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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주인과 손님 그리고 직원]_직원앱에서 작성

무나강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1.31 18:40:57
조회 1575 추천 21 댓글 12
														

[주인과 손님 그리고 직원]_직원






#2024.01.20 20:47

오늘은 츠구미 씨의 장례식입니다.

한 없이 특별한 일이지만, 특별하지 않은 장례식이 없듯이 이 또한 평범했습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에는 상복을 입은 부모님들, 향에서 피어나는 새하얀 연기, 하자와 츠구미 씨의 영정사진, 텅 빈 관짝.
그리고 그것을 향해 절을 하는 츠구미 씨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츠구미 씨의 몸을 했을 뿐, 츠구미 씨가 절대로 아닌 사람이지요.
우리들이 졸업을 하고, 몇 해인가가 지났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오랜 시간동안엔 의학이 발전하고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뇌 이식 수술의 상용화가 그것이며, 츠구미 씨가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것이 그것입니다.

그저 단순한 사실들입니다.
츠구미 씨를 포함한 몇몇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마주 오는 음주운전자와 부딪혀, 사고가 나고,
대부분 크게 다쳤지만 한 명은 몸이, 한 명은 뇌가 죽었고,
그리고 그 결과로 그 결과 운이 나빴던 사람은 운이 더 나빴던 사람의 몸을 가지게 되고,
그 몸은 이렇게, 이전 주인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는, 
잔인할정도로 합리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물론 주변사람들이 고민을 했다던가, 놀랄것도 없이 착한 츠구미 씨가 생전에 시신기증 신청을 했다던가,
의사가 독단을 내렸다던가 등의 사소한 사실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츠구미 씨가, 저렇게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데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압니다. 저 분, 츠구미 씨가 절대로 아닌 사람, 그러니까 카논 씨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수술 자체는 본인의 동의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저에게 하나의 고문 같았습니다.
츠구미 씨의 몸으로 그녀가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 -가령 본인의 장례식에서 살아움직인다는-을 하는 저 분은
마치 '츠구미' 라는 인간을 새로 쓰려는 듯 했고,
그것은 내가 깊숙히 숨겨둔 감정들을 하나 하나 찾아내어 짖이겨버리는 듯 한 느낌이었습니다.

"정말로 유감이에요."

아, 츠구미 씨가 아닌 사람이 부모님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내용일까요.
미안하다 감사하다 뭐 그런 내용이겠죠. 어쨌거나 부모 자식간에 할만한 대화는 아닐 것입니다.
형식적인 대화를 끝냈는지, 자른지 조금 된 갈색단발을 찰랑거리며 물러납니다.
울고 있는 애프터 글로우 분들이 아닌, 검은 장발의 미사키 씨 쪽으로.
그녀와 하고 았는 다정한 대화 또한 친분이 적은 친구끼리 할 만한 대화는 아닐 것입니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츠구미 씨가 죽었다면, 나의 마음은 그대로 남겨졌어야 했습니다.
마음 구석 한 켠에, 기억의 다락방에, 빛바랜 채로, 그렇게 잊혀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츠구미 씨도, 카논 씨도 아닌 저 존재는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게 츠구미 씨를 덮어씌웠고
제 망각과 슬픔은 그렇게, 부정과 혼란으로 전락했습니다.

저 멀리서 츠구미 씨가 아니, 그녀가 아니, 그것이 나를 향해 다가옵니다.
그 앙증 맞은 발이 전에 없던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 상냥한 눈동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 가까워집니다.
마침내 츠구미 씨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내려앉아도 나의 심장은 결코 뛰지 않았습니다.

"이브 짱, 이제 돌아가자."

"네, 카논 씨."

오늘은 츠구미 씨의 장례식입니다.
내 지독한 짝사랑은 부풀어 올라 터져버렸는데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습니다.







#2024.01.20_22:14_집


츠구미 씨는 완벽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모두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밴드 맴버에겐 의지가 되는 친구였고, 학생회장에겐 도움이 되는 부회장이었으며,
점원에겐 상냥한(그리고 사랑스러운) 상사였고, 부모님에겐 자랑스러운 딸이었지만
결국 의사에겐 큰 병을 가진 환자일 뿐이었습니다.

고교 졸업 후 당연한 듯이 부모님의 가게일을 돕던 츠구미 씨는 몇 달 후 병으로 쓰러졌고,
담담한 얼굴의 의사선생님은 불안스러운 표정의 부모님께 완치가 거의 불가능한 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거의 불가능'. 그 얄미운 단어는, 죽음을 준비하기에도 삶에 매달리기에도 애매한 단어였습니다.

물론 그 어떤 부모가 애매하다고 딸의 목숨을 버리겠어요.
하지만 그 병은 너무나 까다로웠습니다. 누군가가 24시간 곁에 있어줬어야 하며,
약을 복용하는 것은 물론 정기적으로 둔부에 주사를 놔야 했습니다.
그리고 츠구미 씨의 부모님은 그 '누군가'가 되기엔 병원비를 버느라 너무나 바빴죠.

그들은 간절히 도움을 필요로했고, 저는 기꺼이 도움을 줬습니다. 그렇게 저는 츠구미 씨와 동거를 하게 됐습니다.
꿈만 같았습니다. 한 없이 길었고, 그 이상으로 숨겨왔던 내 마음이 보상을 받는 듯 했습니다.
얄궂게도 내 사랑의 불완전함은 내 사랑을 완전하게 했고,
며칠전만 해도 눈물이 그렁그렁했었던 제 눈가에는 행복이 맺혔었습니다.

비록 연인은 아니지만, 명백한 점장과 점원 이상의 관계가 된 우리는
매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같은 시간을 보내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우리는 한 없이 가까워졌습니다.
언젠가는 주사 이외의 이유로 츠구미 씨의 속옷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랬고,
결국에는 저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한 가지의 행운과 한 가지의 불행이 있었습니다.
행운은 츠구미 씨의 병이 기적적으로 완화되어 완전히 치료될 날이 멀지 않았었다는 것이고,
불행은 츠구미 씨가 사고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불행은 츠구미 씨의 몸을 다른 사람이 자연스러운 듯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은 츠구미 씨의 몸을 돌보는 사람이 저이기에, 저는 여전히, 그 몸과 항상 같이 있어야 하며
더 이상 그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는 조그만 둔부에 계속해서 주사를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행은, 나의 마음은 츠구미 씨와 함께 갈 곳을 잃었는데도,
나의 의무는 그녀의 몸과 함께, 여기에 남아서, 나의 마음을 배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분 주사도 끝났어요. 이대로 몇 달만 더 놓으면 아마 다 나을거예요."

"항상 고마워 이브짱."

카논 씨가 바지를 올리며 대답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저는 주사기를 버리며 대답했습니다.

"츠구미가 이브에게 정말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구나."

도움. 그것은 일방적인 단어입니다. 저와 츠구미 씨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도 츠구미 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는 걸요."

저는 그녀의 몸의 조직 하나 하나를 안정되게 지탱했고, 츠구미 씨는 저의 온전한 세계가 됐습니다.
그녀가 만든 케이크, 옷깃의 커피향기, 입가의 웃음소리 하나 하나는
저의 혀와 코, 귀, 그리고 제 심장의 새로운 의미가 됐습니다.

"...츠구미는 정말로 유감이야.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해. 내가..."

그러나 저와 츠구미 씨는 더 이상 같은 공간도 시간도 공유하지 못합니다.
같은 마음은 커녕 같은 숨 조차 쉬지 못합니다.
제 심장은 의미를 상실했고, 내 세계는 없어졌습니다.

"카논 씨가 사과할 게 아니에요. 이게 츠구미 씨가 바라신 일일 거에요."

차라리 그걸로 끝났다면 얼마나 다행일까요.
눈물샘이 마르도록 미친듯이 울고, 몸도 마음도 지친 채 죽은 듯이 자고,
그리고 깨어나서 추억의 상자에 담아 망각의 서랍에 넣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상냥한 일일까요.

"정말 그럴까? 가끔은... 츠구미를 소중히 한 사람들에게서 츠구미를 빼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의 츠구미 씨는 부재를 넘어, 왜곡되었고, 결국에는 부정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세계는 마치 좀비처럼, 그 영혼을 잃은 신처럼,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제 존재의 부정이 되어
나의 현관, 나의 매일 그리고 나의 생활 속에 들어섰습니다.

"빼았는다뇨, 이제 카논 씨의 몸이고 카논 씨의 집인걸요."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내 사랑의 죽음을 애도하지도 못하고
내 의미의 상실을 망각하지도 못하고
내 세계의 붕괴로부터 눈을 돌리지도 못한 채
소중한 마음이 생생하게 찢겨지는 걸
그저, 여기서, 지켜 볼 수 밖에 없나요?






#2024.03.08_08:02_하자와 카페


아직 아침 공기가 차갑습니다.
카논 씨가 아침 일찍 미사키 씨네로 간 이 시간, 카페가 문을 열 준비를 하는 이 시간은
몇없는 저만의 한적한 시간입니다.
주인도, 손님도 없는 가게에서 직원은 홀로 스팀의 온기와 은은한 커피향에 둘러쌓여 이 시간을 즐깁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하는데에도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포터필터, 템프, 넛박스 같은 낯선 용어도 입에 익었고,
채우고 누르고 내리고 버리는 것도 손에 익었습니다.
직원이니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개점 후에도 언제까지나 옷걸이에만 걸려있는 저 베이지 색 앞치마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매일 아침이면, 햐얀 소매를 걷어올리고, 앙증맞은 머리핀을 꼽고
기계를 예열한 뒤, 그 베이지 색 앞치마를 둘렀었습니다.
앞치마의 색깔은 츠구미 씨의 흑갈색 머리칼과 참 잘 어울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게의 분위기나 커피 향이 깊게 스며든 옷일 뿐입니다.
아마도, 분명 이 카페에서 그 앞치마보다 더 자연스러운, 그렇기때문에 더 어색한 물건은 없을 겁니다.



[2022.04.24_08:05_하자와 카페]

"이브짱, 이게 포터필터라는거야. 여기에 원두가루를 담아서 여과하면 돼."

"와! 이대로 커피를 내릴 수 있는건가요?"

츠구미 씨가 아프기 전, 그리고 제 마음도 그랬을 때, 츠구미 씨는 제게 기계 사용법을 간단히 가르쳐줬었습니다.

"아니, 그전에 먼저 이 템프라는 걸로 두번 눌러줘야 해."

그러면서 츠구미 씨는 그 섬섬옥수로 도장처럼 생긴 물건을 쥐고 원두가루를 깊게 눌렀습니다.

"처음은 3kg정도의 압력으로, 두번째는 십... 사암... 에서... 이이... 십..."

그러면서 다시 누르는데, 그 가녀린 손과 팔로 부들대며  힘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츠구미 씨, 이건 제가 할게요!"

"안... 돼... 이이거언.... 내애... 일!이니까. 이브는 지켜보기만 해도 돼."

그렇게 말하며 겨우 도장을 찍었습니다. 단단히 압축된 검은 가루에는 츠구미 씨의 선한 고집이 새겨진 듯 했습니다.

그리고 붓으로 미쳐 눌리지 못한 가루들을 살랑살랑 털어내고, 에스프레소 머신에 끼워넣고,
의미심장하게 반짝이는 LED 버튼을 두어개정도 누르니,
기계가 익숙한 소리와 낯선 온기를 내며 거뭇한 갈색 음료를 뽑아냈습니다.
그 '샷'은, 자주 봤지만 한번도 서빙한 적 없는 스테인리스 컵에 담겼고,
츠구미 씨는 그걸 온수가 든 하얀 도기 컵에 따랐습니다.

츠구미 씨는 그 하얀 김이 나는 검은 커피를 저에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자 이브 짱, 여기 오늘의 첫 커피야."

"네? 제가 마셔도 괜찮나요?"

"물론, 항상 곁에서 도와주는 것에 비하면 이런건 아무것도 아닌걸."

그 순간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든 츠구미 씨의 머리칼이 반짝였습니다.
분명 그 때, 그 커피는 제게 아무 것 이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두 손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상냥함과 정성을 받아쥐었습니다. 참 따뜻했습니다.

호록,

한모금 마셨습니다.
갓내린 뜨거운 커피 때문에 제 볼은 붉게 물들었고,
진한 카페인 때문에 제 심장은 급하게 뛰었습니다.
상냥하게 절 지켜보는 츠구미 씨의 눈동자가 너무나 애틋한 나머지 커피 맛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 그녀를 연모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마음을 깨달은 건 이 때였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온기가 낮게 깔린 그 에스프레소 기계 앞의 개점시간에
저는 하자와 츠구미 씨를 지금껏,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 속 작은 혁명 건너편에선 츠구미 씨가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듯이
기계에서 원두가루를 빼며 또 무슨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별것 아닌 일과가, 모든 것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신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온 '포터필터'는 한없이 달콤하게 들렸고
당신의 정성스런 손짓 끝에서 일어나는 누르고 채우는 따위의 행동은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깨닫기 시작한 순간, 더 이상 수천번의 심작박동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검붉은 머리칼에 맺힌 커피향이 내 모든 감각을 망가트렸고,
과거에 느낀 모든 감정을 재정의하기에 충분한 마음이 흘러넘쳤습니다.
결국에는 지금까지의 감정을 유지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때
제 진심은 목젖까지 차올라 넘쳐버리려 했습니다.

"츠구미 씨, 저..."

딸랑

"아! 어서오세요! 하자와 카페입니다.
(미안 이브 짱, 나중에)"

진한 블랙커피와 따뜻한 햇살, 상냥한 미소. 그러한 모든 것들이 재촉한 제 갑작스런 충동은
오늘의 첫 손님이 울린 청량한 소리에 덮어버렸습니다.
제 마음은 다시 심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츠구미 씨는 평소처럼 조그맣고 성실한 어깨를 움직이며 손님에게로 갔습니다.
그 때는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커피 내리는 법을 가르쳐주는 점장이었고 저 또한 배우는게 서툰 직원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붉은 아침의 햇빛이 텅 빈 가게를 채운 그 잠깐 동안, 저는 커피를 내리는 방법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홍차랑 레어치즈케이크랑... 너는 뭘로 할래?"

"음 전 블루베리 파이랑 카페라테로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그 베이지 색 앞치마가 더 이상 옷걸이에서 내려오지 않게 된 뒤로도 카페는 여전히 바쁩니다.
직원이 능력있는 덕이겠죠. 저는 이제 커피도 케이크도 츠구미 씨처럼 잘 만듭니다.
손님들은 그 커피와 케이크로 충분한 듯 합니다. 결국 카페에서 중요한 건 그것들 뿐이니까요.
하자와 카페는 여느때처럼 겹겹의 메뉴판과 웅성거리는 공기, 정성이 담긴 달콤함으로 가득찼습니다.
단지 소란스러움이 닿지 않는 가게 한 켠의 옷걸이에, 츠구미 씨와 제 마음만이 잊혀진 채로 걸려져있을 뿐입니다.








#2024.03.15_21:52_하자와 카페

"이브 짱, 도와줄까?"

한참 마감정리를 하고 있을 때 홀에 앉아있던 카논씨가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금방 끝낼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조금 과하다 싶을정도로 씩씩하게 대답한 저는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기계에서 다 쓴 원두가루를 빼서 넉아웃에 담았습니다.
나머지 도구들을 깨끗히 설거지하며 힐끗 보니, 카논 씨는 푸른 빛의 어둠이 낮게 깔린 창 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츠구미 씨가 아닌 사람이 츠구미 씨가 싫어하는 블랙커피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녀가 츠구미 씨의 모습으로 츠구미 씨가 하는 행동을 한다면 그때야말로 츠구미 씨가 부정당하는 건 아닐까
하고 요즘 생각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제 기운찬 대답 덕분인지, 혹은 단순히 빈말이었던 것 뿐이었는지
다행히도 그녀는 이쪽을 보지도 않고 까만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뿐이었습니다.



"카논 씨, 다 끝냈어요! 이제 가요!"

제가 흑갈색 앞치마를 베이지색 앞치마 옆에 걸며 말했습니다.
카논 씨가 다 마신 잔은 싱크대에 놓은 채, 부엌의 불을 끄고 홀의 전등 스위치를 내린 후 문을 잠궜습니다.
누구도 찾지 못한 첫 별로 가득한 밤하늘 아래에서, 저와 카논 씨는 남은 케이크 봉투를 하나씩 들고 나란히 걸었습니다.

"오늘도 수고했어 이브 짱."

"늘 하는 일이니까요. 카논 씨야말로 제가 계속 카페에 있어야 해서 갑갑하지는 않으세요?"

"아니 전혀. 오히려 이브 짱이 바쁜 와중에 날 도와주니까 내가 미안하지.
그리고 요즘은 미사키 짱도 날 돌봐주니까 항상 카페에만 있지도 않구"

츠구미 씨의 입술에서, 그녀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이름이 소중하게 언급되는 건 여전히 괴롭습니다.
저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저녁 분 약은 먹었어요?"

"응! 물론."

"제가 바빠서 못 챙겨드리기도 하니까, 약은 꼭 제대로 먹어주세요."

"이브 짱도 참, 약 정도는 나 혼자 챙겨먹을 수 있어."

그리고 자연스러운 침묵.
달빛과 밤 공기, 그리고 하얀 입김이 저와 카논 씨 사이를 채웠습니다.
상점가의 거리에는 네온사인이 하나 둘 씩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로수 사이로 부는 바람은 조금 쌀쌀했지만 춥지는 않았습니다.
저 건너편의 페밀리 레스토랑에 CLOSE 푯말이 걸릴 때 쯤, 카논 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기... 이브 짱."

"네?"

"괜한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하자와 카페에서 일할 필요는 없지 않아?"

"..."

"그, 그러니까 내 말은. 더 이상 츠구미가... 그러니까 이 몸이, 그러니까 내가 카페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아니 내가 카페에만 있기 싫다는게 아니라, 이브 짱도 원래는 아이돌에 모델이었잖아?
만약 이브 짱이 하고 싶은 일이나, 가고싶은 곳이 있다면 내가 어디든 따라갈테니까. 그러니까..."

"..."

"저, 저기 난 이브 짱의 발목을 잡고싶지 않은 것 뿐이니까. 혹시 내가 말 실수한 건 아니지?
혹시... 화났어?"

"...아뇨. 그럴리가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카논 씨. 생각해볼게요.
하지만 오늘은 공기가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요."

"...응! 그렇네!"


그렇겠지요.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누구도 츠구미 씨에 대한 제 마음을 모릅니다.
하자와 카페는 그저 카페일 뿐이고, 츠구미 씨의 몸은 그저 몸일 뿐이니까요.
거기에 담긴 츠구미 씨의 아련한 추억과 제 간절한 마음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렇게 간단히 부정당하곤 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왜 제가 하자와 카페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는지 새삼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실제로는 카논 씨라고는 해도,
츠구미 씨는 하자와 카페에 있는 모습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카논 씨의 세심한 말 한마디는 조약돌이 되어 제 정체된 마음에 작은 의문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과연 카논 씨가 츠구미 씨처럼 행동하길 바라는 걸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길 바라는 걸까요.
그녀는 절대로 츠구미 씨가 될 수 없지만 동시에 절대로 츠구미 씨가 아닐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의문을 곱씹을 때쯤,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현관문 옆의 명패에는 여전히 '하자와 츠구미'와 '와카야마 이브'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굳이 직접 주문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지친 하루의 끝에서 이 명패를 보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올랐던 것도,
언젠간 하자와 이브로 명패를 바꿨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품었던 것도, 기억합니다.
하지만 타인에겐 이 명패 또한 그저 갱신되어야 할 낡은 것일까요.
저쪽의 츠구미 씨가 아닌 사람이 언젠가 바꾸자고 하는걸까요.
그렇다면 그 때, 저는 과연 뭐라고 답해야할까요.

"이브 짱, 춥지? 바로 따뜻한 물 받아놓을게."

카논 씨가 신발을 벗으며 말했습니다.
츠구미 씨와 살 때는 번갈아가며 집안일을 했지만, 카논 씨는 본인이 얹혀살고 있다는 생각때문인지
굳이 스스로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는 것입니다. 카논 씨가 욕실로 들어간 후, 저는 케이크 봉투를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안방 두개, 욕실 하나 거실 하나의 적당한 크기의 자취방. 둘이 살기에 좁지도 않고 딱 적당한, 오히려 조금 큰 공간입니다.
거실 벽에는 입주할 때부터 옵션으로 있었던 벽걸이형 TV가 달려있고 반대편엔  밝은 갈색의 소파가 안정된 느낌을 줍니다.
그 뒤로는 작은 식사용 테이블, 그리고 그 옆에는 아담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부엌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방은 TV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눠져 있구요.

적어도 거실은, 츠구미 씨가 있기 전과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냉장고의 내용물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가구의 배치나 방향제 혹은 장식품같은 소소한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주는 분위기는 그대로 였습니다.
하지만 츠구미 씨의 방은 어떨까요. 저는 모릅니다. 아마 지금 몰래 들어간다 해도 모를 겁니다.
츠구미 씨가 있었을 때도 들어가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지금이나 그 때나... 집안에서도 그저 보호자와 환자일 뿐입니다.
마음을 전하지 못했으니 그녀의 마음에 대한 소유도, 몸에 대한 인정도, 방에 대한 권리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마음을 전하지 않았을까. 옅은 의문이 잔잔한 기억과 함께 떠올랐습니다.




[2023.05.12_19:42_집]

"와 츠구미 씨! 그건 뭐예요?"

"그라인더와 드립커피세트라고 하는거야. 집에서도 손으로 커피를 내릴 수 있어."

동거를 시작하고 보름달이 십수번 떠올랐다 진 후,
츠구미 씨는 어느 날 나무 손잡이가 달린 기계와 거름종이가 설치된 주전자를 가져왔습니다.
그 기계는 조금 투박하면서도 고풍스러웠는데, 군데 군데 손 때가 탔지만 잘 보존된 듯 했습니다.
츠구미 씨는 테이블에 가지런히 기계들을 정리하곤 봉투를 하나 더 꺼냈습니다.

"와! 원두다!"

원두는 카페에서 항상 보는 것이지만 향을 깊게 함축하고 있는 점이나 귀여운 모습,
의외로 딱딱한 촉감때문에 볼때마다 왠지 즐거워지곤 했습니다.

"이걸 그라인더에 넣고... 돌... 리... 며언..."

우두드드드드득

거친 파열음과 함께 츠구미 씨의 손은 부들거리며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습니다.

"츠구미 씨! 힘내세요!"

"으.... 으응...."

츠구미 씨가 본인의 일은 스스로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섵불리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녀린 손으로 갈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어보였습니다. 하지만 도와주겠다고 해도 거절하겠죠.
그때는 왜 그랬었는지는 지금도 명확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 오랜 동거로 심리적 거리감이 한없이 가까워졌기 때문일까요.

"이브 짱?"

"같이해요 츠구미 씨!"

저는 츠구미 씨의 등 뒤에서 손잡이를 쥔 츠구미 씨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천천히, 그리고 같이 손잡이를 돌렸습니다.
여전히 빡빡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수월하게 원두가 갈려나갔습니다.
강렬한 커피향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가득한 향기의 미세한 틈에서 새삼스레 느낀 것은
츠구미 씨의 샴푸냄새, 코에 닿을 듯 말듯한 얇은 머리칼, 갈색 단발 사이로 힐끗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
한 손에 가득 느껴지는 앙상한 손가락뼈, 그리고 미친듯이 뛰는 저의 심장이었습니다.

그 아침 햇살로 물들었던 에스프레소 기계 앞의 추억처럼, 저는 또 다시 츠구미 씨와 제 고동을 의식했습니다.
혹시나 들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나 0에 수렴하는 그녀와의 거리감, 코에 닿아 간질거리는 존재가 저를 몽롱하게 했습니다.
두 손으로 쥐어 감추기에는 너무나도 큰 감정과 충동이 츠구미 씨의 등 뒤에서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츠구미 씨가 그걸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원두는 더욱 더 세밀해지고 있었고, 그라인더의 손잡이도 더 가벼워졌습니다.
그리고 곧 제 입술이 그녀의 귓볼에 닿기 직전, 원두는 고체의 형체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츠구미 씨는 말했습니다.



"이브 짱, 이제 된거같아."

"아! 네, 카논 씨. 바로 들어갈게요."

갑작스레, 수증기가 새어나오는 욕실에서 카논 씨가 나오며 저를 불렀습니다.
두 팔과 다리를 걷어올린 그녀는 수건으로 손을 닦고는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습니다.

"금방 씻고 나올게요."

"아냐, 천천히 해도 돼. 난 TV 좀 보고있을게."

저는 욕실로 들어가 단추를 풀었습니다. 수증기의 온도가 여기까지 느껴졌습니다.
스웨터를 벗고 밸트를 풀었습니다. 카논 씨는 물 온도를 조금 뜨겁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지를 벗고 속옷을 마저 벗어 통에 가지런히 놓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제 그 온도에 적응해버린 듯 합니다.

온 살결에 밤의 쌀쌀함과 목욕물의 따스함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구석구석 샤워를 하고, 따뜻한 욕탕에 천천히 발을 담궜습니다.

"핫,"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뜨거운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이 온도에도 적응하게 되는걸까요.
천천히, 천천히 발에서 무릎, 허벅지, 허리, 날개뼈 순으로 몸을 담궜습니다.

"후우..."

저도 모르게 한 숨을 내며 등을 기댔습니다.
지친 하루와 따스한 휴식이 한데 섞여 조금 몽롱한 느낌입니다.
수증기가 뿌옇게 낀 창문에는 푸른 달빛이 은은히 스며들었습니다.



"이브 짱, 이제 된거 같아."

"아 네 츠구미 씨."

저는 황급히 입술을 떨어트렸습니다. 그 모든 촉감과 향과 충동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고동은 여전히 급한 박자로 뛰고 있었습니다. 분명 제 뺨에는 심장보다 붉은 홍조가 맺혀있었겠죠.

저는 다시 츠구미 씨의 옆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어깨가 살짝 닿을 정도로 가깝게, 마음의 거리를 좁혔습니다.
츠구미 씨는 완전한 가루가 된 원두를 거름종이 같은 것에 담고는 말했습니다.

"이제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면 돼."

그렇게 말하며 츠구미 씨는 언제 끓였는지 모를 주전자를 들었습니다.
혹시라도 데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보고 있으니 츠구미 씨가 조심스레 김이 나는 온수를 원두가루에 따랐습니다.
그러자 원두가루는 깊은 향과 함께 촉촉한 초코반죽처럼 조금 부풀어 올랐습니다.

"어? 츠구미 씨 물을 따랐는데 커피가 안 나와요."

"이건 말이지, 뜸들인다고 하는거야. 어느정도 부었으면, 다시 내릴만큼 물을 부어서..."

그러며 조심스레, 정성스레 다시 뜨거운 물을 따랐습니다.
어느샌가 가라앉은 원두는 또 다시 부풀어 올랐다가 살짝 꺼졌는데 츠구미 씨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온수를 부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눈 앞의 대상 뿐인 듯, 그녀는 주의 깊게 집중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봤더라면 저도 같았다고 했을겁니다. 제 눈동자는 두 명의 추종자가 되어 그녀만을 좇고 있었습니다.
두근거림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그녀와의 거리는 충분히 가까웠습니다. 심장소리는 글자가 되어 새어나오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때 축축하게 젖은 원두가루가 제 마음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이내 꺼졌습니다.
그리고 맑고 검은 커피가 내려왔습니다.
결국 정성이 우려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진심은 두 입술 사이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자, 이게 이브 짱 꺼... 그리고 이게 내 꺼."

츠구미 씨는 언젠가 산 커플 컵에 뜨거운 물을 담고 갓 내린 커피를 부었습니다.
맑은 온수에 발을 담근 검은 액체는 초저녁의 몽상이 되어 컵 속에서 퍼져나갔습니다.
츠구미 씨는 아직 블랙커피를 잘 마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성장했기 때문인지
혹은 병에 대한 관리 -카페인은 괜찮지만 당은 자제하라는 그 병- 때문인지, 설탕의 양은 줄었습니다.
평소에는 설탕 두 조각, 하지만 늦은 오후에는 세조각. 그게 그녀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창 밖에는 몇개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츠구미 씨, 설탕 넣어드릴게요!"

"응, 고마워 이브 짱. 그런데 이번엔 한 조각만 ㄷ... 아, 고마워."

저는 다 안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설탕 3조각을 넣었습니다.

"역시 저녁에는 잠이 잘 안오니까, 설탕을 한 조각 더 넣게 되버려."

그렇게 멎쩍게 웃는 츠구미 씨도 홀짝, 한 모금 마셨습니다.
하지만 역시 조금은 썼던건지 그녀의 미간이 잠깐 좁혀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설탕 3조각 넣는건 어떻게 안거야?"

기회의 신이 있다면 분명 성격이 못됐거나 눈치가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갑작스런 질문에 저는 티나지 않게 놀랐습니다. 저의 대답은 진심과 일상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했었습니다.
영원같은 찰나 끝에, 와카미야 이브는 답했습니다.

"...항상 보고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하긴 매일 카페 일을 도와주고, 항상 곁에서 간호해주니까, 이정도는 당연히 알겠지.
새삼스럽지만, 언제나 고마워 이브 짱."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 모금, 마셨습니다.



츠구미 씨는 그 작은 충동의 단서를 조금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 진심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직원이나 보호자의 그것과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추상적인건, 어쩌면 그래서 직원이나 보호자와 구별이 되지 않은 것은, 와카미야 이브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입술에 선홍빛 사랑을 발라주기에는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나는 그녀의 커피를 서빙했고, 일상의 가구가 되었으며, 생명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그녀가 거절할 수 있을까요. 거절하지 않는 다면 그건 마음때문일까요 아니면 필요때문일까요.

그녀가 카페와 병원을 돌아다니고, 집과 약에서 안정을 취할 때도
저는 단 한 자리, 그녀의 옆이라는 위치에만 영원히 머물러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정'이나 '절대'라고 명하기엔 너무나 유동적이었기에,
저는 제 곁의 그녀를 따라, 점원과 보호자가 되거나 동거인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막중한 의무와 무수한 관계들은 광대한 밤하늘이 되어 우리의 사이를 뒤덮었고
수십만번의 심장소리는 어느 새벽이나 초저녁에 아주 잠깐 반짝이는 별이 될 뿐,
그 시간이 닫힌 후에는 또 다시 앞치마와 주사기에 가려져 저 조차도 의식하지 못했었습니다.
언젠가 밤의 끝자락에서 달이 불타올라 하늘이 완치 될 때, 그렇게 츠구미 씨의 옆자리가 하나가 될 때,
저는 앞치마를 벗고 더 이상 필요없어진 주사기를 버린 뒤 와카미야 이브가 되어 고백하자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술취한 운명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달콤씁쓸한 회상이 끝날 때 즈음에 몸이 너무 더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목욕탕 물은 조금 식어버렸고 손바닥은 쭈글쭈글해졌습니다.
조금 오래있었나 싶어서 물에서 나왔습니다. 어느새 수증기도 다 식었습니다.
뜨거웠던 기억에서 갑작스레 차가운 현실로 나온 탓인지 어지러움이 조금 느껴졌습니다.
잠깐의 추억은 마음 깊이 숨겨진 의문에 대한 답이 됐지만, 그보다 더 깊히 묻어진 마음 하나를 더 찾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파낼 수가 없지요.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추억은 내 마음이 묻힌 무덤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씻고, 닦고, 입고. 차가운 공기와 개운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며 거실로 나오니
카논 씨는 시끌벅적한 TV를 자장가 삼아, 소파의 팔걸이에 머리를 뉘인 채로 졸고 있었습니다.
병의 탓일까요. 이전 츠구미 씨도 자주 이랬습니다.
그런데 병은 호전되고 있다고 했으니 그냥 카논 씨가 잠이 많은걸지도 모르지요.

내 앞의, 더 이상 타인의 의식이 들어있지 않은 츠구미 씨의 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배에 뉘이고
작은 가슴은 흉부와 함께 천천히,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습니다.
작고 오똑한 코는 색색 거리며 앙증맞은 숨결을 내뱉었고, 조그마한 운하를 따라 내려가니
옅은 분홍색의 입술 두 쪽이 심야의 노곤함 속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닿고자 했지만 닿지 못했던, 간절히 갈구했지만 영원히 상실한,
영혼 깊은 곳에 숨겨뒀지만 이제는 꺼낼 수 조차 없는,
나의 마음, 츠구미 씨
그것이 바로 앞에, 나의 바로 앞에 새근거리며 놓여져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 마음에, 나조차도 모르게 다가가,
그리고 비로소 진심을 입 맞추려 할 때
작은 어깨가 뒤쳒였고, 츠구미 씨의 두 꽃잎은 다시 카논 씨의 입술로 전락했습니다.
나는 소스라치며 뒷걸음질 쳤고 (다행히도)TV 옆의 벽에 팔꿈치를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카논 씨가 완전히 깬 듯 눈을 비비며 일어났습니다.

"...이브 짱? 다 씻었어...?"

"...네, 네. 너무 오래 있어서 미안해요."

"으응 아냐. 그럼 이제 씻을게. 좀 있다가 주사 놓을 때 부탁해?"

"ㄴ, 네. 편할 때 부르세요."

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못한 채 황급히 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습니다.
장시간의 목욕 이외의 이유로 달궈진 몸을 방문에 기대고, 부들대는 다리를 접어, 쪼그려 앉았습니다.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고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습니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츠구미 씨의 부재는 천천히, 모두에게 당연한것이 되었고
제 마음 또한 다시 빛날 여지를 완전히 잃어갔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유일하게 그녀를 기억하고, 또 내 마음을 되뇌었던 것은 나 뿐인데.
그런데, 방금 나 스스로가, 그녀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려 했습니다.

츠구미 씨가 마지막 숨을 쉰 이후, 세계는 산산조각 나 심연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조각을, 내가 지키고 있던 그 조각을, 나 스스로가 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 한계인 것 같습니다.








#2024.04.28_10:37_집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평소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덕인지 카논 씨는 날이 갈수록 몸에 익숙해지고 본인의 생활에 영위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카논 씨의 지인들에게 그 모습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인가 봅니다.
어느날 미사키 씨가 정중하게 부탁하여 그 몸의 간호에 대해서 조금 배워간 이후로, 카논 씨는 더 자주 돌아다니게 됐습니다.
츠구미 씨가, 츠구미 씨가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모습은 점점 보이지 않게됐지만
오히려 그만큼 모르는 어디선가에서 그 몸이 주인의 마음을 배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녁 주사는 제게만 위임된 권한이기에 카논 씨가 그 몸으로 외박을 한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외출을 하는지, 제가 늦은 아침을 먹는 동안 그녀는 한참 꾸미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 나가시게요?"

"응, 대학교 친구들이랑 조금 만나기로 했어."

그렇게 대답한 휴학생은 츠구미 씨의 앞머리를 정리했습니다.

"아, 이브 짱. 혹시 오늘 근무 언제부터야?"

동거인이 츠구미 씨의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다 말고 물었습니다.

"오늘은, 오후부터 시작해요."

"그럼 친구들이랑 같이 들려도 될까?"

인기인이 츠구미 씨의 어깨에 코트를 걸치며 물었습니다.

"물론이죠. 괜찮아요. 오늘은 평일이니까 사람도 많이 없을거에요."

"그래? 다행이다 손님이 너무 많이 오면 민폐일까 싶어서."

손님은 츠구미 씨의 목덜미에 향수를 살짝 뿌리며 대답했습니다.

츠구미 씨의 것이 아닌 향기가, 츠구미 씨의 것이 아닌 향기로 덮혀졌습니다.

"오늘은 특히 예쁘게 꾸미셨네요."

"그래? 고마워.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기도 하고, 미사키 짱에게 부끄럽지 않은 여자친구가 되어야 하니까."

카논 씨가 거울 속의 츠구미 씨를 만족스럽게 보며 답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방식으로 아무래도 좋은 내용을 말한 뒤,
'오후에 봐' 라며 불쾌한 감정을 남겨두고 나갔습니다.

카논 씨는 저나 츠구미 씨와 다르게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그 사고 이후 완치 될 때까지 휴학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언제 나을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완치된다는 믿음에 지금까지도 선배가 되버린 동기들과 놀러다니곤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카페일은 고단하지만 소심한 질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수술'이 있고나서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그녀는 많은 사람들과 만났겠지요.
그리고 그 사람 중엔 카논 씨를 처음보는, 그러니까 그 몸의 주인이 카논 씨인줄 아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적어도 그 사람들 앞에서 그 몸은, 더 이상 츠구미 씨의 증명이 아닌,
오히려 그녀를 부정하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물일겁니다.

오늘의 오후에 그런 사람이 오는걸까, 나는 내심 불안해하며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근무는 오후부터지만 저는 몇시간 일찍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머리에 가득찬 상념을 지울 수 있는 건 분주함 뿐이니까요.



[2024.04.28_11:20_하자와 카페]

하지만 역시 평일 오전엔 한가했습니다.
간혹 이 시간에만 오는 단골 손님을 제외하면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만이 들렸다가 구름에게 잠깐 자리를 내줄 뿐이었습니다.
주방에 가까운 의자에 잠깐 앉아있으니 식곤증과 노곤함이 한데 섞여 눈꺼플이 감길 듯 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이따금씩 들리는 딸랑소리에  다시 깼다가 다시 졸고, 또 다시 깨서 커피를 내리는 것을 반복하기를 몇 시간,
어느새 태양은 가게 반대편으로 넘어가 보이지 않았고, 시침은 남반구 한복판에서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안오려는 건가 하고 안도하는 찰나 북적이는 사람목소리에 묻힌 종소리가 희미하게 딸랑거렸습니다.

"이브 짱, 기다렸지?"

카논 씨가 생각보다 많은 수의, 그러나 양 손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의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는 카논 씨 옆에 꼭 붙어있는 미사키 씨도 있었습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친구분들이 많네요."

"미안 역시 민폐일까?"

"그럴리가요. 하지만 전부 준비하는데에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요."

"그건 괜찮아. 우리들 한가하니까."

약간의 자조와 즐거움이 섞인 목소리는 마침표룰 찍기도 전에 일행들의 웃음소리에 묻혔습니다.
안내에 따라 그들은 벽 한쪽의 두 테이블에 나눠 앉았고, 기다릴 것도 없이 각자 음료를 주문했습니다.
인수는 많았지만 그 주문이 대부분 비슷비슷해서, 그리고 애초에 손님도 별로 없었기에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통일된 의견의 아메리카노 5잔,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다며 처음 시킨 에스프레소 1잔.
그리고 카논 씨와 미사키 씨 커플의 카페라테 2잔
카페에서 가장 큰 쟁반으로도 두번이나 나눠서 서빙해야 하는 양이었습니다.

잠시 후,
친우들의 테이블에 아메리카노 5잔이 놓일 때쯤은 아직 쌓인 이야기를 푸는 중인 듯 했습니다.
카논 씨는 여전히 적극적으로 어울리는게 서툰지 미사키 씨와 꼭 붙어있었습니다.
츠구미 씨의 갈색 머리칼이 미사키 씨의 흑발에 섞여들어갔고, 츠구미 씨의 작은 가슴이 미사키 씨의 팔에 닿았습니다.
스멀거리는 악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 쓰며 남은 주문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종류가 달라 시간이 조금 걸리는 동안, 이럴거면 아메리카노를 가장 나중에 만들걸 그랬나 라는 작은 후회나,
혹시 저들 중에서 츠구미 씨의 몸을 처음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나
카페라테에 침을 뱉을까 하는 유혹이 머릿속에서 뒤섞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모든 생각을 애써 지워버리며 마지막 주문을 쟁반에 올렸습니다.

두번째 쟁반이 도착했을 때는 테이블에 쌓인 이야기도 다 떨어져서 다른 화제를 찾는 듯 했습니다.

"카논 선배랑 미사키 선배는 언제부터 사귀셨어요?"

아직 앳되보이는 후배가 에스프레소를 받으며 물었습니다.

"응? 어..."

"아... 카논 씨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였지."

짖궂은 질문에 카논 씨와 미사키 씨는 조금 당황스러워 하며 대답했습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사귀셨네요. 어쩐지 잘 어울리더라."

미지근해진 블랙커피를 홀짝이던 또다른 후배가 말했습니다.

"정말? 고마워."

카논 씨가 부끄러워 하며 대답하고는 미사키 씨를 슬쩍 쳐다봤습니다.
미사키 씨도 부끄러운 듯 했지만 한편으로는 티를 안내려는 듯도 보였습니다.

"정말이에요. 검은색과 갈색 머리카락도 잘 어울리고, 둘 다 검소한 이미지라고 해야할까... 아 나쁜 뜻은 아니예요!"

"외모가 어울린다는 거지. 뭐랄까 믿음직한 곰과 귀여운 다람쥐?"

"그래! 그거!"

저는 쟁반에서 마지막 주문을 내려놓고 카운터로 돌아왔습니다.
우려하던 일입니다. 걱정하던 대화입니다. 그저 빈말이길 바랍니다. 아니 빈말이라 하더라도 괴롭습니다.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울린다는 말을 들어서일까요,
아니면 그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완전히 뺐겨버려 그 존재마저 말소됐다는 선고를 들어서 일까요.
소란스러운 카페의 조용한 한 구석에서, 츠구미 씨의 장례식이 떠올랐습니다.
사랑의 상실을 애도하려 남겨진 육체를 갈구했으나,
그 상실은, 또 그 사랑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육체는 떠들썩한 놀이공원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츠구미 씨와 내 마음에 손을 뻗는 것조차 못하게 됐는데, 이제는 눈물을 흘릴 대상도 없어졌습니다.
두번째 쟁반에 컵에 세잔 뿐이어서 다행이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애써 표정을 감추며 텅 빈 부엌만을 응시하고 있는데, 뒤에서 카논 씨가 절 불렀습니다.

"이브 짱, 괜찮아?"

"왜 그러세요 카논 씨?"

저는 바쁜 척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습니다.

"방금 아이들도 절대로 악의가 있어서 그런건 아니야. 내 몸이 원래는 츠구미 짱의 몸...이라는 걸 몰랐으니까.
그러니까, 딱히 츠구미 짱을 부정할 의도는 없었고... 또..."

"알아요 카논 씨. 모르는 사람은 그럴 수 밖에 없죠.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이제는 카논 씨의 몸이니까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다행이지만, 이브 짱은 츠구미랑 특별히 친했으니까... 혹시라도 기분나쁘면 말해줘?"

"알았어요. 카논 씨라도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저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카논 씨는 여전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갔습니다.
한편으로는, 카논 씨가 그렇게 까지 생각해준 것에 놀랐습니다.
저의 진심까지는 몰라도 츠구미 씨가 제게 소중하단 것 정도는 알아줘서 조금은,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앞으로도 츠구미 씨는 계속해서 부정당할 것입니다.
카논 씨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츠구미 씨는 그렇지 못했었으니까요.
그녀가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찰랑거리는 갈색 단발 소녀를 마츠바라 카논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아마 그 때가 됐을 때는, 그저 저 혼자 망상에 사로잡힌 채 카논 씨를 부정하는 사람이 되버릴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고 눈동자에는 촉촉한 절망이 맺혔습니다.
눈 앞의 주인 잃은 베이지 색 앞치마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시침이 한 바퀴를 돌고 분침이 그것을 추월했을 때, 카논 씨와 그녀의 친구들은 한데 모여 2차로 향했습니다.
카논 씨는 저에게만 살짝 '10시 전에는 올게'라고하며 미사키 씨의 손목을 잡고 인파를 따라갔습니다.

그 이후로 또 몇시간 뒤. 손님은 더 오지 않았고 저도 이만 폐점 준비를 했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쓸고, 의자를 테이블 위에 눕히고, 불을 끄고.
넓게 늘어진 어둠을 가게 안에 가둬놓고 문을 잠궜습니다.
카논 씨는 10시에 들어온다고 했으니 저녁은 먹고 올 것이고, 저는 씻은 뒤 주사만 준비해놓으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몇시간 전의 비관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머릿속은 모든 별이 꺼진 밤하늘처럼 어두워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2024.04.28_23:42_집]

현재, 밤 11시 42분을 막 넘겼습니다.
카논 씨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소파에 앉아 주사기를 만지작 거리며 시끄러운 TV방송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조금 늦는 것 뿐입니다.
괜찮아요. 여대생이니 늦게 까지 놀 수도 있죠. 카논 씨니까 오늘 안에는 돌아올 것입니다.
괜찮아요. 그녀도 자신의 몸이 츠구미 씨의 것이라는 자각이 있을거예요.

...하지만 없다면?
제 거짓 위로를 믿었다면? 몇달간 계속된 이 상황에 너무나 익숙해졌다면?
혹시 술이라도 취해서 츠구미 씨의 몸에 대한 통제를 잃었다면?
애써 안심하던 마음은 끝없는 회의의 수렁 속으로 빠졌고,
만지작 거리던 두 손은 주사기를 부숴버릴듯 부들댔습니다.



삐 삐삑 삐삐 삐이-

12시 56분. 현관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도 외박은 안했으니...
현관문이 열리고 코가 빨개진 카논 씨가 비틀대며 들어왔습니다.
옷은 풀어 헤쳐져있었고, 살짝 드러난 츠구미 씨의 흰 어깨와 목덜미에는 수어개의 키스마크가 찍혀있었습니다.
순간 미사키 씨의 입술이 떠올랐습니다.

"미... 미안.... 이쁘 짱... 좀 늦께 드러와..."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습니다. 내 오른손이 얼얼했습니다. 카논 씨의 왼쪽 뺨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 이브 짱...?"

단 한순간에 술이 깬 듯한 카논 씨는 천천히 츠구미 씨의 손가락을 그녀의 뺨에 갖다댔습니다.
눈물이 넘쳐 흐를 듯한 큰 눈동자에는, 울분과 괴로움으로 잔뜩 찡그려진 제 얼굴이 비쳤습니다.

"더 이상은 못참아요."

"이브 짜.... 꺅!"

저는 두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고 벽으로 밀어붙혔습니다.
그리고 모든걸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당신의 몸이 아니라 츠구미 씨의 몸이에요! 내게 닥친 불운은 그 사고 하나로 충분해요.
그것만으로도 난 삶의 의미를 잃었고 죽고싶을정도로 괴로워요.
츠구미 씨는 나의 단 하나의 세계였고 또 사랑이었어요. 내가 졸업하고도 카페에서 일한 것도,
자진해서 그녀의 간호를 한 것도 전부, 전부! 츠구미 씨를 사랑해서 였어요.
그런데 츠구미 씨는 더 이상 없고, 내 사랑도 끝났어요. 하지만 나는 슬퍼할 수조차 없어요. 왜?
당신 때문에. 당신이 멀쩡히 그 사랑스러운 입술과 가느다란 손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츠구미 씨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데, 츠구미 씨의 몸으로 다른 여자에게 안기고 있는데!
내가... 내가 어떻게 그녀를 애도하고, 그녀를 단념하고, 그녀를 잊을 수가 있어요..."

눈물 한 방울이 적신 내 입술은 파르르 떨리며 말 끝을 흐렸습니다.

나는 힘없이 주저앉아 계속해서 토해냈습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츠구미 씨를 기억하지 않아요. 단 한번도 꺼낸 적 없는 내 마음은 영원히 묻혀졌어요.
그 갈색 머리칼 마저 카논 씨의 머리칼일 뿐이고, 나의 마음은 나도 모르게 그 입술을 갈구해요.
그 사고로 없어진 츠구미 씨는, 그 수술로 왜곡되었고, 이제는 당신의 존재로 영원히 부정될 거예요.
당신이 존재하는 이상, 당신이 그 몸으로 당신의 생활을 영위하고 삶을 살아가는 이상!
츠구미 씨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가 영원히 잊혀지고 말거예요.
저는... 그 수술 때도, 장례식 때도, 지금도, 언제까지도, 츠구미 씨의 모습의 당신을 인정... 못해요..."

모든 걸 쏟아낸 저는 고개를 떨구고 분노와 슬픔이 섞인 눈물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트렸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건 땋은 흰머리와 파들거리는 손, 녹아내려 방바닥에 떨어진 울분 몇 방울이 전부였습니다.
내 앞의, 누군가의 몸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아 제 두 팔을 살며시 잡고 말했습니다.

"...미안해... 이브 짱... 나는... 나는 정말로 몰랐어...
그 마음도... 겪었던 괴로움도... 내 행동의 의미도..."

그녀는 울먹이며 단어들을 하나씩 꺼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 어떻게 해야돼...?
원한다면 츠구미 처럼 행동할까? 하지만... 그것도 이브 짱은 원하지 않을거 같아...
아니면...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도록... 성형... 이라도..."

"하기만 해봐요! 그 몸은! 당신의 소유가 아니에요! 당신은 그 몸을 좌우할 권리가 없어요."

내 감정은 목소리가 되어 그녀의 말을 끊었습니다.

"그... 그럼... 적어도 이브 짱이 어떻게 할지 알려줘... 내가 따를게..."

그녀가 슬픔에 우는건지 두려움에 떠는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도 츠구미 씨의 몸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어요. 난 그저 간호할 뿐이에요.
그 몸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그 누구도 그 몸을 소유해선 안돼요."

그러자 그녀의 젖은 목소리는 절망의 끝을 향하는 듯, 힘없는 소리가 되어 내게 물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돼...? 나는......"

저는 고개를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나는... 나는 카논 씨가 그 몸과 함께 죽기를 바래요."

마지막 진심까지 토해낸 내 마음 속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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