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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주인과 손님 그리고 직원]_손님앱에서 작성

무나강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2.01 18:10:09
조회 1331 추천 16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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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주인과 손님 그리고 직원]_손님


#2024.04.29_09:43_카논의 방

따스한 아침햇살이 눈꺼플을 토닥였다.
머리에는 숙취의 통증이, 혀에는 술의 쓴맛이 느껴졌다.

"으...음..."

희미한 신음을 내며 졸린 눈으로 시계를 봤다.
'09시 45분'
일어나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휴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감싸쥐고 다른 한 손으로 침대보를 움켜쥐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시 멍하니 있으니 창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젯밤의 그 사건이 무색하게 날씨는 매우 화창했다.
또 잠시, 눈을 감고 멍하니 햇볕을 안면으로 느꼈다. 폭풍우로 가득찬 내 마음도 화창해지길 바라며.

이런 날씨에는 밖으로 놀러나가고 싶은 기분이다. 그리고 실제로 예정도 있다. 미사키 짱이랑 데이트.
하지만 놀러가기엔 머리가 지끈거렸고, 사랑하기엔 마음이 무거웠다.
따사로운 햇볕과 잠기운의 몽상에도 불구하고, 어제 일은 생생했다.

휴대폰을 보니 미사키 짱에게서 잘 들어갔냐는 문자가 왔었다. 수신시간은 8시 07분. 성실하고 착한 아이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아마 지금쯤 강의실에 앉아있을 시간이겠지.

'뚜루루루루루...', "카논씨?"

통화연결음은 오래 가지 않아 미사키 짱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너의 목소리를 들으니 잠기운이 사라진다.

"응, 미사키 짱.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해?"

"네! 아직 강의 시작하기 전이라 강의실에 있어요.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응... 덕분에. 별 일 없었어"

나는 거짓말을 했다.

"...저기 미사키 짱. 사실, 오늘 몸이 좀 안좋아서 데이트는 못할 거 같아... 미안해..."

"괜찮아요? 역시 어제 너무 마신거 아니에요? 병문안 갈까요?"

부드러웠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상냥했다.

"으응, 괜찮아. 숙취로 조금 지끈거리는 것 뿐이니까. 조금 더 자면 괜찮아질거야.
오히려 미안해 이런걸로 약속을 못지켜서."

"아니에요. 대신 다음에 마실 땐 꼭 제 옆에 붙어있어야 돼요?"

"후후후. 응 알았어."

"그럼 졸릴 텐데 빨리 자요. 몸 괜찮아지면 다시 전화 해주구요.
그, 그리고... 사...(사랑해요.)"

미사키 짱이 작은 소리로 솔직한 마음을 덧붙였다.
너의 따사로운 속삭임에, 잠시나마 몸과 마음의 짐이 모두 덜어졌다.

"응. 나도 사랑해 미사키 짱."

그 말을, 그 마음을 음미라도 하듯이 나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 너머로 느껴지는 듯한 미사키 짱의 부끄러운 미소를 연상하며 전화를 끊었다.
창 밖의 날씨는 방금보다 더 화창해진 것 같았다.

한편,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단순히 숙취 때문에 아픈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잠이 깨고 온 몸의 감각이 살아나면서 곳곳에서 통증과 무기력을 느꼈다.
입 안에는 쓴맛을 머금은 침이 가득했고, 마른 목구멍에선 간절히 물을 갈구했다.
관절 군데군데가 쑤셨고, 근육은 뭉친듯이 무거웠다. 지끈거리던 머리에서는 어느새 조금 붉은 미열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몸살인 듯 하다.
술 때문인지. 어제의 일 때문인지. 혹은 단순한 타이밍 때문인지. 혹은 이 몸의 체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대의 거울을 들여다 본다.
나, 혹은 츠구미, 아니면 누구의 몸이던간에 눈에는 기운이 없었고 양 볼은 빨갛게 상기됐으며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이 땀에 젖은 채 얼굴 곳곳에 달라붙어있었다.
이건 츠구미 짱의 얼굴이다. 그렇다면 몸살도 츠구미 짱의 몸살일 것이다. 하지만 이 통증은 누구의 것이지?

그러나 미열로 가득찬 내 머리는 어떠한 생각을 하기엔 너무 지쳤었다.
나는 거실로 나왔다. 방 안보다는 아주 조금 쌀쌀했다. 베란다의 햇살만으로 가득 차기엔 거실은 너무 넓었다.
이브 짱이 출근하고 난 후의 거실에는 약간의 아침과, 적당한 시원함, 잊고 싶은 기억들 그리고 식탁 위의 종이가 전부였다.
난 종이를 지나쳐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갑게 식은 보리차를 노란 머그컵에 따라서 들이켰다.
말라가던 식도에 시원한 기운이 돌았다. 그리고 한 잔 더.
갈증을 해결한 나는 보리차 병을 도로 넣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 문에는 -적어도 이브가 시키는 건 본적이 없는 싸구려 치킨집 쿠폰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기운을 차린 후에야 식탁 위의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이브 짱의 이쁜 글씨체로 이렇게 써져있었다.

'안 일어나셔서 먼저 출근했습니다.
오늘 15시에 정기검사가 있으니 제가 데리러 갈게요.'

글씨체는 평소와 같았지만, 문체 때문인지 기억 때문인지, 그 쪽지는 한없이 차갑게 들렸다.

아 그렇구나. 오늘 정기검사였지. 그것도 까먹고 미사키 짱이랑 데이트 약속을 잡았었구나.
정확히는 츠구미 짱의 병에 대한 정기검사로, 거의 3달에 한번 씩 진행 되던 것이다.
하지만 사고, 그러니까 수술 직후엔 휴유증과 회복기간 때문에 제대로 검사를 받지 못했었다.
즉, 사실상 나에게는 첫 정기검사다.

'정기검사'. 한편으론 그 딱딱한 네 글자에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그 때만큼은 이 몸의 소유문제보다 건강문제가 더 우선시되는 거니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이 몸이, 내가 빼았거나 빼았기는 존재가 아닌 그저 몸 그 자체로 이해되는 거니까.

그래도 그것과 별개로 병원에 가는 건 언제나 귀찮다.
'하지만 어차피 몸살때문에 병원에는 갔어야 했으니 잘된거 아닐까', '아 몸살때문에 검사 못받는건 아니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다시 방문을 열었다. 방안의 온기가 날 따스하게 감쌌다.
으슬으슬한 몸으로 침대에 앉았다. 이 방은 조금 아담하지만 정리가 잘 되어있어 넓어보인다.
내가 깔끔하게 썼다기보다, 원래 그랬었다. 사실 나는 여기로 이사왔을 때의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몸과 마찬가지로 방을 함부로 하면 츠구미 짱에게 실례가 될 것 같은 마음에 내 소유물은 거의 두지 않았다.

기껏해야 평소에 쓰는 가벼운 화장품이나 데이트 할때만 입는 옷, 해파리 인형,
최근에 미사키 짱에게 선물받은 목걸이와 미사키 짱의 사진이 든 액자가 책상에 놓여있을 뿐.
그 외엔 처음 그대로의 상태였다. 방문 옆의 화장대에는 적당한 크기의 거울, 그 옆에는 베이지색의 옷장과 책장,
90도로 꺽은 벽에는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는 츠구미 짱이 평소에 읽던 듯 한 책들이 꽂혀있었으며,
책상이 붙여진 벽에는 코르크 재질의 게시판이 달려있었는데 거기엔 츠구미 짱의 사진들이 빼곡히 붙어있었다.
본인이 직접 찍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찍어줬는지 츠구미 짱이 자연스럽게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가 앉아있는 침대가 있다.

그렇게 화려한 방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있을 건 다 있기에 불편함은 없다.
그래도 역시 내 물건이 거의 없으니 어색하긴 하지만 그조차 긴 시간이 흐른 지금은 완전히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내가 츠구미 짱의 몸을, 나아가 방을 빌리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기에 이런 '최소한의 나'는 차라리 위안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것도 회의감이 든다.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걸까. 츠구미 짱을 연기한다고 해서 면죄부가 되는걸까.
털석, 하고 푹신한 침대에 나는 누웠다. 으슬함과 오한이 온몸에 스며들었다.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렸다.
눈을 감으니 자연스레 어제일이 떠오른다. 이브가 어제 내게 소리쳤었지. 나를 증오한다고. 츠구미를 사랑한다고.
내가 죽기를 바란다고.

이브 짱의 사랑과 증오, 바램과 마음은 나에게 아주 잘 전해졌다. 몸살로 머리가 몽롱한게 아니라면 지금도 울었을거야.
나는 그녀의 고통을 헤아리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내 고통은 이 방 한구석에 쳐박힌 채 잊혀져야 겠지.
어떻게해야 할지 모르겠다. 외모를 아예 다르게 바꿀까. 내가 츠구미인 것처럼 생활할까. 아예 어딘가로 도망갈까.
아니면 정말 죽어버릴까.
미열이 심한가보다. 눈가에선 식은땀이 멈추질 않고 흐른다.
의식이 희미해진다. 몸이 피곤해서인지 마음이 지쳐서인지, 잠깐의 죽음이 내 눈꺼풀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날카로운 전화소리에 선잠에서 깼다. 배게는 따뜻하게 젖어있었고, 창 밖에는 해가 중천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이불 속을 뒤져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ㅇ 하아아암"

잠이 덜 깼는지 나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카논 씨? 혹시 제가 깨웠나요?"

미사키 짱이 걱정 반 놀람 반의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응, 사실 그렇긴 한데 어차피 일어나야 했어. 전화해줘서 고마워."

"그렇구나... 몸은 조금 괜찮아졌어요?"

으슬으슬한건 여전했지만 몇시간 잔 덕분인지 몸은 조금 더 가벼워졌다.

"응. 많이 괜찮아졌어."

"다행이네요.
......음. 사실 그게 다에요. 걱정돼서..."

"후후후 그렇구나. 걱정해줘서 고마워. ...미사키 짱은 이제 집에 돌아가?"

"아, 네. 오늘은 강의도 오전강의 뿐이니까요."

"아 그렇구나. 원래는 데이트 예정이었으니까... 정말 미안해?"

"카논 씨도 참. 아니에요. 다음에 또 같이 데이트 해요."

"응, 그래 고마워."

"아, 버스 왔다. 카논 씨 이만 끊을게요. 배고플텐데 밥 잘 챙겨먹구."

미사키의 급한 목소리 사이로 굵은 배기음 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미사키 짱도 밥 맛있게 먹어."

전화를 끊고 보니 시간은 오후 01시 23분. 밥은 이미 먹었겠구나.
나도 뭘 먹어야 하는데... 생각은 했지만 마냥 귀찮았다. 몸살을 핑계로 계속 누워있고만 싶었다.
이른오후의 눈부신 창밖으로 부터 고개를 돌리니 책상 앞의 코르크 보드에 붙여진 사진들이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고 있었다.
츠구미 짱의 사진들... 항상 당연한 듯 지나쳤지만 자세히 하나 하나 들여다 본 적은 없다.
어쩌면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이 몸으로 저 것을 보는게, 츠구미 짱을 부정하고 또 나를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새삼스레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또 지금은 어째서인지 자꾸만 저 사진들이 신경쓰였다.
내 동거인이 그토록 사랑했던(하는) 사람이어서 그런걸까.
혹은 내가 빼았었고 왜곡하고 부정할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궁금해서 그런걸지도.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츠구미 짱의 책상에 앉았다. 사진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고 선명했다.
자세히 봤다. 어떤 것들은 아예 처음 보는 광경이지만 또 어떤 것들은 내가 알던 장면이고, 또 어떤 사진에는, 내가 찍혀있었다.
옅은 파랑색의, 약간 웨이브가 있고 날개뼈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작은 꽁지머리가 있는 머리칼.
지금은 가끔씩만 입는 푹신푹신한 느낌의 옷. 그리고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한없이 낯선 나의 웃음.
나는 조심스레 앞정을 뽑아 그 사진을 가까이 봤다. 정말로 생생한 '나'다.

사실 난 츠구미의 몸을 가지게 된 이후로 내 사진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아마 이 불가피한 상황에 최대한 적응하려 했던거겠지
내 진짜 몸은 소각되어 하얀 재가 된지 오래다. 나는 죽지 않았기에 내 몸도 제대로된 장례를 받지 못했다.
그저 필요없어진 쓰레기를 처리하듯이, 그렇게 태워져 없어졌다.
누군가는 츠구미의 빈 관에 그것을 넣는게 어떨까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잔인할정도로 효율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이브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나의 시체는 버려졌지만 그래도 츠구미에 의해 덮어씌워진 채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츠구미의 몸은 나에게 덮어씌워진 채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느낄 듯 했다.

그 약간의 충격에 난 사진을 놓쳤다. 사진은 팔랑거리며 숨겨진 뒷면을 드러낸 채 책상에 착륙했다.
마치 옆서처럼, 그 사진의 뒷면엔 츠구미의 글씨체로 무언가가 빼곡히 적혀졌다.

'2018.02.14_하자와 카페에서.
오늘은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카페에서 시식회를 했다.
항상 자주오는 카논 씨를 위해 특별히 카논 씨가 좋아하는 미쉘 모양으로.
결과는 대성공. 카논 씨도 즐거워 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사진 찍어줘서 고마워 이브짱.
언젠가는 직접 미사키 짱에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시던데, 한번 과자교실같은 걸 열어볼까.'

분명 고등학생 때 발렌타인데이의 하자와 카페였다. 츠구미 짱은 그런 기억 하나 하나를 사진과 글로 남겨뒀구나.
나는 자연스레 코르크 보드의 다른 사진들을 봤다. 아마 이것들의 뒷면에도 각각의 추억과 마음이 적혀있겠지
다른 사진 하나를 가져와 봤다. 그 사진은 비교적 최근 찍은 듯한, 이브와 치킨을 먹고 있는 셀카였다.

'2022.11.09_집에서.
이브 짱이랑 동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치킨을 먹었다.
조금 특이한 맛이지만 그게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새로운 맛을 알게 됐다고 할까.
이브 짱 입맛엔 안맞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브 짱도 맛있다고 했다.
쿠폰은 냉장고 문에 붙였다. 자취하면 해보고 싶었던거였어.'

자세히 보니 이브 표정이 조금 미묘한 것 같기도 하다. 그 치킨 지금은 전혀 안먹는 것 같던데, 일부러 참고 먹어준걸까.
이정도 되면 오히려 그 치킨 맛이 궁금하다. 그러고보니 냉장고에 붙은 쿠폰이 몇개더라...
훈훈한 일상을 뒤로하고 새로운 사진을 골랐다. 카페 내부를 배경으로, 잔이 여러개 있고 츠구미 짱이 미간을 찌푸리며
커피잔을 들고 있는 사진이었다.

'2022.04.18_하자와 카페에서
오늘은 본격적으로 블랙커피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했다.
엄연히 카페의 점장인데 못 마시는 메뉴가 있으면 안되니까.
하지만 역시 너무 쓰다. 익숙해지기 위해서라지만 고문이나 다름없어...
그래도 이브 짱이 응원해주니 조금 더 마시기 쉬웠던 듯도 하다.
그렇다고 이런 얼굴을 찍을 필욘 없잖아 이브 짱ㅠ.'

그렇지, 츠구미 짱은 블랙커피를 잘 못마셨지.
문득 지난날 하자와 카페에서, 이브의 앞에서, 블랙커피를 곧잘 마셨던게 떠올랐다.
혹시 그것도, 아니 분명 그런 것들이 이브에게 상처가 됐겠지. 그럼... 블랙커피는 안 마시는 편이 좋을까...
아니 그게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 난 또 다시 혼란스러운 의문의 굴레에 빠지려 했다.
그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띠리리리리리링- 띠리리-'

"여보세요. 카논 씨?"

"미사키 짱?"

"지금 카논 씨네 지나가는 길인데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사서 갈까요?"

갑작스러웠지만, 반가웠다. 배고팠지만 해먹기는 귀찮았고. 죽은 1인분만 시키긴 좀 그러니까.
하지만 여기는 일단 이브와 츠구미의 집인데 내 독단으로 (사랑스러운)외부인을 초대하는 건 안되지 않을까 생각도 됐고,
몸살인걸 들키면 미사키 짱이 걱정할테니까,
무엇보다 아직은 츠구미 짱의 사진을 좀 더 보고싶었기에.

"미사키 짱도 참 괜찮다니까. 그냥 숙취일 뿐이야. 다 나았어.
...미사키 짱 오늘 데이트 못해서 아쉬웠구나?"

나는 어쩐일인지 장난스레 덧붙였다.

"네,네? 아니 그... 아닌 건 아니고...
....그 오늘... 많이 기대했어서...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어요...
아, 그렇다고 카논 씨 탓하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오히려 어제 잘 돌봐주지 못한 제 잘못이니까..."

"하하하. 응, 잘 전해졌어 미사키 짱.
나도 오늘 못만나서 정말 아쉬웠어. 마침 미사키 짱 목소리 듣고 싶었는데 전화해줘서 고맙구.
다음에는 꼭 만나자? 선물해준 목걸이도 차고 갈게."

난 책상 한 쪽에 걸린, 언젠가 미사키가 선물해준, 수수하지만 이쁜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며 답했다.

"네! 그럼 나중에 또 전화할게요!"

미사키는 기운넘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부자연스러운 3번의 연락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진심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그녀를 생각할 때만큼은 모든 것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이어서 또 다른 앞정을 뽑아 또 다른 사진을 자세히 봤다. 츠구미 짱이 컵 두개를 들고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머그컵은 매우 익숙한, 내가 아침에도 사용했던 노란 머그컵과 이브 짱 전용의 연보라색 머그컵이었다.

'2022.09.21_새 집
이브 짱이랑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땐, 엄마아빠도 나도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이브 짱이 곁에 있어 준 덕에 점차 자리를 잡아간 거 같아.
오늘은 둘이서 장보러 갔다가 귀여운 커플 머그컵을 발견했어. 이브 짱이 사자고 조르는 바람에 사버렸지만,
사실 이브 짱이 조르지 않았어도 내가 샀을 거 같아.
이렇게 사진을 찍고보니 우리 둘이 함께한다는 실감이 나네.
내가 이브 짱에게 의지하는 만큼, 도움도 줄 수 있기를.'

아. 그 머그컵이 그런 존재였구나.
아무것도 모른채, 무신경하게 입을 댔던 그 머그컵이, 그토록 소중한 물건이었구나.
이브 짱은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걸까... 자신이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브 짱은 츠구미에 대해선 묘하게 자신을 낮추는 경향이 있으니...
돌아오면 제대로 사과하자. 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진을 뽑았다. 유일하게 츠구미 혼자만 찍힌 사진이었다.
밝은 미소와 반짝이는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2023.09.21_공원
이브 짱이랑 1주년 기념 데이트.
같이 살게 된지 벌써 1년이 되었구나.
이브 짱에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지고 있어. 항상 고맙고 미안해.
그런데 이브 짱은 내게 항상 고마웠다고 하면서 목걸이를 선물로 줬다.
반짝이는 푸른색 실에, 가운데엔 은색 십자가가 달린 예쁜 목걸이.
이브 짱이 이걸 목에 걸어주며 츠구미 씨는 푸른 색이 가장 어울린 다고 했다.
그때 나는 너의 상냥함과 숨결을 느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한게 없는데. 너에게는 항상 받기만 하는구나.
언젠가는 나도 너에게, 이 모든 걸 보답할 수 있을까.
선물 고마워 이브 짱. 여행 잘 다녀올게.'

여행. 날짜를 봤을 때 어렴풋 느꼈지만, 이건 그 여행을 가기, 즉 사고가 나기 불과 1주일 전의 사진이었다.
사실상 가장 최근에 찍힌 츠구미의 사진인 것이다.
그 사진을 보고있으니 그 사고의 기억과, 츠구미의 밝은 미소와, 애틋한 마음이 뒤섞여 형용하기 힘든 서글픔이 차올랐다.
푸른 빛의 목걸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 목걸이. 지금 그건 어디에 있지?
기억을 되살려본다. 분명 그날, 출발할 때는 차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고 후엔 본적이 없다.
그 사고 때, 차는 전복되었다. 그리고 폐차되었다. 유가족분들은 그 차를 보는걸 꺼려했으니...
차와 함께 사라진게 아닐까.
그럼... 그 목걸이의 존재를 알고있던 사람도 그 목걸이의 부재를 알고있던 사람도 이브 짱 뿐인걸까.
혼자서... 자신의 선물이 아무도 모르게 잊혀졌다는 사실을 품고 있었던 걸까.
그 아이라면 유가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친할 뿐 관계자는 아니라는 자학 때문에 제대로 수색 요청조차 하지 않았겠지.

결국 이브 짱의 마음은 지금도, 처참하게 구겨진 폐차의 희미한 틈 속에서, 아무도 모른 채로, 혼자서, 푸른 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문득, 책상에 걸린 미사키의 마음이 보였다. 그것은 밝은 방 안에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근시일에 내 목에 걸릴 것이다. 그 어떤 목에도 걸릴 일 없이 잊혀진 푸른 목걸이 대신에.
그리고 그 때, 그 푸른목걸이는 폐차 속에서 잊혀진 채로, 새로운 목걸이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겠지.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이.
마치... 이브 짱의 마음처럼...

더는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코르크 보드에는 이제 사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계속 보고 읽는 건 버거웠지만, 동시에 멈추면 안될 것 같다는 미지의 강박이 날 짓눌렀다.
마지막으로 한 장. 마지막 사진 하나를 보기 위해 앞정을 뽑았다.
그러자 그 사진 뒤에 숨겨져 있던 다른 사진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그걸 주워서 봤다. 유일하게 츠구미 짱이 찍히지 않은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소파 위에서 새근 새근 잠을 자는 이브 짱과,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츠구미 짱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자만 있었다.
마찬가지로 뒷면엔 글귀가 적혀있었다.

'2023.01.29_집, 소파에서
네가 깊은 꿈을 꾸고 있을 때 너의 모습을 담은 걸 용서해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네 눈꺼플이 닫힐 때만 겨우 내 마음을 열 수 있는걸.
오직 이 때만 너는 의무를 내려놓고 와카미야 이브가 될 수 있고.
오직 이 때만 나는 무엇도 받지않고 너의 숨결만을 느낄 수 있어.
하지만 결국 너는 깨어나야 하겠지. 가게일을 돕고, 저녁밥을 하고, 그리고 나를 돌보기 위해.
내가 이 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언제까지고 주인과 직원일 뿐일거야.
이브 짱.
너의 사랑을 받지 못해 미안해.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너를 사랑해.

겉면의 사진을 봤다. 깔끔한 방을 배경으로 이브 짱과 츠구미 짱이 같이 찍힌 셀카였다. 날짜는 같았다.

'2023.01.29_집
오랜만에 대청소를 했습니다!
가게나 몸을 핑계로 짤막짤막하게 치우기만 하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둘이 함께 구석구석 청소했습니다.
무려 3시간이나 걸려서 끝냈어! 높은 곳의 먼지는 이브 짱이 도맡아서 털어준 덕에 더 빨리 끝난 거 같아.
둘 다 녹초가 돼서 요리하는 대신 치킨을 시켰어. 이브 짱이 미묘하게 기뻐하던데 많이 피곤한걸까.
언제나 느끼지만, 점장으로써 동거인으로써 환자로써, 너가 아니었으면 난 아무것도 못했을거야.
항상 미안해. 고마워. 그리고'

글귀는 그렇게 어색하게 끊겼다.
분명 끝맺지 못한 그 마음이 뒤에 숨겨진 사진인거겠지.

그렇게 깨달았다.
연모하고 있던 건 이브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신의 마음을 꼭꼭 숨긴 것은 이브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츠구미 짱도 간절히 이브 짱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도 너무나 절대적인 굴레에 힘겨워 했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바보커플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현실은 표현보다 진중했고 또 무거웠다.
츠구미 짱은 주인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브 짱은 직원을 그만두지 못했다.
쌍방향의 애틋한 사랑은 뿌연 현실의 안개에 가려진 채, 혹은 개인의 오만한 자학에 왜곡된 채, 서로에게 닿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무엇하나 짜맞춰지지 못한, 비극적 아이러니의 한가운데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써 이리도 당당히 서 있는 것이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코르크보드의 밑, 책상의 한쪽 구석에 작은 액자가 보인다.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로 단단히 봉해진 그 사진 속에는 언젠가 내가 찍은 미사키 짱이 웃고있다.
그 웃음 뒤에는 별다른 글귀가 적혀있지 않았다. 대신 군데군데에 마음과 추억만이 묻어있을 뿐.

저 사진을 언제 찍었더라.





# 2023.11.12_13:52_1인용 병실

"과일을 조금 깍아왔어요."

온통 하양으로 도배된 1인용 병실에서 미사키가 검은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과일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응... 고마워."

"아직... 많이 아파요?"

"응...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ㅇ... 앗!"

"카논 씨!"

나는 상체를 일으키려하다가 또 어딘가에서 느껴진 통증에 짧은 신음을 흘렸고, 미사키는 깜짝 놀라며 접시를 놓고 달려왔다.

"무리하지 마세요. 제발..."

미사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등과 손을 살며시 받혀줬다.

"고마워 미사키 짱. 하지만 정말 조금 아픈 것 뿐이니까. 적어도 상체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이건 나의 몸도 아니었고 멀쩡한 몸도 아니었다.
이제는 주인을 영원히 잃어버린 츠구미 짱의 몸이었고 불과 몇 주 전에 큰 사고를 당한 몸이었다.
이 때는 불행히도 몸을 잃은 내가, 더 불행한 주인을 잃은 몸에 이식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참이었다.

"그래도 아직 나으려면 멀었으니까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 저에게 말해주세요."

"응. 고마워.
그럼 물 한잔만 가져다 줄래?"

난 부드러운 손길에 의지한 채 침대의 벽에 상체를 기대고 작은 부탁을 했다.

"네, 잠시만요."

미사키 짱은 그렇게 말하곤 탁자 위, 과일접시 옆에 놓인 물병과 컵 쪽으로 걸어갔다.

1인병실은 크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건 다 있었다.
한 쪽 벽에는 간호인이 쉴 수 있는 의자와 탁자가 있었고, 그 뒤쪽에는 작은 냉장고나 전자레인지같은 것들이 배치돼있었다.
그 반대편 벽의 빈 공간에는 절대로 시들지 않을거 같은 생화, 접혀진 휠체어, 그 바로 옆에는 아담한 화장실 문.
내 침대 한 쪽에는 큰 창문으로부터 가을의 청명한 하늘이, 블라인드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상체를 벽에 기대면 반대편 벽과 천장에 걸쳐진 벽걸이형 TV가 보였는데, 잘 때를 제외하고 항상 켜놓았다.
하지만 소리도 켜놓지 않았고, 보지도 않았다. 그냥... 켜놓기만 했다.

"카논 씨 여기 물이에요.
과일도 지금 먹을래요?"

미사키 짱이 너무 차갑지 않은, 딱 적당히 시원한 온도의 물을 건네줬다.
한 손에는 아기자기한 포크로 집은 사과조각을 들고 있었다.
사실 뭔갈 먹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미사키 짱이 이왕 들고왔으니, 그리고 너가 먹여주고 싶어하는거 같아서.

"응 고마워, 그럼 한 입만 먹을까?"

"여기요. 아-"

사각

미사키 짱의 흔치 않는 행동에 조금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그녀를 따라 입을 벌려 한입 베어물었다.
사과는 단단했고 달았다. 미사키 짱의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음. 맛있다.
아, 이 정도면 충분해. 고마워."

"그럼 제가 먹을게요."

사각

미사키 짱은 남은 사과조각을 한 입에 넣고 씹었다. 아삭한 소리가 들렸다.

"미사키 짱은 대학으로도 많이 바쁠텐데, 매일 여기 오는거 힘들지 않아?"

나는 순진한 얼굴로 조각난 사과를 삼키는 미사키 짱에게 물었다.

"음... 아뇨. 대부분 강의 없는 시간에 오는 것 뿐이고 혹시 강의가 있더라도 가끔 대출 부탁하면 되니까요.
과제같은건 아직 저녁에 다 끝낼 수 있는 정도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카논 씨가 걱정이니까."

"그렇구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줘. 나 때문에 미사키 짱에게 폐가 가는 건 싫으니까.
그리고 이브 짱도 자주 와서 간호해주기도 하구..."

"폐라뇨.
...그리고 이브 씨는... ...츠구미 씨의 병 때문에 오는 거잖아요."

이 병실에서 줄곧 암묵적으로 금언되던 사실, 하지만 결국에는 드러날 것이고 또 드러나야만 하는 사실을 미사키는 언급했다.

"아, 물론 이브 씨가 카논 씨에게 전혀 관심없어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고,
저도 그 몸...은 잘 모르니 이브 씨가 꼭 필요한 건 알지만.
그래도... 저는 몸 이전에 카논 씨가 걱정되는 거니까... 아니 그렇다고 그 몸이 카논 씨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고..."

미사키가 당황스런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며 말 끝을 흐렸다.
어째서인지 그녀가 진심으로 당황할 때마다, 혼란스럽던 내 마음도 차분해진다.

"응, 나도 알아. 그냥 미사키 짱이 바쁠 때도 무리하게 올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
나도 미사키 짱이랑 더 많이 만나고 싶구."

"카논 씨..."

귀가 조금 붉어진 미사키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브 씨는 왜 그렇게 자주 오는 걸까요.
본인이 도맡아 간호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기는 병원이고,
카논 씨가 걱정되는 것도 이해하지만 매일 올 줄은 몰랐어요."

"아마... 츠구미 짱이 보고싶어서 오는게 아닐까...
둘은 각별히 친했었으니까..."

"..."

미사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입 밖으로 뱉은 생각을 곱씹었다.
그래, 내가 들어있는 몸은 더 이상 단순하지가 않았다.
이 몸은 사고로 죽을뻔한 몸이면서도, 츠구미라는 타인의 몸이었고, 또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몸이기도 했으니까.
몸은 하나인데 의미하는 건 3개였다. 그리고 그 중 내게 해당되는건 하나도 없었다.
'내 몸'은 소각되어 재가 된지 오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혼란과 공허가 동시에 엄습했다.

"카논 씨, 다리는 언제쯤 낫는다는 얘기는 없었어요?"

무거운 분위기를 느꼈는지 미사키가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직 정확한 기한은 안말해줬어.
하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니 결국은 움직일거래. 지금도 전보다는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한동안은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할 거 같아."

"그럼 한동안은, 많이 갑갑하겠네요."

"응, 조금. 하지만 미사키 짱이 와주니까 괜찮아."

미사키 짱은 조금 생각하더니
벽 한쪽 구석에 놓여진 휠체어를 끌고 왔다.

"카논 씨만 괜찮으면... 저랑 산책 하실래요?"

미사키 짱이 자신이 하는게 잘하는 것인지,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좋은 생각 같았다. 방에서 나가 무거운 분위기와 복잡한 생각으로 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쌀쌀한 가을공기라도 맞으면 기분이 환기되지 않을까.

"그럼 부탁할까? 고마워 미사키 짱."

"네!"

미사키는 기운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서투르게 접힌 휠체어를 폈다.

"저 카논 씨 손좀..."

"아, 응."

미사키가 부끄러워하며 나를 껴안았고 나도 미사키 짱의 목에 팔을 둘렀다.
붉게 물든 나의 뺨이 한껏 상기된 너의 귓볼에 닿았다.

"하낫, 둘,"

미사키 짱이 나를 힘껏 들어올려 휠체어에 살포시 앉혀줬다.
처음 하는 것 치곤 꽤나 능숙했다.

"고마워 미사키 짱."

"아니에요, 그럼 이제 나갈까요?"

미사키 짱이 그렇게 말하며 TV를 껐다.
검은 화면에 나, 혹은 츠구미, 혹은 누군가의 얼굴이 반사됐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수술을 집도하고, 내가 입원한 곳은 대형 병원인 만큼 건물 내부에 넓찍한 공원이 있었다.
곳곳에는 침엽수와 활엽수가 옹기종기 모여 배치되어 있어서, 사계절의 녹음과 가을의 단풍이 공존했다.
나무 혹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고급진 벤치들 위에는 몇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와 몇 개의 파라솔이 안락한 그늘을 드리웠다.
한 쪽에는 스테인리스의 식수대가 이른 오후의 햇빛을 반사했고 계단과 경사로가 우리에게로 뻗어있었다.
미사키 짱은 천천히, 휠체어의 바퀴를 경사로에 밀어올렸다.

덜컹

"미안해요. 많이 흔들렸어요?"

"아니, 전혀.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했지만 여전히 신경이 곤두선듯 했다. 분명 처음 휠체어를 미는 만큼 많이 긴장한 것이겠지.
그녀는 초록과 붉음의 경계즈음에 휠체어를 세웠다. 나와 내 옆의 벤치 위로 나무가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기면 괜찮을까요?"

"응. 좋아."

미사키 짱은 내 바로 옆의 벤치에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나란히 앉은 채로 소나무 틈새로 비치는 따사로운 햇빛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가을 공기는 내 뺨을 차갑게 쓰다듬었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무거웠다.
밖으로 나온건 정답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이 아닌, 바로 옆에 미사키 짱이 앉아있다.
환자와 보호자가 아닌, 전처럼 어깨가 닿는 사이로 돌아간 것 같아 조금 기분이 들떴다.
나는 무거운 머리를 떨구며, 살며시 침묵을 깨트렸다.

"...내 침대 위에 달린 TV 있잖아."

"네? 아 네."

"내가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면서 왜 항상 그걸 틀어놓고 있는지 알아?"

"음... 모르겠어요. 어째서에요?"

미사키 짱은 내가 수수께끼라도 낼 거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뒤물었다.

"TV를 끄면, 검은 화면에 내... 이 얼굴이 비치거든.
난 그걸... 보는게 꺼려ㅈ... 두려워.
타인의 얼굴이라는게 너무나도 낯설기도 하지만. 동시에 츠구미 짱은 어디갔는지에 대해, 헛된 의문이 들어."

"..."

"츠구미 짱이 가지고 있던 중병이나 츠구미 짱의 몸의 어색함. 처음에는 괜찮았어.
그것들의 이질감은 사고의 통증과 뒤섞여 분간이 되지 않았거든.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몸은 사고로부터 회복되고 있고, 그럴수록 이질적 변화는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져.
TV의 검은 화면에 비치는 얼굴. 내 손.내 몸. 내 채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이러한 모든 것이 너무 변해버렸어.
내가 누군지, 나는 혼란스러워."

"카논 씨..."

"이브 짱이 올 때마다, 가끔씩 누굴 보는 건지,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싶을 때가 있어.
가끔은..., 아마 혼자만의 착각이겠지만, 가끔은... 이브 짱이 날 원망하는 거 같다고도 느껴.
내가... 츠구미 짱을 빼았아 갔다고 생각하는걸지도..."

"카논 씨."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몰라. 정말로 내가 츠구미 짱의 몸을 뺐은걸지도 몰라.
화장실의 거울을 볼 때면 거기에 비치는 츠구미 짱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
원망과 상실과 혼란이 뒤섞여 곤죽이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그럴 때면 그저 눈을 감을 뿐이야.
하지만 눈을 감아도, 거울에서 고개를 돌려도, 무의미한 TV를 틀어놔도, 추운 새벽의 깜깜한 공기를 응시해도.
츠구미 짱의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아."

"카논 씨!"

"그 아이는 여기에,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에 있는데,
츠구미의 상냥함과, 웃음과 영혼, 츠구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건지.
혹시 내가 영원히 지워버린 건 아닌 건지.
차라리 이 몸이 츠구미와 함께 묻혔다면, 적어도 츠구미와 츠구미의 인연을 둘러싼 사랑은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카논 씨! 그만 하세요!
카논 씨는 카논 씨고 츠구미 씨는 츠구미 씨에요! 누가 누구의 몸에 있던간에, 그건 변하지 않아요!"

미사키는 어느새 내 앞에서 서서 나의 힘없는 양 어깨를 움켜쥐고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카논 씨, 저는 카논 씨가 느끼는 걸 전부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저는 카논 씨의 여자친구에요. 텔레파시는 없지만 모든 걸 들어줄 수 있고, 진심어린 대화를 할 수 있어요.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더 얘기해줬으면 해요. 하지만 제 얘기도 들어주세요.
카논 씨가 어떤 모습이건, 어디에 있건, 무얼 하건 간에. 전 항상 곁에서 어깨를 맞닿은 채로 당신만을 바라볼거예요.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나를 바라보는 미사키의 두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었지만 동시에 불타오르는 듯 했다.

"카논 씨,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언제든 진심을 털어놔도 좋지만 그런식으로 자신의 부정에 마침표를 찍지 말아주세요.
카논 씨가 츠구미 씨의 몸으로 산다고 해서 그 무엇이 부정되지는 않아요.
츠구미 씨의 친구들도 부모님들도 여전히 그녀를 기억할 것이고 또 사랑할거예요.
저 또한, 카논 씨가 낯선 모습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구요."

"미사키 짱... 하지만..."

두 개의 강렬한 감정이 맞부딪혀, 나는 울먹거렸다.
미사키 짱은 어느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계속했다.

"카논 씨가 그렇게 생각 하는 것도 당연한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웃어주세요. 새로운 몸을 얻었잖아요. 그리고 그 츠구미 씨의 몸도 결국은 완치된다면서요.
저는 그게 마냥 기뻐요. 카논 씨가 다시, 건강하게 내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카논 씨도 저를 위해 웃어줬으면 해요."

"그래도..."

"카논 씨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그 누구도 카논 씨를 원망하지 않구요.
그리고 제가 있는 한, 아무런 불안도 느낄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카논 씨."

미사키 짱은 조심스레, 나의 부정을 부정했다.
그 상냥한 손길로 나의 두 손을 잡고서, 애틋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봤다.
내 눈물이 상기된 뺨을 타고 내렸다.

"정말로... 계속 같이 있어줄거야?"

"네, 언제까지라도."

변치 않는 나의 마음에, 변치 않을 상냥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나는 내 손을 감싼 미사키의 양손을 콧등으로 갖다 댔다.
츠구미의 피부에, 나의 감각에, 미사키의 마음이 느껴졌다.

잠시 후 내가 손을 풀자 미사키는 오른손으로 내 눈가에 흐른 감정을 닦아주며 말했다.

"조금 괜찮아 졌어요?"

"응... 고마워..."

나는 눈물로 조금 젖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미사키 짱은 그걸 보고 조금 안심했는지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병원 내부에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가 있다던데,
오랜만에 홍차랑 케이크 어때요?"

"응, 좋아.
가자."



약간 노란빛과 진한 갈색이 뒤섞인 카페 내부는 어딘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을 줬다.
대형병원의 부속시설이라 그런지 규모가 조금 컸는데, 우리는 한 쪽 코너의, 햇빛이 드는 아담한 소파석에 앉았다.
홍차와 조각케이크, 커피를 주문했다.
은은한 노란 불빛 아래서, 미사키 짱의 여전히 나를 위로하려는 듯이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그러고보니 츠구미 씨랑 카논 씨 키가 같은 거 알고있었어요?
어쩐지 껴안거나 키, 키스... 할 때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어요."

그러면서 얼굴을 붉혔다. 사귄지 꽤 됐는데도 미사키 짱은 여전히 스킨십에 서툴다. 그 부분이 귀엽지만.
미사키 짱은 또 이런 얘기도 했다.

"이제 새로운 모습이 되었으니, 코디 같은 것도 바꿔보는 건 어때요?
전부터 푸른 색 계열이 잘 어울릴 거같다고 생각했어요."

'전'이라니 정확히 언제부터 츠구미 짱의 몸을 눈여겨 본건지 궁금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이야기 꽃을 틔우다보니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그러고보니 츠구미 씨는 블랙커피를 못마셨죠. 그럼 지금의 카논 씨도 블랙커피를 못마실까요?"

순전히 호기심에서 나온 발언인거 같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일단은 미사키 짱이 건네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음... 평범히 괜찮은데..."

"...맛 자체는 혀가 받아들이지만, 느끼거나 기호를 판단하는 건 뇌의 영역이라 그런걸까요."

"글쎄."

나는 멎쩍게 웃으며 미사키 짱의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 이후로도 케이크를 나눠 먹고, 옛날 얘기 새로운 얘기를 하면서 홍차와 커피를 한 잔 씩 더 시켰다.

슬슬 해가 지려하고, 밖보다 안이 더 밝아질 무렵,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의 홍차를 마셨다.

찰칵

"? 뭐하는거야?"

갑작스런 셔터소리에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가렸다.

"카논 씨가 오늘 하루종일 신경 쓰니까... 이렇게 확실하게 하는거에요.
'이제부터 이 사진은, 이 얼굴은 카논 씨다.' 라고.
제 폰 배경화면도 이걸로 바꿀거에요."

미사키 짱이 휴대폰을 만지며 말했다.
약간 장난기가 묻은 말투지만 그러면서도 날 생각해준다는게 느껴졌다.

찰칵

"카논 씨?"

내가 사진을 찍자 미사키 짱도 당황스러워 하며 말했다.

"나도 미사키 짱 사진 배경화면으로 할거야."

"저는 예전 그대로인데?"

"그냥 방금이 예뻐보였으니까.
...안돼?"

"안되...는건 아니지만..."

내가 심술궂은 듯이 솔직하게 말하자
미사키 짱은 부끄럽다는 듯이 말하곤 괜히 텅 빈 커피잔을 들이켰다.



아, 그래. 기억났다. 이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지.
그리고 그 날 어떤 얘기를 했고,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내가 사진을 찍기 전, 미사키 짱이 날 찍은 것도.
그리고 그 츠구미 짱의 얼굴은 미사키 짱의 휴대폰 안에, 마음 안에 마츠바라 카논으로 저장되어 있겠지.

더 이상 생각하면 안될 것 같은 영역에 발을 옮겼다.
미사키 짱이 그 때 나에게 해준 그 모든 말들, 진심어린 위로, 사랑의 속삭임.
그 모든 것들이 종국에는 츠구미에 대한 부정이 되었다.

그때는 마냥 감동적이고 희망적이었던 마음들이 지금이 되어서는 날 괴롭힌다.
너와의 소중한 추억 하나 하나가 내 앞의 츠구미의 사진을 덮어씌우고 있다.
그 어떤 말로도 부정할 수 없는 죄책감이 다시 엄습한다.
그 어떤 마음으로도 긍정할 수 없는 내 존재에 회의감이 들이닥친다.
네게서 느낀 그 모든 상냥함은 무참히 전락하여 결국에는 참혹함 만이 되었다.

내리면 안되는 결론에 가까워진다.
이건 단순히 미사키의 마음과 이브의 마음 사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마음과, 그것들이 긍정하는 각자, 그리고 그것들이 부정하는 각자의 문제다.
그리고 나는 차마 츠구미를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를 부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진과 추억 속의 츠구미를 지우는 것, 그리고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나는 미사키와 헤어져야만 한다.





#2024.04.29_14:11_병원 내부

'위---잉 위---잉 위---잉 위---잉'

미사키에게 3번째 전화가 왔다.
나는 받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다. 적어도, 지금 선언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뭐라고 할지, 충격이 가시지 않은 탓이다.
애초에 아직... 헤어지겠다고 결정한 것도 아니니까...
어쨌거나 많이 걱정할테니, 진료만 끝나고 바로 전화해야겠다.

지금은 오후 02시 12분. 몸살 진료 겸 병의 정기검사를 위해 병원에 왔다.
이브 짱이 같이 간다고 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머리가 너무 복잡했기에 그냥 혼자 가겠다고 문자를 남겼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병원에선 보호자가 꼭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브 짱도 별 말 안하겠지.

"마츠바라 카논 씨, 들어오세요."

"아, 네."

내 이름이 불리자 나는 대기하던 의자에서 일어나 '내과 2'라고 써진 진료실로 들어갔다.

"몸살이 있으시다구요."

의사는 컴퓨터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 말했다.

"네. 오늘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으슬으슬해서-"

"아 아가씨가 그 환자분이군요."

모니터를 보던 의사가 내 말을 끊고 반가운 듯이 말했다.
뇌 이식 수술이란 것이 역시 흔한 일은 절대로 아니어서, 내 수술이 진행된 이 병원에선 내가 알게모르게 유명인인 듯 하다.
그런게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병원 가봤자 의료기록이랑 다른 걸 또 설명해야 할테니... 결국은 항상 여기로 오는 것이다.

"네, 근데 오늘은 몸살 때문에-"

"아 그렇죠. 다만 환자 분의 그 몸의(의사들은 꼭 이렇게 표현했다.) 지병과 관계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추가로 진료를 받아보시는 걸 권해요."

"안그래도 이후에 정기검사를 받으러-"

"그렇군요. 그럼 일단 체온부터 잴까요?"

의사들은 사람 말을 끝까지 듣는 법이 없다.
내가 왼쪽 귀를 드러내자, 조금 차가운 전자체온계가 닿았다.

삐-

"37.9도, 열이 조금 있네요. 기침은 안하신다니 감기몸살은 아닌거 같은데,
어제 과격한 활동이나 잘못 먹은게 있나요?"

"...술을 조금 과하게 마셨던거 같아요. 그리고... 스트레스를 조금?"

"하하하 왜 그렇게 확신이 없어요.
여러모로 무리한게 있는거 같은데. 맥박도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고 그냥 가벼운 몸살 같네요.
약을 좀 처방해드릴게요."

"아, 네."

"몸살이라는게 약만 먹는다고 낫는게 아니니까,
과일 많이 먹고, 물 많이 마시고, 따뜻하게 푹 자도록 해요.
본인의 몸이 아닌터라 아직 생활방식이 적응되지 않은 걸 수도 있으니 항상 주의하시구요. "

그렇게 말하며 의사는 외계어같은 글씨를 처방전에 휘갈겼다.
마지막 문장은 잊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겠지.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에 앉아있던 곳에 조금 기다리니 간호사가 말했다.

"원무과에서 수납하시고 처방전 받아가시면 돼요."

"네."

원무과는 내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형병원이라 그런지 한적한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렸다.
접수는 물론 수납에도 대기순번이 많았다.
어차피 정기검사도 받아야되는거, 먼저 검사부터 받고 수납하는게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내 수술은 특수한 경우라 별동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고, 그래서 따로 접수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수납을 나중에 해도 되는건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정기검사는 옆건물의 5층. 나는 건물을 빠져나와 야외의 인도를 따라 걸어 하얀 건물의 파란색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 마자 왼쪽편에 엘레베이터 두대가 보인다. 이 건물엔 일반 의료시설이 적어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띵동 소리가 났고, 난 넓찍한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나 밖에 없었다. 나는 5라고 써진 단추를 눌렀다.
양 옆에 거울이 달린 은색 상자는 위잉 거리며 움직였다.

평소보다는 조금 더 무거운 중력, 육중한 기계소리, 양 옆으로 무한히 비춰지는 츠구미의 모습.
엘레베이터는 느렸다. 지루함은 곧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런저런 생각들.
몸살은 언제 쯤 나을까, 집에 가서 또 자야하는 걸까 더 졸리지도 않는데.
이브 짱한테 제대로 사과해야 겠지... 하지만 어떤 얼굴로 어떤 얘기를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얘기를 했는데, 이브 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사키 짱이랑은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하지? 대학도 같은데 완전히 끊을 순 없잖아
아니 애초에 정말로 헤어져야 하는거야?
하지만 그건, 미사키 짱도... 나도... 못 견딜거 같아...
아 맞다, 전화.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 엘레베이터는 그제서야 5층의 문을 열었다.
아마 검사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테니, 검사 끝나고 전화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엘레베이터를 나왔다.
딱 한번 이브 짱을 대신해서 츠구미 짱을 데려다 주러 여기까지 온적이 있다. 그 때는 보호자였는데 지금은 환자다.
언젠가 봤던 그림이 달린 코너를 돌아 복도를 열 몇발자국 걸으니 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마자 한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죠?'

"정기검사 받으러 왔는데요."

"성함이?"

"마츠바라 카논이요."

"잠시...만요..."

간호사는 열중하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바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듯 했다.
난 혹시나 해서 덧붙였다.

"저... 그럼 하자와 츠-"

"아 예 마츠바라 씨, 오늘 정기검사하시는 날이네요.
저 쪽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주시겠어요?"

"아, 네."

간호사는 나의 괜한 걱정을 끊고, 예정대로의 수정된 차트에 의거하여, 내게 새로운 의무를 부여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입구의 건너편에 있는 여자 탈의실로 갔다.
옷을 하나 둘 씩 벗고, 휴대폰을 귀중품 보관 주머니에 넣은 뒤, 캐비닛 안에 있는 적나라한 천쪼가리를 걸쳤다.
캐비닛 문을 닫고, 잠근 뒤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문에는 '귀중품 분실 주의'라는 상투적인 경고가 적혀있었다.
검사용 가운은 양 옆에 훤히 뚫린 채 얇은 끈 하나로만 이어진 옷이었는데, 언젠가 일반 정기검진 때 입어봤지만 역시 낯설다.
부끄러움과 해방감이 뒤섞이는 것 같다.
탈의실을 나오니 간호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안내했다.

난 사방에 문이 달린 복도를 지나 가장 안 쪽의 방에서부터, 차례 차례 낯선 검사들을 받았다.
이상한 촉감의 막대기를 물거나, 하얀 기계 내부를 통과하거나,
경사진 런닝머신에서 머리가 하얘질정도로 달리거나, 혹은 그냥 엑스레이를 찍는 등.
그렇게 5층 전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마지막 검사실에서 나오니, 한시간 삼십분 하고도 조금 더 지나있었다.
생각보다 오래걸렸다고 생각하며 다시 탈의실로 돌아와, 검사복을 벗고 일상복을 입었다.
슬리퍼는 신발장에 넣고 열쇠는 캐비닛에 꽂아둔 채 탈의실을 나왔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또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보통의 정기검진처럼 며칠 뒤에 나오는 건 아니니 다행이지.
기다리는 동안 앉은 의자는 몸살 진료를 기다리기 위해 앉았던 의자와 같은 제품이었다.
멍하니 앉아있으니 반대편의 벽이 보인다.
새하얀 벽에는 형광등이 반사되어 조금 눈 부셨다. 나는 눈을 내리 깔고 벽과 바닥의 경계를 멍하니 처다봤다.
어째서인지, 나는 이제서야 정기검사, 그리고 이 몸에 관해 생각했다. 이 중병의 몸에 관해.
물론 생전 츠구미 짱에게서 몇번인가 몸 상태에 대해 듣기도 했고, 호전되어가고 결국 완치된다고 했으니 큰 걱정은 안하지만,
그래도 츠구미 짱이 들었던걸, 그 죽음에 관한 중계를 실제로 듣는다는 것은 역시 긴장되는 일이다.

"마츠바라 카논 씨, 3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네."

간호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내 생각을 멈췄고, 긴장은 행동이 되었다.
나는 나무재질의 막대기형 문고리를 잡아돌려 의사의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나를 보며 가볍게 목례했고, 나도 끄덕이며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마츠바라 카논 씨."

"네."

"그 수술 이후, 그러니까 마츠바라 씨가 그 몸으로 이 정기검사를 받으신 건 처음이죠?"

"네."

"그럼 모르시는 것들도 많이 있겠군요."

"네 하지만, 츠구미 짜-, 하자와 씨에게 적잖이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짧은 침묵 속에서 의사의 마우스 클릭 소리가 여러번 들렸다.
의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검사 결과... 이전과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어요.
다만 체온이 조금 높고 혈압이 조금 높은데..."

"아 제가 오늘 몸살에 걸려서요. 방금 내과에서 진료받고 온 참이에요."

"음... 그렇군요. 특별히 이 병의 증상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하지만 악화에 따른 면역력 저하의 결과로 볼 수도 있기에 완전히 무관하다고 단정짓기는 힘듭니다."

"악화요?"

의사는 내 질문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멈추지 않고 얘기했다.

"사고를 겪은 뒤 첫 검사인데, 관리를 잘하신건지 이전 검사와 아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물론 조금 악화되긴 했지만 병의 예정된 주기에 진입한 것 뿐입니다.
남은 예상 수명도 변화는 없어서 현재로는 6달 남짓입니다. 조금 더 오래 사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완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기한을 늘리고, 통증을 줄이도록 해보겠습니다.
일단 새로운 주기로 들어갔기 때문에 앞으로 검사를 조금 늘려야겠군요.
복용하시는 약과 주사도 조금 늘려야 되구요.
그건 그렇고 안심했습니다. 이렇게 잘 받아들이시니.
전 환자분, 그러니까 하자와 씨도 이렇게 까지 담담한 표정은 아니셨는데."



"...환자분?"



"환자 분 괜찮으세요?"

"...무슨 뜻...이에요?"

새하얀 공백 끝에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이라니... ...혹시 하자와 씨에게서 제대로 듣지 못하셨나요?"

"츠구미 짱은 분명 호전되고 있고 완치 될 거라고..."

"네?
그 분이 병에 걸린 이후로 완치 가능성은 한번도 결론내려진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병을 진단하고 6개월 후에 이미 구체적 기한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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