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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치사카오] 철 지난 기사도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2.19 21:20:49
조회 1163 추천 34 댓글 7
														

 X X X 



 제 아무리 비싼 시계를 산다한들 흘러가는 시간을 살 순 없다. 분침을 되돌려도, 시침을 되돌려도, 시간은 초침을 빙자하여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흘러갈 뿐이다. 한 마리의 연어처럼 시간도 거슬러 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세상에 만연히 퍼져 있는 그 진리가, 삶에 마모된 줄 알았던 그 감정이, 아련히 품어왔던 그 연정이, 결국 나를 무너트렸다. 


 

 X X X 


 새하얀 눈이 바닥을 두드렸다. 그동안 영 내리지 않아 올해는 이대로 끝이라고 예상했건만,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늦겨울은 제 때 아닌 발악을 시작했다. 눈은 뭉치가 되어 보일 정도라, 혹시 쌓일까 조금 걱정했었다. 그러나 눈들은 검은 아스팔트에 장렬히 삼켜져만 갔다. 


 쌓이지 않는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가지 않는 곳, 담벼락 같은 고양이들만이 지나가는 곳, 그리고 천천히 걷는 사람들의 우산 위.  


 우산 위 사박, 사박 쌓이는 눈의 소리가 세타 카오루는 듣기 좋았다. 그 소리는 언뜻 들으면 스네어드럼과 닮은 점이 있었다. 밴드를 한 경험으로 인해, 카오루는 사물이 내뿜는 소리들을 좋아했다. 간만에 듣는 겨울의 소리도 카오루의 마음엔 쏙 들었다. 


 유독 바쁜 하루. 지난번 찍었던 드라마 단역의 반응이 좋아 일거리가 제법 늘었다. 유명 아이돌의 뮤직 비디오 엑스트라 역과, 연극 쪽 선배가 추천해준 영화 속 행인 역할. 비록 대사는 적어도 카오루에겐 소중한 배역이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다르게, 일이 없을 땐 계속 놀게 되는 게 배우니까. 


 그러니 일을 두 개나 따낸 오늘 같은 경우. 본인에게도 그리고 카논에게도 조금의 사치가 허락되지 않을까. 그래서 카오루는 떡집에 들러 떡 한 접시와 야마부키 베이커리에 들러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을 사려했었다.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막 걸려온 전화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녀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통화는 그녀의 일정을 조금 더 늦은 밤으로 잡아 이끌었다. 


 하지만 그게 언짢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되려, 주연을 맡은 드라마가 끝났으면서도 연락이 오지 않아 섭섭하던 찰나였다. 그도 그럴게 전화를 한 사람은 카오루 자신의 아주 오래된 벗이었으니까. 


 약속장소에 도착해, 조심히 접은 비닐우산을 탁탁 털었다. 어느새 물이 된 눈들이 뚝뚝, 계단 바닥으로 떨어졌다. 밖을 바라보니 아직 도쿄는 눈에 감싸인 채, 점점 흰 요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쌓이는구나, 하고 바라보다가 카오루는 조용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도쿄 외곽 건물 2층에 위치한 작은 어묵 집. 맡기만 해도 속이 풀리는 냄새. 오래 된 엔카와 그보다 더 늙수그레한 할머니가 반겨주는 아주 작은 술집. 그리고 연락을 받아 올라가면, 늘 오뎅탕 냄비 하나와 함께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근사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자신의 벗. 


 “치사토.”


 카오루는 벗의 이름을 아주 작게, 그러나 귀에는 들리게끔 읊조렸다. 이미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던 듯, 탁자 옆엔 텅 빈 병이 몇 개 존재했다. 


 “카오루.”


 밖에 내리는 눈보다 희어야 하는 얼굴이, 술에 찌들어서 그런지 복숭아마냥 분홍빛처럼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분홍 모찌를 생각나게 해서, 카오루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왜 이리 마신 거니.”


 치사토의 귓가에도 조용히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엑스트라, 단역, 기껏해야 몇 마디 대사 섞는 조역 주제에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얘는. 


 “남 이사.”


 그게 짜증이 나, 치사토는 괜스레 틱틱 대는 반응을 내비췄다. 분명 본인이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치사토는 카오루가 생글생글 웃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잔이나 받아.”


 그 못된 심보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 치사토는 아직 남아 있는 술병을 들었다. 그러자 카오루도 저의 자리에 놓여있던 술잔을 들었다. 잔을 안 들기엔 아직 남은 회포도 술도 너무나 많았다.  

 

 “저번 일은 고마웠었다, 치사토.”


 목으로 넘어간 술의 끝 맛이 달았다. 그래도 무겁게 다가온 맛이 없는 건 아니어서, 카오루는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별 일 아니야.”


 치사토는 나긋한, 혹은 조용한 목소리로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토록 간단히 말했지만, 그 말은 진실이었다. 단역과 조역 사이의 배우를 꽂아주는 것은, 지금의 시라사기 치사토에겐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너는 쉬이 말한다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별 일이다. 비록 단역이라고 하지만, 너와 다시 연기의 합을 맞춘 건 오랜만이었으니까.”


 카오루는 치사토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카오루는 치사토가 저를 챙겨준 게 기뻤다. 특별히 일감을 챙겨준 것뿐만이 아닌, 그녀와의 합을 맞추는 건 카오루에게 있어서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할머니!”


 치사토는 카오루를 외면하며, 혹은 부엌을 바라보며 외쳤다. 한결같이 보기 좋은 인상을 가진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왜 그러니?”


 “저희 계란말이 좀 해주세요. 케이크처럼, 많이.”


 “알았다.”


 낡은 수첩에 주문을 적어간 할머니는 조심스레 자리를 떠났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은 이내 카오루를 향했다가, 이제는 눈 내리는 게 어설피 보이는 군데군데가 녹슨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을 뚝뚝 때리던 눈은 어느새 응고되어 찰싹 붙어 있었다.  


 “굳이 낯 뜨거운 이야기 하지 마.”


 “이런, 이런. 여전히 부끄럼쟁이구나, 치사토는.”


 서로가 서로의 잔을 채워주었다. 얼굴은 뜨거워지고, 속은 메스껍고, 특히 머리 골이 점점 아파왔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점. 그게 술의 신기한 점이다.  


 속이 점점 쓰려오는 걸, 계란말이에 덕지덕지 붙은 케찹과 머스타드의 단 맛으로 중화시켰다. 어묵 집인데 계란말이가 맛있는 건, 뭔가 이상하다. 케이크처럼 부푼 계란말이가, 들뜬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 몽글몽글하다. 


 “카논은?”


 치사토는 술을 연거푸 마셨다. 어느덧 한계주량을 넘어서려했지만, 눈이 와서 그런지 오늘은 더욱 잘 들어갔다. 그게 아니면, 최근 번민의 대상 중 한 명을 만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마? 집에서 자고 있을 거야, 치사토를 만나러 간다고 했으니...”


 술에 쩔은 카오루는 카논의 이야기를 힘겹게 하면서, 치사토의 이름을 같이 두었다. 잘 생각해보니 셋이 만나도 좋았을 걸 그랬다. 두 사람은 자신이 알기 이전부터 훨씬 각별한 사이였으니까. 


 “보고 싶네, 카논.”


 치사토의 목소리가 꿈을 꾸는 것처럼 불분명했다. 분명 절친인데, 요즈음 들어 통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몇 달, 카논을 진심으로 보기 어려워진 건 몇 년 정도. 


 “보면 되지 않은가, 치사토. 이곳은 우리 집에서 얼마 안 걸리니까...”


 “카오루.”


 이어져가던 카오루의 목소리를 치사토의 냉철한 목소리가 끊었다. 카오루는 몽롱한 눈으로 치사토를 보았다. 목소리와 같이 냉정해진 표정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직언, 그리고 바른 말을 빙자한 힐난이었다. 카오루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이윽고 보기 좋게 흔들렸다. 그제야 치사토의 얼굴에도 조금 측은함이 떠올랐다. 대놓고 흔들려고 떠 본 것이긴 하지만, 이리 쉬이 흔들리다니. 


 세타 카오루란 사람은 역시 무르다. 


 “이렇게 살려고 사는 게 아니잖아, 내가.”


 카오루는 조용히 변명하며 다시 술을 털어 넣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과 정곡을 찔려 분한 눈빛과 한 눈에 봐도 움츠러든 어깨는 카오루에게서 가여움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치사토는 그녀의 이런 반응들을 못 본 체 했다. 악랄한 악역인 듯, 어설픈 선역인 듯, 그녀의 의중은 통 알 수가 없다. 


 세타 카오루와 마츠바라 카논, 두 사람은 어린 부부였다. 이십대 중반이라는 다소 젊은 나이에, 두 사람은 시라사기 치사토가 차마 손을 내밀 수 없는 스피드로 인생의 반환점을 되돌아버렸다. 정말, 혜성이 떨어지는 것 마냥... 순식간에.


 동성 결혼이라는 점에서, 기가 찬 양가의 부모님이 노발대발한 건 당연 지사였다. 세타 가도, 마츠바라 가도 두 사람의 결혼을 원치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의 혼인길에 양가의 지원은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여건이 이렇게 되자 츠루마키 그룹의 총수였던 츠루마키 코코로가 직접 지원을 해줄 의사를 밝혔으나, 그 제안은 두 사람이 거절의 뜻을 내비췄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때문이었다.


 결국 카오루는 극단을 돌며 모은 소소한 돈을, 그리고 카논은 유치원 교사 일을 하며 만들었던 조금의 목돈을, 모두 도쿄 외곽에 있는 허름한 빌라에 쏟아 부었다. 가장 최우선적으로 떠날 집이 필요했고, 그 결과 정말 간신히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얼마 안 되는 남은 돈은 모두 서로를 위해 써버렸고, 그렇기에 두 사람의 생활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개미 눈물처럼 나아지기 시작했다. 


 동네 웨딩숍에서 간신히 빌린 턱시도와 드레스. 식 장소는 상점가의 하자와 커피숍. 손으로 셀 수 있는 하객, 심지어 신혼여행은 도쿄에서 멀지 않은 초라한 여관에서 보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행복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카오루는 그동안의 과장된 미소가 아닌 은은한 미소를 계속 입 꼬리에 걸고 있었고, 카논도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환한 미소를 연이어 흐드러지게 했다. 카논의 부케를 받은 치사토가 내심 질투할 만큼, 그들은 그토록 행복해보였다. 


 두 사람의 길엔 장미로 가득 찼다. 쓸쓸함과 후회와 공허한 마음을 끌어안았던 치사토가 보아도 행복해 보일만큼, 카논과 카오루는 서로에 의지해 꽃길을 걸으려 하고 있었다.  


 항상 간드러져왔던 그 꽃길이, 장밋빛 가시밭길로 변하기까진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았다. 


 “카오쨩.”


 치사토의 부름에 카오루가 움찔했다. 둘만의 애칭은 언제나 반칙이다. 촌스럽지만 그리운 옛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마력이 있었고, 그건 카오루와 치사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들린 그리운 호칭에 카오루는 물기가 스며든 눈빛으로 치사토를 바라보았다.

 

 “다시 시작하자, 나랑.”


 치사토는 카오루를 똑바로 바라보며 제 뜻을 전했다. 강렬히, 그리고 더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끔. 시라사기 치사토는 본인이 어렸을 때와, 그리고 고교생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올망졸망한 눈으로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세타 카오루는 실패했다. 무대의 조명과 빛을 한꺼번에 잃었고, 치사토는 단언했다. 그건 시라사기 치사토란 사람이 카오루의 재능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날이 쇠퇴해가는 무대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가려했던 카오루의 날개는 처참히 꺾여버렸다. 하나, 하나, 실시간으로 전해야 되는 무대와는 다르게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선 그런 과장된 연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되려, 다른 배우와 어울릴 수 있는 조화로운 면이 필요했다.


 하네오카에서 썼던 3년 동안의 가면이, 그대로 페르소나가 되어 그녀의 발목을 연이어 붙잡았고, 연기의 작법을 고쳐먹는 데에만 몇 년이 흘렀다. 


 물론 카오루에게 있어선 첫 좌절이었지만, 처음이라는 좌절의 크기가 남들 이상으로 큰 게 천재란 족속들이었다. 그녀 또한 사라져 간 천재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카오루는 연기를 포기할 수 없었고, 그러던 도중 또 몇 년이 흘렀다. 이젠 되돌릴 수도 없는, 다시 누릴 수도 없는 시간들이.


 “너한테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잖아.”


 그렇지만 나라면, 나였다면 끌어줄 수 있다. 그랬기에 치사토는 다시 시작하자고, 저의 앞에 앉아 있는 소꿉친구에게 말했다. 정제되어 새로워진 세타 카오루란 사람을, 다시 스크린이든 브라운관이든 끌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너는, 너라는 사람은. 


 “치이쨩.”


 폭음은 폭력이자 박력이다. 병 하나가 빌 때까지 연거푸 목구멍에 넘기던 카오루가, 잔을 손에 쥔 채 치사토의 애칭을 불렀다. 손은 울컥한 감정에 부들부들 떨렸고, 카오루의 백설같은 얼굴 또한 석류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딱 거기까지만 듣고도 치사토는 카오루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훤히 눈치 챘다. 미안한 듯 내려간 눈썹, 깍지를 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손가락들, 그리고 풀지 못한 문제를 받은 아이처럼 힘겹게 웃어 보이는 너의 모습까지.


 “그래도 내 힘으로 해보려고 해.”


 정직하면서도, 우직하다. 선생님 몰래 답안지를 훔쳐보면 될 것을, 결국 사서 고생까지 하며 어려운 길로 되돌아가려 했다. 서투르지만, 진솔한 그녀의 대답에 치사토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작게, 아주 작게, 쉽사리 보이지 않도록 아주 연하게. 


 “넌 그런 식으로 말할 줄 알았어.” 


 세타 카오루란 사람은 역시나 덧없다. 그리 미숙하면서도 진솔한 점은 카논과 닮았다. 부정할 수 없는, 정말 타고난 한 쌍이다. 참을 수 없는 질투가 날만큼, 너희들은.


 “내민 손은 잡을 줄도 알아야지.”


 지금부터는 호의가 아니라 명백한 투정이었다. 그저 땡깡이라는 것을 치사토도 이미 알고 있었다. 변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거절당한 실망감을 동시에 느꼈지만, 그래도 감정의 크기는 실망감 쪽이 조금 더 컸다. 


 “....슬슬 그만 마시지 않겠는가, 치사토.”


 그러나 카오루는 치사토의 투정을 마지막엔 못 들은 척해버렸다. 그녀 나름대로의 정중한 거절이었고, 그러한 모습마저 그녀다웠다.


 술에 쩔은 카오루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땅에서 날리는 어퍼컷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결국 일어나긴 했다. 계속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달래기 위해 물을 연거푸 마셨지만, 정신이 돌아오기는커녕 졸음이 솔솔 찾아왔다. 


 치사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카오루가 오기 전부터, 어느 정도 한계에 달해 있던 그녀였다. 오래된 장지갑에서 만 엔 한 장을 꺼내 카오루에게 건네주었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를 보던 할머니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갔다. 잔돈을 건네주는 할머니의 주름이 묘하게 인상 깊었다.


 도쿄의 밤하늘은 여전히 검은 하늘을 배경삼아 흰색 소묘를 계속하고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도로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혔다. 피부에 든 멍 같다는 생각이 든 카오루와 깨끗한 걸 더럽혔다는 생각이 든 치사토. 각각의 생각을 가진 밤거리를 두 사람은 거닐었다. 한층 더 깊어진 밤이라, 택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저보다 몇 발 앞선 치사토를 카오루는 보았다. 그녀는 답지 않게 기분이 좋은 듯 우산에서도 벗어나 눈을 맞으며 걷고 있었다. 가끔 치사토가 눈길에 미끄러지려고 하면, 카오루는 나이 대에 맞지 않은 어린 아이처럼 요상한 소리를 냈다. 그게 즐거워 치사토는 일부러 더욱 미끄러지려고, 점포들도 다 닫은 시간 속에 그토록 발을 굴렀던 것 같았다. 


 해는 도통 뜰 생각을 안 하고, 카오루가 어딜 가냐고 물어보아도 치사토는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즐거운, 무언가에 해방된 것처럼 함박웃음을 지은 채 어두운 야경 속을 걸었다.  


 아까의 대화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카오루는 생각했다.


 “치사토.”


 추위와 수마는 역설적이다. 절대 같은 곳에 있어서는 안 될 두 개의 단어는, 마치 제 짝처럼 함께했다. 그것을 인지하자, 카오루의 눈꺼풀에서 뛰노는 수마도 한층 힘을 더 했다. 


 “어딜 가는 거야.”


 참을 수 없어진 카오루가 먼저 치사토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보다 먼저 카오루는 자판기에 몸을 기대려 했다. 잔뜩 붉어진 볼은 술김인지, 추위인지 이젠 알 수가 없었다. 다리에서도 힘이 빠져 카오루는 결국 그대로 주저 앉고야 말았다.


 “카오루.”


 요정처럼 카오루의 곁을 맴돌던 치사토. 그녀는 카오루가 인도 한 복판에 쓰러질락 말락하기 직전에야 찾아왔다. 카오루는 눈을 떠 치사토를 바라보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카락에 가려,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햇빛을 가려주는 커튼처럼, 치사토는 보이지 않았다.


 “미안.”


 그 대신 아주 익숙한, 그리고 어딘가 아련함을 담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카오루는 입을 열어 무언가 질문하려 했지만, 이내 찾아든 졸음기에 그대로 쓰러졌다. 얼굴을 댄 자판기는 차가웠지만, 그보다 잠기운이 훨씬 강했다. 술을 많이 마셨다한들,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치사토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녀에게 하루쯤은 기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당했다. 세타 카오루란 사람은 시라사기 치사토란 사람을 신용하고 있었기에, 당하고야 말았다.  

 

 X X X 


 

 어느덧 환히 웃는 날보다, 몰래 우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게 억울해서 너를 넘어트렸다. 술에 물든, 것도 아니면 밖과 안의 차이에 물든 네 볼을 더 보여줘.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너희에게 화가 나. 그게 분해서 네 예쁜 입술을 한번 핥아버렸다. 잠이 깬 너는 뭐하냐고 말하지만, 이미 너도 다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처음 자는 것도 아니잖아, 카오루.


 네가 나한테 남은 감정은 이제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그게 궁금해서 네 흰 목덜미에 내 자국을 남겨버렸다. 지금은 그저 붉지만 나중에 가선 흉측스럽게 보라색으로 또 검은색 물들어가겠지. 그걸 보면 너도 내가 생각났으면 좋겠어.  


 입은 살려뒀으니 씨발년이라고 욕해도 좋아, 그런 소리를 들어도 이게 나인 걸 어쩌겠어. 하지만 넌 착해서 험한 말 하나도 하지 못하네. 친구끼리라도 그렇게 무르면 안 돼, 카오루. 어렸을 때 같이 배웠잖아, 싫어요. 하지마세요. 이러면 안 돼요. 


 그러나 난 변덕스러운 사람이라, 다시 네 입술을 내 입술로 막아버리겠지. 네가 싫다고, 하지 말라고,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게 듣기 싫어서, 나는 네 이를 내 살덩이로 느껴버리고 말 거야. 그렇지만, 이렇게 강제성을 띠긴 해도, 너는 좋잖아? 응, 카오루. 


 너, 나 좋아했었잖아. 


 안 그래? 정말, 모든 게 덧없다. 그치, 카오루.



 X X X 



 속이 아픈 걸 인지하자, 머리가 아팠고, 머리가 아픈 걸 인지하자 이젠 팔이 저려왔다. 집에 있는 요와 이불과 다른 편한 느낌에, 카오루는 머리를 박은 채 신음 소리를 내려 했다. 


 “뭐야.”


 그러나 그 편한 느낌이 위화감이 되어, 카오루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도록 만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카오루의 시야에, 창문 너머 난간 위 눈이 쌓인 게 보였다. 흰 눈에 비친 햇빛의 세기가, 카오루로 하여금 지금이 몇 시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큰 일 났다는 생각에, 주변을 뒤져 스마트폰을 찾아냈다. 카논, 카논, 카논, 카논, 카논. 액정엔 와이프의 이름이 가득했다. 어젯밤부터 최근 한 시간 전까지 계속해서 전화를 건 것 같았다. 저질렀다는 사고가 엄습하고,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카오루는 다시 쓰러졌다.  


 “일어났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카오루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네글리제 롱 원피스를 입은 채, 스마트폰 액정을 검지로 터치하는 치사토가 있었다. 먼저 말을 건 주제에, 그녀는 쉬이 시선을 옮겨주지 않았다. 


 카오루도 굳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기억이 중간부터 끊긴 느낌이 있지만, 힘이 모두 풀려 있었던 잠깐의 기억은 선명하다 못해 분명했다. 설마 치사토가, 그런 짓을 할 줄이야.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몸 처신을 못한 건 자신이지만, 선을 넘은 건 저쪽이 먼저였으니까. 그리고 배우자가 있는 쪽도 이쪽이고, 그걸 모른 것도 아니다. 선을 넘은 쪽은 반려자와 이미 몇 십 년 된 친구였으니까.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줬으면 해.”


 낡은 청바지와 남색 니트, 그리고 그 위에 검은 코트를 황급히 얹은 카오루가 거칠게 말했다. 살짝 짜증이 일었지만, 이정도 선에서 잘라내는 걸로 끝을 맺는 게 서로한테 나쁘지 않을 거라고 자위했다. 


 “카논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카논에게도 미안했기에, 그녀는 저를 속이는 말을 했다. 사실은 그저 들킬 게 두려웠을 뿐이면서.   




 호텔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면서, 카오루는 전화 어플과 메시지 어플을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렸다. 지원해두었던 일감에서 전화가 한 통, 코코로에게서 전화가 한 통, 미사키에게서 전화가 여섯 통, 하구미에게서 전화가 세 통, 그리고 카논한테서 전화가 무려 스무 통씩이나. 


 뭐라고 사과해야할지 고민하기 이전에, 연락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살아있다고 먼저 연락을 해야 했다. 물론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야 할 사람은 당연히 카논이었고. 


 익숙한 전화 연결음 소리를 들으며 카오루는 로비로 나왔다. 다행이도 눈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귀찮아 보이는 것들이 몇 명, 아니 수 십 명.


 “카, 카오루!”


 스마트폰 너머에서 카논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음기가 번진, 그러나 안심한 목소리도 섞인 채 말이다. 


 “카논, 잠깐만.”


 하지만 카오루는 다시 전화를 끊고 코트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설마 나를 맞이하러 온 걸까 싶어 조심히 문을 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든 카메라는 미친 듯이 셔터 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눈이 아닌 빗소리처럼 들려왔고, 아무 것도 없는 바다에 뚝 떨어진 것 마냥 카오루를 외롭게 했다.  


 왔다, 왔어. 저기요, 저기! 시라사기 치사토 씨와 어떤 사이시죠! 네?! 한 마디만 해주세요! 야, 거기 빠져! 빠져! 오늘자에 뒷모습 찍히신 거 본인 맞으신가요! 아니, 거기 앞에 나와! 나오라고! 한 마디만 하시라고요! 아, 밀지 마! 엇, 시라사기 치사토다!


 누군가가 언급한 이름에, 카오루도 뒤를 돌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바다 속 난파한 배의 승객을 구해주려는 것처럼, 치사토는 팔짱을 낀 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한 듯, 그녀는 갈색 베레모와 검은 선글라스로 중무장을 한 채다. 


 멍한 시선으로 카오루는 제 옆에 나란히 선 치사토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터지는 플래시 속에서, 안 그래도 하얀 치사토는 더욱 하얘져 눈을 떼면 시야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마치 겨울 전설 속 설녀처럼.  


 “너한테 선택권은 없어, 카오루.”


 무슨 말인가 했더니, 어제의 연장이었다. 지금 이게 그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카오루는 역으로 질문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눈 감아 줄 수 없는 무임승차구나. 치사토.”


 그것이 어떠한 배였던 간에, 오월동주의 마음으로 카오루는 치사토의 손을 잡은 채 기자들을 헤쳐 나갔다. 두 사람의 뒤꽁무니를 찰칵, 찰칵, 하고 들려오는 플래시 소리가 뒤쫓았다.  


 -


 3일 동안 쓰다가 결국 마무리를 내기 위해 쓴 글. 검정치마 2집을 들으며 썼읍니다.


 이제 대회 글 준비하러 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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