는 카스미의 그런 면도 좋아했다.

"오늘은 푹 쉬어. 학교에는 전화해둘 테니까."

"네......"

아리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스미가 눈만 이불 밖으로 빼꼼 내민 채로 대답했다. 싸늘한 표정을 하던 아리사는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얼음 가면을 옅은 미소로 녹이며 아스미의 방문을 닫아 주었다.

지난밤에 잠을 못 잔 탓인지, 감기약의 수면효과인지 아스미는 이윽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딱히 꿈은 꾸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슬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스미가 다시 눈을 뜬 건 해가 서쪽 하늘로 뉘엿뉘엿 넘어가려고 할 때 즈음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고 몽롱한 의식을 집중하며 머리를 깨웠다. 땀에 젖었던 파자마가 말라서 등에 달라붙는 느낌이 불쾌했다. 천천히 머리를 들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위장에서 공복감이 기분 나쁘게 스멀스멀 올라왔다. 입맛은 하나도 없는데 배가 고파서 불편하다. 사람의 몸은 왜 중추신경계와 자율신경계가 따로 노는지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참 복잡하고 피곤하게 설계했다고 생각하면서 아스미는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겨우겨우 일으켰다. 그 때 때마침 카스미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어나 있는 아스미를 본 카스미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달려왔다.

"앗! 아스미! 일어났어? 배고프진 않아? 일단은 죽을 만들었는데 혹시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어?"

카스미가 속사포처럼 물었다. 아스미는 카스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녀의 눈을 보는 게 아직 거북했는지 이불만 바라보면서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다는 말을 전했다. 카스미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아스미에게 서운하면서도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죽을 만들어주겠다면서 방을 나섰다. 바로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려서 카스미는 부엌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네~ 나가요~"

어두운 감정을 접어두고 카스미는 평소와 같이 건강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침대에 앉아서 아직도 쑤시는 다리를 주무르면서 아스미는 현관으로 나가는 카스미의 발소리를 들었다. 아스미는 혹시 카스미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됐다. 용기를 내어 사과하고 싶었지만 아픈 몸과 머리로는 어떻게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할지 더더욱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죽 한 숟갈이라도 먹고 생각하기로 하고 그녀는 그렇게 잠시 멍하니 있다가 창가로 기어가서 커튼을 걷었다.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인 태양이 이제는 수평선 아래로 내려 가려 해서 조금은 쓸쓸한 주홍빛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옅게 구름이 깔려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말라서 피부에 붙은 파자마가 찝찝하고 묘하게 차가워서 아스미는 파자마 뒤로 손을 넣어 말라붙은 천을 피부에서 떼어냈다.


"아스미? 친구가 병문안 왔는데?"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던 중 카스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라면 역시 야마부키가 병문안을 왔을 거라고 아스미는 생각했다. 열 때문인지 그녀는 카스미가 어릴 적부터 알아 왔던 야마부키라면 '친구'가 아니라 '야마부키'라고 호칭했을 거라는 사소한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런 준비도 못 한 채로 병문안을 온 손님과 마주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이치가야 선배."

"이케다…. 라고 했니? 우리 집에 온 거 처음이지? 편하게 있다 가렴. 쿠키 먹을래?"

"괜찮아요. 어머니. 급하게 오느라 선물도 준비 못 해서 죄송한데 이렇게 받을 순 없어요."

이케다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마~ 쑥쑥 클 때니까 많이 먹어야 한단다!"

공손하게 거절하는 이케다에게 카스미가 기어코 직접 포장한 쿠키 포장을 건네주었다. 빨간색 리본이 아기자기하게 묶여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꼭 다음에 보답할게요."

"괜찮아 괜찮아! 그냥 아스미랑 사이좋게 지내줘!"

비록 상투적인 대화였지만 둘은 꽤 즐거워 보였다. 카스미와 이케다가 이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스미는 완전히 굳어버린 채로 그녀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은 계속해서 애꿎은 이불을 잡아 구기고 있었다. 오늘은 아스미에게 신이 시련을 내린 것일까. 몸도 아프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짝사랑 후배가 집에 병문안 오고. 정말 되는 대로 시련을 내리는 엄격한 신님이다. 모두 아스미 자기 잘못이긴 하지만 막상 벌을 받는다 생각하니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다. 좀 봐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럼 편하게 쉬다가 가렴~"

아스미가 야속한 신에게 원망을 퍼붓는 사이 카스미가 주방으로 나가면서 아스미와 이케다 단둘만이 침실에 남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꽤 긴 정적이 흘렀다. 이케다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 가방을 들고 아스미를 말없이 바라봤고, 아스미는 이내 이케다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케다가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와 정좌한 뒤 말을 꺼냈다.

"선배, 몸은 좀 어떠세요?"

걱정하는 눈빛. 낮게 깔린 음색의 목소리. 검은 스타킹으로 감싸인 무릎 위에 올려둔 손. 지금 이케다의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전의 그 고백을 이어서 할 생각이라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아니면 이쪽에서 먼저 사과를 해야 할지 아스미는 계속해서 머리를 회전시켰다. 하지만 학교 수업도 책들도 답을 내주지 않았다. 아스미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이케다는 천천히 말했다.


"오늘 부활동 안 오셔서 고문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아프다 하셔서 많이 걱정했어요. 미리 연락 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폐를 끼친 것 같네요. 죄송해요."

'아니야. 사과해야 하는 건 나야.'

하지만 아스미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요. 이거라도 받아 주시겠어요?"

이케다가 옆에 둔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서 침대 옆 좌식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특별히 신경 써서 포장한 것은 아니었고 카페에서 일반적으로 주는 포장 상자 그대로였다.

"......고마워."

아스미가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낸 대답은 겨우 한마디였다. 말하자마자 그녀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이케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궁금했지만 동시에 무서웠다. 만약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면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다면 어떤 말로 위로해줘야 하는지 어떻게 보듬어 줘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녀는 한 번 더 도망쳐버렸다.

"선배."

어느새 이케다는 일어서서 창밖으로 몸을 돌린 아스미의 등 뒤에 와 있었다. 그녀는 곧 허리를 숙이고 아스미의 옆구리에 팔을 두르고 아스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자……. 잠깐! 이케다?"

이케다의 돌발행동에 아스미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이케다의 팔을 떨쳐내기 위해 손을 옆구리로 향하던 그때 이케다의 말이 이어졌다.

"잠시만, 이대로 있게 해줘요. 잠시만......"

속삭이듯이 이케다는 말했다. 속삭인다기보다는 이케다 자신에게 거는 암시 같았다. 다만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후련함이 느껴졌다. 아스미는 이케다의 팔을 잡으려던 손을 허공에 그대로 뒀다가 이불 위에 힘없이 떨어뜨렸다.

"감기, 옮을지도 몰라."

아스미는 씁쓸하게 말했다. 이케다는 작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미소지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황금빛 노을이 포옹하고 있는 두 소녀를 비춰주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똥차 스페셜!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런을 하는 것이 진짜 똥차입니다.

점점 수습이 안될정도로 전개되는데

담편으로 완결일 것 같은데 힘내보겠습니다

사실 카스미랑 아리사 대화 쓰는게 젤 힘들었음


아리사가 카스미 뿔 만들어 주는거는 밑에 사진 참고했는데 묘사능력 없어서 이상하게 됐으요......


viewimage.php?no=24b0d769e1d32ca73ced82fa11d02831fe384ecd5bf5471a0304a3eb0e96158de05ad72db48964b0376214fda4d5f2e712c53e6760d1566bdccc7f3cea2b91a400996dff5357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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