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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카스아리 2세물) 미숙한 그녀들 -4(완)

AGBMD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2.19 00:42:09
조회 1420 추천 18 댓글 6
														

1편 : https://gall.dcinside.com/m/lilyfever/511455


2편 : https://gall.dcinside.com/m/lilyfever/515342


3편 : https://gall.dcinside.com/m/lilyfever/52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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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자 열도 내리고 무겁게 아스미의 전신을 짓누르던 근육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제까지 가슴 속에서 아스미를 괴롭히던 질척질척한 무언가도 해열제와 함께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다. 샤워하고 교복을 바르게 입은 그녀는 책상에 놓아둔 밤늦게까지 써둔 편지지를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 이제는 그녀가 용기를 내어 늦가을의 화단으로 나갈 차례다. 마지막으로 조금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한 아스미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아침 식사를 위해 탁자 앞에 앉았다. 그러자 이미 나갈 준비를 끝낸 아리사가 아스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스미, 학교 갈 수 있겠어? 무리하면 안 되는데......"


말하면서 아리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먼 곳을 바라본 채로 아스미를 향해 흘끔거렸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미안한 감정이 담긴 대화와 사과는 익숙해지지 않는 그녀였다.


"이제 완전 괜찮아……! 그리고 아리사 엄마, 걱정 끼쳐서 미안. 카스미 엄마 울린 것도......"


아스미가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녀도 아리사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저 탁자 위의 토스트만 바라보면서 말했다. 붕어빵처럼 닮은 두 사람을 카스미는 부엌에서 바라보면서 기특한 듯이 미소지었다. 정말 소중하고 따뜻한 반짝임이었다. 아스미 몫의 베이컨을 구우며 카스미는 행복한 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 그래...... 엄마도, 어제 뭔가 너무 거칠게 말한 것 같아서...... 미안..."


안절부절못하는 두 모녀의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오는 카스미였다. 웃는 카스미에게 항의하는 모습까지 정말 너무나 닮아서 카스미는 행복했다. 서투른 말이었지만 그래도 비슷한 모녀끼리 통하는 게 있는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전달된 모양이었다. 아리사는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코트를 걸치고 자동차 키를 챙겨서 출근길을 향해 도망치듯이 나갔다. 아스미도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토스트를 집었다. 따뜻하고 바삭한 촉감의 식빵을 베어 물자 부드러운 버터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아스미가 입안에서 홋카이도의 풍취를 만끽하고 있을 때 갓 구워진 베이컨이 탁자 위에 올라왔다. 탁자에 베이컨과 계란후라이를 올려놓은 카스미는 앞치마를 벗어서 의자에 걸어놓고 아스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스미, 정말 괜찮아? 무리하는 것 같으면 조퇴해도 괜찮으니까."


"응, 괜찮아! 그리고 엄마가 내준 숙제 말인데. 일단 오늘 해볼게!"



그녀의 취향대로 부드럽게 굽힌 베이컨을 집으면서 아스미가 결심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자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다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아스미를 보고 카스미는 안도하면서 동시에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아스미는 질색하면서 말했다.


"아, 엄마! 머리 다 흐트러져...... 오늘은 좀 신경 쓴 거란 말이야!"


예상치 못한 반응에 카스미는 풀죽은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다시 정리해주었다. 꼬리가 있었다면 아마 축 늘어져 있을 것만 같은 표정에 아스미는 조금 죄책감을 느껴 사과하고 동시에 등을 떠밀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엄마는 밀어준 것뿐이야. 걸어가는 건 아스미의 몫이니까...... 꼭 힘내."


아스미의 감사 인사에 대해 카스미가 쑥스러운 듯 말하는 동안 접시는 빠르게 비워졌다.


아침 식사를 모두 끝내고 아스미는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카스미가 등교하는 아스미에게 화이팅이라는 몸짓을 보내며 윙크했다. 아스미도 미소로 대답한 뒤 학교로 향했다. 아침햇살이 따뜻했고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공기가 아스미를 반겨주었다. 긴장되던 흐린 마음이 맑은 하늘을 보자 그래도 조금은 개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날일수록 사소한 느낌 하나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아스미는 좋은 날씨를 준 신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다. 본래 등교하는 시간보다 30분 정도 빠르게 그녀는 학교로 달려갔다. 그녀는 정문을 지나 운동장에서 아침훈련을 하는 운동부를 뒤로하고 적막한 교사의 문을 열었다. 신발장에 도착한 그녀는 아무도 없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한 뒤 이케다의 신발장에 편지를 넣고 문을 닫았다. 철제 신발장이 굳게 닫히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방금 넣은 편지의 무게를 실감시켜주었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서둘러 자신의 신발장에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교실로 향하려 뒤로 돌아선 그녀의 시야가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로 가득 찼다. 누군가가 그녀의 바로 뒤에 인기척도 없이 서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아앗!"


깜짝 놀란 아스미는 괴성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난데없이 엉덩방아를 찧어서 엉덩이에 통증과 한기가 서려서 불쾌했다. 주저앉은 채로 인물의 정체를 확인한 아스미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뜨고 자신을 놀라게 한 그녀를 큰소리로 나무랐다.


"야마부키 너! 깜짝 놀랐잖아!"


"아스미 일찍 왔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스미의 반응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흘려 넘기고는 야마부키 사에가 능글거리면서 허리를 숙이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아침햇살을 받아 흩날리는 흑 장발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 아스미도 빵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음...... 역시 빵이 일찍 일어나게 해주는 걸까? 지각생에게는 빵을 주는 게 좋을지도."


야마부키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쪼그려 앉아 아스미의 눈높이에 눈을 맞춘 뒤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대면서 어이없는 말을 쏟아냈다. 입만 안 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스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야마부키에게 항의했다.


"너! 자꾸 놀라게 하면 이름 말고 성으로 부르는 거 1달 더 연장할 거야!"


"응, 괜찮아. 그래도 아스미가 날 싫어하지는 않는걸? 그리고 우리 빵집 홍보도 되는 것 같구!"


전부 어찌 보면 맞는 말이고 뭐라 대꾸하기도 이상한 말들이라서 아스미는 에너지 낭비를 그만두기로 하고 야마부키를 계속 째려보면서 떨어뜨렸던 가방을 짚고 일어난 뒤 교복 치마의 먼지를 털고 성큼성큼 교실로 향했다.


"아, 아스미! 같이 가!"


야마부키가 허둥지둥 신발을 갈아신으면서 멀어져가는 아스미에게 손을 뻗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고무인간이 아니기에 닿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팔이 고무가 아닌 것을 방금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어차피 같은 교실이잖아! 알아서 와!"


아스미가 투덜거리면서 교실로 향했다. 뒷모습에서 아스미의 분노와 부끄러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씩씩거리며 교실로 향하는 아스미를 보면서 야마부키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케다 그래도 잘 됐나 보구나. 생각보다 빠르네."


야마부키 사에의 중얼거림은 이내 흥얼거림으로 바뀌었고 그녀는 신발을 올바르게 신은 뒤 계속해서 아스미에게 기다려달라고 외치며 종종걸음으로 아스미를 따라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아스미는 2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



그녀는 종일 두근거렸다. 평소에는 선생님의 말씀과 칠판의 필기를 꼼꼼하고 자세하게 정리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님의 말씀은 전부 소음이 되어서 반대쪽 귀로 흘러가 버렸고 칠판의 글씨들은 의미 없는 흑백의 조합일 뿐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맞이한 점심시간도 입맛이 없어서 대부분 남기고 말았다.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뱃속에 들어가지 않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식도를 지나는 음식물을 전부 튕겨낼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계속 냉수를 들이켰지만, 효과가 없었다. 급우들이 혹시 몸이 안 좋냐고 물었지만 얼버무리면서 화장실로 달려가 냉수로 연거푸 세수했다. 늘 가던 도서실도 혹시나 누군가를 만날까 봐 피했다. 그녀는 방과 후가 될 때까지 도서실에 가지 않을 생각이어서 도서부 담당 선생님께 오늘은 도서부를 쉬겠다고 말씀드렸다.

이어지는 오후의 체육 수업 때도 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공에 맞았다. 탈의실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오는 실수도 했다. 점심시간과 이어서 체육 수업을 하고 졸릴 법도 했지만,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서 전혀 졸리지 않았다. 물론 졸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수업 내용은 전부 놓쳐서 잠을 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여곡절 끝에 오후 수업을 끝내고 당번 일을 모두 마친 그녀는 가방을 정리했다. 두근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창밖의 해는 점차 저물어 가고 있었고 운동부의 연습 소리와 취주악 부의 금관악기 소리가 다가오는 하교 시간을 거부하듯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스스로 뺨을 몇 대 치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 하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 약속 장소인 화단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 일기예보에서는 제법 쌀쌀해질 거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런 추위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머리와 가슴이 뜨거웠다. 열이 오르면 으슬으슬 추워진다던데 지금 그녀는 계속 오르는 열 때문에 더울 지경이었다.

3층에서 2층으로, 그리고 이제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앞에서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계단 끝에는 낡은 검은색 문이 보였다. 한 걸음씩 계단을 내딛는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어서 위태로웠다. 손잡이를 잡았지만, 손도 팔도 어깨도 가슴도 떨렸다. 심호흡해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 나눴던 애매한 대화에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다. 그녀는 도망쳐서 이대로 애매한 채로 남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오늘 돌아간 뒤 내일부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처럼 평소대로의 생활을 하면 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잔불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그녀는 내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정문 쪽 계단으로 향하기 위해 다시 층계를 올라가려 했다.


바로 그때 하교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모든 부 활동을 중지하고 귀가하기 바란다는 방송부의 방송이 끝나자 지금껏 조금씩 들리던 부 활동의 소음이 귀신처럼 잦아든 것 같았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망설이고 애매함으로 도망치려던 그녀는 하교 종을 듣자 갑자기 절박한 마음이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은 이런 애매한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성이 제지하기도 전에 그녀는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층계를 두세 칸씩 뛰어 내려갔다.


1층에 닫자마자 그녀는 문을 난폭하게 열어젖히고 교사 뒤편 화단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이쪽을 보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우아하게 서 있었다. 찬바람에 흩날리는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나뭇잎과 함께 신비하면서도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넋을 잃고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이 다가옴에 따라 점점 그 얼굴과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떨리는 눈동자와 굳은 결의를 내보이고 있는 입술, 그리고 미묘하게 떨고 있는 다리와 손까지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 사람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이내 뭔가 생각난 듯 그녀를 바라보더니 치마 앞에 가지런히 모아뒀던 손을 들어 난데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그녀는 놀라서 손을 황급히 빼려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더 빨랐다.


손을 잡자 조금 전까지 오르던 열이 손끝에서 팔을 타고 머리와 가슴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그 사람은 아예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열기와 부끄러움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뜨겁고 긴장되는 열기는 따뜻하고 안심되는 온기로 바뀌었고 온기를 따라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쩐지 기분 좋은 느낌이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고 두근거렸지만, 아까와 달리 굉장히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손을 잡고 있었다. 몇 분 정도 지났을까, 화단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이 먼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케다, 미안해."


역시 그녀가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조금 전 손에서 느껴진 온기 때문에 조금 기대했었는데 이렇게 냉정하게 확인받으니 절망이 몰려왔다. 차라리 도망쳤다면 거절당하지 않았을 테고 애매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 같이 지낼 수 있었을 거라고 자신을 책망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아스미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대답해주지 않고 도망쳐서 미안해. 이케다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다 알면서도 도망쳤으니까...... 내가 참 못됐지?"


"아니에요. 선배. 선배는...... 나쁘지 않아요."


이케다가 목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을 집어삼키면서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아스미는 그 목소리를 듣고 이케다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혹시나 오해하지 않도록 도망가지 말고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달라는 의사표시였다.


"으응..... 이케다. 이제 나의 대답을 들려줄게."


"네? 방금 미안하다고 하신 건......"


"말했잖아...... 그... 도망친 거에 대한 사죄야. 이제부터 대답할 테니까. 잠시만 손을 잡고 있어도 돼?"


이케다가 몹시 당황한 눈빛으로 아스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케다는 손끝에서 올라온 이 온기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가슴으로 알 수 있었다. 대답하려 했지만 당황해서인지 거절당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스미는 잠시 대답을 기다리다가 이케다가 계속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자 그냥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기로 하고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깍지 낀 손가락을 고쳐잡은 뒤 말했다.


"이케다, 비록 겁쟁이에 바보 같은 나라도 괜찮다면, 지금부터 연인이 되어도 괜찮을까?"


말했다. 마침내 아스미가 자신의 대답을 이케다에게 전했다. 동시에 손끝에서도 다시 한번 포근한 느낌이 전해졌다. 이케다는 아스미의 말을 듣고 잠시 아스미의 눈을 바라보더니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아스미의 품에 안겼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아스미는 허공에서 손을 이리저리 저으며 당황할 뿐이었다.


"이……. 이케다? 잠깐만?"


"흑…. 흑…. 선배…. 흑..., 좋아해요! 좋아해요....!"


터져버린 감정이 여과되지 않은 채로 아스미의 품속에서 계속 흘러나와 교복 상의를 적셨다. 아스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멍청하게 휘두르던 손을 진정시켜서 아스미의 등 위에 부드럽게 놓은 뒤 토닥여주었다. 전날 카스미 엄마에게 받았던 것을 이제는 자신의 후배, 아니 이제는 연인이 된 사람에게 해주고 있으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이 오늘따라 뜨겁기보다는 따뜻하다고 느낀 아스미였다.


*


이케다는 울음이 멈춘 뒤에도 계속 아스미의 품에 안겨있었다. 슬슬 수위나 풍기위원이 순찰을 돌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아스미는 아쉬운 대로 이케다를 떼어내고 대신 이케다의 손을 잡아주었다.


"오늘은 같이 집에 갈까?"


"네, 고마워요 선배......"


아스미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이케다는 잠시 잡았던 손을 풀고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가방을 들고 먼지를 툴툴 털어냈다. 홀가분한 듯이 가방을 털고 손을 닦는 이케다를 보니 아스미도 가슴 속에 자리하던 응어리가 사라져 후련했다. 조심스럽게 이케다의 손을 잡자 이케다의 손이 움찔 거리는게 느껴졌다. 아스미는 잠시 놀랐지만, 다시 미소지으면서 이케다의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혹시 싫으면 말해줘?"


"아니에요! 싫지 않아요! 그냥 좀 부끄러워서......"


"응. 나도...... 엄청 부끄러우니까......"


두 사람은 서로의 붉게 물든 뺨을 보고는 멋쩍은 웃음소리를 낸 뒤 천천히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평소대로의 하교길이었지만 하루 사이에 모든 게 달라 보였다. 따뜻한 노을의 주홍빛이 선명했고 차가운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학교의 담장도 포근해 보였고 낡아서 군데군데 파손된 보도블록도 오늘따라 고풍스럽고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짝지어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두 사람은 평소보다 천천히 하굣길을 걸었다. 두 사람이 갈라지는 장소까지 최대한 천천히 때로는 멀리 돌아가면서 소중한 시간과 소중한 온기를 함께 나눴다. 두 사람은 힐끔힐끔 서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걸었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손을 잡고 있는 동안은 말이 필요가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하굣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도착했다.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아스미가 잡았던 손을 풀려고 했지만, 이케다가 손에 힘을 주면서 놓아주지 않았다. 이케다는 입꼬리를 내려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스미를 바라봤다.


"이제 갈림길이네요."


"그래......"



이케다가 잡고 있는 손의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아스미의 손을 간지럽혔다. 아스미가 간지러움을 느끼고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러우니 그만두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아스미를 바라보던 이케다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아스미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한 뒤 아스미의 연한 입술과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맞닿은 순간의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이케다는 뗐던 입술을 다시 한번 더 맞췄다.


"에......?"


이제서야 상황 파악이 된 아스미는 귀까지 홍당무가 되어서는 자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소리를 냈다. 이케다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인지 작별 인사도 못하고 뒤돌아서 자신의 집 방향으로 도망치듯이 달려갔다. 아스미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이케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연거푸 쓰다듬었다. 남아있는 이케다의 감촉을 확인하듯이......



*


카스미와 아리사는 집으로 돌아온 아스미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방에 들어갔다가 교복도 안 벗은 채로 저녁 식사를 하러 오더니, 식사 중에도 딴생각을 하는지 젓가락질을 하다 실수를 연발했다. 목욕하고 나올 때도 알몸 차림으로 나와서 카스미가 당황하면서 옷을 입혀주었다. 옷을 입혀주면서 카스미는 역시 아스미는 아리사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리사에겐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리사는 하루 정도 더 쉬게 하는 게 정답이었다고 생각하면서 걱정했고 카스미는 스스로 나서서 아스미의 이야기를 듣고 오겠다고 하면서 아스미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리사는 침대 위에 앉아서 전전긍긍하면서 카스미를 기다렸다. 혹시 자기 때문에 아스미가 상태가 안 좋아진 건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꿎은 베개만 세게 꽉 끌어안으면서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방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카스미가 달려왔다. 아무리 힘들고 불안해도 저 자색 눈동자를 보면 신기한 듯이 불안이 씻겨 내려갔다. 달려든 카스미를 안으면서 아리사가 말했다.


"우앗! 카스미! 위험하니까 조심해!"


"아리사~~ 좋은 소식이...... 헛!?"


카스미는 순간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입을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 아리사가 의아해하면서 카스미에게 질문하자 카스미는 눈을 피한 채로 손가락으로 볼을 긁으며 입을 살짝 벌리고 멋쩍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리사가 반달 모양으로 눈을 뜨면서 의심스러운 기색을 풍기자 카스미는 이내 자색 눈동자를 아리사에게 향한 뒤 최대한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스미 몸은 완전 괜찮대! 그냥 하루 정도 빠진 사이에 도서부에서 행사가 막 쌓이고 그래서 생각할 게 많았다나 봐 아하하...... 걱정 끼쳐서 미안하대."


카스미의 말을 들은 아리사는 여전히 의심을 풀진 않았지만 우선 의심하는 눈빛은 거두기로 했다. 뭔가를 숨기는 건 분명했지만 언젠가는 말해줄 거라 믿고 있기에 아리사는 넘어가기로 힜다.


'그래도 나만 빼놓고 아스미랑 단둘만의 비밀이라니 섭섭한데......'


아리사는 갑자기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카스미에게 다가갔다. 카스미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표정으로 아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시야가 천장으로 반전됐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카스미의 등이 푹신한 침대에 닿았다. 아리사가 카스미를 침대에 밀어붙여 눕힌 것이다.


"아……. 아리사?"


"카스미, 내일은 토요일이라 나 일 쉬거든?"


"아하....하... 그렇구나...... 그럼 내일 어디 같이 놀러 갈까?"


아리사의 의중을 파악한 카스미가 눈을 피하면서 장난기가 섞인 얼버무리는 말들을 내뱉었다. 그러나 아리사의 손은 이미 부지런히 카스미의 상의 파자마 단추를 풀고 있었다.


"그것도 좋은데...... 그래도 2주 만에 느긋한 밤을 맞이해서 말이지?"


카스미의 파자마 단추가 풀려감에 따라 카스미의 얼굴에는 열이 점점 올라와서 이미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리사를 흥분시키는 얼굴빛이었다. 그래도 카스미는 끝까지 말로 저항해 보려고 했다.


"에~ 아리사도 참...... 헤헤.... 근데 어제도..."


"아, 진짜 시끄럽네! 토야마 카스미!"


카스미의 어설픈 밀어내기에 아리사는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시끄러운 카스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버렸다. 당황한 카스미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곧 눈을 감고 아리사의 입술과 혀의 감촉을 만끽했다. 푹신한 입술과 끈적하고 뜨거운 혀의 감촉이 카스미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카스미는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아리사의 혀와 자신의 혀를 얽어가면서 옅은 신음을 흘렸다. 열기는 얼굴뿐만 아니라 가슴과 아랫배에도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침실에서는 숨소리와 질척거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겨울이 다가오는 금요일 밤은 길었다.


*


주말 아침은 항상 나른하고 귀찮다. 거기에 쌀쌀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라면 더더욱 이불 밖에서 나가기 싫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아스미는 찬 바람이 부는 아침 9시에 일어나서 몸단장을 마쳤다. 그녀는 머리를 말린 뒤 옷장을 열고 입고 나갈 옷을 살폈다. 고민 끝에 사고 나서 한 번도 입지 않은 아이보리 색 원피스를 꺼내 거울 앞에서 맞춰보았다.



'이케다가 이런 걸 좋아할까? 애초에 이거 나한테 어울리나?'


외출할 때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나가던 그녀였기에 거울 앞에서 옷을 입고 한 바퀴 돌아보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카스미나 아리사에게 물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밤에 물을 마시러 나갔을 때 우연히 안방에서 흘러나왔던 소리를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아마 정오가 되도록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야마부키와 시로카네 그리고 마루야마 선배에게 보내서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아스미는 두근거리고 둥실둥실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라인을 켰다. 하지만 진정이 부족했는지 무심코 밤새 눌렀던 최상단의 채팅방을 열고 사진을 보내버렸다.


"아."


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다. 밤새 라인을 했던 채팅방은 어제부터 아스미와 연인이 된 '이케다 유이'였다. 읽음 표시가 뜨지만 않았어도 보낸 메시지를 취소했을 텐데 이미 읽어버린 이상 지우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한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답장을 기다렸다.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잡아 뜯고 싶었지만, 데이트를 앞두고 이상한 머리를 할 수 없었기에 아스미는 올라가던 손을 필사적으로 내리고 침대로 달려가서 애꿎은 베개만 팡팡 때렸다. 들뜨는 바람에 데이트 상대에게 데이트 복장을 물어보는 바보짓을 한 자신을 원망하면서 베개에 화풀이하던 그녀는 책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울리자 베개를 내던지고 달려가서 내용을 확인했다.


'귀여워요. 아스미 선배~ 입고와 주시는 건가요?'


하트가 잔뜩 들어간 이모티콘과 함께 온 메시지를 읽은 아스미의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주체할 수 없는 둥실거림에 그녀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다가 그대로 침대로 뛰어들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것도 잊은 채 이불에 머리를 파묻고 마구마구 문질렀다. 옅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달콤했고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과 약간 시원한 이불이 기분 좋았다. 한동안 얼굴을 비비던 그녀는 문득 시계를 보고 약속 시각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서둘러 원피스를 입고 허리 부분에 리본을 두른 뒤 아직 뚜껑도 안 딴 비비크림을 꺼냈다. 거울을 보면서 비비크림을 이마부터 시작해서 볼을 따라 얼굴 전체에 바르던 아스미는 입술 근처에서 손이 멈췄다. 어제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아서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잡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두어 번 흔든 뒤, 마무리를 했다. 다른 화장법들은 앞으로 천천히 배우기로 하고 머리를 적당히 정리한 아스미는 마지막으로 스타킹을 신고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방문을 나왔다. 현관으로 향하기 전 그녀는 거실의 탁자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어 무언가를 쓴 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가기 전 아스미는 안방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마음속으로 카스미 엄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현관문을 열자 쌀쌀한 아침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이 쌀쌀한 공기마저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스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시 한번 진정시키기 위해 차가운 공기를 힘껏 들이켰다가 다시 내뱉었다. 시내에서 볼 이케다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그녀는 골목을 달려 나갔다.




*


쌀쌀한 공기가 햇빛에 데워져 조금은 따뜻해질 시간이 되어서야 카스미는 허리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격렬했던 지난 밤을 상기시키듯이 카스미의 몸 곳곳에는 붉은 꽃들이 피어있었다. 카스미는 아직도 옆에서 새근거리며 자는 아리사의 볼과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어 준 뒤 침대에서 나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파자마를 집은 뒤 방문을 열고 욕실로 향했다.

카스미는 아침에 욕실로 갈 때마다 거실을 지나며 집안을 한번 둘러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크지 않지만 작은 변화들이 모여서 한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년도가 바뀌는 그 변화가 카스미는 신기하면서 놀라웠다. 그녀는 매일매일의 작은 변화가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서 항상 아침에 집안을 둘러보며 어제와 다른 점이 있는지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속에 담아두려 노력했다. 그렇게 담아둔 매일의 풍경들이 갑자기 반짝임으로 떠오를 때도 있었기에 직업적으로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파자마로 앞을 가린 채로 집안을 둘러보던 그때 탁자 위의 메모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한 글씨체는 영락없는 아스미의 글씨였다. 메모지를 집어 그 내용을 확인한 카스미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현관을 바라보며 딸의 첫사랑을 응원했다. 아리사에게는 천천히 말해주기로 하고 그녀는 몸을 가린 파자마자 흘러내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욕실로 향했다.


' 오늘 약속이 있어서 일찍 나갈게요. 그리고 카스미 엄마, 아리사 엄마 고마워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후다닥 겨우 다 썼네... 일단 완결은 냈음


솔직히 아스미와 이케다의 이야기는 따로 더 쓰고 싶지만 그러면 이게 2차장작인지 1차창작인지 너무 애매해져서 고민인데 마음 가는대로 써보든가 할게;;


이외에도 나름대로 생각해둔 2세 유니버스가 있는데 전부 쓰는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되는대로 최대한 풀고 싶음


완결까지 쓰고 제일 후회하는 건 역시 제목... 1편 쓰고 제목을 뭐할지 고민하다가 대충 암거나 넣었더니 이상해졌음 ㅋㅋㅋㅋ 차라리 다른 비유나 상징을 생각할 걸 그랬나 하고.... 코스모스라든가?


그래도 카스미, 아리사, 아스미 모두 각자 미숙함을 가지고 있기에 아주 벗어나는 제목은 아닌것 같다고 믿고 싶음 ㅋㅋㅋ


미숙한 제목처럼 미숙한 글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늦은 밤에 백합꿈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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